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워 시간대라 그런지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한소은은 차 한 대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까지 그녀가 타던 차는 노형원이 사고 노형원 명의로 된 차였다. 그때는 누구 명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뭐, 어차피 노형원이 잔뜩 쌓아놓은 쓰레기 따위 이젠 관심도 없지만.시간을 확인하던 한소은이 차라리 지하철을 타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남자의 손이 분명한 두터운 손바닥과 손에 담긴 힘까지, 왠지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사람이 아니란 생각에 한소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고 낯선 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던 그때.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한소은, 지금 나 때리려고 그러는 거야?”조금 마른 체격, 빳빳하게 다린 정장에 목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 그리고 코랄트 블루 빛을 내뿜는 커프스단추...“차성재?!”한소은의 눈이 커다래졌다.“자리 옮겨서 얘기하지?”차성재가 눈썹을 실룩거렸다. 비록 어깨에 올린 손은 내려놓았지만 말투는 여전히 강압적이었다. 그 모습에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도로에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법, 한소은은 차성재의 뒤를 따라 작은 골목으로 향했다.도망칠 곳도 없이 한쪽이 벽으로 막힌 골목길의 끝까지 들어간 뒤에야 차성재는 천천히 돌아섰다.“한소은, 오랜만이다?”차성재는 한소은의 모든 변화를 분석해 내려는 듯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나 만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말도 안 되는 우연에 한소은이 질문했다.차성재의 정보력으로 그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는 건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울 터, 그럼에도 손길 한 번 내밀지 않았다는 건 그녀를 도울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매정하게 돌아선 건 한소은이 먼저였으니 이제 와서 아쉬울 것도 없었다.한소은을 바라보는 차성재는 온갖 감정들이 몰려왔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당연한 거 아니야?”차성재가 한발 다가섰다.“지금 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아직 화가 덜 풀린 거네.”차성재가 고개를 저었다.“할아버지가 말씀 심하게 하신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때는 할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신 상태였잖아. 홧김에 하신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면 어떡해. 그동안 밖에서 혼자 지내면서 너도 느낀 게 많을 거 아니야. 남자한테 호구 잡힌 것도 모자라서 소송까지... 그런데도 집으로 안 돌아오겠다고?”“영원히 안 돌아간다는 게 아니라 내가 돌아갈 준비가 되었을 때 돌아갈 거라고.”한소은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내가 차씨 집안사람이라는 거 사람들은 모를 거니까 걱정하지 마.”하지만 그 말에 차성재가 발끈했다.“너 말 그렇게밖에 못해? 지금 우리가 네가 쪽팔려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착각이든 뭐든 좋을 대로 생각해. 내가 돌아갈 준비가 되면 외할아버지한테는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니까.”“그래서 정말 싫다고?”차성재가 한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워낙 마른 체격에, 맑고 하얀 피부, 그리고 남자답지 않은 핑크빛 입술까지... 누가 봐도 병약한 미소년의 모습이었다.하지만 고개를 든 한소은의 눈빛에는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그래.”그리고 다음 순간, 강력한 장풍이 그녀를 향해 몰려왔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낸 한소은은 차성재와 무예 대결을 시작했다.숨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차성재의 공격을 차근차근 막아내는 한소은이었지만 막기만 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열합 정도 주고받았을까 한소은은 벌써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순간 빈틈을 파악한 차성재의 킥이 날아오고.아차...!이건 막을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든 순간, 차성재의 다리는 그녀의 복부와 3cm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추었다.“많이 약해졌네.”차성재가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알아.”한소은이 담담하게 인정했다.노형원의 보디가드들과 싸울 때 이미 느낀 사실이었다. 2년 동안 수련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체력, 기술 모든 면에서 무뎌질 수밖에
시원 웨이브 실험실.모든 직원들이 모여 실험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 실험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일 하나를 만드는 데는 수많은 향신료가 들어간다. 설령 제조법이 있다 해도 완벽한 비율에 맞춰야 제대로 된 제품이 완성될 텐데 지금은 제조법이 정확한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수많은 변수들에 직원들은 난감할 따름이었다.시간이 한참 흐르고 다들 뻐근한 어깨와 목을 돌리며 잠깐 휴식을 취했다.하지만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중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오이연이었다.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의자를 끝까지 내리고 눈까지 감고 있는 걸 보아하니 잠이 든 듯싶었다.실험실에 들어온 강시유는 퍼져 자고 있는 오이연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심호흡을 크게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리고 오히려 오이연에게 담요까지 덮어주는 말도 안 되는 친절함을 보였다. 낯선 손길에 깜짝 놀란 오이연이 부스스 눈을 뜨더니 말했다.“강 팀장님, 오셨어요?”“네.”강시유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이연 씨 많이 힘들죠? 커피라도 한 잔 할래요?”처음 보는 강시유의 친절한 모습에 오이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여자가 뭘 잘못 먹었나...그 눈빛에 담긴 뜻을 읽은 강시유도 불쾌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인내,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한소은을 설득하는 건 물 건너 간 것 같으니 지금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동아줄인 오이연을 공략할 수밖에.“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내가 뭐 독이라도 탔을까 봐요?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실까요?”강시유가 먼저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난 진심으로 걱정돼서 그래요.”“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실험실에서는 커피는 물론이고 음료수 같은 건 못 마시는 거 모르세요?”실험실은 조향사의 공간, 제품 시약을 제외한 다른 향기가 변수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곳이다. 더군다나 특히 향이 강한 커피라니... 조향사로서, 기술 총 디렉터로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오이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
