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유민준은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었다.“다연아... 가지 마...”놀라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하지만 유민준은 여전히 자기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유강후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온다연의 손을 잡고 가버렸다.막 문밖으로 나왔을 때 최금영이 마침 휴식실에서 나왔다.그녀는 잔뜩 언짢은 시선으로 온다연을 보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민준이 곁에 있어 주지 않고 또 어디를 가는 거냐?”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최금영이 계속 말을 이었다.“민준이는 너 때문에 다친 거다. 며칠이나 지났는데 병문안도 안 오고, 양심은 있는 거니?”온다연이 입을 열려고 하자 유강후가 강대한 기세를 내뿜으며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온다연한테 하지 마시고요. 저한테 심한 말을 하셔도 상관없으니까요.”온다연은 최금영을 보며 다소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할머님, 민준 오빠가 절 위해 다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민준 오빠한테 빚을 진 건 아니잖아요. 저랑 민준 오빠는 이 일로 더는 서로 빚진 것이 없는 거예요.”최금영은 분노가 치밀었다.“천박한 X,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해?! 민준이는 너 없이는 못 산다고 난리인데, 너는 감히 민준이를 피하는 거냐! 안 된다, 못 간다! 당장 여기 남아서 민준이 곁에 있어 줘! 민준이 잘 보살펴주면 나중에 내가 널 민준이 내연녀 정도로는 허락해주마. 만약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다면 내연녀도 꿈 깨!”“아, 그리고 경고하나 하지. 넌 그냥 내연녀, 딱 그 정도일 뿐이다. 민준이는 절대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민준이가 결혼해야 할 사람은 오직 집안 수준이 맞는 부잣집 딸 뿐이지. 만약 계속 민준이를 홀려서 민준이가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피운다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다!”이때 심미진도 거들었다.“다연아, 얼른 가서 민준이를 챙겨줘. 민준이가 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온다연은 유강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파고들었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무서워요. 할머님이 절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보고 계셨어요.”유강후는 얼른 그녀를 안고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친 채 한참 키스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제야 입술을 떼며 말했다.“앞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전부 해. 설령 네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있으니까.”온다연은 처음으로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화를 내어봤던지라 속이 조금 후련하기도 하여 미소를 지었다.“만약 그 사람들이 아저씨랑 제가 이런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와 유강후의 사이는 원래부터 떳떳한 사이가 아니었다.그녀는 대용품이자 놀이 상대였기에 유강후가 그녀와의 사이를 밝힐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강후는 이런 그녀의 생각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쏙 들어간 그녀의 보조개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이때 또 한 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온다연은 얼른 그의 허리에 올린 손을 내렸다.“누가 와요.”유강후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도 손을 내리며 그녀의 턱을 잡고 뽀뽀했다.“뭘 두려워하는 거지?”‘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어차피 내 일에 유씨 가문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는데 말이야.'원래는 일단 먼저 한재민과 나은별 사이를 밝힐 생각이었지만 다소 마음이 급해진 그는 일찍 그녀와의 사이를 공개하고 싶었다.하지만 공개 후 온다연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항상 거침없이 과단성 있게 행동하던 그는 다소 망설이게 되었다.그는 그녀를 꼭꼭 숨겨두어 평생 지켜주고 싶었다.이때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며 온다연은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얼굴이 다소 발그레해졌다.“여기서는 안 돼요. 사람이 있잖아요.”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
방금 그 아이는 비록 장난꾸러기처럼 보였지만 얼굴도 동그랗고 눈도 동그랬을 뿐 아니라 피부도 뽀얘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사람들의 귀염을 받는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유강후의 눈빛이 다소 어두워졌다.그는 아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만약 온다연과 자신의 아이이고, 또는 온다연을 더 많이 닮은 아이라고 상상해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미묘하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다만 유감스럽게도 온다연의 지금 상태론 몇 년간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건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부터 중요했던지라 의사의 당부를 그는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이때 온다연은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우리 얼른 돌아가요. 속이 좀 안 좋네요.”차에 올라탔을 때 오늘따라 유난히 가죽 냄새가 심하게 나면서 더 속이 울렁거렸다.그녀는 그렇게 울렁거림을 참으며 호텔까지 왔다.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들어 갔다.