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어요.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동료, 회사 이름처럼…신생."한소은은 새 회사에서 겪은 곤란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만사가 다 순조로울 수는 없다. 살다보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안 어울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조팀장도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유명하지도 않고 스펙도 없으며, 심지어 복잡한 소송까지 대비해야 한다. 웬만한 회사와 팀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그녀는 확실히 “관씨(关系)”로 들어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 많은 노력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탄복할 수 있도록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그럼 됐어요." 김서진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부드럽게 말했다.사실, 회사에서 일어난 일을 그가 모를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으며, 그도 그녀가 이렇게 집요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려 하지 않고 혼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기도 했다.그는 그녀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입술과 뺨의 가벼운 스킨십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그는 고개를 조금 더 숙여 그녀의 입술을 정확하게 찾아냈다.그녀의 반짝이는 눈, 붉은 입술, 김서진의 눈빛은 갑자기 어두워졌고, 마치 한순간에 사나운 파도를 일으킨 것 같았다.그가 손을 꽉 잡지 않았다면 한소은은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다행히 어깨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하지만 도발할 엄두도 못 냈다. 결국 화가 난 남자는 좀 무서웠다.마침 이때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려 벨소리가 다급해서 김서진이 듣기에는 거슬렸다."전화 좀 받고 올게요."한소은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팔을 풀려고 했지만 그는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고, 귀찮은 눈빛으로 휴대폰을 힐끗 쳐다보았다. "신경 쓰지 마요!""그럼 일단 누군지만 볼게요.”그의 모습을 보고 한소은은 웃고 싶었다. 뜻밖에도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유치해지니 매우 귀여웠다.김서진은 비록 입을 열지 않았지만, 손의
"……" 노형원이 이렇게 절박하게 자신을 찾는 이유가 집 문제였다는 것은 뜻밖이었다.흥미롭게도, 그는 이제서야 그녀가 이미 그곳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그는 며칠 동안 한 번도 집에 가 본 적도 없고, 그녀를 찾은 적도 없었다.김서진을 한 번 쳐다본 후, 그녀는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들고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살지 않을텐데 당연히 퇴실하죠. 퇴실 같은 건 집주인에게 말하면 되는데, 왜 노대표님에게 보고해야 합니까?”"잊지 마라. 집세는 내가 다 내줬거든. 너…"하고 투덜거리려고 했지만, 그는 억지로 참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물었다. "그럼 지금 어디로 이사 간거야? 설마 신생이 먹고 자게 해주나?"노형원은 그녀가 신생에게 세뇌당했다고 굳게 믿었고, 게다가 그와 강시유의 일은 정말 어쩔 수 없이 한소은에게 들켰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얌전하고 온순하던 여자가 어떻게 갑자기 변할 수가 있지?그의 말에 한소은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고, 특히 바로 맞은편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그녀의 남자가 서 있었다.김서진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띄엄띄엄 말했다. "네, 먹고 재워주니 노대표님께서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그건 그렇고, 노형원 대표님이 저를 고소하지 않으셨나요? 왜? 변호사 비용이 너무 비싼가요? 마침 집세 보증금이 아직 집주인에게 있으니 그걸로 변호사 비용을 내시면 되겠네요."그녀의 비아냥거림은 노형원을 화나게 만들었고, 그는 이를 악물며 물었다. "당신은 손에 그 녹취록을 쥐고 있다고 내가 당신을 두려워할 것 같아?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채택되더라도 편집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더라도 나는 너가 악의적으로 유도한 말이라고, 나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주장할건데.""노대표님이 두렵지 않으시니 저는 기다리고만 있겠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바로 끊기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귀찮아서 아예 그의 번호와 위챗, 모든 연락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아.
