주현정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진심이야. 앞으로 잘할게. 절대 당신 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야.”배석준은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단 일어나요.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그녀는 재빨리 손을 뺐다. “내가 내 와이프한테 무릎을 꿇는데 뭐 어때서? 프러포즈할 때 무릎 못 꿇었던 거 지금 보상한다고 생각해.”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내가 밖에 나가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계속 아픈 척하고 있을게. 하지만 이 병실은 너무 작고 답답해. 좀 더 큰 곳으로 마련해 줄 수 있어?”“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요.”“고마워.”그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껴안으려 하자 그녀는 이내 그의 손길을 피했다.“지금 바로 전화할게요.”그녀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그는 배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일단 음식 사 오지 마. 너희 엄마가 다른 곳을 마련해 주겠대. 이따가 그쪽으로 음식을 보내달라고 해.”통화를 하고 있는데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여보, 벌써 다 된 거야? 네가... 여긴 어떻게?”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고 그가 빠른 걸음으로 병실 문 앞에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다행히도 주현정은 이쪽을 등지고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와이프가 와 있어. 얼른 돌아가.”“회장님, 몇 마디만 하고 갈게요.”김지민은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김지민이 난동이라도 부려 주현정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급히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빨리 얘기하고 얼른 가.”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억울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회장님께서는 절 버리실 거예요? 전 친구도 없고 직장도 없고 저한테는 이제 회장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회장님도 절 버리실 거예요?”그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전에도 분명히 얘기했지만 난 이혼 같은 거 절대 안 해. 너 스스로 상관없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란이야?”“네, 명분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아요
주현정은 따지지도 않고 내쫓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배석준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지막 남아있던 그 빛마저 사라져 버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배석준은 이내 앞으로 달려가 김지민을 밀어냈다.“꺼져. 당장 꺼지라고.”“회장님, 회장님. 몇 마디만 하게 해주세요.”“얘기하게 놔둬요.”소파에 앉아 있는 주현정은 우아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바닥에 있는 김지민은 비교가 안 될 만큼. 배석준은 경고의 눈빛으로 김지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김지민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주현정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사모님, 전 사모님과 회장님을 갈라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 정말 회장님 많이 사랑합니다. 회장님 아이를 가졌어요. 절 이리 쫓아내시면 저더러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는 거예요.”“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배석준은 불같이 화를 냈다. 피임을 했는데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겠는가?그러나 그 얘기를 꺼내면 김지민과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는 이를 악물며 사나운 눈빛으로 김지민을 노려보았다. 이때, 김지민이 가방에서 임신 진단서를 꺼내 배석준의 손길을 피하여 주현정의 손에 쥐여주었다.“사모님, 저 바라는 거 없습니다. 명분도 원치 않고요. 그저 이 아이를 생각해서 회장님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임신 진단서는 구겨졌고 주현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었다. 오래전부터 배석준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으니까.“여보, 이 아이는 분명 내 아이가 아닐 거야. 나한테 꼬리를 쳤다면 다른 남자한테도 꼬리를 쳤겠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라고.”배석준은 급하게 변명했다.“여보, 한 번만 기회를 줘. 난 이미 헤어지자고 했어. 그런데 그럴 받아들이지 못하고 쟤가 지금 이러는 거야.”주현정은 임신 진단서를 그한테 건네주었다.“당신한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이혼
김지민은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당연히 아이는 배석준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없으면 어떻게 배석준을 묶어둘 수가 있겠는가?사실 이 아이는 술집에서 만난 원나잇 상대의 아이였다. “회장님 아이예요.”김지민은 눈물을 쏟으며 말을 이어갔다.“저도 처음 알았을 때는 많이 놀랐어요. 병원에서 잘못 진단한 줄 알았고요. 그런데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봐도 결과는 똑같았어요.”“회장님께서는 매번 느낌이 올 때만 콘돔을 사용하셨잖아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렇게 하면 피임 성공률이 80%에 불과하대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이가 태어난 후 유전자 검사 하세요. 그때가 되면 제가 회장님을 속였는지 아닌지 알게 되실 테니까.”그녀의 말에 배석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솔직히 콘돔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네가 누구의 아이를 가졌든 난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매달리지 마. 계속 이러면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어떻게 이리 모질게 절 대할 수가 있어요? 아이를 가지게 만들어놓고 지금 저한테 죽으라는 거예요?”