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끼리 이야기 나누는 중이니 보미 씨는 이 자리에 모시지 않을게요.”주현정의 말은 겉보기엔 정중했지만, 그녀에게 얼른 사라지라는 뜻이었다.손보미는 그 말뜻을 이해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억울한 눈빛으로 배건후를 바라봤으나 그는 진범준 부부에게 차를 따라주는 한편, 도아린의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질투심에 손보미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선물 상자를 꽉 움켜쥐었다.어떻게든 주현정에게 선물을 보여줘야 했다. 큰돈을 들여 어렵게 구한 물건인데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지 못하면 나중에 배씨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일부러 배지유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탁자 위의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신호를 보냈다. 배지유는 선물 상자를 집어 주현정에게 건넸다.“엄마, 보미 언니는 엄마가 비취를 좋아하신다는 걸 알고, 특별히 오래된 광산에서 나온 최상급 얼음 느낌의 옥불을 구해 왔대요. 게다가 엄마의 안녕을 기원하며 스님께 부탁해서 복을 비는 의식까지 했다잖아요.”배지유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주현정이 끝까지 외면하면, 배씨 가문이 손님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주현정은 딸이 손보미와 한통속이 된 모습에 속으로는 불쾌했지만, 가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손을 내밀어 상자를 받았다.“내가 비취를 좋아하는 건 내 며느리가 좋아하기 때문이야.”주현정은 상자를 열며 말했다.“아린아, 너 옥불을 모시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이게 마음에 들어?”그러고는 상자를 윤명희에게 건네며, 자신의 마음속엔 오직 도아린뿐임을 보여주려 했다.손보미는 손톱이 부러질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녀를 모욕하다니, 정말 배건후와 결혼하게 된다면, 저 할망구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그녀의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 배지유는 재빨리 상자를 빼앗았다.“엄마, 이건 보미 언니가 엄마를 위해 모신 거란 말이에요. 새언니에게 주고 싶으시면 따로 준비하셔야죠. 그래야 성의가
손보미가 이 자리에 온 것 자체가 배건후의 잘못인데, 감히 자신의 딸과 함께 앉게 하다니.도아린에게 뒷배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진씨 가문 사람들이 호락호락하다고 생각하는 건가.배지유는 진 씨 사모님이 화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늘은 그녀 엄마의 생일잔치였다. 아무리 진씨 가문이라도 그건 해남에서 통하는 이야기였다.오늘 이 자리에는 연성의 유력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으니 진씨 가문이라고 해도 함부로 난동을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말은 자신이 하는 것보다 배건후가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오빠...”배건후는 차가운 눈으로 여동생의 애원하는 눈빛과 손보미의 억울한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네 친구니까 네가 알아서 챙겨.”배지유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미소가 채 만개하기도 전에 배건후의 말이 이어졌다.“지배인에게 가서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해.”“...”따로 마련해?따로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그녀는 배씨 가문의 천금으로 당연히 주빈석에 앉아야 했다.배지유가 손보미와 눈빛을 교환하기도 전에 배건후는 이미 지배인을 불렀다.“이 두 사람 자리 안내해 줘요.”“싫어요!”배지유는 즉시 얼굴을 붉혔다.“나는 배씨 가문 사람인데 왜 손님 석에 가야 해요?”손보미 역시 당황하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배지유의 손을 잡고 말했다.“아린 씨가 진 씨 가문 사람들이랑 같이 있잖아. 우리가 모두 있으면 자리가 너무 좁으니까 내가 너랑 같이 밖에 나가 앉을게.”갈등의 화살은 도아린을 향했다.며느리라는 작자는 외부인인 진범준 부부와 함께 주빈석에 떡하니 앉아 있는데, 정작 배씨 가문의 천금인 그녀는 친구 하나 데려오지도 못하고 쫓겨나야 한단 말인가.과연 배지유는 도아린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녀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배석준의 팔을 붙잡았다.“아빠... 일 년 만에 겨우 만났는데 같이 식사도 못 해요?”배석주는 얼굴을 굳히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도아린을 쏘아보았다.“네가 보미와 사이가
