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야, 대체 왜 내 말은 믿어주지 않는 거야? 왜? 운전석에 있던 건 분명 여자였잖아. 그런데 왜 네 눈에만 보이지 않는 거야?”배정우는 운전석에 있던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믿지 않았다. 여하간에 그녀가 밤을 보낸 곳이 진승윤의 아파트였으니 말이다. 그는 진승윤과 그 아파트에서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절대.“임슬기, 넌 절대 내 곁에서 떠날 수 없어.”말을 마친 배정우는 갑자기 몸을 굽히더니 그녀의 입술에 거칠게 키스했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목에 닿으며 입을 벌려 세게 물어 흔적
방으로 올라온 배정우는 임슬기를 침대로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오늘 밤은 내가 옆에 있을 거야.”그 말에 임슬기는 눈을 뜨고 배정우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너무도 가소롭게 느껴져 바로 몸을 돌려 그에게 등을 보였다.‘옆에 있겠다고?'‘하하, 무슨 선심을 쓰듯 말하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그렇게 사랑하는 연다인 옆에 있어 줘도 되는 데 말이야.'“지금 뭐 하자는 거지? 네가 외로운 거 버터지 못한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내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하잖아.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그 말을 들은 임슬기는 아랫입술을
배정우는 원래 화를 낼 생각이었지만 바닥 가득 쏟아진 죽과 피가 나는 연다인의 손가락을 보니 다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일단 일어나. 사람 불러서 치워달라고 할 테니까.”“하지만 죽은...”“신경 쓰지 마. 가서 개인 간병인한테 상처 치료해달라 하고 방에 들어가서 쉬어. 남은 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정우야, 그럼 슬기는? 슬기 옆에 있어 주려고?”배정우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연다인은 계속 아랑곳하지 않고 질척거렸기 때문이다.“넌 그냥 방으로 돌아가면 된다고.”배정우의 어투가 다소 거칠어지
연다인은 멈칫하더니 이내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임슬기를 빤히 보았다. 행여나 임슬기가 뭔가라도 알아냈을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그러나 임슬기는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연다인을 보며 피식 웃을 뿐이다.“그냥. 너처럼 표독한 사람이 자기 신장을 기증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아서 물어본 거야.”말을 마친 임슬기는 연다인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우유를 마실 생각이었지만 연다인은 임슬기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확신하며 얼른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길을 막고 차갑게 비웃었다.“왜. 질투해?
“3년 전에 낙태 수술을 한 적 있었는데 부작용으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예요.”그 말을 들은 임슬기는 눈이 커지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불임이라는 거예요?”“네. 하지만 얼마 전에 유산했다는 병원 기록도 있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수상하네요.”임슬기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저도 모르게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그녀는 연다인이 불임일 거라고는 전혀 꿈에도 몰랐다. 그럼 임신했다는 것도 전부 배정우를 속이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소리였다.“그 기록 저한테 전송해줘요.”“네,
임슬기는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이를 빠득 갈자 거의 부러질 듯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아이까지 죽인 살인범을 죽여 복수하고 싶었다.결국 연다인에게 달려들며 멱살을 잡고는 난간으로 밀쳤다.“연다인,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내 가족을 전부 죽이는 거냐고!”연다인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픽 웃었다.“그래. 전부 다 죽일 거야! 임슬기, 넌 대체 뭔데 지금도 여전히 고고한 명인시의 장미이고 난 하층민인 거지? 왜! 너와 나는 같은 위치에 서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너만 칭찬하
임슬기는 비틀대며 뒷걸음질을 쳤다.“넌 2년 전부터 이미 변했어. 설령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어도, 네가 증오하는 대상과 믿어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도 알게 되어도 넌 절대 뒤돌아보지도 않을 거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넌 네 자존심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연다인이, 내 가족을 전부 죽인 연다인이 넌 내 앞에서 천사라고 말하더라.”임슬기는 폐가 너무도 아팠다. 발작을 일으키며 피가 울컥 올라왔지만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억지로 삼켜버렸다.“배정우, 네가 그랬었지. 연다인이 너한테 신장을 하나 기증했었다고. 그
고개를 든 임슬기는 처량한 눈빛으로 한때 자신의 전부였던 배정우를 보며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이번엔 또 어떻게 날 괴롭히려고?”배정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또 자신의 동정을 사려고 연기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번엔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임슬기의 손목을 확 잡아당긴 그는 차가운 입술을 그녀의 귓불에 댔다.“임슬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 너야. 네가 가진 모든 걸 망가뜨려도 후회하지 마!”임슬기의 몸이 흠칫 떨리며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뭐 하려고? 종현이는 건들지 마!”“
