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버지도 널 믿는다!”윤중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잘 생각해 봐. 양미나랑 상담할 때 뭐가 잘못된건지, 그래서 미움을 산 건지. 혹시 전에 그 여자의 요구를 안 들어준 적이 있었니? 아니면 네가 제시한 가격이 마음에 안 들었거나?”둘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는데, 당시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후에 보복을 당한걸지도.“없어요.”곰곰이 회상하던 윤소겸이 고개를 저었다.“얘기할 때 분위기는 그냥 좋았어요. 제가 제시한 가격에도 바로 동의했구요. 촬영할 때도 정상이었고 어떤 특별한 요구도 없었어요. 정말 호흡이 잘 맞았어요.”모든 일이 순조로워서 이상하다고 여길 게 없었는데, 그래서 더욱 이런 치명타는 상상치도 못했다.“그럼 이상한데…….”그 때, 옆에 있던 진고은이 말했다.“저는 알아요!”“당신이 안다고?!”윤중성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말해 봐요, 당신이 아는 게 뭔지!”“양미나가 그렇게 한 이유는!”윤중성을 흘겨보던 진고은은 콧방귀를 뀌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당신 때문이에요.”“나?!”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윤중성이 반박했다.“그만 좀 해요!”“당신이야말로 그만해요! 당신 때문이라구요!”진고은은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생각해 봐요, 양미나가 누구에요?”“모델!”“그래요, 모델이 어떤 사람이에요?”“…….”진고은의 어이 없는 물음에 윤중성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모델이 모델이지, 당신 도대체 왜 모델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거야?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해. 지금 수수께끼라도 하자는 거야?”“흥! 모델은 연예계 사람이잖아요, 바보!”“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당연히 상관이 있죠. 당신 집에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해 봐요. 전에 어떤 짓을 했는지. 다 그쪽 사람들이잖아요. 일부러 우리 소겸이를 모함하고, 고의로 실수하게 한 거예요!”진고은의 머릿속은 교모하게도, 사실의 절반을 맞혔다. 단지 윤설아와 노형원 부분을 추측하지 못했을 뿐. 모든 원망과 예
진고은은 매우 불쾌했다. 이게 요영에 대한 두둔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어째서 상관없다는 거죠? 다 그쪽 사람들이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소겸이를 소중히 생각하는데, 그 여자가 원한을 품고 우리 두 모자를 해치려 하는 게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말할수록 감정이 올라와 그녀는 아들을 껴안고 또 울기 시작했다.“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프니, 내 새끼, 어렵게 세상에 나가서 뭐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모함이나 당하다니…….”“제발,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마요! 요영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크게 호통을 치며 윤중성이 말했다.“그 여자도 일의 무겁고 가벼운 정도는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이건 단순히 여자들 사이의 가벼운 질투가 아니라 윤씨 집안과 관계된 일이에요. 윤씨 집안을 무너뜨려서 그 여자한테도 좋을 게 없다는 거 당신도 잘 알고 있겠죠. 그 여자가 그렇게 멍청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한바탕 호통에 진고은의 감정이 조금 진정되고, 옆에 있던 윤소겸도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어머니, 아닐 거예요. 아마 상업상의 경쟁자가 저지른 일인 것 같아요. 다 제가 경험이 부족한 탓이니 저를 원망하세요!”그도 처음 일이 발생했을 때는 많이 당황했지만 소동이 지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낮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 게다가 어머니의 말에 찬성한다 해도 지금 아버지는 분명히 믿지 않을 것이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지.아들의 태도를 보고 윤중성은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급한 일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방법을 생각해서 일을 순조롭게 끝내는 거야.”“그럼… 어떻게 하죠?”진고은은 전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판매직 일자리를 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윤중성과 만나면서 그만두고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아무런 경험도 없을 수밖에. 그나마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윤중성이 그녀의 곁에 있는 시간이 적었기
