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도 한때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결국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였고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오직 이 아이만이 그녀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었으니까.가끔은 꿈꿨다. 아이가 태어나면 혹시 배정우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비록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셋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그러나 그 아이를 죽인 건 배정우였다. 그는 스스로 그들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도,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희망?”임슬기는 눈이 붉어진 채 진승윤을 바라보았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승윤아, 내 아이가 없어졌어. 이제 다시는 희망 같은 건 없어.”그녀도 한때 모든 걸 끝내버릴까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불룩하게 솟아오른 작은 배를 볼 때마다 다시 마음을 접었었다.그러나 이제 아이가 사라졌다. 그녀의 희망도, 배정우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도 그렇게 끊어졌다.“승윤아.”그녀는 흐느끼며 진승윤의 손을 붙잡았다.“내 아이가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나를 탓하지 않을까? 혹시... 나 같은 엄마를 만난 걸
“다시 가지면 된다고?”임슬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배정우, 너 혹시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쉽게 말하는 거야?”그 아이는 그들의 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다시 가지자’ 따위의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배정우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임슬기는 거침없이 그를 밀쳐냈고 그는 병실 문에 세게 부딪혔다.“배정우.”임슬기는 눈물을 머금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나랑 너 사이에... 다시는 아이가 있을 일 없어.”그 말은 날 선
“여기... 무슨 일 있었어요?”강재호는 병실 바닥에 널브러진 난장판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별일 아니에요.”임슬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고개를 들고 강재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강재호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물었다.“옷에 왜 피가 묻었어요? 혹시 어디 다쳤어요?”그녀는 곧바로 김현정의 팔을 툭 쳤다.“현정아, 빨리 의사 좀 불러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강재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슬기 씨, 걱정하지 마요. 이건 제 피가 아니에요.”“재호 씨가 흘
반 시간쯤 지나 진승윤이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급히 달려온 탓인지 이마엔 땀이 가득 맺혀 있었고 평소 깔끔하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흰 셔츠엔 커피 자국까지 묻어 있었다.“슬기야, 괜찮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병원 아래에 너희 어머님 시신이 있다는 게 무슨 말이야?”“응... 난 괜찮아.”그가 다급해하는 걸 보자 임슬기의 콧등이 절로 시큰해졌다. 그녀와 친구로 지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흘이 멀다고 걱정을 안겨주니까.임슬기가 무사한 걸 확인한 진승윤은 그제야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안도했다.“괜찮아서 다행이야
“종현아?”임슬기가 성큼 앞으로 다가가 임종현을 와락 껴안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누나는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임종현은 임슬기를 거칠게 밀쳐냈고 그녀는 중심을 잃고 김현정 품에 쓰러졌다.“종현아...”임슬기의 눈동자에는 실망감이 스쳤고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아직도 누나 미워하는 거야?”얼마 전 마지막으로 동생을 만났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며 그날의 상처가 다시 가슴을 쥐어짰다.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웠던 남매였지만 지금은 연다인의 농간에 휘말려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임
배정우가 팔을 뻗어 진승윤의 목을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뭘 하든 네가 참견할 일은 아니야.”진승윤은 목이 짓눌리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너 슬기랑 종현이 사이 억지로 갈라놓고, 애한테 그런 증오를 심어준 게 진심으로 문제없다고 생각해? 너랑 연다인 일에는 솔직히 나도 관심 없어. 하지만 종현이는 이제 슬기한테 돌려보내야 하잖아.”배정우는 코웃음을 치며 조수석을 가리켰다.“좋아.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가 봐. 직접 물어보지 그래, 본인이 가겠다고 하는지?”잠시 멈칫하던
“재혼이라니?”김현정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걸 알기에 임슬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 전에 일단 이혼부터 해야지.”“그래서 이혼하면 재혼할 생각은 있어요?”김현정이 진지하게 다시 묻자 임슬기의 눈빛에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임슬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현정아, 자꾸 장난치지 마. 내가 이혼한다 해도, 지금 이런 나를 마음에 들어 할 남자가 있을 것 같아?”결혼한 적도 있고, 두 번이나 유산하고, 한 사람을 17년 동안 사랑하고, 가슴에 피보다 짙은 원한을 안고 살아가는 데다 말기 폐암 환자인 여자.
