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원이 그녀에게 이렇게 화를 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그녀가 억지를 부려도 항상 인내심 있게 달래주던 그였는데... 심지어 다른 사람도 있는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소리를 지르다니.충격에 눈물도 흐르지 않고 그저 멍하니 노형원을 바라볼 뿐이었다.한편, 조금 이성을 되찾은 노형원은 고개를 돌려 강시유의 상태를 살폈다. 충격을 심하게 받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다가가서 위로를 해줄까 싶다가도 지금 회사 상황을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한숨을 푹 내쉰 노형원이 입을 열었다.“지금 내가 좀 많이 혼란스러워. 난 회사로 들어가서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볼 테니까 집에는 알아서 들어가.”말을 마친 노형원은 그렇게 강시유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커피숍을 나섰다.혼자 남겨진 강시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랑, 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때 한소은을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마지막 한 단계만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생각지도 못한 일들로 인해 시원 웨이브는 풍전등화 상태고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노형원의 사랑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이게 다 한소은, 그 계집애 때문이야! 너만 가만히 있었어도... 네가 모든 걸 다 안고 넘어갔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변호사님,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까지 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한소은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 걸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런데...”잠깐 망설이던 나현우는 의아한 한소은의 얼굴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 대화를 들어보니 시원 웨이브에서 한소은 씨의 제조법을 훔쳐갔고 오히려 지금 표절로 한소은 씨를 고소한 상황인 것 같은데 맡습니까?”“네, 하지만 방금 전 대화는 법정에서 확실한 증거로 쓰이기 어렵겠죠?”한소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네.”고개를 끄덕이던 나현우
러시아워 시간대라 그런지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한소은은 차 한 대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까지 그녀가 타던 차는 노형원이 사고 노형원 명의로 된 차였다. 그때는 누구 명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뭐, 어차피 노형원이 잔뜩 쌓아놓은 쓰레기 따위 이젠 관심도 없지만.시간을 확인하던 한소은이 차라리 지하철을 타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남자의 손이 분명한 두터운 손바닥과 손에 담긴 힘까지, 왠지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사람이 아니란 생각에 한소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고 낯선 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던 그때.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한소은, 지금 나 때리려고 그러는 거야?”조금 마른 체격, 빳빳하게 다린 정장에 목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 그리고 코랄트 블루 빛을 내뿜는 커프스단추...“차성재?!”한소은의 눈이 커다래졌다.“자리 옮겨서 얘기하지?”차성재가 눈썹을 실룩거렸다. 비록 어깨에 올린 손은 내려놓았지만 말투는 여전히 강압적이었다. 그 모습에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도로에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법, 한소은은 차성재의 뒤를 따라 작은 골목으로 향했다.도망칠 곳도 없이 한쪽이 벽으로 막힌 골목길의 끝까지 들어간 뒤에야 차성재는 천천히 돌아섰다.“한소은, 오랜만이다?”차성재는 한소은의 모든 변화를 분석해 내려는 듯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나 만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말도 안 되는 우연에 한소은이 질문했다.차성재의 정보력으로 그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는 건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울 터, 그럼에도 손길 한 번 내밀지 않았다는 건 그녀를 도울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매정하게 돌아선 건 한소은이 먼저였으니 이제 와서 아쉬울 것도 없었다.한소은을 바라보는 차성재는 온갖 감정들이 몰려왔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당연한 거 아니야?”차성재가 한발 다가섰다.“지금 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아직 화가 덜 풀린 거네.”차성재가 고개를 저었다.“할아버지가 말씀 심하게 하신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때는 할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신 상태였잖아. 홧김에 하신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면 어떡해. 그동안 밖에서 혼자 지내면서 너도 느낀 게 많을 거 아니야. 남자한테 호구 잡힌 것도 모자라서 소송까지... 그런데도 집으로 안 돌아오겠다고?”“영원히 안 돌아간다는 게 아니라 내가 돌아갈 준비가 되었을 때 돌아갈 거라고.”한소은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내가 차씨 집안사람이라는 거 사람들은 모를 거니까 걱정하지 마.”하지만 그 말에 차성재가 발끈했다.“너 말 그렇게밖에 못해? 지금 우리가 네가 쪽팔려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착각이든 뭐든 좋을 대로 생각해. 내가 돌아갈 준비가 되면 외할아버지한테는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니까.”“그래서 정말 싫다고?”차성재가 한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워낙 마른 체격에, 맑고 하얀 피부, 그리고 남자답지 않은 핑크빛 입술까지... 누가 봐도 병약한 미소년의 모습이었다.하지만 고개를 든 한소은의 눈빛에는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그래.”