그러나 이 고요함도 결국 깨질 것이다.“큰어머니.”두 손으로 서류봉투를 쥐고 선 윤설아가 병실 문 밖에 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설아야, 네 마음은 알지만 큰아버지가 지금 손님을 만날 수 없는 몸 상태야.”“저도 큰아버지 쉬시는 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회사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말씀을 청해야 해요. 게다가 제가…….”설아가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한 손으로 이마의 잔머리를 쓸어넘기며 이어서 말했다.“제가 손님도 아닌걸요! 편하게 대하셔요.”“하지만…….”여전히 망설이는 사이에 병실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며 가래 뱉는 소리가 들렸고, 윤백건이 입을 열었다.“설아라고…? 빨리 들어오게 해요!”그의 말을 들은 윤 부인이 복잡한 눈으로 설아를 쳐다보고는 한 걸음 양보했다. 설아가 기뻐하며 병실로 들어가니, 깨끗이 정리된 병실이 보였다. 한쪽 궤짝에 놓여 있는 꽃 덕분에 은은한 꽃향기까지 가득한 곳. 하지만 그곳에 누워있는 윤백건은 온몸이 크게 야위어 보였고 누르스름한 얼굴에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다.“큰아버지, 안색이 참 좋으셔요!”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윤설아.“아유, 좋긴 뭐가 좋아! 몸이 하루하루 이렇게 안좋아지고 있는데!”콜록콜록… 몇 마디 말도 못하고 또 기침이 시작됐다.“그럴리가요!”베개를 조절해서 기댈 수 있게 해준 뒤 윤설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냥 조금 편찮으신 거예요. 휴양만 잘 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근데 평소에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안좋아지셨어요?”윤백건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멀쩡한 사람도 병 얘기가 나왔다 하면 금방 이렇게 되더라고. 사람이 이 나이가 되면 다 이렇게 늙는거야. 참, 너네 아버지랑 어머니도 평소에 좀 더 주의하라고 해, 신체검사도 자주 하고. 작은 병도 빨리 발견해야지, 나처럼 되지 말고!”이어서 또 심한 기침을 하는 등을 두드리며 윤설아가 말했다.“아유, 조급해하지 마시고 천천히 말씀하세요.”“설아는 정말 좋은 아
윤설아는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 말은, 요즘 오빠가 바빠서 잘 없잖아요, 그럼 제가 바로 딸이죠! 제가 오빠를 대신해서… 아니지, 제가 잘 돌봐드릴게요!”허둥지둥한 행동이 누가 봐도 이상한데, 윤백건 같은 눈치 빠른 사람한테는 말할 것도 없을 터. 단지 병이 난 것일 뿐, 결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도 아직 힘이 들어가 있었다.“아니야! 분명히 둘 다 나한테 숨기는 일이 있는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아내를 바라보며 엄하게 말하는 순간, 윤 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물만 흘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에게서 답을 얻지 못하자 다시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본 윤백건.“설아야, 말해봐! 내가 줄곧 너를 그렇게 아끼고 딸처럼 키웠는데, 방금 뭐라고 했지? 최웅이, 어떻게 됐다고?”“큰아버지, 묻지 마시고 몸부터 챙기세요!”윤백건은 설아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힘껏 침대를 두드렸다.“나를 더 화나게 하고싶니?!”“이러지 마세요. 제가, 제가 말씀드릴게요.”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힌 윤설아가 흐느끼며 울었다.“며칠 전에 진해 쪽에서 소식이 왔는데, 오빠가 재료를 찾다가 독사에 물렸는데 제대로 치료도 안하고…….”뒷말은 없었지만, 누구라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윤설아가 울음을 터뜨리고 옆에 있던 윤 부인도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았다. 천천히 손을 놓은 윤백건이 큰 충격에 오히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윤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이 사람을 두렵게 한다.“큰아버지…….”“너 지금 농담하는 거 맞지? 웅이는 괜찮아. 밖에서 멋대로 돌아다니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한 번도 애 먹인 적 없는 자식인데, 아니야, 괜찮을 거야…….”고개를 저으며 마치 넋 나간 것처럼 말을 반복하고 있다.“큰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오빠가 없어도 제가, 저희 모두 함께 있잖아요, 절대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윤설아가 초조하게 말했다.“지금