임슬기도 한때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결국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였고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오직 이 아이만이 그녀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었으니까.가끔은 꿈꿨다. 아이가 태어나면 혹시 배정우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비록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셋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그러나 그 아이를 죽인 건 배정우였다. 그는 스스로 그들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도,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언니, 제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김현정은 코를 훌쩍이며 침대에 기대어 앉았고 눈물 맺힌 눈으로 창백한 얼굴의 임슬기를 바라보았다.“17년 전에 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었어요.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던 그때 언니를 만났는데 그때 언니도 겨우 열 살쯤이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언니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저를 보호하려고 했어요.”“기억나요? 한번은 제가 울며 소리를 질렀더니 놈들이 화를 내며 밥을 안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언니는 놈들이 떠난 뒤 몰래 언니 빵을 반으로 갈라서 제 손에 쥐여줬어요. 또 다른 날은 그놈들이 절
상처를 다 싸맨 후 배정우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고 한동안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방 안에 가득한 정적이 답답하고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그렇게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달빛만이 희미하게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층 더 싸늘해 보였다.그러다 갑자기 배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뻗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문 앞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배정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문
진승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요?”그는 임슬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든 말든 아무 의미도 없다.진승윤은 그저 임슬기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그런데 김현정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중요해요.”진승윤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김현정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만약 진 변호사님이 슬기 언니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배정우 그 개자식보단 나은 선택지니까요. 변호사님은 슬기 언니를 다치
“배정우, 너 진짜 비겁한 놈이야!”진승윤은 배정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올리더니 바로 또 주먹을 날렸다.퍽.“사랑하지 않으면 그냥 놔줘야지. 도대체 왜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만약 아직도 사랑한다면 슬기를 믿었어야지!”퍽.또다시 강렬한 주먹이 배정우의 얼굴을 강타했다.진승윤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배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어올랐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런 배정우의 무기력한 모습이 오히려 더 분노를 자극해 진승윤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거짓말만
배정우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연다인을 밀어내고 임슬기를 구하려 했지만 연다인이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고 늘어져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 사이 임슬기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배정우는 재빨리 연다인을 확 밀쳐내고 황급히 난간으로 달려가 손을 뻗었다.하지만 늦어버렸다. 두 사람의 손끝은 닿을 듯 스치며 멀어져 갔다. 마치 그들의 사랑이 결국 엇갈리고 만 것처럼.“슬기야!”무표정하기만 하던 배정우의 눈동자가 드디어 공포와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
“그거 참 정말 난처하게 됐네.”임슬기는 옷깃을 여미며 연다인 앞으로 다가와 차갑게 웃었다.“연다인, 내가 죽어도 넌 만족하지 못할 거 같은데? 설마 내 유골까지 팔아서 명혼을 치르려는 건 아니지?”연다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그거 좋은 아이디어네. 한 번 고려해 볼게.”그 태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임슬기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정작 우스운 사람은 자기 자신일지도 몰랐다. 임슬기는 선의를 한 번 베풀었다가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쳐버렸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초
다음 날 아침.진승윤이 임슬기의 병실을 찾았을 때,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부은 눈은 밤새 울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승윤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슬기야, 무슨 일 있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아무것도 아냐. 어젯밤에 추웠나 봐. 감기 기운이 좀 있어.”“주민규가 왔어. 오늘에는 일단 예비 검사를 진행할 텐데, 너 몸 괜찮아? 부담스러우면 다른 날로 미룰 수도 있어.”“괜찮아. 오늘 하자.”임슬기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네가 아니면 주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실 수
임슬기는 예전엔 낮고 매력적인 배정우의 목소리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려움이 밀려왔다.“배정우, 뭐 하는 거야? 당장 일어나.”하지만 배정우는 일어나지 않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임슬기, 잠깐만 이러고 있자.”갑작스러운 다정함에 불편해진 임슬기는 배정우의 몸에서 나는 희미한 술 냄새에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너 취했어?”“윽!”배정우는 가슴을 움켜쥐며 얼굴을 찡그렸다.임슬기는 배정우의 부상이 떠올라 급히 다가가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상처를 건드린 거야? 피는 안 나?”배정우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