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유강후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큰 눈은 약간 찌푸린 채 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로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수군대고 했었다. 특히 고씨 집안사람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몰랐던 것이다.그들은 분명히 고유정과 봉현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찬영이 누구란 말인가?설명을 듣고자 로비를 한참 돌아다녔지만 봉씨 집안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저택 도우미만 있었다.이때 사회자가 또다시 말했다.“다음으로 고유정 씨와 이찬영 씨의 행복한 순간을 함께 감상하시겠습니다.”로비의 스크린에는 고유정과 낯선 남자의 사진이 떴다. 남자는 키가 크지 않았다. 얼굴도 못생겨서 차마 봐줄 수 없을 정도였다.의논 소리는 더욱 커졌다. 고승철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대뜸 사회자의 멱살을 잡았다.“봉씨 집안사람 어디 있어? 왜 한 명도 안 보이는 건데? 봉현수는 또 어디 있어? 오늘은 현수랑 내 딸의 약혼식이야. 이제 와서 다른 남자로 바꾸는 건 무슨 뜻인데? 무슨 뜻이냐고?!”이때 장하그룹의 회장 봉태식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승철을 바라봤다.“저희는 한 번도 고유정 양을 며느리로 들인다고 한 적 없어요. 댁의 귀한 따님은 알아서 챙기세요.”고승철은 불끈 화를 내며 손가락질했다.“뭐요? 사람을 이런 식으로 갖고 노는 게 어디 있어요? 제 딸이 뭐 어때서요? 집안 좋지, 학벌 좋지, 가정 교육도 잘 받았지, 어디가 모자라요?”“가정 교육을 잘 받아요? 그럼 보여드려야겠네요. 그 잘난 따님이 어떤 일을 했는지.”그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스크린에는 두 사람이 엉켜 있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여자는 교태로운 소리를 냈다.“빨리! 더 빨리! 아아, 찬영 씨!”현장은 갑자기 술렁거렸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들어 올려 촬영하기 시작했다.봉태식은 차가운 표정으로 고승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댁 따님의 실체예요. 지금도 저택 3층에서 이찬영이라는 남자랑 같이 있죠.
“독한 녀석들!”봉현수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피식 웃었다.“그러게 왜 밖에서 서자를 키우셨어요. 따님을 아주 잘 키운 덕도 있겠죠. 건드려서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그는 또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잃으신 건 무한테크의 지분뿐이 아니에요. 부동산도 동산도,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빚은 많겠네요. 오늘의 식사가 최후의 만찬이 될 것 같은데 배불리 먹어 두세요. 내일부터는 빚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찬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마약에 미친 사람이에요. 더러운 병도 있어서 따님을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을걸요.”봉현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께는 진심 어린 사과를 드립니다. 사과의 뜻으로 떠나실 때 선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면 좋겠어요.”사람들은 이제야 고유정의 더러운 사생활 때문에 오늘의 파국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고유정이 휘청거리며 3층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봉현수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현수 씨, 내 얘기 들어줘요. 누가 나한테 약을 먹였어요. 제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요. 누가 나한테 악감정을 품은 게 분명해요. 나는 주스 한 모금에 정신 잃고 끌려갔었어요.”봉현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우미에게 말했다.“그 방은 적어도 10번은 반복 소독하세요. 이 여자가 지나갔던 곳은 전부 소독해줘요. 그리고 고씨 집안사람은 이만 내보내 줘요. 귀한 손님들 기분을 망치면 안 되니까요.”고씨 집안사람들은 걸인처럼 밖으로 내던져졌다. 로비는 시끄러웠던 것도 잠시 금세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갔다.경원에는 이런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한 시간 전만 해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 바닥에 처박혔다고 해도 놀란 건 없다. 고씨 가문의 결말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봉현수는 밖으로 밀려 나가는 고씨 집안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위층에 올라가려고 했다. 이때 집사가 후다닥 달려와서 말했다.“도련님
장화연은 여자를 힐끗 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담담한 표정으로 온다연에게 말했다.“도련님이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같이 있던 걸 들키면 또 벌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알아요. 저는 모르는 사람인데 무슨 사관이에요. 아저씨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말 한마디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저 진짜 추워서 그래요.”장화연은 이제야 밖으로 나갔다.여자는 소파에 털썩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단속이 심하네요. 다연 씨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이런 인생 놔두고 왜 힘든 길을 가려고 해요? 유씨 집안이랑 대체 얼마나 척을 졌길래.”온다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물건은 이미 전해줬어요. 근데 왜 온 거예요? 아저씨가 의심할 수도 있어요.”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정아 씨는 너무 눈에 띄어요. 여기 들어왔던 것도 분명히 들킬 거예요.”임정아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무서워요? 저는 그냥 뭐 좀 주러 왔어요. 정아 씨 아저씨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거라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온다연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고유정 씨 영상은 어떻게 퍼뜨릴까요?”“그럴 필요 없어졌어요. 어차피 고씨 가문은 재기하지 못해요. 제가 가만히 있어도 욕은 충분히 먹을 거예요. 이효진 씨 일만 계속 퍼뜨려주면 돼요.”임정아는 피식 웃으며 온다연을 훑어봤다. 그러고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정말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이 정도 조건이면 무조건 잘 될 텐데.”온다연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근데 이런 얼굴로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네요. 이효진 씨 자살 기도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요? 이런 모습 유강후 씨한테 들켜도 괜찮겠어요?”그녀의 말은 가시처럼 온다연의 심장에 박혀서 통증을 유발했다. 온다연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정아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아저씨가 곧 돌아올 테니