쾅!병상에 세게 찧는 소리가 울렸다.“큰아버지!”윤설아가 놀라서 소리치고, 옆에 있던 윤 부인이 얼른 달려들었다.“의사, 의사를 불러야 해!”당황하여 얼른 침대 머리맡의 긴급 호출 벨을 누르자 곧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들어 그들을 나가게 한 후 응급처치를 했다. 문밖에 선 윤 부인의 모습이 한순간에 폭삭 늙어 보인다. 온몸에 정신이 없고 눈물만 줄줄 흘리는 모습. 원래 몸이 좋지 않은 그녀인데, 지금은 더욱 바람에 쓰러질 듯하다. 윤설아가 그녀 곁에 서서 휴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휴지를 받지 않은 채 고개를 든 윤 부인의 두 눈동자에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왜 그런 말을 했지? 네 큰아버지가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걸 모르니?”“저도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냥 실수로… 여쭤보시는데 대답을 안할 수 없었어요.”억울해하는 모습으로 윤설아가 대답했다.“실수? 분명히 고의였어! 그리고, 너 웅이의 일은 어떻게 안 거지?”윤 부인이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몸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신만은 매우 뚜렷했다.“그건…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저희도 회사도 모두 오빠의 행방에 관심이 많았어요. 큰아버지가 이렇게 오랫동안 편찮으시니 항상 오빠가 돌아와서 효도하고 인수인계도 받아야 하는데 어쩌다가…….”윤설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어서 말했다.“큰어머니, 지금 매우 슬프시다는 거 알아요, 저도 너무 슬퍼요. 큰아버지도 상심이 크실 거예요. 하지만, 평생 속일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이렇게 계속 오빠에 대한 오해와 원망으로 걱정만 끼쳐드리는 것보다 진실을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윤설아가 닫힌 병실 문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문이 시선을 가로막고 있고, 위쪽에도 창문이 없어 안의 상황이 어떤지 볼 도리가 없다. 응급처치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몰라. 다만 방금 전의 상태로 보아 큰아버지는 아마도… 평소에 그렇게 건장하던 사람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설아 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네가 이런 짓을 하다니!”윤 부인
윤씨 부인이 화가 잔뜩 나서는 손가락으로 병실을 카리켰다."지금 너의 큰아버지는 안에 누워서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데 너는 꼭 이렇게 틈을 타서 권력을 빼앗아야겠니?설아야,넌 비록 우리의 딸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린 네가 커오는 걸 지켜봐 왔어.근데 넌 너의 큰아버지에게 이 정도의 효심도 없니?한시라도 기다릴 수 없을 만큼?""제가 기다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기다릴 수 없어요."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물건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큰어머니,큰어머니께서는 회사일에 관여하지 않으셔서 많은 일들을 잘 모르세요.지금 회사가 이렇게 큰 어려움과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저도 마음이 조급해요.회사를 돕고 싶어서.다만...저에겐 그럴만한 정당한 신분이 없어서 도울 수가 없어서 그래요.""저 지금 물려받지 않아도 돼요.기다리라면 기다려도 돼요.하지만 더 기다렸다간 큰아버지를 귀찮게 할 사람이 저뿐만이 아닐지도 몰라요.그러니 그럴 바에는 이 곤란한 일을 저한테 맡기시라는 거죠.큰어미니의 말이 맞아요.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서 제가 자라는 모습을 봐오셨는데 제가 어찌 두 분을 돌보지 않겠어요?그러니 안심하세요.제가 이 회사를 맡는다 해도 반드시 두 분께 계속 효도할 거예요."설아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큰오빠도 안 계시는데 저를 딸로 여기세요.제가 꼭 두 분을 잘 모실게요."윤씨 부인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설아를 쳐다보았다.눈물은 이미 눈시울을 가득 채웠지만 끝까지 떨어지지 않게 했다.잠시 후,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너의 큰아버지의 개인 도장과 회사의 열쇠는 지금 나한테 없어.이틀만 기다려줘.만약 너의 큰아버지가 이 고비를 넘길 수만 있다면, 이틀 후 그 물건들을 모두 너에게 줄 게.""정말이세요?"설아의 눈빛이 순간 밝아졌다.하지만 확신이 가지 않았다.그래서 흥분된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윤씨 부인이 후회라도 할 까봐."네 말이 맞아.설웅이도 이젠 없고 나와 너의 큰아버지의 건강도 좋지 않아져서 아직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윤씨
