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원철수는 울부짖으며 고통스럽게 소리쳤다.감금된 그곳처럼 방음이 되지 않아 이곳 텅 빈 환경이 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오랫동안 울려 퍼지게 했다.머리도 아프고 눈도 아팠다.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고통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으려다 한쪽 팔이 끼어 한 손으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두드리고 다른 한 손으로 계속 힘껏 흔들어야 했다.통증 때문에 힘이 세졌는지, 아니면 너무 흔들어 느슨해졌는지, 그가 힘을 주었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난간이 헐거워졌다.콰당!난간 전체가 떨어져 원철수의 팔에 걸렸다. 질곡에서 벗어난 원철수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이고, 빨리 이 고통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이리저리 부딪쳤다.꽝! 꽝! 철제 난간과 벽이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 크다.어르신은 다시 방에서 뛰쳐나와 목을 젖히고 위층으로 올려다보았다.“너 이 자식, 지금 뭐 하는…….”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원철수가 팔에 철제 난간을 두르고 몇 번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위층의 그 틈새에서 훌쩍 뛰어내렸다.“이놈 감히…….”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서 세찬 바람이 스치더니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원 어르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사람이 그의 앞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할아버지는 떨리는 입술로 조심스럽게 외쳤다.“철…… 철수야? 철수야?”대답이 없었다.“철수야? 철수야? 이 노인네 겁주지 마, 나…… 나 안 속아. 철…….”할아버지는 앞으로 다가가 막 손을 뻗어 그를 만지려 하였다. 순간 원철수는 갑자기 일어나 몸을 괴상하게 뒤틀더니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아, 아파…….”원철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여전히 의식이 있는 듯 원 어르신을 바라보며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둘째 할아버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원철수는 비틀거리며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으나 나간 발은 허공에서 다시 억
원철수가 다시 깨어났을 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위를 보고 있는 채 뇌는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손을 들려고 시도했지만 손가락만 들었다.목이 간질간질하여 기침 한 번 하고 싶은데 입이 벌리니 그냥 숨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정말 이상한 느낌이다. 마치 사람이 이미 죽음의 문턱에 있는데도 그렇게 숨을 내쉬고 죽지도 못하면서 버티기도 힘들었다.“깼어?”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리려다 눈동자만 돌렸다.“움직이지 마, 너 지금 기력이 빠져 움직일 수 없어.”원철수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원 어르신은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있는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미간에만 조금 더 온화한 것 같았다.“나…….”원철수가 소리 내려고 발버둥쳤다. 속으로 너무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목이 말라 한 글자도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너 왜 이러는지 묻고 싶구나.”원 어르신이 그의 몸에 있는 담요를 위로 당겨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원철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눈만 깜박거렸다.긴 한숨을 내쉬고 원 어르신은 옆에 있는 걸상에 앉아서 손에 든 탕약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며 2분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솔직히 나도 몰라, 네가 왜 이러는지.”“…….”“우리 한의학에서 볼 때 너는 기혈양손이야, 몸의 정기가 크게 소모되고, 맥이 부고 건조하며, 간의 불이 왕성한 거지. 원래 허약해야 하는데 네 몸은 오히려 표상기능이 발달되어 있고, 나타나는 증상은 매우 강건해, 이건 불가능한 거고, 자연논리에 완전히 어긋나는 거야…….”천천히 말하면서 눈길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며 그의 몸 구석구석 드러난 피부를 살폈다.단단한 근육질은 마치 갈라질 듯이 부풀어 올랐지만 원철수의 눈은 탁하고, 설태는 두꺼우면서도 노랗고, 안색도 정상이 아니었다. 사람은 허상이지만 겉모습은 오히려 강했다.“그들이 너한테 바이러스를 주사했다고요?”원 어르신이 생각
“이거…….”“이건 몸 기능을 조절하고 체력과 기혈을 보충하는 거야, 해독제 아니라고!”약을 먹이면서 어르신이 말씀하셨다.“나 신 아니야, 아직 네 몸에 있는 그거 뭔지 모르니까 해독제 만드는데도 시간 필요해.”원철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을 마셨다. 물론 그도 해독제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독제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는 절대적인 확신이 없었다. 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크다.하지만 둘째 할아버지가 이렇게 해주니 마음속으로 너무 기뻤다.약 한 그릇을 먹이고 어르신은 빈 그릇을 움켜쥐고 원철수를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아직 네 몸 안에 있는 거 뭔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보험 삼아 여기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너도 알잖아, 전에 그 역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뭐, 너도 당분간 움직일 수 없으니 이 기간에 내가 한 번 생각해 볼게.”마지막 말에서 어르신은 크게 노하며 말했다.“감…….”원철수가 고마움을 인사하기도 전에 어르신은 이미 발을 동동 구르며 나갔다.방안은 다시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자리에 누워 있는 원철수는 마음이 이렇게 평온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실험실에서 등불은 밤낮으로 밝았다. 