김지민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밖으로 걸어나가 복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쌍한 내 아가. 넌 결국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랑 함께 죽게 되는구나. 아빠, 엄마. 제가 못난 자식이에요. 더는 아빠 엄마 곁에 있을 수 없게 되었어요.”배석준은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혈압도 높아졌다.김지민에게 입 닥치라고 하면 할수록 울부짖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내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달려와 주위를 에워쌌다.그녀의 옷은 흐트러지고 다리는 걷어차인 탓에 울긋불긋 멍이 들어 있었다. 김지민이 처참히 울고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혐오감과 경멸로 가득한 눈빛으로 배석준을 바라보았다. “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절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정말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고 이런 일은 가족 간의 갈등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사실 경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봤지만 두 사람 모두 건강한 상태였고 배란에 도움 되는 한약도 많이 챙겨 먹었었다.두 사람 몰래 콘돔도 몇 개 구멍 냈었는데 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건지... 주현정은 불임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전에 똑똑히 묻지 않았던 건 두 사람의 화해에 대해 조금은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부부한테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가 해서...그러나 현재 도아린의 옆에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고 도지현과도 사이가 좋아졌고 배건후는 그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아웃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뭔지 똑똑히 알고 싶었다. 이런 얘기를 하기가 거북했던 도아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저희 두 사람 함께 잔 적 없어요.”이게 무슨...주현정의 손에 있던 사탕 집게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건후 문제니?”도아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글쎄... 누구의 문제인 것일까?첫 관계를 가진 그날 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일주일 동안이나 고열과 감염 때문에 고생했었다. 그러나 그는 매번 몸이 달아오를 때까지 달아올라도 결국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 남자였다. 한편, 배건후가 주현정을 마중하러 왔을 때 도아린은 집에 일이 있다고 먼저 돌아섰다.도아린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주현정은 조롱이 가득 찬 말투로 입을 열었다.“출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우승까지 꿈꾸고 있는 건 우습지 않니?”그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거두었고 어이없어하는 주현정을 표정을 발견하고는 한마디 물었다.“저 사람이 무슨 얘기 하던가요?”“일 얘기했어.”아들이 사내구실을 못 한다는 사실은 엄마로서 비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한의사를 찾아 아들의 몸을 돌봐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찌 아들이 평생 외롭게 사는 걸 두고 볼 수만 있겠는가?...진씨 가문, 도유준이 또 찾아왔다. 강홍련이 도정국에게
“그러니?”윤명희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이 브랜드의 마스크팩이 그렇게 좋더라. 두 개밖에 안 남았어. 다음에 살 때는 네 것도 사줄게.”“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저 툭하면 여드름이 나거든요.”두 모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스크팩 얘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차화영은 오늘 이 일이 성사되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달갑지가 않았다. 외손녀에게 주는 혼수를 왜 도아린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건지.“명희야. 민아는 어렸을 때부터 네 곁에서 자랐어. 친자식처럼 데리고 다니던 아이가 아니더냐. 네가 이 집안으로 시집온 지난 시간 동안, 난 너의 일 처리가 줄곧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이번 민아의 혼사도 네가 전적으로 맡아서 준비하거라.”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윤명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아무리 가까워도 친자식은 아니죠. 그리고 친엄마가 있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이제 막 세은이를 찾게 되었으니 세은이를 더 많이 사랑해 줄 생각입니다. 민아의 결혼식까지 준비할 여유가 없어요. 잘못하다가 결혼식을 망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요?”차화영은 벌컥 화를 냈다.“민아는 절대 네 탓을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딸을 시집보낸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거라.”“그건 더더욱 안 되죠. 이제 막 돌아온 딸인데 전 세은이가 시집가는 걸 절대 용납 못 합니다.”그동안 한약을 마시고 마침내 손을 떨지 않던 차화영은 화가 나니 또다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다들 이런저런 핑계만 대면서 내 체면을 짓밟는 것이냐? 그래도 아직은 내가 이 집안의 어른이야. 어떻게 이리 내 말을 무시한단 말이냐?”“차라리 장례식을 치르거라. 언젠가는 너희들 때문에 화병으로 죽을 것 같으니까. 장례식 부조금은 민아의 혼수로 사용해. 민아야, 섭섭지 말거라. 이 할미가 목숨까지 너한테 준 거니까.”“할머니, 오래오래 사셔야죠. 전 아직 할머니께 효도도 못 해 드렸어요.”안민아는 차화영의 품에 안
