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공식적인 답변은 오지 않았고 대신 ‘윤주별’이라는 라윤주 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손보미가 여기까지 온 건 남자친구가 돈 써서 띄워준 덕이잖아?][기쁨, 분노, 슬픔 다 한 표정으로 금화상 후보까지 올랐으니 라윤주 선생님이 아니라 네 금주한테 고마워해야지.][연기나 제대로 해. 괜히 갖다 붙이지 말고!]그러자 뜻밖에도 손보미가 직접 댓글을 남겼다.[윤주별 님들. 그렇게 말하면 라윤주 선생님이 슬퍼하실걸요.]헐. 도아린은 화가 치밀었다.진짜 아무나 다 이용하려고 하는구나.라윤주는 3년째 소식이 끊겼고 외부에는 그녀에 대한 전설만 남아 있을 뿐 아무도 라윤주의 상황을 몰랐다.손보미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하고 있었다. 누가 자신이 라윤주를 모른다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이용하는 것이었다.어쨌든 라윤주는 행운의 상징이니까 누구든 그녀와 엮이면 다 성공할 수 있으니까.그녀가 이 글을 올린 뒤, 정말로 브랜드에서 그녀에게 광고 모델을 제안했다.라윤주는 과연 행운의 상징이었다.도아린은 페이지를 넘기고 서대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손보미가 아부하는 꼴, 진짜 역겹다.]서대은은 디자인 도면에서 고개를 들며 차갑게 웃었다.[아부하는 사람을 보면 결국 남는 게 없어.]도아린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예쁜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성대호는 병원에 도착하자 깊이 숨을 들이쉬고 배지유의 병실로 들어갔다.“지유야, 너 바다 진주 갖고 싶다 하지 않았어?”그는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6억 주고 사 왔어.”배지유는 눈물을 머금은 채 그 상자를 들어 문밖으로 던져버렸다.“싫다고 했잖아!”“...”성대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서대은의 비서가 상대방이 팔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좋은 말로 설득해 겨우 바다 진주 한 쌍을 살 수 있었다.하지만 배지유는 쳐다보지도 않고 밖으로 던지며 그의 호의를 무시했다.그녀는 입을 가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성대호는 한숨
방우진은 병원 로비에서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몇 층이야?][8층.]그는 입에 물었던 이쑤시개를 뱉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8층은 조용했다. 끝쪽 병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더니 키가 작은 중년 여자가 빠르게 나왔다.“이쪽으로 와.”여자가 그를 테라스로 안내했다.방우진은 짜증 난 표정으로 뒤따랐다.“그 영감탱이가 죽자마자 일자리를 구한 거야?”여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주머니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방우진은 그것을 단숨에 낚아채고는 손에 침을 바르고 빠르게 돈을 세었다.“이것밖에 안 돼?”“지난달 내가 아파서 며칠 동안 수액을 맞았잖아...”“오백 원짜리 감기약을 먹으면 되지 무슨 수액이야? 돈 낭비하지 마!”여자는 억울한 표정으로 두 손을 불안하게 비볐다.“다음 달에는 좀 더 벌 거야. 이번 고용주는 좋아. 월급도 많고 식사도 챙겨주거든.”방우진은 비웃으며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돈 좀 뜯어갔다고 서러워하지 마. 내가 상가를 손에 넣은 뒤 임대료를 받으면 엄마도 남은 인생 똥 치우며 살 필요 없어, 알았지?”그가 돌아서려 하자 여자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우진아, 너 출근하기 싫으면 엄마가 열심히 벌게. 힘들어도 괜찮으니까 우리 제발 나쁜 짓은 하지 말자.”방우진은 여자를 밀쳐버렸다.“위선 떨지 마. 엄마가 나쁜 짓 안 했으면 우리 누나가 왜 죽었겠어?”방우진은 돈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엄마가 지금 겪는 고통은 그때 저지른 죗값을 치르는 거야! 내가 엄마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그 말을 남기고 그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를 내버려 두고 가버렸다....도아린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꿈속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탐욕스럽고 흉악하고 분노에 찬 시선은 확실히 보였다.그녀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갑자기, 손목이 꽉 잡혔다.키
퇴근 시간이 되자 그 직원은 대표와 사모님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걸 보고 서둘러 일어나 맞이할 준비를 했다.“오뎅 맛있었어요?”도아린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대표님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다.대체 맛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우정윤의 신호를 받고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근무 시간에는 음식을 먹으면 안 돼요.”“아, 그럼 먹지 마세요. 차가워지면 배탈 나요.”배건후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차가운 음식이 배탈을 일으킬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오뎅을 안 먹었다고 불평하는 도아린이 어이없었던 것이다.차별 대우를 받은 누군가는 기분이 좋지 않아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도아린은 그를 따라잡으려고 작은 걸음으로 뛰어갔다.다리 긴 게 뭐가 대단해!매너도 없는 주제에!집에 갈 줄 알았는데 배건후는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주현정은 방금 잠들어 두 사람은 방해하지 않고 배지유의 병실로 향했다.배지유는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말해봐.”