온다연은 몸을 뒤로 빼서 임정아의 손길을 피했다.“빨리 가요. 저한테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요.”임정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온다연의 손에 소형 카메라를 쥐여줬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툭툭 치면서 물었다.“주희랑은 어떤 사이에요?”온다연은 고개를 홱 들었다.“네? 주희요?”임정아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었다.“아는 사이 아니에요?”온다연은 다소 경직된 말투로 대답했다.“알고 싶은 게 뭐예요?”“연예인 되겠다고 우리 회사에 들어온 신인데, 생긴 건 나름 괜찮았어요. 욕심이 많고 마음이 급한 게 문제지만요. 요즘 또 사고를 쳐서 다연 씨가 아는 사람이면 도와주려고 했어요.”그녀는 온다연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모르는 사람이면 말고요.”온다연은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임정아는 눈썹을 튕기더니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지금은 일단 원래 계획만 실행하죠. 서류들만 찍어주는 걸로. 다른 생각이 있으면 또 연락해요.”그녀는 문을 힐끗 보면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젠 진짜 가야겠어요. 유강후 씨가 돌아오네요. 참... 그리고 경고하는데 나은별 씨 조심해요. 다연 씨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전혀 못 당하겠더라고요. 유강후 씨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조심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향수 냄새를 휘날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는 유강후와 딱 마주쳤다.그녀는 놀란 척 눈을 크게 뜨며 그의 팔을 잡으며 교태를 부렸다.“대표님,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저 오늘 행운의 날인가 봐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비켜요.”악의와 혐오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임정아는 잠깐 멈칫했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힐끗 바라봤다.“새사람 생겼다고 옛사람 잊은 거예요. 매정해라.”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을 향해 걸어갔다. 온다연은 먼저 쪼르르 거리를 좁혀서 그의
온다연은 고개를 들며 부족하지만 받아주려고 했다.이런 일에서 그녀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특히 밖에서 받아준 적은 더욱 없었다. 유강후는 가슴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벽에 밀어붙이더니 더 깊게 탐하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절대적이고 강압적으로 말이다.온다연은 금방 호흡이 딸려서 낑낑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강후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녀는 견디다 못해 손을 뻗어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아, 안 돼요... 사람 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물러나지 못하게 했다.“누가 감히 우리를 본다고 그래?”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온다연은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 놓일까 봐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손이 붙잡히면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뜨겁게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은 문밖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다. 암울한 눈빛은 안경 뒤에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장화연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다음에야 상대는 몸을 돌려서 떠났다.장화연이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떨어져 있었다. 유강후는 장화연에게서 외투를 받아 온다연에게 걸쳐주었다.“배고프지 않아?”온다연의 입술은 잔뜩 부어 있었다. 그녀는 유강후가 또다시 다가올까 봐 두려운 듯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조금요. 아저씨, 저희 외식 안 한 지 한참 됐어요. 오늘은 밖에서 먹으면 안 돼요?”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는 훨씬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전에 살던 곳 근처에서 먹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온다연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서 말이다.그녀는 또 금방 말을 보탰다.“안 간 지 한참 돼서 약간 그리워요. 그리고 그쪽도 나름 괜찮은 식당이...”거절당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내 앞에서 조심스러워할 필요 없어. 너 혼자 허락 없이 가는 거 아니면 다
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자가 어디까지 도망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잡혀 오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봉씨 집안사람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봉현수는 구린 구석이 꽤 많아 보였다.온다연이 침묵에 잠긴 것을 보고 유강후의 말투는 더욱 차가워졌다.“넌 절대 따라 배우지 마. 만약 지난번과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못 했다.차량 뒷좌석에서 유강후는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가까이 와서 앉아.”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유강후에게 다가갔다. 그것도 답답한 듯,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내가 말했지. 문에 붙어서 앉지 말라고.”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안아서 자기 무릎에 앉히려고 했다. 그녀는 황급히 뒤로 뺐다.“안 돼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막강한 아우라에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댔다.