사실 안민아는 남자에 빠져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아린보다 잘 살고 싶었고 도아린의 기를 꺾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도움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도유진을 동아줄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한테 회사 경영을 맡길 생각이에요. 아빠의 능력이라면 이 혼수는 분명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 없어.”도아린이 이리 통쾌하게 동의할 줄은 몰랐다. 안씨 가문의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승리 직전의 기쁨을 만끽했다.“다들 이의가 없다면 혼수를 얼마나 해줄 건지에 대해 의논해 보자.”이때, 차화영이 다급히 입을 열며 외손녀의 손을 토닥였다.“이 할미가 그동안 아껴 쓰고 모은 돈이야. 2천만 원 되는데 다 너한테 줄게.”아껴 쓰기는 개뿔. 어렵게 살았던 차화영은 아들이 부자가 된 후부터는 욕망만 늘어났다. 아들딸 집에 갈 때는 간단한 음식들을 위주로 먹었지만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면 호의호식하였다. 사실 모아둔 돈이 2천만 원밖에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진범준한테 들으라고 한 소리일 뿐. 생활비를 더 뜯어내려는 목적이었다. 안민아도 외할머니한테 고작 2천만 원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할머니, 이 돈을 다 저한테 주시면 어떡해요? 젊었을 때부터 고생 많이 하셨는데 몸에 좋은 거 많이 사드세요.”“역시 내 생각하는 건 우리 민아밖에 없다니까. 민아만 좋다면 이 할미는 뭐든 다 줄 수 있어.”“엄마, 할머니께서 2천만 원을 주셨으니 엄마는 얼마 줄 거예요? 할머니보다 더 많이 내놓은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은데.”핸드폰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윤명희가 무심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난 1600만 원 줄 거야.”“그럼 난 1200만 원.”차화영과 안씨 가문의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한편, 도유준의 안색도 어두워졌다.진씨 가문에 혼수를 바라고
“하지만 민아의 혼수는...”진범준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자네도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한 사람이니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겠지.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소문만 조금 내면 합작하자고 찾아올 사람이 있을 거야.”화가 치밀어 오른 안준휘는 진옥경을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등을 꼿꼿이 펴던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오빠, 다른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면 결국은 민아의 혼수를 나눠 가질 거잖아. 그럼 부모 입장에서 우리가 뭐가 되겠어?”“그렇다고 너희 딸 혼수 때문에 내 딸의 사업이 물 건너가는 걸 어떻게 두고만 보니.”진범준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세은이는 그동안 밖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살았어. 세은이가 돌아왔을 때 너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 그런데 지금 또 내 딸의 사업을 망치려 하는 거야?”그 순간, 안준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형님께서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됐습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수밖에요. 민아가 시집가는 날 남들이 형님의 험담을 하더라도 형님은 그저 모른 척하세요.”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안준휘의 모습에 도유준과 안민아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안 서방, 민아야...”차화영은 조급한 얼굴로 딸을 쳐다보았다. 진옥경은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혼수를 챙기지 못한 안준휘가 그녀를 괴롭힐 것이 뻔했다. 그러나 또 따라가지 않으면 더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앞까지 걸어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진범준을 쳐다보았다.그러나 단호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섰다. “옥경이가 돌아가면 분명 또 한 소리 들을 거다.”차화영이 소파를 내리치며 화를 냈다.“20억이 없으면 10억은? 어떻게 합쳐서 2억도 안 돼? 옥경이가 시댁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있겠니?”“어머님, 아가씨가 진씨 가문의 돈으로 시댁에서 고개를 들고 산다면 진작에 이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남편의
차화영이 계단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너랑 얘기하면 화가 나고 머리가 아파. 난 얘기하고 싶지 않다.”“그래요? 민아한테 혼수를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뭐.”도아린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자. 얘기해.”손을 뻗어 문을 밀던 차화영은 문틈에 손가락이 끼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세게 내리쳤다.“넌 정말 나랑 궁합이 안 맞는 것 같구나.”도아린은 급히 차화영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발 물러섰다. 손끝에 멍이 생긴 차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진작 그렇게 철이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오늘같이 난처한 상황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 넌 얼마를 보탤 생각이니?”그녀는 차화영의 손을 주무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전 정말 돈이 없어요.”손을 빼고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돈을 구할 방법은 있어요.”차화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똑바로 말해. 수작 부리지 말고.”“할머니, 제가 이혼할 때 빈털터리로 쫓겨나서 정말 돈이 없거든요. 진씨 가문에 기여한 게 없으니 아빠가 주신 주식도 받지 않았고 오빠가 주겠다고 한 회사도 거절했어요.”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차화영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되는 애네. 돌아오자마자 돈을 요구하지 않은 걸 보면...“민아의 결혼은 큰일이에요. 제가 도유준을 계속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도유준은 아마 지금도 도정국과 인연을 끊지 못했을 거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큰 사업도 가져오지 못했겠죠. 전 다 민아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정말이냐?”차화영은 반신반의한 얼굴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사생아인 도유준이 안민아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강씨로 성을 바꾸라고 한 사람은 도아린이었다. 강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해남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다. 만약 도유준이 도정국