그러자 강시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거렸다. 움직임을 멈추기라도 하면 참아왔던 화를 다 쏟아낼 것 같아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오이연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기지개를 켠 채 몸을 돌려 나른하게 실험에 임했는데, 동작이 느릿느릿한 것이 작업 중인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은 강시유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요, 이연 씨가 원하는 게 뭐죠? 조건을 최대한 맞춰줄게요.”위기가 닥치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참아야 했고, 그녀가 한소은에게 빌러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이 계집애와 조건을 협상하는 게 낫지, 적어도 오이연은 자신의 범위 안에 있을 거니 말이다.오이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오......강 팀장님의 권력이 이렇게 대단했나요? 조건을 최대한 맞춰주겠다고요? 정말 감동적으로 들리네요. 정말 뭐든지 들어주실 수 있는 건가요?”그녀의 흥미진진해하는 모습을 본 강시유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경멸했다, 결국 모두 하나의 거래일뿐 의리나 인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이연이 이렇게 물었으니, 역시 중요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겠지.강시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권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들 이렇게 오래 헌신을 해주셨잖아요? 저는 비록 팀장일 뿐이지만, 저와 노 대표와의 관계가 어떠한지 아실 거라 믿어요. 오늘 이 일만 잘 처리하면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노 대표님 앞에서 몇 마디 해줄게요. 이연 씨가 실험실에서 10년, 8년을 견딘 것보다 절대적으로 나을걸요, 아닌가요?”오이연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듯 한참을 망설였고, 이내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말이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정말로 어떤 조건이든 들어 주시는 건가요?”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매우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강시유는 속으로 약간 웃기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또 아주 진지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당연하죠, 이연 씨는 뭘 원하죠? 승진?
"열......" 숨을 한 모금 들이쉬며 강시유는 그녀가 정말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이연이 계속해서 말했다."승진은……제 탐욕을 너무 얕잡아보시는군요. 연구개발부 차장 자리가 어떻게 저를 만족시킬 수 있겠어요? 저는……당신의 자리를 원해요!”오이연은 손을 뻗어 강시유를 가리켰고, 그 눈빛은 분명히 농담이 아니었다!!!강시유의 얼굴은 곧 어두워졌다.비록 그녀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이 조건들은 그녀에게 줄 수 있고 다시 돌려받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달라고 하다니, 너무 건방진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만약 정말 그녀가 승낙한다면,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외부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이연은 그녀가 망설일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그녀를 다그치지 않고 웃으며 다시 앉아 한 손을 의자 등받이에 얹고 자신의 손등에 턱을 괴고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아 맞다. 그 외에도 한소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훔친 것은 당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저도 별수 없이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겠네요.”“……”강시유는 초반에는 참을 만했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 이! 연!”한 글자 한 글자씩 거의 이빨 사이로 그녀의 이름이 비집고 나왔고, 강시유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정말 선을 넘는군요!”그녀의 분노에도 오이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강 팀장님, 제가 왜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팀장님께서 아무런 조건이든 다 말해도 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보세요, 제가 조건을 말했는데 팀장님은 기분 나빠하시네요. 그러니까, 대단한 능력이 없으면 그렇게 큰소리치지 마세요. 지금 다들 얼마나 난처한지 안 보이시나요?”“당신……”"알겠어요, 강 팀장님이 농담하시는 거 알아요, 저도 농담이었어요. 이제 농담이 끝났으니 모두 열심히 일해야 하겠네요. 저도 일을 해야
강시유는 휴대폰을 보자 노형원의 전화인 것을 확인했고, 오이연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보고는 시험관을 그녀의 손에 다시 넘겨주며 말했다.“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바보처럼 굴지 말고!”말을 마친 뒤, 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어디야?"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실험실이지.”강시유는 매우 억울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방법을 찾고 있어, 한소은은 널 돕지 않을 거고, 그렇다고 나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시원 웨이브는 우리 심혈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끝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뭐가 끝난다는 거야,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준비해, 내가 곧 데리러 갈게."