한의사가 처방해 준 위에 좋은 한약을 먹은 뒤로 그녀의 위장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이렇듯 속이 안 좋은 날은 이젠 손에 꼽을 정도였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토하는 횟수도 거의 없었다.유강후는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약 제때 먹은 거 맞아?”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다소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오후에는 깜빡했어요.”유강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얼른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에 내려놓은 뒤 약을 그릇에 담아왔다. 그리곤 그녀가 먹는 걸 지켜보았다.하지만 먹자마자 온다연은 다시 울렁거리는 속에 화장실로 달려갔다.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토했다. 마치 위에 있는 걸 전부 비워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모든 걸 게워내고 나니 온다연은 몸에 힘이 빠졌다.기운 없이 축 유강후의 품에 기댔다. 울렁거림은 여전했고 이마와 손엔 어느새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유강후는 가슴이 아파 휴지로 그녀의 땀을 조심히 닦아준 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몰래 약을 버린 건 아니지
유강후의 어투는 유난히 차가워 주위의 공기마저 싸늘하게 만들었다.그의 모습은 화가 난 모습이었다.온다연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분명 조금 전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일까?그녀는 손에 든 귤차를 보았다. 순간 맛이 없게 느껴졌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장화연을 보았다.장화연은 그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유강후는 계속 차갑게 말했다.“앞으로 내 눈앞에 이딴 음식을 내놓지 마. 얼른 가져가!”장화연은 담담하게 온다연이 들고 있던 귤차마저 가져갔다.“다른 거로 만들어 드릴게요.”온다연은 여전히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강후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극히 드문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귤차를 보곤 화를 냈다. 이 귤차에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말하지 않아도 온다연은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작게 말했다.“괜찮아요. 다른 거 만들지 않으셔도 돼요. 조금 피곤해서 쉬고 싶네요. 저 먼저 쉬러 갈게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장화연은 귤차를 든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커다란 거실엔 유강후 혼자 남았다.그는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평생 지우려고 애썼던 기억이 귤차를 보자마자 다시 떠올랐다.그와 유연서는 쌍둥이였다. 어릴 때 유연서가 아프면 그도 따라서 아프곤 했다.그는 사실 단 것을 싫어했지만 유연서가 좋아했기에 그도 매번 그 귤차를 먹었다.그랬기에 매번 장화연이 귤차를 들고 등장하면 그에겐 벌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유연서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그는 가끔 그 귤차를 그리워하게 되었다.다만 장화연이 그 뒤로 만든 적이 없었던지라 그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때 그 맛을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아파 잠도 쉽게 이루지 못했다.그는 가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와 그의 어머니가 경원을 떠나지 않았다면, 혹은 유연서도 함께 데리고 떠났다면 유연서가 그때 죽지 않았
그날 이후로 유강후는 해외로 떠났다.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조용히 그녀가 성인이 되길 기다리기 위함이었다.그렇게 생각한 유강후는 방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은 이미 자고 있었다.그녀는 부드러운 잠옷을 갈아입은 상태였고 몸에서는 은은한 바디워시 향이 났다.상쾌하고도 깔끔한 향이었다.저도 모르게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그는 그녀의 옆에 누우며 작게 말했다.“화났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게 감은 두 눈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유강후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그 차는 내가...”온다연은 눈을 뜬 후 말허리를 잘랐다.“아저씨, 저 너무 피곤해요. 자고 싶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렸다.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로 그녀를 다시 돌렸다.“일어나서 뭐라도 먹고 자. 안 그러면 이따가 또 속이 안 좋아질 거야.”온다연은 그를 피곤한 눈빛으로 보았다.“저 정말로 자고 싶어요.”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도 피곤했고 잠이 몰려왔다. 게다가 입맛도 없었던지라 지금 이 순간 그저 잠을 자고 싶을 뿐이다.유강후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그녀를 보며 장화연에게 따듯한 우유를 가져오라고 했다.온다연은 조금만 마시고 바로 잠들어 버렸다.꿈을 꾸었다. 꿈속에 그녀는 새하얀 눈을 밟으며 주한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유강후가 튀어나왔고 누군가 억지로 주한을 그녀의 곁에서 떼어내며 데려갔다.그녀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유강후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던지라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저 주한이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안돼, 주한, 돌아와!”하지만 주한의 모습은 점점 더 흐릿해지며 내리는 새하얀 눈 속에 사라졌다.꿈속에서 본 유강후의 눈빛은 짐승처럼 사나웠다.“온다연, 내 곁에서 떠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죽기 전까지!”“넌 평생 내 곁에 있어야