손보미는 주현정의 날카로운 눈빛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배지유를 따라 나갔다.윤명희의 따뜻한 위로에 도아린은 마음이 훈훈해졌다.그녀는 집안 배경도 좋지 않고 배건후에게 의지해야 할 부분도 너무 많아 저항할 힘이 없었다.처음에는 윤명희가 자신을 양딸로 받아준 건 단순히 생명의 은인에 대한 형식적인 감사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위해 배씨 가문과 맞설 줄이야.사람은 지지 기반이 있어야 힘이 생기는 법이다.식사가 시작되고 두 가문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점차 누그러졌다.배석준은 배지유와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그는 화장실에 간 후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며 배지유를 불러냈다.“집에 무슨 일 있었어? 네 엄마가 예전과 좀 달라진 것 같아.”배지유는 몇 마디 떠보면서 아빠가 주현정이 자신 때문에 화병으로 기억을 잃은 일을 모른다는 걸 확신하고, 곧바로 도아린에게 책임을 떠넘겼다.“아빠가 외국 나간 이후로 엄마는 아린이만 엄청 챙겨요. 분명 진씨 가문 사모님을 구한 건 나인데, 엄마는 그 공을 아린에게 돌렸잖아요. 아린이가 진씨 가문의 양딸이 되면 모건 그룹을 도울 수 있다면서요.”“모건 그룹이 언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대?”배석준은 담배를 세게 쥐었다.처음 해외 진출을 결정한 것은 주현정의 생각이었다.국내 시장은 경쟁이 너무 치열했기에 해외 시장을 개척하면 모건 그룹이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배석준은 야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모건 그룹이 연성에서 10위 안에 들고 자식들이 잘 자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아내의 꿈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아들은 모건 그룹을 연성 3위 안에 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그러니 해남의 진씨 가문과 협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두 집안은 서로 마주칠 일 없이 지내는 게 최선이었다.배지유는 자신과 도아린 사이의 갈등을 부풀리고 왜곡하여 이야기했다. 배석준의
“어머니~”도아린은 윤명희를 껴안았다.“고마워요.”“바보. 엄마한테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윤명희는 도아린의 목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글썽였다.손님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배건후가 말했다.“진 대표님, 사모님, 위층에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죠.”“괜찮아요.”진범준은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친딸이 눈앞에 있는데도 알아볼 수 없고 양딸이라고 불러야 하다니.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저희는 돌아가 봐야 해서. 배 대표님...”“그냥 건후라고 불러주세요.”배건후는 진범준에게 담배를 건넸다.이는 그들을 경쟁 상대가 아닌 어른으로 대우한다는 의미였다.“그럼 사양하지 않겠네.”진범준은 담배를 받아 배건후가 불을 붙여주자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린이가 이전에 배씨 가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든 이제 아린은 우리 진씨 가문의 딸일세. 만약 아린이가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우리는 즉시 딸을 데려갈 거야.”진씨 가문의 단호한 태도에 배건후는 부담감과 동시에 놀라움을 느꼈다.도아린은 윤명희에게 응급처치했고, 배지유는 구급차를 불렀다.엄밀히 말하면 두 사람 모두 은인인데 진씨 가문은 두 사람을 완전히 다르게 대했다.도아린을 양딸로 삼은 것만 해도 큰 은혜를 베푼 것인데 도아린을 감싸고 배지유의 체면을 무시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진 대표님...”진범준은 손을 내저으며 배건후의 말을 끊고 아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아린이랑 쇼핑 간다고 하지 않았어? 갑시다.”“맞아. 아린아. 우리 쇼핑 가자. 옷이랑 장신구 몇 벌 사 줄게. 괜히 누구 때문에 기분 망치지 말고.”윤명희가 도아린의 손을 잡아끌자 도아린은 그들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배건후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차에 올랐다.배건후는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손에 든 담배를 꺾어 버렸다....윤명희는 도아린을 데리고 여러 브랜드 매장을 돌아다니며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는지 물었다.진