그는 시간이 촉박한 듯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지만 뭐가 급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끊긴 전화를 들여다보던 강시유는 다시 걸어와 실험실을 둘러보았다.됐다, 아마 그녀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여기서 화풀이를 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그녀는 항상 자신을 위해 뒷길을 모색해야만 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형원의 차가 실험실 문 앞에 도착했고, 강시유는 이미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눈을 붉히며, 매우 힘들고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형원아……”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형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거야?! 분명 내가 준비하라고 했잖아!”"그게……”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조수석 문을 닫자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회사 때문에 그런 거잖아. 네가 마음이 급한 건 알지만 나도 똑같아. 그래서 빨리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해서 다시 와서 시도해 본 거야.”“그럼 결과는?”결과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노형원은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물었다. "……”강시유는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알다시피 오일의 배합은 원래 복잡해. 그 안에 단지 향기 하나의 변화만으로도 많은 다른
그냥 한바탕 싸웠을 뿐인데 온몸이 시큰거렸고, 운동을 제대로 못한지 너무 오래되었다.차 씨 집안의 환경을 떠나서,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편안했고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차성재는 그녀가 아무리 멀리 떠나도, 여전히 그녀는 차 씨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려고 온 것이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손을 들었을 때 팔뚝에 약간의 멍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방금 손을 쓰다가 부딪힌 것 같으니 이따가 연고를 발라주면 되는 일이었다. 고개를 들고 숨을 내쉬며 오늘 그 두 사람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정말 재미없는 일이었다.원래는 분노하고 증오할 줄 알았는데, 막상 앉아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그저 예전의 자신과 사이가 나빠졌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놓지 못하고, 달갑지 않은 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예전에 헌신했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헌신했고, 그도 똑같이 그녀에게 잘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 평생 절친한 친구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에게 농락을 당하다니, 정말 바보 같았다.그리고 그 두 사람은……정말 웃겼다!그녀는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자신의 우둔함을 비웃었다.따뜻한 물은 사람의 몸에서 마음까지 이완시켜주었고, 그녀가 눈을 감고 뒤로 젖히자 깊은 잠이 밀려왔다.김서진이 돌아왔을 때 욕실 물소리만 들려왔고, 한소은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문을 밀고 들어섰다. 누군가가 욕조에 기대어 조금씩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발견했다.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분명히 조금씩 가라앉아 목도 보이지 않았고, 수면에 턱도 점차 닿고 있어 그녀가 일어나지 않으면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소은 씨!”김서진은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더니 두세 걸음 걸어간 뒤 허리를 굽혀 그녀의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그의 즉각적인 저지로 한소은이 물에 잠기는걸 막았고, 동시에 그녀도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상
"김서……”그녀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 김서진의 검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왔다.“아무 말도 하지 마요.”"……" 눈을 뜨고 그를 보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목덜미 쪽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렇게 무의식적인 동작이 가장 매혹적이었다.김서진의 입술은 천천히 그녀의 입술과 맞닿았다. 그녀를 욕조에서 막 건져냈고, 몸의 물이 완전히 마르지 않았으며 또 그녀를 안고 욕실에서 걸어 나온 탓에 그의 옷은 이미 물에 젖어 오히려 그녀의 몸에 달라붙었다.한소은은 최근 몇 년 동안 단련에 서툴렀지만, 몸매는 계속 잘 유지되고 있었고 여성스러움도 더해졌다. 한소은은 약간 흐리멍덩하게 눈을 떴고, 그녀의 눈에는 튼튼하고 섹시한 근육이 들어왔다.양복 차림의 겉모습에 감춰진 그의 몸매가 이 정도로 좋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고, 보아하니 그는 일 년 내내 운동하는 습관이 있는것 같았다. 피부는 하얗지만 건강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고, 또 진한 커피색도 아니었지만 라인 하나하나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었다."서진 씨……”그녀는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그의 이름을 불렀다."착하지, 여보라고 불러요.”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여……”볼이 뜨거워 그녀는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 두 글자는 마치 거기에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았고, 혀끝에 이르러서는 억지로 물러갔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안색은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빨개졌다."하……." 김서진은 가볍게 웃었고, 그 호칭에 대해 그다지 집착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익숙해지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 아닐까. 김서진의 키스는 거위털이 스치는 듯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고, 한소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지만 그를 멈추게 할 생각은 없었다.이 사람과 혼인신고를 할 때부터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낸 상태였다. 그래도 그녀는 약간은 긴장을 했으며, 그 긴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