배건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지유는 이불을 꼭 쥐고 빠르게 도아린을 쳐다본 후 모깃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사고였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잠시의 침묵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배건후의 실망한 눈빛을 마주할까 봐 배지유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지금 모건 그룹은 배건후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그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녀는 자회사에도 발을 들이기 힘들었다.오히려 그녀를 해외로 유학 보내 버릴 가능성이 컸다.일단 연성을 떠난다는 건 육하경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배지유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오빠에게 용서를 빌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남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차 얘기 말고, 네 몸이 어떠냐고. 의사가 뭐래?”“...”배지유의 몸이 얼어붙었다.문가에 서 있던 도아린의 눈에
도아린은 그가 나오는 걸 보고 간단히 몇 마디 한 후 전화를 끊었다.“이제 갈 수 있어요?”그녀의 차가운 태도에 배건후는 불만을 느꼈다. 차에 타고나서 배건후는 냉정하게 말했다.“소인배는 사람을 짜증 나게 하지.”도아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대충 한마디를 내뱉었다.“고집 피우는 사람이 더 혼나야죠.”차 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때릴 만큼 때렸고 욕할 만큼 했어. 지유도 잘못을 인정했는데 이제 뭘 더 바라는 거야?”‘이 말은 배지유가 다 털어놨다는 뜻인가?’배지유는 도아린을 이용해 회사의 기밀을 유출하고도 오히려 그녀를 모함하려고 했다. 하여 도아린은 이 문제를 잘못을 인정했다는 말 한마디로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배건후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아무리 뛰어나도 그 역시 결국엔 자기 동생을 감싸는 오빠에 불과한 보통 사람일 뿐이었다.“지유 씨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렇게 쉽게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요.”배건후는 눈살을 찌푸렸다.결혼 후 도아린은 배지유를 항상 챙겨주고 배지유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들어줬다. 하지만 지금은 이혼을 앞두고 배지유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지유가 아린이를 존중하지 않은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죽을죄는 아니지 않나?’교통사고를 당하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하지만 배지유가 이미 사과했는데도 도아린이 끝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기분이 배건후 때문에 다 망쳐졌다.“수현 씨, 저는 강진 아파트로 데려다줘요.”그녀는 스튜디오로 돌아가고 싶었고 배건후와 더 이상 감정을 소모하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조수현은 감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슬쩍 백미러를 통해 배건후의 눈치를 봤다. 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단호히 거부의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차는 갑자기 속도를 냈다.상업구를 지나가면서 건물 외부 스크린에 빅토리아
조수현은 핸들을 꼭 잡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긴장한 상태로 있었다.뒤이어 검은 구름이 드리운 듯한 분위기 속에서 차는 무사히 에이트 멘션에 도착했다.도아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배건후와 이렇게 지내다가는 1년은커녕 반년도 못 버틸 것 같았다. 차라리 그 4000억을 포기하고 일찍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결혼 후 살게 된 에이트 멘션에 도아린은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배건후의 강압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가게 두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마이바흐가 잔디 위에 멈춰서자 도아린이 먼저 차에서 내려 어두운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그 뒷모습은 마치 결연히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사람 같았다.문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은 가디건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그녀가 허리를 숙여 신발을 갈아신는데 목 부분의 단추가 느슨하게 풀렸다.오늘 도아린은 복숭아 모양의 브라를 입었는데 앞부분만 살짝 가려져 있었고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뒤따라 들어온 베건후는 그녀 옆에 서서 이 모든 걸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의 아랫배에서 갑작스레 열기가 치솟았다. 차 안에서 도아린이 한 말들이 떠오르며 불편함을 느꼈던 그는 더욱 긴장했다.모건 그룹을 맡은 이후로도 수많은 여자가 그에게 접근 해왔지만 배건후는 그 모든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아린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침을 삼키며 욕망을 억누르려 애썼다.도아린은 배건후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었다.그녀의 엉덩이가 그의 다리에 살짝 닿자 베건후는 전기가 등줄기를 타고 흐른 듯했다.뒤이어 도아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님방으로 향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건후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도아린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배건후가 그녀의 뒷목을 잡아채며 말했다.“위층으로 가.”그러자 도아린은 그의 철처럼 단단한 손을 떼어내려 하며 말했다.“싫어요!