한소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고소하는 것이 두려운게 아니라 고소 안할까봐 두려워요.”"네?" 김서진은 생각을 했다가 물었다. "그럼 그 자료들, 모두 백업해 두었어요?"조향사로서 1년에 수 차례나 데이터를 작성해야 하고, 또 중간 과정에서 조율 등등. 자료를 기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백업하는 것이 정상이며,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할 경우 찾기도 편리하다."백업이 있긴한데 그것도 다 가져갔어요."예전에 그녀는 노형원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그 사람을 그토록 믿으니까 당연히 자료를 옮기거나 숨길 생각을 못했을 거다. 모든 자료들이 실험실에 있었는데, 그날 다른 사람 시켜서 다 가져갔다.그녀의 말을 듣고 김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훑어보면서 얘기했다. "그럼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한 치의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에요?"원래 한소은은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물어보니까 그에 대해서는 숨길 것이 없다."사실 별거 아니에요. 전에 내가 노형원을 경계하지 않아서 자료와 모든 데이터, 샘플은 모두 실험실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가 며칠 전에 사람을 보내 모두 가져갔어요. 오이연이 그때 그렇게 막았는데도 막지 못했어요.”그날의 상황을 생각하면 노형원은 속셈이 의뭉했고 더욱 몰인정했다.직접 모든 증거를 가져가 피해자인 그가 지목할 수 없게, 그리고 '도둑'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했다.사랑은커녕 동창의 정조차 전혀 생각해주지 않았다.그녀가 멈추자, 김서진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나의 작은 습관 하나에 고마워해야죠.”"작은 습관이라니?" 이것은 의외로 김서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한소은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필기를 할 때 나만의 습관이 있는데, 너무 많은 자료가 기록되면 헷갈리니까 실험 수기마다 시간을 기록하지만 하루 마무리할 때에 날짜도 적고 내 이름 약자도 같이 적어요. 노형원은
이팀장은 그녀를 보자마자 곧장 사무실로 불러들였고, 그 모습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같았다.“우선 블라인드를 내리세요.”그는 책상 옆으로 가서 그는 맞은편 블라인드를 가리켰다.한소은은 돌아서서 블라인드를 내리면서 밖에서 구경을 하려는 직원들의 눈빛을 보았다.이것은…블라인드를 내리고 돌아오자 이선재는 이미 봉투 하나를 꺼내 그녀 앞에 내팽개쳤다. “이거 봐요.”한소은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봉투를 뜯어보니까 그 안에 변호사내용증명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노형원이 정말 그녀를 고소한 것이다.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면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충 보고는 다시 접으며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이팀장은 너무 담담한 모습에 참지 못해 물었다. "상대방이 이미 회사에 변호사내용증명을 보냈으니 소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회사에 작은 폐를 끼치게 돼서 죄송합니다. 이 일은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그녀는 편지를 거두면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절대 제 업무에 지장이 없을 겁니다.""……" 이선재도 몹시 난처했다.인사담당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사실 한소은 같은 사람을 채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조현아는 조금 흥분되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한소은은 스펙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고, 귀찮은 일까지 안고 있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정말 이런 사람을 채용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어쨌든 왕사장님께서 지시하신 것이니 위에서 시키는대로 해야할 뿐만 아니라 잘 챙겨야 한다. 회사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지금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변호사내용증명만 보냈겠지만, 나중에 우리 회사까지 고소할지 몰라요. 물론 신생에서는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우리 회사에 법무팀도 있고요. 다만 이런 일은 빨리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아요. 결국 회사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에요. 알고 있죠?"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사에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그녀를 보며 이선재는 한숨을 돌렸다.
“왜 굳이 손으로 베껴야 해? 그냥 프린트하면 되잖아. 정 안 되면 알바라도 쓰든가!”강시유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더니 노형원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나 요즘 진짜 너무 피곤하단 말이야. 한소은 그 계집애 때문에 스트레스 폭발이라고!”애교 섞인 목소리에 똘망똘망한 표정의 강시유를 보는 순간 노형원의 마음은 사르륵 녹아내렸다.노형원은 바로 강시유를 품에 와락 끌어안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알잖아. 데이터 분석은 컴퓨터로 한다고 해도 기본 데이터는 아직 손으로 베끼는 경우가 많아. 그리고 혹시 알바한테 맡겼다가 필적 감정이라도 진행하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우리 시유 고생하는 모습 보면 마음이 아파. 그래도 어쩌겠어. 이번 소송은 무조건 이겨야 해. 소송에서 지는 순간 우리 시원 웨이브는 끝이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응?”말을 마친 노형원은 강시유의 이마에 쪽 뽀뽀를 날렸다.그럼에도 강시유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렸다.“이게 다 한소은 그 계집애 때문이잖아. 기자회견에서 쓸데없는 소리만 안 했어도 대회에서 우승도 했을 테고 투자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 텐데...!”말을 마친 강시유가 노트를 책상에 홱 던져버렸다.노형원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불평이나 하고 있을 대가 아니었다. 한소은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배신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 사태를 수습하고 승소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한소은 뒷담화는 그 뒤에 실컷 해도 충분하니까.그 뒤로 노형원은 한참 동안 강시유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그제야 강시유는 노트를 베끼기 시작했다.드디어 고분고분해진 강시유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형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시유한테 맡겼어. 원고 확인했는데 문제는 없더라. 그래,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통화를 마치고 커다란 창문으로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는 노형원의 눈앞에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36층에 자리 잡은 사무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기 위해 온갖 발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만남도 갖지 못할 거라 생각지 못한 한소은은 어안이 벙벙했다.비서는 조현아 팀장이 회의 중이라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고 아직 신생의 정식 직원이 아닌 한소은은 들어갈 명분조차 없었다.30분 정도 기다렸을까? 