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 구슬로 만든 팔찌는 정교한 기술과 뛰어난 재질로 만들어졌기에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예솔은 그 팔찌가 얼마 전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된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인공적으로 합성한 호박석이 추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예솔은 팔찌를 가리키며 물었다. “유 대표님이 경매에서 팔찌를 낙찰하셨나 봐요? 2개 모두 법사님 손에서 나온 거라 당시 20억 정도의 가격까지 올라서 인상이 깊었거든요.” 온다연은 팔찌가 마음에 드는 듯 시도 때도 없이 호박석을 어루만졌다. “법사님한테 부탁했다고 들었어요. 자세한 건 저도 잘...” “이거 맞아요.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인공적으로 만든 호박석을 왜 추가했는지 모르겠네요. 유 대표님이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나 봐요.” ‘인공적으로 만든 호박석이라고?’ ‘아저씨가 분명히 희귀한 천연 호박석이라고 했는데?’ 온다연이 답하기도 전에 지예솔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호박석을 자세히 관찰했다. “합성된 게 맞아요. 그리고 이 안에 들어있는 건 태아의 머리카락인 것 같네요.” “제가 예전에 주얼리 디자인했었는데, 태아의 머리카락을 넣는 손님들이 꽤 있었어요.” 지예솔은 온다연의 손을 놓더니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유 대표님은 아이를 무척이나 아끼시나 봐요.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걸 보면...” 그 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더니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 장화연이 디저트를 가지고 다가왔다. 지예솔이 온다연의 팔찌를 유심히 구경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장화연은 조용히 디저트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예솔 씨, 주얼리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네. 예전에 주얼리 디자인을 담당했거든요.” “그러시군요. 방금 만든 디저트인데 한번 맛보세요.” 말을 하던 장화연은 담요 꺼내 온다연에게 덮어주었다. “약 준비됐습니다. 손님이 계시니 저쪽으로 가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후 온다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기만 해봐. 내가 너 죽여버릴 거니까.” “지예솔,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거 알아. 다연 씨를 부러워하는 것도 눈에 보이고. 하지만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다연 씨도 아이가 없거든.” “그러니까 딸 하나만 낳아줘. 그럼 내가 너 풀어줄게.” ... 순간 큰손 하나가 나타나 온다연을 끌어당겼고 곧이어 그녀는 따뜻하고 넓은 품속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로 유강후의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숨어서 다른 사람 대화를 엿듣걸 좋아하나 봐?” 말을 마치고 그는 온다연을 안아 집으로 들어갔다. 한편 온다연의 머릿속에는 지예솔과 봉현수가 나눴던 대화로 가득 찼다. 정교하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손에 든 온다연은 식겁할 정도로 얼굴이 창백했다. “현수 씨가 방금 나한테 아이가 없다고 했어요. 무슨 뜻일까요? 이건 우리의 아이를 저주하는 거잖아요.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유강후는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신경 쓰지 마. 예솔 씨가 아이를 잃었으니까 위로 차원에서 일부러 저런 말을 한 거야.” 유강후는 당장 달려 나가 봉현수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매번 지예솔과 연관되면 이성 잃고 입을 함부로 놀리니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온다연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전화해서 우리한테 아이가 있으니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고 경고해요. 이런 말 계속하면 아이한테도 안 좋아요.” 유강후는 재빨리 타일렀다. “알겠어. 나중에 전화할게. 봐봐, 밖에 오래 있으니까 손이 빨갛게 얼었잖아. 얼른 따뜻한 거 좀 마시자.” 그렇게 말하면서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손에 든 건 얼른 내려놔.” 온다연은 꼼짝하지 않고 집요하게 그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 전화해요. 저런 말 듣는 게 싫다고요. 아이도 싫어할 거예요.” 온다연의 반응에 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 전화할게. 너도 봤다시피 지금 통화할 상황이 아니잖아.”