온다연은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유강후에게 탐해졌다.빠르게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잠옷이 사라졌다.나직한 목소리로 애원하며 내몰아 쉰 뜨거운 숨이 방 안 가득 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집사가 아침을 들고 문을 노크하는 것은 세 번째였다. 유강후는 그제야 방에서 나왔다.장화연은 혼자 나오는 그의 모습에 방 안을 힐끗 보았다.“온다연 씨는 일어나지 않으셨나요?”유강후는 보기 드문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낮게 말했다.“자게 내버려 둬. 괜히 들어가서 깨우지 말고.”점심이 되어서야 온다연은 깨어났다.화장실에 갔을 때 옷에 묻은 피를 발견하곤 생리가 온 줄 알았다.하지만 오후가 지나서도 피는 계속 흐르지 않았고 다소 배가 아픈 기분만 들었다.그녀는 따듯한 핫팩을 들고 와 배에 가져다 댔다. 통증이 사라지자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처음 생리 왔을 때부터 그녀의 생리는 불규칙했다. 가끔 2, 3개월 지나서야 생리하거나 6개월 지나서야 한 번 할 때도 있었다.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을 때 의사는 그녀에게 내분비 기관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그 뒤로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장화연은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지만, 입맛이 없었던 그녀는 대충 몇 입 먹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티브이를 시청했다.영원시에 관한 뉴스였다.이틀간 영원에 있는 여러 개 가문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 탈세 혐의만 해도 그 금액이 엄청났다.소문에서 신씨 가문의 딸이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려 자살 시도하게 되었다고 했다.하지만 뛰어내렸을 때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원히 의식을 되찾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이 소식이 퍼지자 신씨 가문과 친했던 나씨 가문이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나씨 가문에서는 신씨 가문을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정체 모를 배후에 협박을 당해 감히 나설 수가 없었고 그저 모른 척 가만히 있어야 했다.온다연은 한참 보다가 채널을 돌렸다.마침 새로 나온 임신테스트기를 광고
그러고 난 후 온다연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설명서엔 똑똑히 적혀 있었다. 임신테스트기가 두 줄을 가리킨다면 임신한 것이라고.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배 속에 작은 아이가 있다는 말이었다.아니, 지금은 아마 작은 콩알만 한 형태일 것이다.당황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여러 감정이 휩싸이며 그녀는 제자리에 조각상처럼 우뚝 서서 멍하니 있었다.장화연이 노크하는 소리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황급히 대답을 하곤 전부 갈기갈기 찢어 변기에 버렸다.그녀는 두 줄을 나타내고 있는 그 종이를 한참을 보다가 물을 내렸다.머릿속이 복잡했다. 꼭 모든 계획이 망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게다가 그녀는 자기가 사 온 임신테스트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그렇게 한참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그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꼭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장화연이 물을 건네자 바로 마시고, 밥 먹으라고 하면 바로 얌전히 식탁으로 갔다.심지어 자신이 뭘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밥을 먹은 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역시나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장화연이 따듯한 우유를 가지고 들어왔을 때 혈색이라고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안색과 그녀의 멍한 눈빛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온다연의 이마에 올리며 열이 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이내 온다연에게 말을 걸었지만, 온다연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천장만 보았다.장화연은 하는 수 없이 유강후에게 연락했다.“도련님, 온다연 씨가 이상합니다. 혹시 바쁘신 게 아니라면 일찍 돌아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아주 중요한 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런데 장화연의 연락에 바로 회의를 중단했다.그가 급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몽유병 환자처럼 거실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그녀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고 걸음걸이마저 다소 비틀거렸다.그를 발견한 온다연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오셨어요?”유강후는 코
온다연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정말로 싫어하는 거예요?”유강후는 혈색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녀의 안색을 보았다. 표정도 이상했다.손을 뻗어 다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어디 아파?”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자고 싶어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장화연을 보았다.장화연이 말했다.“오후에 한 번 외출하신 뒤로 쭉 이런 상태였습니다. 따라간 경호원에게 물었는데, 구월이가 뛰쳐나간 바람에 다연 씨가 찾으러 나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처 약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멀리 나간 것은 아니니 아마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유강후의 두 눈에 분노가 점차 드리워졌다.“따라간 놈들은 대체 뭐 하고 있었기에 고양이 한 마리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는 거지?”