도아린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머리에는 수건을 둘러쓴 채,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과 종이쪽지를 찾았다.쪽지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낯선 필체였다.비에 젖어 마지막 숫자가 번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 주소는 한 개인 묘지 근처였다.도아린은 즉시 일북을 불러 함께 묘지로 향했다.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관리인이 다가와 말했다.“오후 5시 이후에는 방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일 다시 오세요.”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발길을 돌렸다.다음 날 아침, 일북이 갑자기 도아린에게 말했다.“휴대폰 좀 주시겠어요?”“왜?”“제가 전에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아가씨 근처에 있는 사람이 도청 장치를 가지고 있다면 기록이 남도록 설정했어요.”도아린은 바로 휴대폰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LY 임원 회의 때 내부 내용을 유출한 흔적이 있는지도 확인해 봐.”도아린이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일북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말씀하신 회의 시간에는 이상 기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공항을 떠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상 신호가 감지됐어요.”도아린은 그 시간대를 곰곰이 되짚어 봤다.“그때 차 안에 있던 사람은 운전기사, 한 비서, 그리고 신지훈...”만약 한유미가 감청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제 우산을 함께 썼을 때 신호가 감지됐을 것이다.“기사는 운전만 했고 그녀와 대화도 없었다. 그가 감청 장치를 가지고 있다면 과연 누구를 감시하는 걸까?”“그렇다면 신지훈?”도아린은 어제 차 안에서 자신이 그에게 갑자기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떠올렸다.그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도아린은 출근 후 곧장 신지훈의 사무실을 찾았다.“도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서류만 결재 마치겠습니다.”신지훈은 한유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한 뒤,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봤다. 화분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에 걸린 그림도 한동안 감상했다.
주머니 속에 한 장의 종이가 더 들어 있었다!도아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공항을 떠날 때, 옷이 뭔가에 스치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몰래 넣은 것이 분명했다.최근 계속해서 신지훈과 우연히 마주친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더욱 경계심을 높였다.신지훈은 굳어 있는 도아린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혹시 제 차가 불편한가요?”“그런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천천히 손을 주머니에서 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방금 문득 생각났어요. 돌아왔다는 걸 강재민 씨에게 알리지 않았네요. 아마 또 삐치겠죠.”“강재민이라...”신지훈이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렸다.“그 유명한 보석 브랜드 대표도 강 씨인데, 최근 표절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죠. 도 대표님과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그건 그분 아버지 사업이고 강재민 씨는 그저 스카이 빌딩을 운영하고 있죠.”도아린이 신지훈의 미묘한 눈빛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못난 배지유 덕분에 스카이 빌딩은 한동안 엠파이어 빌딩의 고객들을 꽤 많이 빼앗아 갔죠. 제 인맥으로 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신지훈은 코웃음을 쳤고, 눈빛에는 미세한 경멸이 스쳤다.“강재민 씨 방식이 못마땅한 건가요? 아니면 배지유가 제 가족을 배신한 게 못마땅한 건가요?”“둘 다요.”탁. 탁.신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장난스럽게 튕겼다.“배지유는 남은 다리까지 못 쓰게 됐다던데요. 이제 남은 인생이 순탄치 않을 거예요. 하늘도 결국 정의를 베푸나 보네요.”신지훈의 시선이 갑자기 도아린을 향했다.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바짓단을 살짝 걷어 하얀 발목을 드러냈다.그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정의가 있다면 인신매매범부터 싹 다 처단해야죠. 아무리 그놈들을 언젠가 다 잡아들인다 해도 피해자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한유미가 뭔가 말하려다 망설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신지훈의 눈에 잠깐 감탄의 빛이 스쳤고 곧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남자는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더니 이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의 빗방울이 마치 도아린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녀의 눈에도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그녀는 또다시 배건후를 닮은 실루엣을 본 것이다.“착각일까?”요즘 도아린은 누구를 봐도 배건후처럼 보였다.“아니면 그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가 정말로 죽었는지 나한테서 확인하고 싶은 걸까?”띠링.남자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도아린은 무심히 넘기려 했지만 자신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이번에 본 이 남자는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배건후와 닮아 있었다.도아린은 결혼했을 때의 탄탄했던 그의 체격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혼 후, 배건후는 눈에 띄게 말라갔었다...