이곳은 시간을 보지 않으면 낮과 밤을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 교대 근무도 거의 24시간 쉬지 않았다.그러나 사람은 항상 피곤할 때가 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일을 하다 보면 아무리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도 소홀히 하고 졸 때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이럴 때 정신 상태가 해이해진다.한소은은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이곳은 사실 침대도 있고, 이불도 있었다. 잠시 잘 수도 있는 평범한 간이 휴게실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문이 잠겨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한소은은 지금 자고 싶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자세로 느릿느릿 움직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문밖에서 가벼운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문 앞의 사람은 막 돌아선 한소은과 마주쳤다.“왜 안 쉬어요?”그는
그의 물음에 한소은은 담담하게 한마디만 답했다.“잠시 후 모든 게 밝혀질 겁니다.”“정말 그자라고 해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텐데…….”이때 남자가 얼굴의 고글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바로 그녀를 가두라고 명령한 고지호 교수였다.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움직일 거예요!”그리고 나서 이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는 질문을 하였다.“최근 국가 백신 기지가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맞아요.”고지호 교수가 답했다. 이 일은 그도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관계 있는 일이고, 또 일등 대사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조금은 알고 있었다.“근데 이게 그가 움직이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여기 해독제 진도가 지연된다고 해도 백신 개발 진도에 영향 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설마 저쪽에도 사람을 붙였나요?”고지호 교수는 무슨 생각이 난 듯 다시 말했다.“참, 이 프로젝트는 원래 소은 선생 애인의 회사에서 따낸 거 아니었어요? 왜…… 혹시 재입찰했나요?”구체적으로 왜 재입찰이 되었는지에 대해 잘 모르나 진정기가 직접 승인한 것이니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네!”한소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바깥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김서진이 없어도 회사는 그대로 운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서진이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면서 그만한 수단은 있는 남자이다.매일 여기 머물며 몸조리하고 핸드폰도 압수당했지만 나름대로 다 방법이 있는 것이다.그 잃어버린 프로젝트는 원래 되찾으려고 회사 위층에서 회의를 열고, 해결책을 만들어 김서진에게 보고했지만 그가 막았다.진정기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는 아니지만 오랜 친구이기에 일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지만 몸이 이러하여 묻지 못하고 일단 일을 덮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걸 진정기의 결정에 맡
“상대가 움직인 것 같아요!”고지호 교수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한소은이 뒤를 따랐다.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사람들은 한소은이 고지호 교수의 뒤를 따르는 걸 보고 어리둥절했다.“한…… 저기…….”그러나 두 사람의 발걸음은 빠르고 멈추질 않았다. 게다가 고지호 교수의 표정이 너무 굳어 아무도 감히 더 묻지 않고 그들이 병동 쪽으로 가는 것을 지켜봤다.‘이거…… 또 비상인가?’‘근데 병동 쪽 호출은 없었는데!’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이미VIP 구역에 도착했고, 많은 병실을 지나 곧장 김서진 병실로 달려갔다.펑!고지호 교수가 발을 들어 직접 문을 걷어찼다. 동작이 빠르고 맹렬하여 한소은도 깜짝 놀랐다.평소에 진지하고 온화한 그분이 문을 걷어찰 때 의외로 용맹스러웠다.방 안의 병상에 한 사람이 눌려 있었다. 이불 쪽으로 얼굴을 숙인 채 엎드려 있었고, 팔은 뒤로 잡혔다. 그리고 그 팔을 잡은 사람이 바로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김서진이다. 김서진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정신이 맑고, 눈빛은 더욱 매서웠다. 다만 눈을 들어 한소은을 보았을 때 한 순간 부드러워지고, 다시 고지호 교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셨나요, 그럼 이 사람…… 그쪽에 넘기겠습니다!”김서진은 그 사람의 팔을 위로 당기고, 이어서 사람을 앞으로 비틀어 밀었다.결국 그 사람은 김서진에게 끌려 일어났고, 앞으로 밀치는 힘에 똑바로 서지 못하고 두 번 비틀거리며 땅에 반쯤 무릎을 꿇었다.그 사람 흰 가운을 걸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고지호 교수는 자신의 앞에 반쯤 무릎을 꿇은 사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정말 받아들이기 싫은 결말이다.“정말 너였어?!”그 말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허둥지둥 일어서서 먼지를 털고 웃었다.“교수님, 이게 무슨 일이죠? 저는 그저 별실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저 아니면 누구겠어요.”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은 죄 없는 듯 눈빛은 너무나 맑았고, 한소은을 보았을 때 의아해하며 물었다.“한