장화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행동이 빠른 놈으로 골라 당장 찾아오라고 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장화연은 그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네, 알겠습니다.”며칠 전 화분 사건 이후로 유강후는 전보다 더 온다연을 감시하고 있었다.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전부 유강후에게 자세하게 보고해야 했고 무슨 일이 생겨서도 안 되었다.예전에는 온다연이 혼자 집 근처쯤은 돌아다니게 했었다. 비록 그때는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유로웠다.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동네 산책하고 싶다고 해도 허락해주지 않았다.만약 나가고 싶다면 반드시 장화연이나 몇몇 경호원과 함께 나가야 했다.장화연은 여전히 넋을 잃은 상태인 온다연을 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도련님, 다연 씨는 이미 많이 얌전해졌습니다.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다면 오히려 더 문제가 생길 겁니다.”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안 돼. 지난번에 친구 사귀고 싶다고 해서 허락해줬더니 무슨 사달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그래? 장화연, 왜 점점 예전 모습 잃어가고 있는 거지?”이
온다연이 너무 안쓰러워 덩달아 괴로움이 밀려온 유강후는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니야. 다연이는 최고의 엄마야.”“우리 아이는 다연이를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타나잖아.”“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울먹였다.“꼭 돌아오겠죠? 강후 씨, 아이는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맞죠?”“그런데 꿈속에는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맨발이었어요. 너무 불쌍해요.”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온다연은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그곳이 너무 춥대요.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원망하는데...”“강후 씨, 아이가 추워하나 봐요.”“나 너무 힘들어요.”“괴로워요.”...극심한 괴로움과 고통은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유강후의 옷자락을 적셨다.그는 온다연의 피와 살에 녹아들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다연아, 이제 그만 아파해.”...한참 동안 울다가 지쳐버린 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안방 문을 열려 있었는데 침대는 깨끗이 치워졌고 도우미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에게 안겨있던 온다연은 발버둥 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팔찌가 부러진 곳에 무릎을 꿇더니 나무판자 틈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찾았다.온다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마침내 호박석은 바닥과 벽이 맞닿은 틈새에서 발견됐다.온다연은 그것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예 몰랐던 도우미들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아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유강후는 그녀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품에 안았다.“다연아, 이제 찾았으니까 좀 쉴래?”온다연은 호박석에 담긴 아이의 체온이라도 느끼려는듯 손에 꽉 쥔채 놓지 않았다.“강후 씨, 아이가 잠든 곳에 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몸이 너무
‘호박석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아이의 머리카락이라고?’온다연이 차고 있던 팔찌는 엊그제 영문도 모른 채 끊어졌고 그때 호박석을 잃어버렸다.그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잃어버렸으니 죄책감이 밀려왔고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다.‘찾아야 돼. 아직 그 방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이를 본 장화연도 얼른 뒤따라가며 그녀를 말렸다.“다연 씨,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아이를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대로 나가면 다칠 겁니다.”온다연은 주저 없이 장화연을 밀어냈다.“비켜요. 장 집사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장화연은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고선 여전히 온다연을 부축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고 가세요. 엄마가 힘없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속상해할 겁니다.”그 말을 듣고 멈칫한 온다연은 곧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싫어하겠지?’‘하긴 이런 엄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온다연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죽 먹을게요. 줘요.”장화연은 그녀를 작은 식탁으로 부축해 갔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온다연은 죽을 필사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속이 안 좋은지 곧바로 심한 기침을 이어갔다.장화연을 다급하게 죽그릇을 옆으로 치웠다.“이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때마침 병실로 돌아온 유강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기침하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다급하게 달려오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유강후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단호하게 호통쳤다.“사람이 몇인데 이런 일도 똑바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한 명을 케어하는 게 어려워?”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때 온다연이 유강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러고선 팔찌를 뚫어져라 쳐