“오늘은... 키스를 너무 많이 했어요. 입술이 아프다고요...”유강후의 눈빛은 이제야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다.“이리 와. 내가 봐줄게.”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강후는 어린아이를 안듯이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는 턱을 잡고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입 벌려 봐. 까졌는지 확인할게.”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싫어요. 또 키스하려는 거죠.”여린 목소리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반항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강후는 깊어진 눈으로 손에 힘을 줘서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입 안쪽은 약간 까져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더 크게 벌려 봐. 안엔 어떤지 보게. 심각하면 약 발라야 해.”여기서 말을 안 들으면 그는 힘만 더 줄 것이다. 그래서 온다연은 순순히 입을 더 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은 곳까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강후가 그녀의 입속을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깊어졌다.그는 그녀의 혀를 잠
유강후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입구에 서 있었다. 아주 장엄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말이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그의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눈빛 또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시선으로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온다연을 빤히 바라봤다.누가 봐도 사장의 말을 들은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온다연은 손끝이 약간 떨렸다. 주한이 좋아하던 음료수를 산 것만으로 알아보게 될 줄은 몰랐다.이 편의점은 주한이 자주 오던 곳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는 음료수 두 병을 사 왔다. 사정이 좋아진 다음에는 근처의 식당에 가서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기도 했다.온다연이 이곳에 안 온 지는 4년 정도 되었다. 이쯤이면 사장도 잊을 줄 알았는데 결국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그녀는 음료수를 꽉 잡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람 잘못 보셨다고요. 저 여기 처음 와요.”유강후를 발견한 사장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온다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손끝을 보고, 사장도 무언가 눈치챈 듯했다.“아, 그러네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아가씨가 지갑을 두고 갔는데, 빨리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몇 번째 잘못 알아보는지 몰라요.”온다연은 한시름 놓으며 결제하려고 했다. 이때 유강후가 다가와서 물었다.“어떤 지갑이요? 보여주실 수 있어요?”사장은 잠깐 멈칫하다가 온다연을 바라봤다.“아가씨 남자 친구예요?”온다연은 음료수를 꽉 잡은 채 대답했다.“네!”사장은 자기 생각에 더욱 확신했다. 온다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동정이 서려 있었다.그는 웃으면서 서랍에서 지갑을 꺼냈다.“이 지갑이에요. 혹시 근처에서 본 적 있으면 알려줘요. 얼핏 보면 여기 아가씨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요. 안에 사진이 있거든요.”유강후는 말없이 지갑을 펼쳤다. 갈색 지갑 안에는 잔돈과 카드가 있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사진도 있었다.사진 속의 여자는 온다연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작고 피부는 뽀얀 것이 온다연과 마
온다연은 조수석에 앉아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강후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이 거리에서 그녀는 몇 년 동안 살았다. 곳곳에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설령 유씨 집안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해도 그녀는 거의 매일 이곳으로 왔다.물론 그때는 주한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이 거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어느 골목 벽에 벽돌이 몇 개 떨어졌는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다만 유감스럽게도 항상 그녀의 곁에 있어 주던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주한은 4년 전 악랄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주한이 눈을 감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살이었다.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주한은 영원히 눈을 감게 되었다. 그리고 주한을 죽게 만든 인간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음료수를 꽉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등에 핏대가 드러났다.‘주한, 내가 꼭 복수해줄게!'멍 때리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차를 세웠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던지라 춥기도 했고 습하기도 했다.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차는 나무 그늘에 세웠던지라 불빛이 어두웠다.동시에 차 안의 분위기는 어둡고도 위험하기도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빤히 보았다.“말해 봐. 예전에 다른 남자랑 이 거리를 걸었어?”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을 빤히 보았다.만약 온다연이 세심한 사람이었다면 유강후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그는 온다연이 그런 적 있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예전의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10년 전 그가 바꿀 수 없었던 그때, 그녀가 유난히도 힘들었던 그때, 조금 전 그 사장이 말한 것처럼 그녀에게 따듯함을 준 남자애가 있는지 궁금했다.만약 있었다면 그 남자애는 영원히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살게 될 것이다.그는 그녀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