그리고 다음 순간, 강력한 장풍이 그녀를 향해 몰려왔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낸 한소은은 차성재와 무예 대결을 시작했다.숨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차성재의 공격을 차근차근 막아내는 한소은이었지만 막기만 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열합 정도 주고받았을까 한소은은 벌써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순간 빈틈을 파악한 차성재의 킥이 날아오고.아차...!이건 막을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든 순간, 차성재의 다리는 그녀의 복부와 3cm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추었다.“많이 약해졌네.”차성재가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알아.”한소은이 담담하게 인정했다.노형원의 보디가드들과 싸울 때 이미 느낀 사실이었다. 2년 동안 수련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체력, 기술 모든 면에서 무뎌질 수밖에
시원 웨이브 실험실.모든 직원들이 모여 실험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 실험인지 모른다. 하지만 오일 하나를 만드는 데는 수많은 향신료가 들어간다. 설령 제조법이 있다 해도 완벽한 비율에 맞춰야 제대로 된 제품이 완성될 텐데 지금은 제조법이 정확한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수많은 변수들에 직원들은 난감할 따름이었다.시간이 한참 흐르고 다들 뻐근한 어깨와 목을 돌리며 잠깐 휴식을 취했다.하지만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중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오이연이었다.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의자를 끝까지 내리고 눈까지 감고 있는 걸 보아하니 잠이 든 듯싶었다.실험실에 들어온 강시유는 퍼져 자고 있는 오이연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심호흡을 크게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리고 오히려 오이연에게 담요까지 덮어주는 말도 안 되는 친절함을 보였다. 낯선 손길에 깜짝 놀란 오이연이 부스스 눈을 뜨더니 말했다.“강 팀장님, 오셨어요?”“네.”강시유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이연 씨 많이 힘들죠? 커피라도 한 잔 할래요?”처음 보는 강시유의 친절한 모습에 오이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여자가 뭘 잘못 먹었나...그 눈빛에 담긴 뜻을 읽은 강시유도 불쾌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인내,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한소은을 설득하는 건 물 건너 간 것 같으니 지금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동아줄인 오이연을 공략할 수밖에.“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내가 뭐 독이라도 탔을까 봐요?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실까요?”강시유가 먼저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난 진심으로 걱정돼서 그래요.”“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실험실에서는 커피는 물론이고 음료수 같은 건 못 마시는 거 모르세요?”실험실은 조향사의 공간, 제품 시약을 제외한 다른 향기가 변수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곳이다. 더군다나 특히 향이 강한 커피라니... 조향사로서, 기술 총 디렉터로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오이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
그러자 강시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거렸다. 움직임을 멈추기라도 하면 참아왔던 화를 다 쏟아낼 것 같아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오이연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기지개를 켠 채 몸을 돌려 나른하게 실험에 임했는데, 동작이 느릿느릿한 것이 작업 중인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은 강시유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요, 이연 씨가 원하는 게 뭐죠? 조건을 최대한 맞춰줄게요.”위기가 닥치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참아야 했고, 그녀가 한소은에게 빌러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이 계집애와 조건을 협상하는 게 낫지, 적어도 오이연은 자신의 범위 안에 있을 거니 말이다.오이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오......강 팀장님의 권력이 이렇게 대단했나요? 조건을 최대한 맞춰주겠다고요? 정말 감동적으로 들리네요. 정말 뭐든지 들어주실 수 있는 건가요?”그녀의 흥미진진해하는 모습을 본 강시유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경멸했다, 결국 모두 하나의 거래일뿐 의리나 인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이연이 이렇게 물었으니, 역시 중요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겠지.강시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권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들 이렇게 오래 헌신을 해주셨잖아요? 저는 비록 팀장일 뿐이지만, 저와 노 대표와의 관계가 어떠한지 아실 거라 믿어요. 오늘 이 일만 잘 처리하면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노 대표님 앞에서 몇 마디 해줄게요. 이연 씨가 실험실에서 10년, 8년을 견딘 것보다 절대적으로 나을걸요, 아닌가요?”오이연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듯 한참을 망설였고, 이내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말이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정말로 어떤 조건이든 들어 주시는 건가요?”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매우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강시유는 속으로 약간 웃기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또 아주 진지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당연하죠, 이연 씨는 뭘 원하죠? 승진?