“교수님, 무슨 말씀인지…….”모범은 아직도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소은에게 끊겼다.“그만하시죠.”“…….”“지금 이 상황에 그 변명 먹힐 거라고 생각하세요? 설마 아무 증거도 없이 우리가 여기에 왔을까요?”그를 보는 한소은의 마음도 복잡했다.사실 이곳에 왔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바로 고지호와 모범이다.모범과는 친한 친구사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협력이 유쾌한 동료라고 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편파적인 인식과 불신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사람이었다.배신자보다 원철수처럼 그냥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받아들이기 쉬웠다.한소은의 말을 듣고, 또 앞에 서있는 고지호 교수를 보고 모법은 홀연히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고개를 젖히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마치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온 사람이 홀가분해졌고, 얼굴의 웃음은 더욱 커졌다. 정말 괴이했다.“이렇게 될 줄이야.”고개를 저으며 모범은 천천히 머리를 숙이고 속삭였다.“어떻게 알아챈 거예요? 나 여기서 일하면서 교수님에게 할 만큼 하고, 한소은 선생님도…….”“너무 괴롭힌 거 아니죠?”“빈틈 없었어요.”한소은이 대답했다.“처음엔 정말 의심 한 번 안 했어요, 근데 맹호군 선생이 나타나면서 달라졌죠.”“맹호군 선생님이요?!”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모범은 의아했다.“그자와는 무슨 상관이 있죠?”‘맹호군과 가깝게 지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관계가 차가운데 왜 그 사람 때문이지?’“겉으로 보기에 맹호군 선생님의 혐의가 가장 큽니다. 하지만 그 혐의가 너무 커서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는 거예요.”일이 이때쯤 되면 못할 말도 없었다.“워낙 저에게 불만이 많은 분이라 소희에게 병을 악화시킬 수 있는 약도 몰래 넣었죠. 근데 이 모든 게 너무 겉으로 드러나 있어서 의심스러운 겁니다.”“여긴 능력자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고, 다른 조직에서 들여보낸 사람이라면 더욱 범상치
그러나…….모범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복잡하고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몸은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김서진에게 팔짱이 끌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온몸이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모범 선생님!”한소은이 충격을 받았다. 모범이 자기 앞에서 자살할 줄 정말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왜?!’“마지막 한 발짝만 남았는데!”모범은 손가락 하나를 내밀고, 고개를 들어 한소은을 바라보며 띄엄띄엄 말했다.“당신 목적은 모든 처방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희망과 믿음도 같이 없애 버릴 셈이죠, 해독제는 기대도 하지 말라 뭐 그런 뜻인가요?”그를 보며 한소은은 조용히 물었다. 모범이 이상한 눈빛으로 한소은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독이 너무 빨리 발작하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몸을 힘껏 위로 꼿꼿이 세우더니 머리를 떨어뜨렸다.“숨이 끊어졌어요.”콧김을 떠보고 김서진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모범을 한 번 깊이 보고 나서야 한소은은 비로소 고지호 교수를 바라보았다.“모범 선생…….”“뒷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하나만 먼저 확인할게요!”고지호가 미간을 찌푸렸다.한소은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답했다.“걱정 마세요, 한약의 해독 처방은 이미 개발되고, 약효에도 문제가 없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복용의 편의를 위해 해독제를 알약으로 만들었습니다.”“아무 문제 없죠?”고지호 교수가 다시 한번 물었다.비록 약호도 이미 보았고, 처방은 한소은뿐만 아니라 기타 한의학 의사 선생님과도 여러 번 토론하고 실행성을 확인했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보통 일이 아니니 조그마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됐다.“네, 제 목숨을 걸고 약속합니다!”한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지호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간으로 가서 사람을 불러 모반의 시체를 처리하고 그제서야 몸을 돌려 한소은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요 며칠
“괜찮아요!”김서진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은 한소은의 목덜미에 가볍게 닿았다.한소은도 이제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사실 너무 피곤했다. 지금 긴장이 풀리자 온 몸이 느른해졌다. 자신을 향해 그녀의 몸을 돌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의술이 뛰어난 당신이 있는데 몇 번은 더 감염…….”“그런 말 하지 마요!”김서진의 말을 끊고 한소은은 얼굴을 찡그렸다.“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불길해요!”“그런 걸 믿어요?”김서진은 웃으며 한소은을 자기 옆에 앉히고 그녀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연스럽고 섬세한 움직임이다.두 손을 느슨하게 주먹을 쥐고는 그녀의 다리를 자기 다리에 위에 얹고 두드리거나 쥐어주며 부드럽게 그녀의 불편함을 풀어주었다.처음에 한소은은 다리를 내려놓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끝내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임신한 탓인지 아니면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런지 두 다리가 시큰거리고 더부룩한데 이렇게 주무르니 정말 많이 편했다.“믿는 게 아니라 이번 바이러스 너무 까다로워서요.”한소은은 양손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많은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해독제는 이미 개발된 거 아닌가요?”김서진이 물었다.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김서진 본인이다. 몸의 불편함과 한때 위중한 상황, 그리고 점차 호전되고 회복되는 것, 심지어 나중에 반복되면서 지금 확실히 회복되었다!“하지만 그들이 또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 낸다면요?”그를 보며 한소은은 되물었다.“대처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김서진이 생각하고 말했다.그러나 한소은이 고개를 저었다.“바이러스 하나를 처리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지금 남아시아 경제 전체가 마비된 상황이예요, 우리 쪽은 조치가 빠르고 적절하여 큰 재앙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너무 끔찍해요!”걱정스러운 한소은의 모습을 지켜보던 김서진은 손놀림을 멈추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