이번 식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종현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오늘 임종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임슬기는 그가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배정우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내가 설거지할게.”임슬기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말릴 생각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종현아, 누나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잠시만요.”몇 분 후, 임종현이 문을 열었다.“무
임슬기는 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밥부터 하자. 좀 있으면 종현이 배고플 거야.”하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더 꼭 껴안더니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그럼 콩나물국 해줄 거야?”“너 전에 싫어했잖아.”“이젠 먹어.”임슬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콩나물국에 무슨 집착이 있는 건지, 평소에 먹지도 않던 음식을 굳이 해달라니.하지만 이런 걸로 또 얽히기 싫어서 마침 재료도 있는 김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해줄게.”배정우는 그녀를 놓아주고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도대체 왜 갑자기 입맛
“왜 네가 여기 있어?”임슬기는 잠시 멍해졌고 당황한 나머지 그를 밀치며 소리쳤다.“이거 놔.”배정우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놓아주고 조리대 앞으로 걸어갔다.“뭐 도와줄 거 있어?”그 말이 끝나자 그는 상의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으로 장바구니를 열어 채소를 고르기 시작했다.“새우 내가 씻을게. 다른 것도 씻을 거 있어?”그 모습에 임슬기는 말문이 막혔다.이런 배정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딱 2년 전 두 사람이 함께했던 평온했던 어느 날의 장면이 떠올랐다.그때 그들은 종종 함께 요리를 했고
약 한 시간쯤 지나자 한 배달 기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별장 대문 앞에 멈춰 섰다.배정우는 차 안에서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린 기사가 배달 상자에서 장바구니 두 개를 꺼내 철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바라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배달 기사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배정우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임슬기가 제대로 한 상 차릴 생각인 것 같았다.그때 휴대폰 너머에서 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자료 보내드렸습니다. 내일 지방에 회의 있는 거 잊지 마세요.”“응.”
두 사람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정신을 먼저 차린 건 임슬기였다. 그녀는 김현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현정아, 너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이런 힘쓰는 짓 하면 어떡해?”“슬기 언니, 나 진짜 괜찮아요.”김현정의 말투는 금세 부드러워졌다.“근데 언니는 괜찮아요? 그 자식이 또 무슨 짓 한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자세한 건 안에서 이야기하자. 우선 네 손 좀 보자.”“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좀 탈골됐던 거 의사 선생님이 맞춰줬어요. 봐봐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그럼 아니야?”임슬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내가 혼수상태일 때 연다인을 몰래 도시 밖으로 빼돌려서 숨겼잖아. 내가 복수할까 봐, 그 여자 죽일까 봐 무서웠던 거 아냐?”배정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난 그런 짓 안 했어.”“안 했다고? 하, 누가 그 말을 믿겠어.”임슬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직접 말했잖아. 연다인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배정우가 한 짓이었다. 연다인을 저
“그래.”배정우는 자연스럽게 임슬기 맞은편에 앉으며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나도 한 그릇 끓여줘.”임슬기는 순간 멍해졌다. 예상 밖의 부드러운 반응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몰랐다. 다만...그녀는 라면을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레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괜찮다면 이거 먹어. 나 아직 안 건드렸어.”“응, 괜찮아.”배정우는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천천히 씹어 삼킨 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여전한 맛이네. 진짜 맛있어.”그 말
감정이 너무 격해졌던 탓일까. 임슬기의 폐가 갑자기 조이듯 당기더니 목구멍으로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놀란 그녀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간신히 기침을 참았다. 터져 나오려던 피는 꾹 삼켜냈다.그 모습을 본 임종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왜 그래요?”임종현은 어제 묘지에서도 그녀가 피를 토하는 걸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임슬기는 대충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입을 가린 채 말했다.“괜찮아. 그냥 기침이 좀 나서.”“어제 피 토하는 거 다 봤어요.”그 말에 그녀의 어깨
임종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실 소파로 내려와 앉았다.“좋아요. 딱 10분 줄게요.”10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임슬기의 얼굴엔 기쁨이 번졌다. 그녀는 웃으며 조심스레 임종현 옆에 앉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를 잡자마자 임종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요.”임슬기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 동생은 어쩜 이렇게 자랐을까. 말투며 행동까지 하나같이 배정우를 닮아 있어서 괜히 움츠러들 정도였다.“종현아, 누나는 정우 형한테 정말 잘못한 게 없어. 임씨 가문이 무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