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님, 다치셨어요? 내가 부축할게요.”하지만 임슬기도 원래 입었던 중상이 채 낫지 않은 데다가 기력이 없어서 혼자서는 오정태를 부축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오정태의 가슴을 꾹 누른 채 조급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집사님, 무슨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돼요, 절대!’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하려 했지만 신호가 없었다. 신호를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오정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가씨, 연다인을 조심해요...”임슬기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알아요. 집사님,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내가 사람 좀 불
임슬기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이틀 뒤였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스친 순간 죽지 않고 또 병원에 왔다는 걸 알아챘다.이젠 그녀의 목숨이 질긴 건지, 아니면 하늘이 그녀를 괴롭히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이렇게 망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건 짐이 될 뿐이지 않은가?임슬기의 몸을 닦아주던 간병인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슬기 씨, 정신이 들어요? 제가 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임슬기는 간병인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저 며칠이나 잤어
그 말에 배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임슬기에게는 한마디 말로도 그의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었다.사실 그날 밤 그녀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교차로를 두 개 지난 후 갑자기 권민에게 차를 돌리라고 했다. 임슬기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어디로 가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그런데 절반쯤 쫓아가다가 놓쳐버렸고 되돌아가는 택시 기사를 붙잡고 나서야 임슬기가 서촌에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서촌이 어떤 곳인지 배정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권민에게 속도를 내라고 했다.
‘하나같이 나보다 낫다고?’분노가 치밀어 오른 배정우는 무서운 냉기를 뿜으면서 침대에 있는 여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원래는 좋게 좋게 얘기하려 했지만 임슬기가 자꾸만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그래, 임슬기.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배정우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그때 임슬기가 불쑥 물었다.“배정우, 내가 다른 남자들이랑 잤다고 믿는 거 아니었어? 더럽지 않아?”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상스러운 여자라 욕하고 바람을 피웠다고 믿으면서 또
권민은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없었어요. 왜 그렇게 물으시죠?”배정우는 눈을 가늘게 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체 뭘 하러 서촌에 갔지?’임슬기가 남자를 만나러 그런 곳에 갔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진승윤은 배정우가 간 걸 보고서야 문을 두드렸다. 임슬기는 간병인인 줄 알고 옷을 입은 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들어와요.”그런데 고개를 든 순간 진승윤과 눈이 마주쳤다.“승윤 씨?”“요 며칠 병원에 여러 번 왔었는데 계속 자고 있더라고요.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임슬기가 고개를
오정태를 구하지 못했기에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오정태는 임슬기가 자라는 모습을 쭉 지켜봤고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그 생각에 임슬기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예전에 그녀는 재벌 집의 공주였고 매일 호사스러운 삶을 누렸으며 사랑도 듬뿍 받았다. 이렇게 모든 걸 잃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슬기 씨?”진승윤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고 나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다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그냥 집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슬퍼서요... 괜찮아요
마침 물만두를 사 들고 온 간병인이 진승윤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슬기 씨 보러 오셨어요?”“쉿.”진승윤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슬기 씨한테 비밀로 해요. 난 먼저 갈 테니까 잘 챙겨주고요.”간병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임슬기는 물만두를 다 먹은 다음 시간을 확인하고는 옆에 앉아 있는 간병인을 초조하게 쳐다보았다.‘대체 누가 간병인을 불렀지? 만약 배정우라면 내 행적을 전부 보고하는 게 아니야? 간병인을 내보낼 방법을 생각해야겠어.’“돌보는 환자가 나 하나예요?”간병인이
“집사님 시신 건드리지 마.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한테 뭘 더 어쩌겠다는 거야?”남자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임슬기의 볼을 어루만졌다.“나랑 하룻밤 같이 보내면 그 늙은이 시신 돌려주지. 어때?”“꺼져!”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그런 더러운 방법으로 날 협박할 생각 하지도 마.”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슬기의 두 손을 잡아 침대에 짓누르고는 코웃음을 쳤다.“그 늙은이가 너한테 중요한 사람 아니었어? 그런데도 몸을 바치기 싫어? 네 남편은 널 사랑하지도 않잖아. 어차피 그 사람은 우리 둘이 이미 돌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
말이 끝나자마자 임슬기는 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낚아채더니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또 있어?”진승윤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술 말이야. 너 아까부터 마시고 있었잖아?”임슬기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왜 혼자 마셔?”진승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임슬기의 이마를 짚었다.정상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그제야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임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아직 열나고 있잖아.
주민규를 돌려보낸 후 진승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마를 찌푸린 채 침대에 누운 임슬기를 바라보았다.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까지 울었던 얼굴이었다.이렇게나 쉽게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데, 배정우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었을까.진승윤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뜨거워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슬기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연다인이 거기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배정우가 어떤 선택을 할지 뻔히 알
연다인은 임슬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배정우의 품에 고개를 기대었다.“정우야, 나 슬기 밀지 않았어. 정말이야...”분수대를 벗어나자 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밀었는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연다인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울먹였다.“내가 밀 이유가 뭐가 있겠어? 네 눈엔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몇 차례 기침을 했다.“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진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은 부
진성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우야, 난 널 돕고 있는 거야.”“아저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배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임슬기의 손을 이끌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내가 분명 진승윤한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임슬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웃었다.“승윤이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거예요.”“진성한은 네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맞아요, 내가 감히 건드릴 수 없겠죠.”임슬기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힘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