장화연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답했다.“다연 씨는 가족이 없잖아요. 아이가 유일한 희망인데 지금은...”“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도련님은 무조건 다연 씨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망설임 없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다연 씨는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잠드신 것 같은데 침대로 옮기시죠.”유강후는 신생아를 안은 듯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침대로 옮겼다.온다연의 연약함은 깃털과도 같아서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찢어질 게 틀림없다.하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유강후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온다연이 그에게 잡혀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어느새 유강후도 잠이 들었다.꿈속에는 그는 온다연과 두 아이를 낳았다.아들은 유강후를 닮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는데 두 아이가 유강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그들은 평범한 부부처럼 밤에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는 달콤한 입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했다.유강후는 매일 그녀에게 해바라기 한 송이를 선물했고, 온다연은 늘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포옹으로 그에게 보답했다.그러던 어느 날 온다연이 선물이라며 그림을 주었다. 그림에는 해바라기로 가득한 꽃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이 그림의 이름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얘기했다.심장이 터질듯한 행복감이 밀려온 유강후는 이대로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자존심만 세우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귀함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은 여생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생겼다.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가질 수 없는 게 제일 비참하다.그 시각 온다연도 꿈을 꾸고 있었다.꿈속의 온다연은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고 누군가에게 손을 밟혔다.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건 벌이야.”나은별은 그의 곁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강후 씨, 벌이 너무 가벼운데? 말 잘
하지만 이제 온다연에게 아이는 없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없었을 수도 있다.온다연은 더 이상 유강후가 본인을 속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와 따지려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이미 모든 것에 실망했으니 다시 누군가는 사랑할 능력과 용기조차 없었다.따스한 햇볕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 세상은 온다연에게 너무 각박했고 살고픈 희망을 가질때 쯤 잔인하게 짓밟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온다연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며 말했다.“아침 바람은 쌀쌀하니까 여기에 앉아 있지 마.”그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나은별을 만나고 왔겠지?’‘이 향기는... 나은별에게서 나는 건가?’‘역시나 나보다는 나은별이 더 중요하구나. 전화 한 통에 밤새도록 자리를 비운 걸 보면...’‘됐다. 누굴 좋아하든 마음대로 해.’온다연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이때 장화연이 죽과 함께 아침밥을 챙겨왔다.“도련님, 이쪽에서 드세요. 제가 다연 씨를 돌볼게요.”“내가 할게. 죽 이리 줘.”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한 후 푹신한 쿠션을 그녀의 허리 뒤에 놓아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줬다.그럼에도 온다연은 힘이 없는 듯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쿠션 두 개를 더 가져와 그녀를 지탱했고 모든 걸 마친 후 그는 죽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마침 장화연은 죽을 그릇에 옮겨 닮고 있었다.유강후는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위가 안 좋으니까 앞으로 이것보다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줘.”“알겠습니다. 이것도 2시간이나 고아서 만든 죽입니다.”“다연이 언제 깨어났어?”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깨어난 지 여섯시간쯤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지금껏 계속 말이 없었고 아침부터 저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그녀는