"열......" 숨을 한 모금 들이쉬며 강시유는 그녀가 정말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이연이 계속해서 말했다."승진은……제 탐욕을 너무 얕잡아보시는군요. 연구개발부 차장 자리가 어떻게 저를 만족시킬 수 있겠어요? 저는……당신의 자리를 원해요!”오이연은 손을 뻗어 강시유를 가리켰고, 그 눈빛은 분명히 농담이 아니었다!!!강시유의 얼굴은 곧 어두워졌다.비록 그녀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이 조건들은 그녀에게 줄 수 있고 다시 돌려받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달라고 하다니, 너무 건방진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만약 정말 그녀가 승낙한다면,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외부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이연은 그녀가 망설일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그녀를 다그치지 않고 웃으며 다시 앉아 한 손을 의자 등받이에 얹고 자신의 손등에 턱을 괴고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아 맞다. 그 외에도 한소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훔친 것은 당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저도 별수 없이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겠네요.”“……”강시유는 초반에는 참을 만했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 이! 연!”한 글자 한 글자씩 거의 이빨 사이로 그녀의 이름이 비집고 나왔고, 강시유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정말 선을 넘는군요!”그녀의 분노에도 오이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강 팀장님, 제가 왜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팀장님께서 아무런 조건이든 다 말해도 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보세요, 제가 조건을 말했는데 팀장님은 기분 나빠하시네요. 그러니까, 대단한 능력이 없으면 그렇게 큰소리치지 마세요. 지금 다들 얼마나 난처한지 안 보이시나요?”“당신……”"알겠어요, 강 팀장님이 농담하시는 거 알아요, 저도 농담이었어요. 이제 농담이 끝났으니 모두 열심히 일해야 하겠네요. 저도 일을 해야
강시유는 휴대폰을 보자 노형원의 전화인 것을 확인했고, 오이연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보고는 시험관을 그녀의 손에 다시 넘겨주며 말했다.“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바보처럼 굴지 말고!”말을 마친 뒤, 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어디야?"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실험실이지.”강시유는 매우 억울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방법을 찾고 있어, 한소은은 널 돕지 않을 거고, 그렇다고 나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시원 웨이브는 우리 심혈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끝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뭐가 끝난다는 거야,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준비해, 내가 곧 데리러 갈게."그는 시간이 촉박한 듯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지만 뭐가 급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끊긴 전화를 들여다보던 강시유는 다시 걸어와 실험실을 둘러보았다.됐다, 아마 그녀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여기서 화풀이를 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그녀는 항상 자신을 위해 뒷길을 모색해야만 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형원의 차가 실험실 문 앞에 도착했고, 강시유는 이미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눈을 붉히며, 매우 힘들고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형원아……”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형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거야?! 분명 내가 준비하라고 했잖아!”"그게……”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조수석 문을 닫자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회사 때문에 그런 거잖아. 네가 마음이 급한 건 알지만 나도 똑같아. 그래서 빨리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해서 다시 와서 시도해 본 거야.”“그럼 결과는?”결과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노형원은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물었다. "……”강시유는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알다시피 오일의 배합은 원래 복잡해. 그 안에 단지 향기 하나의 변화만으로도 많은 다른
그냥 한바탕 싸웠을 뿐인데 온몸이 시큰거렸고, 운동을 제대로 못한지 너무 오래되었다.차 씨 집안의 환경을 떠나서,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편안했고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차성재는 그녀가 아무리 멀리 떠나도, 여전히 그녀는 차 씨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려고 온 것이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손을 들었을 때 팔뚝에 약간의 멍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방금 손을 쓰다가 부딪힌 것 같으니 이따가 연고를 발라주면 되는 일이었다. 고개를 들고 숨을 내쉬며 오늘 그 두 사람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정말 재미없는 일이었다.원래는 분노하고 증오할 줄 알았는데, 막상 앉아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그저 예전의 자신과 사이가 나빠졌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놓지 못하고, 달갑지 않은 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예전에 헌신했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헌신했고, 그도 똑같이 그녀에게 잘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 평생 절친한 친구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에게 농락을 당하다니, 정말 바보 같았다.그리고 그 두 사람은……정말 웃겼다!그녀는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자신의 우둔함을 비웃었다.따뜻한 물은 사람의 몸에서 마음까지 이완시켜주었고, 그녀가 눈을 감고 뒤로 젖히자 깊은 잠이 밀려왔다.김서진이 돌아왔을 때 욕실 물소리만 들려왔고, 한소은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문을 밀고 들어섰다. 누군가가 욕조에 기대어 조금씩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발견했다.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분명히 조금씩 가라앉아 목도 보이지 않았고, 수면에 턱도 점차 닿고 있어 그녀가 일어나지 않으면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소은 씨!”김서진은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더니 두세 걸음 걸어간 뒤 허리를 굽혀 그녀의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그의 즉각적인 저지로 한소은이 물에 잠기는걸 막았고, 동시에 그녀도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