뭔가 결심한 듯 한소은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비서가 부랴부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안 됩...”“누가 들어오라고 했죠?”고개를 힐끗 든 조현아가 입을 열었다.“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여요? 외부인은 나가주시죠!”“정식 입사 절차도 밟았고 기획팀으로 발령까지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기획팀 팀원이니 외부인이라고 할 수 없죠.”말을 마친 한소은은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하, 이것 봐라?생각보다 세게 나오는 상대의 모습에 조현아는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한소은을 노려보았다.“글쎄요. 아직 난 한소은 씨를 기획팀 팀원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는데요?”두 여자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다른 팀원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팀장의 반대에도 대표가 굳이 한소은의 입사를 허락했다는 소식은 이미 신생 기획팀에 쫙 퍼진 상태였다.표절 사건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 게다가 리스크를 떠안을 정도로 학력이나 커리어가 뛰어난 여자도 아니다. 그런데 차기 부장 후보라고 인정받을 정도로 엘리트인 조현아 팀장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억지로 한소은을 입사시켰다는 건 아마... 두 사람의 관계가 회사 대표와 사원 그 이상이라는 말이겠지.능력은 둘째치더라도 남자 후리는 수단은 뛰어난 게 분명했다. 차도남 대표님의 마음을 이 정도로 구워삶을 수 있다니.“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절 팀원으로 인정해 주실 거죠? 테스트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한소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선재 말대로 조현아는 까칠하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능력도 뛰어나고 친해지면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라고 하니 신생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대한 빨리 그녀의 오해를 푸는 게
흔쾌히 승낙하는 한소은의 모습에 조현아도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한소은의 당당한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번 기회에 낙하산을 완전히 쳐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비록 신생은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회사지만 환아라는 대기업의 서포트를 받고 있다 보니 입사한 직원들 모두 내놓으라 하는 엘리트들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낙하산이 갑자기 나타나다니.고지식한 조현아는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이 종양 덩어리 같은 여자를 어떻게 기획팀에서 쳐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소은 쪽에서 먼저 미끼를 덥석 물었으니 미소가 절로 나올 수밖에.“좋습니다. 난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질색이니 알아두시고요.”혹시나 말을 바꿀까 싶어 조현아는 한 마디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 저도 최악이니까요.”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눈썹을 씰룩거리던 조현아가 의자의 방향을 살짝 돌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가까이 와봐요.”사실 회의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한소은은 조현아의 앞에 놓인 향수를 발견했다. 똑같은 용기에 담긴 똑같은 양의 향수, 아마 신제품 테스트 중이었겠지.하나의 완벽한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서는 수백, 수천 번의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테스트에서 가장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바로 조향사의 예민한 후각이었다.“이 세 샘플은 이번 우리 회사 신제품 테스트에서 탈락한 제품들이에요. 시향해 보고 왜 탈락했는지 이유를 말해 봐요.”조현아의 말에 다른 팀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사의 뜻을 눈치챈 팀원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이게 테스트인가요?”조현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한소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기 시작했다.한소은은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는걸, 억지로 끼워 넣은 테스트에서 망신을 당하길 바라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챈 상태였다.그녀의 전 회사와 그녀가 표절 논란에 휘말렸다는 건 뉴스에서 워
한소은의 말에 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무리 여자한테 미쳤다지만 설마 신제품 정보까지 빼돌린 건가?나름대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조현아를 바라보며 한소은은 말을 이어갔다.“세 샘플은 사실 같은 제품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세 향수에 들어간 원료 중 다른 건 단 하나뿐이니까요. 하지만 그 단 하나의 향료 때문에 세 가지 가능성으로 나뉜 거겠죠.”“그래요?”조현아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한소은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소 지었다.그럼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디서 잘난 척은.하지만 한소은은 그런 조현아의 태도에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덤덤한 표정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보통 사람들이 시향했다면 아마 큰 차이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차이겠지만 조향사라면 단번에 눈치챌 수 있겠죠. 베이스 노트에 들어갈 향료가 바뀌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향을 낼 테고... 굳이 저더러 세 샘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신다면...”한소은은 손을 뻗어 가장 오른쪽의 제품을 가리켰다.“이 제품을 선택하겠습니다. 18세부터 23세의 젊은 여성 고객층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네요.”한소은의 말에 순간 정적이 일었다.조현아는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확신해요?”“네, 확신합니다.”대답하는 한소은의 말투에는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조현아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까지 조롱과 비웃음으로 가득하던 조현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서렸다.“이 정도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신다면 무슨 향료를 썼는지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샘플에 사용된 향료의 이름을 하나하나씩 읊는 한소은의 모습에 팀원들의 두 눈은 더 휘둥그레졌다.아무 능력 없는 낙하산인 줄만 알았던 여자가, 표절 사건으로 소송까지 치르고 있는 여자가 조 팀장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건 물론 이렇게 훌륭한 기량을 보여줄 줄이야.팀원들 중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하지만 한소은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테스트가 시작된 순간부터 훌륭하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