온다연의 위치에서 보면 인큐베이터 안에 얌전히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한참 동안 지켜봤지만 아이가 움직이지 않자 불안함이 밀려온 온다연은 다급하게 물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거죠?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그웬이 답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는 자고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기에 움직이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온다연은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병균을 가지고 들어갈까 봐 마지못해 참았다. 그렇게 또 한참 동안 지켜보니 아이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온다연이 한숨 돌린 사이에 어느덧 규정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지 무균실밖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새벽이 되어가는 시간이라 유강후는 한시라도 빨리 온다연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온다연은 문틀을 붙잡고 떠나기를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유강후는 침착하게 그녀를 달랬다. “지금은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여. 그러니까 다음에 와서 다시 보자. 너도 몸이 회복된 게 아니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야지. 그래야 아이 퇴원했을 때 잘 돌보지 않겠어?” 온다연은 그의 옷을 꽉 잡은 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이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답했다. “너도 봤잖아.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조명아래 비친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에 피곤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솔직히 너무 무서워요. 불안해서 잠도 잘 못 자요.” “계속 아이가 사라지는 꿈을 꾸거든요.” 그 말에 얼어붙은 유강후는 가슴에 커다란 돌이 내려앉은 듯 숨이 막혀왔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온다연을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건 꿈이잖아. 너도 봤다시피 아닌 건강해.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봤는데 저렇게 작은 아이는 살아남을 확률이 없대요.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 유강후는 흠칫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숨 막히는 강렬한 키스가 끝난 후 유강후는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의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온다연, 내가 정말 아이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온다연은 턱이 잡혔음에도 차마 유강후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자 유강후는 더욱 옥죄여왔다. “내 눈 똑바로 쳐다보고 답해.” 사실 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의 행동이 예상이 가서 그런지 당황함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저씨, 그만해요...”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연아,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건 너야.” 어두운 불빛과 서늘한 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조차도 차 안의 설레는 분위기를 가리지 못했다. 유강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진심이 느껴진 온다연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약간의 기대도 밀려왔지만 그 말에 또 다른 뜻이 숨겨있을 수도 있으니 더 깊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온다연은 늘 자신을 초라하다고 생각했고 그녀에게 있어 유강후는 범점 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자존심 내려놓고 무언가를 ‘원한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으니 믿기지 않기도 했다. 온다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아저씨, 전 별 볼 것없는 존재인데...” 자존감이 바닥 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유강후는 어두운 눈빛으로 답했다. “다연이가 나를 버리면 정말 못 버틸지도 몰라.” 귀까지 빨개진 온다연은 감히 유강후를 쳐다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한 채 그저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다연아,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날 만나지 않겠다는 그런 얘기하지 마.” 그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살면서 누구한테 비는 건 처음이야. 다연아, 그러니까 대답해 줘. 다시는 안 보겠다는 그런 말 하지 않기로.”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꼭
온다연은 여전히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공간이 좁은 데다가 유강후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머리와 마음이 너무 복잡해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유강후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판단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아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의 곁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곁에 있을게요.” 온다연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만큼은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게다가 그녀는 유강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자기고 있다. 유강후는 온다연을 세게 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또 떠나느니 마느니 그런 말을 하면 정말 화낼 거야.”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긴 온다연은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걸 다시 한번 느꼈다. 해가 지나니 날씨도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영하권이지만 보름도 안되어 바깥 나무에 새 가지가 돋아났고 봄기운이 물씬 풍겼다. 마치 그날 밤 이후 새로운 관계를 맞이한 유강후와 온다연과 꼭 닮았다. 온다연은 처음 느껴보는 어색함에 유강후를 보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졌고 심장이 빨리 뛰어 파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피한다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거니와 유강후는 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온다연이 피할 때마다 그는 강제로 키스를 했고 불과 며칠 사이에 입술이 찢어질 정도였다. 밤에 피하면 유강후의 처벌은 심해졌다. 입에 담기 수치스러운 말을 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고 온다연이 울면서 반항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유강후는 이번 기회를 통해 온다연이 그들의 관계와 감정을 직시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날이 반복되자 온다연은 점차 익숙해졌다. 