"대체 언제까지 연기를 해야 돼요?"그녀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남편을 도와 함께 연극을 하겠다고 약속한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은 좋았던 적이 없었다.그녀는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하지만 며칠 간격으로 각종 앙큼한 마음을 품고 병문안을 온 사람들을 대응하며 그들의 능청스러운 태도、각종 마음에도 없는 칭찬들을 들어야 했으니.이전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남편이 “병이 나서” 입원한 이후로 그녀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광경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떠보다가 나중에는 점차 냉담해졌고.지금은...친조카딸,친동생마저 모두 찾아와 권력을 빼앗으려 하고있다."어제 중성이가 왔다 갔었지?"그는 창밖을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어제 그때 그는 자고 있었고 밖에서는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었다.마지막엔 아마 그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갔겠지."네."윤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금방 링거를 맞고 쉬고 있으니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먼저 돌아가라고 했어요.""부녀지간이 각자의 생각이 있는가 보군!"그는 낮게 웃으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설마 중성이 정말 그 사생아에게 산업을 모두 맡길 작정인 걸까요?"윤씨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영이가 중성이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영이가 얼마나 속상하겠어요.""당신은 제수씨가 정말 그렇게 현숙하고 온순하기만 하다고 생각하나?"윤백건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입가의 웃음이 차가웠다.바깥의 햇빛이 그의 몸에 쏟아졌지만 커튼이 오히려 빛을 절반이나 가렸다.비록 그는 지금 이곳에 숨어서 전략을 세우고 전반 국면을 장악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나쁜 점도 많았다.예를 들면 한동안 제대로 햇볕도 쬐지 못하고 바람도 쐬지 못했다는 점.병실에서 햇볕을 쬐더라도 커튼 뒤로 숨어야 했다.언제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서."설마 영이도요?"윤씨 부인은 매우 놀랐다.최근에 발생한 일과 본 사람들이 이전과 큰 차이가 너무 많아 끊임없
남편의 말을 들은 윤 부인이 잠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릴 적의 설웅은 정말 다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엄친아였다. 부모님의 말씀도 곧잘 들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 사업 쪽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모두 좋은 건 아니었지만 자기만의 생각과 이해가 있었다.그 시절, 윤 가네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화목한 가정이었다. 백건은 이런 아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설웅이 열서너 살 때였다. 누구나 다 겪는다는 사춘기가 설웅에게도 찾아왔다. 하필이면 그 무렵이 회사를 확장하고 있었을 때였다 회사 업무가 바빠지기 시작하자 백건이 집에 들어오는 날은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적어졌다.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자기 자식을 단속할 힘이 없었다. 때마침 요영이 집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요영은 항상 그녀더러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몸 회복에 집중하라 했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도맡아 처리했다. 심지어 윤 가네 친인척에 관한 일도 모두 요영이 나서서 대신 처리해 주었다. 그 때문인지 설웅도 점차 요영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이렇게 평온할 것만 같았던 나날이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설웅이 어디서 목조를 접하게 되었는지 어느 날부터 목조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그녀는 짚이는 게 없었다.아마 그때부터 설웅이 공부와 담을 쌓게 되었고 눈만 뜨면 나무에 정신이 팔려 하루 종일 나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처음에 그녀는 이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이런 것에 열중하는 게 어디 나가서 사고 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일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라는걸 그녀는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설웅은 날이 갈수록 목조에 빠져들었고 심지어는 밤까지 새 가며 나무에 집착했다.한동안은 집안 여기저기에 나무 부스러기가 널려져 있었다. 설웅은 점점 자기관리에 소홀했고 수업을 들으러 가려 하지 않았다. 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