한바탕 난리 후 의사도 진땀을 뺐다.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보름이 넘도록 쉬지 못한 데다가 온다연이 걱정되어 줄곧 긴장한 상태였으니 몸이 지쳐 쓰러진 게 틀림없다.이런 상황에서도 온다연의 곁을 지키려고 하자 의사는 안된다며 강제로 수면제 한 알을 먹였다.곧이어 이권과 장화연도 들어왔다.장화연은 초췌한 모습의 유강후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지만 표정만은 담담했다.“오늘은 푹 쉬세요. 다연 씨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유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눈뜨면 바로 불러.”이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 생각 말고 얼른 주무세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르신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를 먹은 탓에 잠이 쏟아졌다.곧이어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약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가 시야가 들어왔다.간호사는 잠에서 깬 유강후를 보더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에센스 하나를 깨뜨려서 제 몸에 향이 배었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으니까 나가봐.”그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그래도 억지로라도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유강후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아홉시간 정도 잤다는 걸 알아챘다.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권, 들어와.”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이권은 안색이 많이 좋아진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표정이 않았는데...”“왜 안 깨웠어?”유강후의 말투에서는 언짢음이 담겨있었다.“깊이 자고 계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도련님, 거의 1년 넘게 맘 편히 잠을 못 주무셨잖아요. 다연 씨는 장 집사님이 지키고 있으니...”“이권!”유강후는 싸늘했다.“이제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이번 달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네 말은 배에 탄 사람 들중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유강후는 단 한 번도 탑승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그 배는 유강후의 소유였기에 당시 초청을 받은 사람들도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굳이 꼽자면 소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이가 어색한 것 빼고는 거의 다 유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이다.집안의 뿌리까지 서로 얽혀있는 사이랄까?아무리 소씨 가문과 관계가 어색하다고 한들 가문 후계자가 유강후의 소꿉친구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능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책임감이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니까.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지 수상쩍은 생각이 들 뿐입니다. 도련님이 물에 들어갔을 때 마침 상어 떼가 나타났잖아요. 배에 타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 한재민 씨만 도련님을 발견한 것도 뭔가 좀 걸립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계획 살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타깃은 도련님이 아닌 한재민 씨죠...”“듣기로는 그날 한재민 씨가 나은별 씨와 엄청 크게 다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눈빛이 반짝였다.“이 일이 나은별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이권이 답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그 답을 들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은별이 성격이 더러운 건 사실이야. 우리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건 알지? 내가 아는 나은별은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이 아니야. 재민이의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그는 잠시 망설였다.“권아, 앞으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내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만에 하나 정말 크게 싸웠다 해도 상대를 죽일 만큼은 아닐 거야.”이권은 말문이 막혔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나은별이 걸어온 전화였기에 이권은 자연스레 스피커폰으로 돌렸다.통화가 연결되자 곧이어 연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보러 와줘. 응?”“어제 꿈꿨는데 계속 그 장면이 떠올라서 너무 괴로워.”“재민 씨
이권은 재빨리 입을 닫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자고 있는 온다연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지켜줘. 다연이 눈뜨면 바로 연락하고.”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는 마세요. 다연 씨는 지금 대표님이 필요합니다.”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장화연은 그들을 배웅했다.그 시각 침대 위의 온다연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권은 유강후가 나오자 재빨리 옆에서 다가갔다.“도련님, 헬기는 준비했습니다.”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통보하는 거야? 제멋대로 결정하는 거 보니까 미래 그룹의 대표를 해도 되겠어.”“그래도 도련님을 대신해 총을 막았으니 적어도 한번은 찾아가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유강후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피우지 않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경원은 매우 컸고 반짝이는 네온 불빛과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했다.한때 유강후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도시마저 그의 발밑에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실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온다연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다.만약 지금 가진 모든 것으로 아이의 생명을 바꾸고 온다연의 마음과 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내놓을 준비도 되어있다.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다.담배 연기가 가라앉고 불꽃이 반쯤 꺼졌을 때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권아, 넌 와이프랑 사이가 좋아?”“성격이 예민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와이프 임신했다며? 몇 개월이야?”이권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3개월이요. 임신해서 그런지 더 예민하더라고요.”유강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아이가 태어나면 큰 선물을 줄게. 권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밝은 불빛과 달리 유강후는 오히려 밤의 어둠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울고