하지만 산후조리가 끝나갈 무렵 온다연은 또다시 유강후를 피하기 시작했다. 유강후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지난 며칠간의 훈련으로 인해 온다연은 그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먼저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 집사, 오늘따라 참견이 심하네?” 장화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연 씨가 몸이 안 좋은 건 도련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또다시 임신하게 된다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온다연이 산후조리가 끝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유강후다. 불과 며칠 전, 온다연은 그의 품에 파고들어 몸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만졌다. 비록 극도의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아냈지만 골병이 들 지경이었다. 드디어 오늘부터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온다연은 아마 유강후의 행동을 짐작했을 것이다. 심지어 본인이 며칠 전에 함부로 달려든 게 떠올라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워 하루종일 연락을 피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이제는 숨기도 했다. 하지만 이럴수록 유강후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진다. 방문을 열자 작은 덩어리채로 부풀어 오른 이불이 보였다. 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천천히 걸어가서 이불을 들추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온다연은 이불을 붙잡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저씨, 저 배가 아파요.” 유강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이불속에서 꺼내 다리 위에 앉혔다. “어디가 아픈데? 내가 마사지해줄게.” 온다연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배요. 여기가 너무 아파요.” 유강후는 뚫어져라 온다연을 쳐다봤다. “정말 아파?”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아파요.” 얼마 전 온다연이 함부로 달려들었을 때 유강후는 산후조리가 끝나는 순간 3일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할 거라고 경고했다. 온다연은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애기한 유강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스타일이기에 날이 다가올수록 온다연의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매일 카운트다운을 세며 유강후를 피할 방법에 대해 생
반항의 결과는 더 큰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가두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 채 있는 힘껏 격렬하게 키스했다. 불과 몇 초 만에 온다연은 온몸에 힘이 풀렸다. 유강후가 서랍을 여는 모습을 보 온다연은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보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뭐지?’ ‘도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왜 난 모르고 있었지?’ 유강후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망치려고 했지만 1초 만에 다시 잡혀왔다. 그는 온다연을 품에 가둔 채 벌주듯이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망치려고 했어? 정말?” 이미 온몸에 삭신이 쑤신 온다연은 유강후 손에 들린 박스를 보고 벌벌 떨었다. “왜... 왜 이렇게 많아요?” 유강후는 태연하게 답했다. “한꺼번에 다 쓸 생각은 아니야. 오늘은 한 박스만 쓸 거야.”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박스 외관에 ‘6개입’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온다연은 숫자를 본 순간 막막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 박스... 절대 안 돼요...” 유강후는 그녀의 가냘픈 목을 가볍게 깨물고선 한 손으로 가는 허리를 꼬집었다. “말 잘 들으면 살살하게. 네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면 하나쯤은 버려도 돼.” 온다연은 곧바로 울부짖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싫어요...” 한 박스를 다 쓰게 된다면 아마 며칠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강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려 욕실로 향했다. “말 안 들으니까 전부 다 써야지.” 욕실의 욕조에는 이미 따뜻한 물이 준비되었다. 따뜻하면서도 므흣한 분위기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온다연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날만을 기다려온 유강후에게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 곧 욕실은 애원하는 온다연의 목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 문이 열렸다. 유강후가 온다연을 품에 안고 나온 찰나에 마침 장화연이 뜨거운 우유를 주러 들어왔다. 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보고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세히 살폈다.야들야들한 손목에 푹 파인 자국이 두 개 생겼고, 깊은 곳은 이미 피부가 벗겨졌다.흰 피부 때문에 보기가 더 흉했다.‘별로 힘을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피부가 벗겨졌지?’유강후가 긴장하며 자세히 살피려 하자, 온다연이 손을 움츠리며 울먹였다.“저리 가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울어서 눈이 빨개졌지만 피부는 여전히 희고 보드라워 순진무구하고 만만해 보였다.유강후는 눈빛이 사악해졌고, 또 그녀를 안고 한바탕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손목 피부가 까지고 울어서 눈이 빨개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안쓰러웠다.유강후는 억지로 그녀를 안아 다리 위에 올려놓고 그녀의 머리에 키스하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다음에는 살살 할게. 뚝, 그만 울어.”그는 말하면서 그녀의 잠옷 단추를 벗겼다.“좀 보자, 다쳤으면 약을 발라야 해.”온다연은 급히 옷깃을 붙잡으며 풀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유강후는 그녀를 달래면서 억지로 단추를 풀었다.정말 다쳐서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렇게 쉽게 다쳐?”유강후가 자기 몸을 지켜보자, 그녀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아저씨가 너무 세게 해서 그렇죠.”그가 눈이 빨개져서 날뛰는 모습은 정말 무서웠다.유강후는 옷을 입혀준 후 지난번에 의사가 처방한 연고를 찾아 조금씩 발라주었다.온다연은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가 꽉 잡고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붉히며 그가 약을 바르게 내버려두었다.아직 세 개가 남아있고, 그가 꼭 한 통을 다 써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 그녀는 덜컥 겁이 나서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이만하면 안 돼요?”유강후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얘가 나를 뭐로 보고? 내가 그렇게 인정이 없는 사람인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내가 계속한다는 건가? 아니면 이 일 자체를 거부하는 건가? 그건 안 된다.’게다가 처음에는 그녀도 분명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