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식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종현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오늘 임종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임슬기는 그가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배정우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내가 설거지할게.”임슬기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말릴 생각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종현아, 누나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잠시만요.”몇 분 후, 임종현이 문을 열었다.“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임슬기는 배정우가 혹시라도 일기장 안에서 보지 말아야 할 내용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그러나 배정우는 일기장을 몇 장 넘기다 어느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잠시 후, 그는 일기장을 닫더니 바닥에 툭 내던졌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너 송재현이랑 잤어?”그 한마디에 임슬기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녀의 일기장엔 대부분 십 대 시절의 감정이 담겨 있었고 거의 전부가 배정우에 관한 내용이었다. 송재현이랑 관련된 건 전혀 없었다.“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일기장에
배정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병원까지 도착했다.차에서 내리기 전 임슬기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내일도 종현이 보러 데려가 줄 거야?”“상황 봐서.”‘이 말은 어쩌면 더 이상 종현이를 못 보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그렇지만 임슬기는 그 물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 내일이 오지 않았으니, 그전까지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알겠어.”차에서 내린 후, 임슬기는 주머니 속 사진을 슬쩍 만져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배정우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그가 그 사진을 봤
임슬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배정우를 밀어내려 했지만 바위처럼 무거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배정우, 너 취했어.”배정우는 갑자기 그녀를 껴안더니 고개를 들어 턱으로 그녀의 이마를 살며시 문질렀다.“나 안 취했어, 슬기야. 지금 정신이 아주 멀쩡해.”“멀쩡하면 지금처럼 부르진 않았겠지.”“슬기야.”배정우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럼 널 뭐라고 불러야 해? 여보?”‘완전히 취했구나.’이 남자는 제대로 취했다. 그런데도 임슬기의 마음속 어딘가에선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지금 이 남
육문주는 배정우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정확히 그날, 임슬기가 추락한 자리로 끌고 가 말했다.“정신이 좀 들어요?”배정우는 어두운 눈빛으로 불쾌한 듯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육문주, 죽고 싶어?”“여길 봐요.”육문주는 자신의 발 아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정우 형, 여기가 슬기 씨가 떨어진 곳이에요. 형 손으로 직접 밀어낸 곳이라고.”“난 그런 적 없어.”“그건 형 생각이죠. 근데 슬기 씨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을지?”육문주의 말에 흠칫하던 배정우는 옥상 변
그날 밤, 임슬기는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꿈속에 배정우가 나타났고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갑자기 배정우가 임종현의 목을 움켜쥐며 그녀를 위협했다. 숨 막히는 공포가 엄습하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때,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기? 내 아기인가?’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임슬기는 그제야 모두 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의 아이일 뿐이었다.“슬기 언니, 아침 먹어요.”임슬기는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김현정을 보며 물었다.“방금 나가서 사 온 거야
해 질 녘, 김현정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육문주가 도시락을 가만히 들고 들어왔다.“슬기 씨, 여기 저녁이요.”도시락을 내려놓은 육문주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덧붙였다.“난 정말 정우 형 편이 아니에요. 그냥 의사로서 환자를 돌봐줄 뿐이라고요.”“환자? 이미 퇴원한 거 아니었어요?”육문주는 복잡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슬기 씨, 사실 전에 여러 번 말하려다 계속 말 못했던 게 있어요. 정우 형이 2년 전 교통사고로 뇌진탕을 입었었는데, 그때는 한 달 정도 요양하고 다 나았지만, 최근 다시 두통이
“네.”대답하고 나서야 육문주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말을 바꿨다.“아니에요. 안 좋았어요.”배정우는 한참을 침묵하다 욕을 퍼부었다.“쓸모없는 새끼.”육문주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내가 왜 쓸모없어요?”“육문주, 내 기억 상실 어떻게 치료해야 해?”“최면이요.”육문주는 배정우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설명하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한참 뒤 배정우가 물었던‘기분 좋았어?’의 상대가 자신이 아닌 임슬기였음을 알아차린 육문주는 배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슬기가 말을 하기도 전에 김현정이 화가 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슬기 언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임종현 그 녀석이 또 문제를 일으켰어요? 아니면 정우 그 개자식인가요?”“그들과는 상관없어.”“그럼 누군데요? 말해봐요. 내가 가서 혼내줄게요.”김현정이 소매를 걷어붙이는 모습을 보며 임슬기는 살짝 웃었다.“현정아, 그런 성격으로 언제 결혼하겠니?”“난 결혼 안 할 거예요! 평생 언니 곁에 있을 거라고요!”말을 마치자 김현정은 다시 화를 내며 물었다.“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대체 누군데요?”“다인이네 가족이지?”