도아린은 화를 내지도 않고 소파에 앉은 채 도우미가 건네준 차를 받았다.“너, 어머님한테 뭐 선물했어?”“나...” 배지유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난 엄마의 친딸이고 내 사랑이 가장 좋은 선물이야, 너랑 비교할 수 없지.”도아린은 피식 웃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그럼 난 너랑 비교할 수 없는데 보미 씨는 나랑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이야?”배지유는 가슴이 답답해졌다.사실 배지유는 원래 주현정에게 선물하려고 했지만 주현정은 가족끼리 굳이 겉치레할 필요가 없다며 그저 엄마 말을 잘 듣는 게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했다.배지유도 주현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산더미처럼 쌓인 선물 가운데 자기가 준 게 없다는 걸 과연 누가 알까?그런데 도아린이 그걸 콕 집어냈다.배지유는 배석준에게 기대며 일부러 말했다.“아빠, 아린 언니가 아빠가 귀국한 걸 몰라서 따로 선물을 준비해 두었다고 하던데요.”“그 애 선물은 필요 없다.” 주현정은 귤을 탁자 위에 던지며 약간 화가 난 듯했다.배석준은 딸의 서운한 표정을 보더니 분위기를 풀려고 먼저 입을 열었다.“그 애가 주겠다면 받으면 되지, 별로면 그냥 놔두면 되잖아. 그래도 우리 지유 친구인데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말자. 그 애 입장이 난처할 거야.”“당신이 그 애 선물을 받으면 난 평생 당신이랑 해외 안 나갈 거야!” 주현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아빠...” 배지유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운함을 드러냈다.배석준은 딸을 안심시키고 아내를 따라갔다.주현정은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누구 선물이든 무턱대고 다 받는 거야? 당신 오늘 연회에서 진씨 가문의 태도를 못 봤어?”그 말을 듣자 배석준도 기분이 나빠졌다.“아무리 진씨 가문이 해남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의 눈치까지 봐야 하냐고?”주현정은 몸을 돌리더니 일어나 앉았다.“당신이 정말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외국 문화에 물들어 버렸는지 모르겠는데, 진씨 가문이랑 정약결혼을 맺는 게
배지유는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옆에 있던 쿠션을 꽉 움켜잡았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경고했다.“우리 오빠가 없다고 해서 언니가 여기서 마음대로 헛소리해도 되는 줄 알아? 여기는 배씨 가문이야, 에이트 맨션이 아니라고!”도아린은 하얗게 질린 배지유의 얼굴을 외면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너 방우진과 안팎으로 공모해서 엠파이어 2기의 고객 정보를 훔쳤잖아. 이것만으로도 이사회에서 네가 배씨 가문에 들어오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걸?”“너랑 보미 씨가 짜고 내 가게를 빼앗았잖아. 넌 방우진의 욕심이 그 하나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 절대 아니야. 기다려 봐, 언젠가 너도 배신당할 테니까.”도아린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배지유의 당황한 표정을 빤히 쳐다봤다.“육하경한테 있는 드레스를 빼앗은 것도 단순히 입어 보고 싶어서 그런거 아니지...?”배지유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채 도아린이 자신의 비밀을 낱낱이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앞의 두 건은 배씨 가문의 일이니 부모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지만 드레스 건은 만약 진씨 가문에서 진짜 목적을 알게 된다면...배지유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도아린은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소파에 기대앉았다.갑자기 멀어진 거리에 배지유는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반박하기도 전에 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배지유, 내가 꼭 알아낼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도아린은 유민정에게 볼일이 있어 나간다고 전하고 큰 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배지유는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려왔다.‘안 돼, 절대로 도아린에게 들켜서는 안 돼.’...조이서가 막 쉬려는 찰나 병실 문이 열렸다.그녀는 도아린을 보더니 깜짝 놀라 물었다.“아린 씨,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갑자기 동생이 보고 싶어서요.” 도아린은 간호사에게 쉬라고 하고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더니