“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아이는 다시 생길 거야. 너만 건강하다면 반드시 선물처럼 찾아올 거야.”...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온다연은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급성 위경련으로 이미 약했던 위가 강한 자극을 받아 대량의 출혈을 일으켜 피를 토해낸 것이다.곧이어 응급 처치 및 수혈이 시작됐다.장장 두 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그 후 온다연은 병실로 옮겨졌지만 밤이 될 때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의사도 이런 상황이 의외인 듯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진찰을 마친 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위출혈로 찾아오는 환자는 지금도 많습니다. 다만 그 심각도에 따라서 상황이 나뉘죠. 대량의 피를 토해낸 심각한 경우라면 30분 이내에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다연 씨의 경우 이미 심한 위궤양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절대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보통 출혈이 끝나고 상태가 점차 호전되면 5시간 안에 의식을 되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열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감고 있네요.”“대표님, 제 생각에 다연 씨는 스스로 코마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거죠.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죠.”의사가 떠난 후 유강후는 오랫동안 온다연의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는 손으로 온다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온다연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말랐고 성격도 많이 변해 있었다.어쩌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아채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해 육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진 것 같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대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자. 우리 함께 맞서 싸우자.”...얼마 후 장화연이 들어왔다.유강후는 외로운 조각상처럼 홀로 온다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세 시간 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자세조차 바꾸지 않은 그를 보며 장화연은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유
그 말과 함께 온다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아이를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요. 안 그러면 확 죽어버릴 거예요.”“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아이만...”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온다연을 일으켰다.“다연아, 거짓말이 아니야. 저 아이는 우리 아들이 아니라니까?”온다연은 그를 바라봤다.“말했잖아요. 우림이랑 유전자 검사해 봤다고요. 혈연관계가 없다는 결과를 이미 확인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거예요?”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저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진짜 아들은요? 누구한테 줬어요?”유강후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점점 더 과격해졌다.“말하라고요. 내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어느새 유강후의 눈에도 슬픔이 차올랐지만 입을 꾹 닫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을 못 해요? 말해줘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말하라고!”이때 뒤에 서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제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권을 쳐다보며 물었다.“이권 씨는 알고 있죠?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이권, 입 닫아.”유강후가 단호하게 호통을 쳤지만 이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다연 씨, 아이는 죽었어요.”“그 작은 아이가 5개월 동안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마지막 숨이 끊겼습니다.”그 말은 날벼락처럼 날아가 온다연의 가슴을 후벼 찧었다.‘죽었다고?’‘내 아들이 죽었다고?’그녀의 눈빛은 서서히 생기를 잃었고 마치 영혼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것처럼 공허하고 슬퍼졌다.‘아니야. 분명히 건강을 되찾고 있었어.’‘거짓말하는 게 분명해. 세상이 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거야.’심장이 멎은 듯 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중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