도아린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배건후와의 관계를 바라기도 했지만 지금은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나한테서 떨어져요! 제발 그만둬요!”“누구 만나러 가려던 거였냐고!”배건후의 눈에서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차갑고 무서웠다.도아린은 배건후가 답을 요구할 때면 그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벽과 배건후 사이에 갇힌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배건후가 다시 입을 맞추려 하자 도아린은 그의 이마를 세게 들이받았다.“할게요! 해줄게요! 하지만 이혼 후에 저한테 20억 더 주면요!”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다. 배건후의 가슴이 들썩였고 그의 눈빛엔 조롱이 섞인 차가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20억? 네가 뭔데? 대세 연예인이야, 대단한 사람이야, 아니면 나를 기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야? 도아린, 너한테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억울한 마음이 든 도아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그녀는 머리를 정리하면서 똑같이 되받아쳤다.“건후 씨의 그 거칠고 서툰 기술이랑 내 병원비 생각하면...”이러면서 도아린은 조금 전 배건후에게 물린 자신의 입술을 보여주었다.“20억은 우리가 그래도 3년간 결혼생활을 한 정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거예요. 안 그럼 200억 원을 줘도 절대 안 돼요!”도아린의 조롱에 배건후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고 입가에는 냉정한 웃음이 맺혔다.“상처가 다 나으니까 잊었나 보네. 아직도 감히 대들어?”도아린은 그를 세게 밀어내며 냉소를 지었다.“상처가 나아도 흉터는 남아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대드는 거 말인데... 다른 데서 못 대들면 말로라도 해야죠.”만약 도발이 효과가 있었다면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벌써 배건후를 정복했을 것이다.그녀는 지난 3년 동안 낮추고 기회를 노리며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배건후는 항상 절대 선을 넘지 말라고 도아린을 경고했다.그러니 이제 와서 도아린이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손보미 씨가 깨끗하게
“엄마, 난 배씨 가문 딸이에요. 다들 나를 떠받들어주기 바쁜데 어떻게 문제가 생기겠어요?”배지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새언니 기분 나쁘게 할까 봐 걱정하는 거죠?”“네 새언니 성격 너도 잘 알잖아. 네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 너한테 뭐라 하지 않을 거야.”그러자 배지유는 못마땅한 듯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오빠는 아직도 안 오지? 연회에 참석하려면 여자는 화장도 해야 한다는 걸 모르나?”“회사에 일이 많아서 그래. 듣기로는 엠파이어 2차 프로젝트의 입주 문제에 문제가 생겼대.”배지유의 눈이 순간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주현정이 눈치챌까 봐 그녀는 급히 말했다.“내려가서 오빠 기다릴게요.”그녀가 상대에게 보낸 자료는 바로 점포들의 정보였다.이 일류 브랜드들은 모건 그룹과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아무 능력 없는 사람이 이들을 빼앗아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녀를 위협한 건달 역시 그럴 힘이 없었고 단지 그녀의 약점을 이용해 점포 하나를 얻으려는 것뿐이었다.별일 아닐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인 배지유는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지금 어디예요? 지금 이게 몇 시인데...”“가고 싶으면 기다려. 잔말 말고.”기분이 나빴던 배건후는 배려 없이 말했다.마이바흐가 병원 앞에 도착하자 배지유가 웃는 얼굴로 달려와 차 문을 열었다. 그러나 도아린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오빠, 난 뒷좌석에 앉을래요. 다쳐서 안전벨트를 맬 수가 없거든요.”배건후는 차갑게 말했다.“출발해.”배지유는 어리둥절해졌다.그때 도아린이 차에서 내려 차 앞쪽으로 돌아가 조수석에 탔고 배지유는 속으로 기뻐하며 얼른 뒷좌석에 올랐다.도아린이 아직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배지유는 재촉했다.“기사님, 빨리 가요.”도아린은 배건후가 자신을 차갑게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그를 무시했다.모건 그룹과 협력하는 드레스샵에 도착한 후 배지유는 미리 세워둔 계획을 실행했다.
