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는 원래 화를 낼 생각이었지만 바닥 가득 쏟아진 죽과 피가 나는 연다인의 손가락을 보니 다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일단 일어나. 사람 불러서 치워달라고 할 테니까.”“하지만 죽은...”“신경 쓰지 마. 가서 개인 간병인한테 상처 치료해달라 하고 방에 들어가서 쉬어. 남은 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정우야, 그럼 슬기는? 슬기 옆에 있어 주려고?”배정우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연다인은 계속 아랑곳하지 않고 질척거렸기 때문이다.“넌 그냥 방으로 돌아가면 된다고.”배정우의 어투가 다소 거칠어지
연다인은 멈칫하더니 이내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임슬기를 빤히 보았다. 행여나 임슬기가 뭔가라도 알아냈을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그러나 임슬기는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연다인을 보며 피식 웃을 뿐이다.“그냥. 너처럼 표독한 사람이 자기 신장을 기증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아서 물어본 거야.”말을 마친 임슬기는 연다인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우유를 마실 생각이었지만 연다인은 임슬기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확신하며 얼른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길을 막고 차갑게 비웃었다.“왜. 질투해?
“3년 전에 낙태 수술을 한 적 있었는데 부작용으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예요.”그 말을 들은 임슬기는 눈이 커지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불임이라는 거예요?”“네. 하지만 얼마 전에 유산했다는 병원 기록도 있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수상하네요.”임슬기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저도 모르게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그녀는 연다인이 불임일 거라고는 전혀 꿈에도 몰랐다. 그럼 임신했다는 것도 전부 배정우를 속이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소리였다.“그 기록 저한테 전송해줘요.”“네,
임슬기는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이를 빠득 갈자 거의 부러질 듯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아이까지 죽인 살인범을 죽여 복수하고 싶었다.결국 연다인에게 달려들며 멱살을 잡고는 난간으로 밀쳤다.“연다인,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내 가족을 전부 죽이는 거냐고!”연다인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픽 웃었다.“그래. 전부 다 죽일 거야! 임슬기, 넌 대체 뭔데 지금도 여전히 고고한 명인시의 장미이고 난 하층민인 거지? 왜! 너와 나는 같은 위치에 서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너만 칭찬하
임슬기는 비틀대며 뒷걸음질을 쳤다.“넌 2년 전부터 이미 변했어. 설령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어도, 네가 증오하는 대상과 믿어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도 알게 되어도 넌 절대 뒤돌아보지도 않을 거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넌 네 자존심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연다인이, 내 가족을 전부 죽인 연다인이 넌 내 앞에서 천사라고 말하더라.”임슬기는 폐가 너무도 아팠다. 발작을 일으키며 피가 울컥 올라왔지만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억지로 삼켜버렸다.“배정우, 네가 그랬었지. 연다인이 너한테 신장을 하나 기증했었다고. 그
고개를 든 임슬기는 처량한 눈빛으로 한때 자신의 전부였던 배정우를 보며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이번엔 또 어떻게 날 괴롭히려고?”배정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또 자신의 동정을 사려고 연기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번엔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임슬기의 손목을 확 잡아당긴 그는 차가운 입술을 그녀의 귓불에 댔다.“임슬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 너야. 네가 가진 모든 걸 망가뜨려도 후회하지 마!”임슬기의 몸이 흠칫 떨리며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뭐 하려고? 종현이는 건들지 마!”“
임슬기는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남자를 보았다. 배정우는 예전에 그녀에게 평생 그녀만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역시나 동화는 동화일 뿐 현실은 아니었다. 결국은 그녀는 그에게 천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차가 멈추고 배정우는 문을 열더니 그녀를 끌어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익숙한 정원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임씨 가문 본가는 예전에 아주 화려했지만 지금은 폐가와 다를 바 없었다. 대문에는 여전히 압류 딱지가 붙어 있었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바닥에 휙 던졌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기자 두
임슬기는 아주 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그녀의 부모님과 오정태, 그리고 임종현도 나타났다. 그들은 그녀의 주위에 몰려들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배정우는 그녀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귀여워.”꿈속의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주 행복하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입가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더니 그제야 자신의 두 볼이 흠뻑 젖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거지?'‘분명 행복한 순간들이잖아. 근데 왜 울고 있는 거지?'이때 흰색 치마를 입은 연다인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
말이 끝나자마자 임슬기는 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낚아채더니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또 있어?”진승윤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술 말이야. 너 아까부터 마시고 있었잖아?”임슬기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왜 혼자 마셔?”진승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임슬기의 이마를 짚었다.정상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그제야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임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아직 열나고 있잖아.
주민규를 돌려보낸 후 진승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마를 찌푸린 채 침대에 누운 임슬기를 바라보았다.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까지 울었던 얼굴이었다.이렇게나 쉽게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데, 배정우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었을까.진승윤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뜨거워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슬기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연다인이 거기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배정우가 어떤 선택을 할지 뻔히 알
연다인은 임슬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배정우의 품에 고개를 기대었다.“정우야, 나 슬기 밀지 않았어. 정말이야...”분수대를 벗어나자 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밀었는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연다인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울먹였다.“내가 밀 이유가 뭐가 있겠어? 네 눈엔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몇 차례 기침을 했다.“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진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은 부
진성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우야, 난 널 돕고 있는 거야.”“아저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배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임슬기의 손을 이끌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내가 분명 진승윤한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임슬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웃었다.“승윤이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거예요.”“진성한은 네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맞아요, 내가 감히 건드릴 수 없겠죠.”임슬기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힘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