“슬기야, 다인이도 잘못했지만 그래도 네 친구잖아. 너희는 한때 자매처럼 지냈는데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죽이려고까지 해야 해?”“슬기야,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다인이는 지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10kg 넘게 빠졌어. 네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해.”“그 아이가 자살 못하도록 나와 다인이 아빠가 24시간 지켜보고 있어. 슬기야...”이 울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며 임슬기를 둘러쌌다.“다인이 어머니, 일어나 주세요! 다인이가 내 부모님을 죽이고 내 남편을 빼앗고 내 아이까지 해쳤을 때 그와 나는
육문주는 임슬기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말했다.“슬기 씨, 성격이 너무 착한 것 같아요.”“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예의 따질 필요 없어요.”약을 다 바르고 나서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만약 임씨 가문이 힘이 없다고 생각되면 내 이름을 걸어봐요. 누가 감히 무시하겠어요?”임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주 씨, 고마워요.”그녀는 거울 앞으로 가서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상처를 가렸다.“나는 우현식이 정말 다쳤는지 알고 싶어요. 만약 실제로 다쳤다면 종현이도 잘못이 있는 거지만...”“만약 다친 게 거짓이라면
병원.임슬기는 우현식이 있는 병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안녕, 현식아.”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우현식은 그녀를 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왜 왔어요?”“네 부상 상태를 보러 왔어.”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옆에 놓고 그의 다리 쪽으로 다가가 석고를 살짝 찔러보았다.“아파?”우현식의 어머니는 없었고 우현식은 임슬기가 무서운 듯 다리를 움직이며 대답했다.“아파요.”“종현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야?”우현식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임슬기는 임종현이 우현식을 다치게 할 정도의 힘이 있
아침 식사 시간, 임슬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정우를 몇 번 흘깃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못 들은 건가?’임슬기는 배정우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식사 후, 배정우는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새 옷이야. 갈아입어.”임슬기는 거절하려 했지만, 임종현을 학교에 데려다주려면 옷을 바꿔입어야겠다는 생각에 받아들였다.“고마워요.”방으로 들어가 봉투를 열어보자, 검은색 롱드레스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이해할 수 없는 배정우의 행동에 임슬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정우야,
임슬기는 눈물을 닦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불을 바꾸려던 찰나, 깨끗한 이불이 깔린 걸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곳이 먼지 하나 없이 청소되어 있었다.‘누가 청소한 거지? 지난번에 왔을 때는 먼지가 가득했는데?’책장 옆으로 가던 중 그녀는 갑자기 일기장이 사라진 걸 알아챘다.배정우가 가져간 것 같아 속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봤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일기장에 있던 사진은 이미 임슬기가 가져갔으니, 배정우는 그녀가 쓴 일기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챌 리도 없었다. 설령 알아챈다 해도, 모두 오래
남자의 몸에서는 희미한 술 냄새와 담배 향이 났다. 또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임슬기는 숨이 막혀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놔요.”하지만 배정우는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단단히 끌어안더니, 차가운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 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싫어.”“배정우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슬기야,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임슬기는 숨이 턱 막혀왔다.한참 후, 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진짜로 날 잊었으면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응?”임슬기는 이를 악물고 냉정하게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이제 종현이 곁을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야.”임슬기는 코를 훌쩍였다.“누나는 종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졸업하고, 대학 가고, 결혼해서 아이 낳는 모습까지 다 보고 싶어. 누나가 곁에 있을게. 앞으로 계속...”임슬기는 만약 죽지 않는다면, 정말로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임종현은 주먹을 꽉 잡으며 말했다.“하지만 난 아직 용서는 못 하겠어요.”“종현아, 누나한테 시간을 줘. 나중에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야. 알겠지?”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임종현은 임슬기의 손을 떼어내고 돌아서서
임종현이 물을 사 오는 동안, 임슬기는 이미 약을 먹고 벤치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여기 물. 약 먹어요.”임슬기는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고마워.”“대체 무슨 병인 거예요?”임종현은 한 발짝 떨어져 서서 눈살을 찌푸렸다.“대충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임종현의 관심에 임슬기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폐암에 대한 건 여전히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임슬기는 임종현도 배정우처럼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폐렴이야.”“그냥 폐렴이요?”임종현은 자신의 교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