“결혼 생활에서 어려운 관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이 아니라 시누이와의 사이도 있죠.”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속으로 생각했다.“보세요. 저렇게 애원까지 하는데 새언니는 아무런 반응도 없잖아요. 밖에서조차 체면을 안 세워 주는데 집에서야 오죽하겠어요.”비록 고객을 직접적으로 논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제가 나가서 차에 치여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곧 배지유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배건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오빠...”배건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배지유의 외모는 단정하고 피부도 고운 편이었지만 노란빛을 띤 피부 때문에 보라색 드레스가 얼굴을 더 칙칙하게 만들었다.드레스 자체는 화려했지만 그녀의 나이와 맞지 않았다.반면 도아린은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검은색 미니 드레스를 골랐다.그녀의 하얀 팔과 다리는 조명에 비쳐 마치 도자기처럼 빛났다.배건후는 도아린에게서 시선을 떼며 살짝 찡그렸다.“무슨 일이야?”“오빠, 나 도와서 새언니한테 잘 말해준다면서요... 아무것도 안 말한 것 아니에요?”배건후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잘못한 건 알아요. 말로 사과해도 소용없어서 내 용돈으로 새언니한테 줄 귀걸이 한 쌍을 샀어요.”배지유는 벨벳 상자를 배건후에게 내밀며 말했다.“새언니가 내가 준 귀걸이를 연회에서 착용해야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뜻이 될 거예요.”“드레스에 맞춤 장신구가 이미 정해져 있어.”배건후가 담담하게 말했다.“알아요. 목걸이랑 크라운이 있잖아요. 새언니가 먼저 고르면 난 나중에 고를게요.”배지유는 억울하지만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건 귀걸이 한 쌍뿐이라 화장하는 데는 문제 없을 거예요.”배지유는 비취 팔찌를 선물했다가 루비 목걸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그러니 도아린이 이 귀걸이를 받아야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그녀가 곤란하지 않게 될 수 있었다.배건후는 도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유 마음이니까 받아 줘.”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
“지금 두 분은 어느 정도까지 간 거예요?”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아린은 본론부터 꺼냈다.그녀는 오빠와 변슬기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걸 단번에 눈치챘다.“아...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변슬기는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시작은 안 했어도 뭔가 있었네요?”“크흐흑!”그 말에 변슬기는 자신이 삼킨 침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벌게졌다.변명하려 할수록 기침은 더 거세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물 한 잔을 건넸다.“너무 걱정 마요. 변슬기 씨 덕분에 우리 집에 큰 도움 됐잖아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진짜 아니에요...”변슬기는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저었고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날 밤 나랑 같이 집에 안 갔잖아요. 여기서 잤던 거 아니에요?”“그랬었죠. 그런데요...”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도아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설마 우리 오빠가 그쪽에 문제 있어요?”‘설마 그럴 리가... 아빠는 나이 들었어도 정력이 넘치시던데 오빠도 피는 못 속일 텐데?’변슬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날 서로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진수혁이 스스로 멈췄고 그는 침실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다음 날 술이 깬 듯한 표정으로 전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변슬기도 굳이 꺼낼 수 없었다.그 후로도 그들의 사이는 은근하게 가까워졌지만 딱히 확실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안 돼요!”변슬기는 도아린의 팔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도 선생님...제 신분이 황태자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 잘 알아요. 남자들은 술 먹으면 착각할 수도 있고...다행히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은 책임감 없는
“아!”변슬기는 병아리마냥 진수혁 차로 옮겨졌다.도아린은 웃으며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녀는 휴대전화로 사진 하나를 골라 일남에게 전송했다.일남은 안전벨트를 하려던 참 알림 소리에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사진을 본 그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아가씨 사진 실력이 정도면 필터도 울고 갈 수준인데요.”“정말? 나도 볼래!”송 비서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앉아. 운전해야 해”일남은 그의 머리를 눌러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시내에선 뒷좌석 안전벨트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연성은 관리가 그렇게 심해? ”송 비서는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일남은 일북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너도 보지 마. 그냥 안 본 셈 쳐.”그 사진은 일남이 일북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을 캡처한 것이었다.일북은 정면만 똑바로 응시하는 완전 군인 양식이었고 일남은 몰래 보는 범인 양식이었다.