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병상에 누워 있는 도지현을 바라보았다.도지현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그렇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도아린은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서 몇 번 흔들자 도지현의 눈동자도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마침내 도지현은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누나.”도아린은 눈물이 예고 없이 쏟아졌다.그녀는 입을 막으며 웃다가 울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사람처럼 굳어버렸다.조이서는 의사를 불러 그녀를 옆으로 데려갔고 도아린은 마치 인형처럼 끌리는 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축하해요, 동생이 드디어 깨어났네요.” 주치의는 감격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축하를 건넸다.“내일 백 교수님께서 근무인데 분명 기뻐할 거예요.”“백 교수님, 너무 대단하신 거 아니에요? 3년 동안 고치지 못한 병을 일주일 만에 치료하다니?!”의사는 주의 사항을 간단히 설명하고 떠났다.도아린은 다시 병상 옆에 앉아 도지현의 손을 잡은 채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지만 애써 삼켜버렸다.도지현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누나, 고마워.”“바보야, 누나한테 뭘.” 도아린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옆에 있던 조이서도 함께 눈물을 훔쳤다.3년 동안, 도지현은 영양제로 연명하며 피부 역시 창백하다 못해 혈색이라고 찾아볼 수 없었고 뼈만 남은 듯했다.그는 조금 배가 고팠지만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조이서는 안혜진에게 전화를 걸어 죽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도아린은 지난 3년 동안 도씨 가문과 자신의 상황을 도지현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특히 도정국이 건물을 도유준에게 주려 한다고 말했을 때 도지현은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지현아, 그때 어떻게 계단에서 떨어지게 된 거야?”“누나, 나 믿어?”도아린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믿지.”“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말은 믿어?”도아린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절대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정말로 자신이 동생에게 너무 큰 부담을 줘서 그렇게 된 거라면.
도정국은 얼굴에 드러난 분노를 금세 숨겼지만 잠깐이나마 스친 살기마저 도아린은 놓치지 않았다.“지현이 이제 쉬어야 해요. 그만 돌아가세요.”“넌 내가 오지 않았어도 쉬게 하지 않았을 거잖아. 하필 내가 오니까 쉬게 하려는 건 뭐니?”도정국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내 아들이야,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아낀다고!”도아린은 갑자기 비웃음을 흘렸다.“제일 아끼는 애를 세 살 이후로 그냥 내버려두더니, 제가 지현이를 보내지 못하게 하자 제 생활비까지 끊어버렸잖아요. 세상에 이런 좋은 아버지가 어디 있죠?”도정국은 순식간에 얼굴빛이 변하더니 불만스럽게 손을 저었다. “오늘은 내가 지현이를 돌볼 테니 내일은 네가 돌보거라. 이제 지현이가 깨어났으니 간병인도 필요 없잖아.”“이모는 제가 고용한 사람이에요. 아빠랑 상관없으니까 이제 지현이도 깨어났고 누가 돌볼지 선택할 권리는 지현이한테 있어요.”도아린은 고개를 기울인 채 도지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치, 지현아?”도지현은 도정국을 흘겨보더니 다시 도아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봐요, 지현이는 제가 있기를 원하잖아요. 그러니 얼른 도유준과 상의해 보시는 게 좋겠네요. 도대체 도씨 가문의 재산을 누구에게 물려줄 건지.”도정국은 그제야 도유준이 찾아와 도지현을 자극할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그럼 내일 다시 올게.”도정국은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도아린은 서둘러 문을 잠그고 병상 옆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밀었어?”도지현은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핏기 없는 입술을 꼭 다문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누나, 난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야. 평생 누나를 돌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누나에게 짐만 될 거야.”도지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목소리까지 메여왔다. “나 때문에 누나가 배건후한테 시집간 것도 모자라 돈까지 요구하면서 멸시당했잖아.”“그런 일 없어.” 도아린은 동생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그녀는 애써 개의치 않은 척하며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