공항 출입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누군가는 날씨를 원망했고 누군가는 차가 늦게 오는 것에 불평했다.비를 뚫고 나가려던 사람들은 이내 돌아왔고 거센 바람에 공항 내부까지 빗물이 들이쳤다.바닥은 흠뻑 젖었고 사방이 소란스러웠다.그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감지한 듯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사람이 많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도아린이 젖은 바닥을 밟고 미끄러질 뻔했고 순간적으로 옆 사람을 붙잡았다.“죄송합니다!”“도 대표님?”신지훈이 그녀의 팔꿈치를 받쳐주며 웃었다.“방금 막 도착하셨나요? 설마 우리 같은 비행기 타고 온 건 아니겠죠?”“그럴 리가요.”도아린이 황급히 손을 떼고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남자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출입구를 둘러보았지만 차가 도착한 흔적도, 비를 맞으며 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누구 찾으세요?”신지훈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신 대표님은 마중 나온 사람이 있나요?”“곧 도착할 겁니다. 도 대표님은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신지훈이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서대은의 메시지를 본 순간, 도아린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보스, 다음 생에는 부하로 남을게!]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혹시라도 무모한 짓을 저지를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주작 팀원들에게 연락해 서대은을 찾아보라고 했다.진경수가 조깅하러 나왔다가 테라스에 앉아 있는 도아린을 발견했다.그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밤새 못 잤어?”놀란 도아린이 뒤돌아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그냥 일찍 일어난 것뿐이에요. 오늘 비가 올 것 같아서 연성 가는 비행기 표를 바꿀까 고민 중이었어요.”“조금 더 쉬었다 가지 그래?”진경수가 도아린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열은 없었다.그는 쪼그리고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넌 이미 충분히 애썼어. 너무 무리하지 마.”“어차피 모건 그룹은 배씨 가문의 것이잖아. 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모르지만 팔 수 있으면 파는 게 나아.”물론 배건후가 회사를 자발적으로 넘긴 것이었지만 도아린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사람들은 분명 도아린이 재산을 탐내서 배건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고 수군댈 것이었고 겉으로는 선을 긋는 척하면서도 결국 돈 앞에서는 한없이 유약하다고 말할 터였다.진경수는 동생이 결혼을 서두르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부당한 오해를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알았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에 살짝 스치는 날 선 눈빛을 진경수는 보지 못했다.아침 식사 후, 윤명희가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출발하기 전, 윤명희는 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애틋한 눈길을 보냈다.“무슨 일이 있으면 꼭 집에 연락해. 혼자서 다 짊어지지 말고!”“참, 강씨 가문에서 표절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어. 네 디자인을 표절한 제품은 세 배 가격으로 전량 회수하고 회수한 제품은 전부 소각 처리하기로 했대.”“회수되지 않은 것들은 판매가의 두 배를 배상할 거고 경수가 계속 지켜
서대은은 처음엔 아버지의 병 때문에 도아린을 배신했다.하지만 도아린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급해하지 말라며 위로했고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다.심지어 청룡 쪽의 자원을 동원해 그의 아버지에게 맞는 장기를 찾아주려고까지 했다.하지만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도아린을 배신했다.아니, 이번엔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날카로운 단검을 꽂는 행위나 다름없었다.서대은은 도아린을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자기 두 손으로 배신의 칼끝을 도아린의 심장 깊숙이 찔렀다.“보스, 미안해!”“서대은!”서대은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어린 얼굴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차가운 어둠이 서려 있었다.그는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육청아가 그를 발견하고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비웃으며 길을 비켜주었다.“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어.”서대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방 안을 둘러봤다.둘만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금 하고 있는 이 사업, 현무도 알고 있어요?”서대은의 말에 육청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대답이 없었다.서대은은 거침없이 이어갔다.“나도 끼워줘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회의에서 라윤주의 선발에 끝까지 반대할 겁니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 서대은 씨가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육청아는 비웃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그러나 서대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육청아 씨, 내 손에 있는 증거만으로도 당신을 감옥에 보낼 수 있어요. 누가 다음 라윤주가 되든, 결국 당신은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육청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그러나 이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서대은! 설마 당신도 도아린 그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그녀는 손뼉을 치며 비웃었다.“대체 도아린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남자들이 하나같이 미쳐 돌아가는 거지? 하지만 서대은 씨, 그 여자는 아버지 일 때문에 당신을 평생 용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