하지만 일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동을 걸어 배건후 차량을 따라갔다.“왜 웃어?”배건후는 도아린이 조수석에서 혼자 피식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밌는 사진 하나 건졌어.”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밀크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김지민네 진짜 끝도 없네. 혹시 배 회장님 유골 넘기면서 돈 요구한 거 아냐?”진옥경 고모 장례 때도 남편이 돈부터 요구했었다.다행히 진가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사망 후에도 부부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배석준 역시 김지민 가족한테는 그냥 은행 통장 같은 존재였고 이제 더는 못 빨아먹으니까 마지막으로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는 거였다.“2억.”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방금 마신 밀크티를 뿜을 뻔했고, 그 티슈로 입까지 닦았다.“진짜 줬어?”“아니.”배건후는 새 티슈를 또 건네며 그녀의 티슈 재활용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눈빛엔 오히려 다정함이 가
진수혁은 변슬기의 얼굴이 붉어진 걸 못 봤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했는지 담담히 말했다.“우린 여기서 기다릴게.”도아린은 변슬기 머리 위에 달린 풍선을 가리켰다.“이렇게 눈에 띄는 표시도 있으니까 제가 금방 찾으러 갈게요. 오늘 관광객 많으니까 지금 덜 붐빌 때 구석구석 잘 봐요.”“길 잃으면 전화해.”진수혁은 풍선 끈을 가볍게 당기며 변슬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일북은 도아린 뒤를 바짝 따라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할까 혹은 누가 몰래 물건을 훔쳐 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반면 일남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광에 진심이었다.관광 가이드 옆에 붙어 설명을 듣고는 돌아와서 일북에게 흥분한 얼굴로 그대로 전달했다.“아까 가이드가 그러는데 양평산 대군이 남자인데 얼굴이 여자처럼 생겨서 어떤 후궁이랑 닮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제가 유독 아껴줬대.”일북은 그런 일남의 말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시선은 한시도 도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둘이 가서 마음껏 구경하고 와.”“아가씨...”도아린은 손목에 찬 긴급 호출 시계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일은 잠시 내려놔.”도아린의 반복된 설득에 일북도 결국 잠깐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일남은 일북을 끌고 다니며 계속 얘기했고 도아린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오늘 날씨는 참 좋은데 운동복만 입어도 괜찮지만 햇살은 은근히 따가워서 그늘 아래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아린은 마침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양산을 쳐다보고는 옆쪽에 서 있는 송 비서를 바라보았다‘아 맞다! 얘도 있었지.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애 하나 더.’그렇게 해서 도아린은 송 비서와 함께 느긋하게 궁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끔 변슬기를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쳤다.공왕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 일남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놨다.“갈비뼈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유치장에 있을 때 남궁유민 차가 폭발했잖아요? 그때 도아린 씨를 안고 같이 넘어지면서 또 다쳤거든요. 아까 강재민이랑 싸울 때 그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알겠어.”일남은 일북을 힐끔 바라봤고 일북은 눈빛으로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아가씨,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알아. 나 안 화났어.”도아린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 대충 눈치챘거든.”야밤에 신지훈이 간호사 유선미를 데리고 배건후에게 수액을 놓으러 간 걸 봤다. 그 사람 몸에는 분명히 예전부터 앓고 있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배건후는 약한 척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주말이 되자 모두 함께 공왕부로 향했다.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아린은 진범준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부모님은?”“주 대표님이랑 장비 사러 가셨어.”진수혁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변슬기 손에서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며 말했다.“출발할 때 들었는데 부모님이 주 대표님이랑 같이 자가 여행 떠나신다고 하더라고.”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배건후는 배석준 회장님 장례 치르러 갔어.”김지민은 아직도 운전기사에게서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버티고 있었고 끝까지 합의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배건후는 김지민 동생의 약점을 찾아냈고 오늘 반드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김지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집안의 욕심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히 배건후에게 또 뭘 요구하려고 들 것이다.하지만 배건후는 배석준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