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녀가 이 비적이 가짜라는 확신을 들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비적을 훔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김서진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비적을 우해영이 힘들게 훔쳐 온 비적이다. 이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잃어버린 순간 온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정상이다. 김서진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약 자기가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다면 제 성을 뒤집어서라도 꼭 찾아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적을 훔쳐 오고부터 김서진 쪽은 조용하다 못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전에 김승엽도 김서진이 그에게 따지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비적이 잃어버리건 말건 김 서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결론은 하나다. 바로, 이 비적은 처음부터 가짜였다는 것이다. 김서진이 김승엽에게 두 개, 세 개의 함정을 준비했다면, 분명 자기에게도 함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이 다 납득이 갔다. “그렇다는 건 진짜 비적은 아직 당신들 손에 있다는 말이군요.” 우해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가다듬고 계속 물었다. 반면, 한소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한소은의 반응은 우해영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믿지 못한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당신들 손에 없다고?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럼,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비적을 태워 없앴다거나 누군가 보관하도록 맡겨두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아니요.” 한소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비적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우해영의 말은 한소은의 말과 동시에 입에서 튀어 나갔다. 그녀는 조금도 한소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해가면서 날 속이는 이유가 뭐예요? 오늘 난 성의를 가지고 당신과 얘기하려고 부른 거예요. 내게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도 다 밝혔는데 지금 비적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
“몇 년 동안 무술을 배우고 나서 스승님께서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날 데리고 하산했어요. 절을 떠나면서 스승님께서 내게 불경을 한 박스나 전해주면서 시간 날 때 자주 보라고 당부했고요.” 이렇게 말하면서 김서진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스승님이 주신 불경을 여러 번 보고 나서야 모든 무술은 다 심법을 먼저 잘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심법은 모든 무술의 근본이에요. 사실 아무리 대단한 수법이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에요. 게다가 무술뿐만 아니라 사업에서 닥친 어려움도 불경에서 답을 찾을 수 있어요.” 그의 말을 듣고 한소은은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그 말은 당신이 자칫하면 스님이 될 뻔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하마터면 그녀의 남편은 불자가 되어 그녀와 만나지 못할 뻔 했다. 그녀의 말에 김서진은 사뭇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맞아요.” 김서진의 진지한 대답에 한소은은 웃으며 그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지금 이 말들을 우해영에게 알려주자, 처음에는 흠칫 놀라더니 이윽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소은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우해영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항상 믿으며 쫓아왔던 것이 결국에는 거짓이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물건이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 수 있다. “당신이 이 말들을 믿기 힘들다는 거 알지만…….” 한소은이 잠시 멈칫하다 느릿하게 이어서 말했다. “서진 씨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당신의 무술이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는 거예요. 사업에서든 무술에서든 자기보다 대단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렇게 발전한 사회에서 살면서 왜 이토록 최고의 자리를 집착하는 거죠?” “사실,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에 비해 당신은 이미 성공적인 사람이에요. 우씨 가문을 더욱 빛내어 가문의 사람들이 편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천하제일의 자리를 쫓는 거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
“독에 중독된 거예요?” 우해영이 기침하는 모습을 보며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한소은이 물었다. 그녀의 말에 우해영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자기가 독에 중독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사실이 소문이 나게 되면 자기에게 원수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데일은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우해영이 이 시기에 이 사실을 한소은에게 알려줄 거라는 걸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한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앞선 모든 일들을 연결하고는 결론을 내렸다. “당신에게 독을 탄 사람은 바로 당신의 쌍둥이 동생인 거죠?” 이번을 우해영이 흠칫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획 들며 의아한 표정으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우해민이 자기에게 독을 탄 사실은 그녀와 김승엽, 그리고 옆에 있는 데일 만 알고 있는 일이다. 데일이 한소은에게 말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한소은은 어떻게 알았을까? 우해영의 반응에 한소은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사실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당신처럼 신중한 사람에게 독을 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이렇게 쉽게 성공했고 또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분명 당신이 가장 신뢰하고 쉽게 경계하지 않는 사람이 했을 거예요.” “며칠 동안 사람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동생이었으니, 이 모든 일들을 같이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수밖에 없죠.” 우해영은 잠시 침묵했다. 느릿하게 한숨을 쉬더니 한소은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하고 눈치가 빨라요.” “너무 방심한 탓이죠? 당신처럼 예민한 사람이 쉽게 독에 중독될 리가 없는데. 다만, 당신의 쌍둥이 동생은 왜 당신에게 독을 탄 거예요? 친자매잖아요.” 한소은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우해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남자 때문이에요
우해영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한번 보고는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해민이가 당신이 어디가 좋아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당신 같은 남자가 왜 끌리는 거지?” “그래, 맞아. 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더더욱 당신을 해칠 능력이 없어. 그러니까 제발, 날 놔줘!” 김승엽은 잠시 머뭇거리다 한소은을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조카며느리, 아니 사모님, 한소은 씨! 당신은 날 구하러 온 거지? 김씨 가문으로 날 데려가려고 온갖? 어떻게 되었든 어머니가 날 이렇게 버리지 않을 거야. 맞지?” 죽음 앞에서 겁에 질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김승엽을 보면서 한소은은 그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김서진이 죽음을 직면했을 때는 겁에 질린 모습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항상 어떤 일이 닥쳐와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일을 헤쳐 나간다. 마치 모든 일이 그의 손에 잡혀있는 것처럼 항상 그녀를 안심하게 해주었다. ‘김승엽은 역시 김씨 가문의 자식이 아니야. 서진 씨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어.” 목숨을 살려달라 구걸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소은이 담담하게 말했다. “할머니 지금 많이 아프세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더 이상 충격을 받아선 안 된대요.” 그의 일로 반복적으로 충격을 받은 노부인의 심장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조금의 충격도 받아선 안 된다. “그래, 내가 죽으면 어머니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줄 거야. 그러니까 난 죽으면 안 돼. 빨리 날 데려가 줘! 김씨 가문으로 돌아갈게!” 김승엽이 황급히 말했다. 그의 말에 한소은은 어이가 없었다. “…….” “이 사람 데려가도 될까요?” 잠시 고민하다 한소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인이 그를 보고 싶어 하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김씨 가문에 데려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김씨 가문에서 쫓아낸 사람일지라도 다른 가문이 나서서 처리한다면 이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우해영은 작게 고개
“지금 너희 둘을 놔줄게. 네게 자유를 줄 테니 이 사람과 멀리 떠나. 어때?” 우해영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우해민은 그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뭘 원하는지 말해. 이렇게 돌아서 말할 필요 없어!” 한소은을 우해영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해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분명 다른 뜻이 있을 거라는걸 알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 있기만 했다. “정말이야. 너희 두 사람에게 기회를 줄게. 넌 이 사람을 죽을 만큼 사랑하잖아? 함께 떠나고 싶지 않아?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지 않아?” 이 말은 우해민에게 있어서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설령 이것이 함정이라 해도 우해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김승엽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자기의 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건이 뭔데?” 한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난 쌍둥이 안 데다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두 사람이었기에 우해민은 우해영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녀가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자기와 김승엽을 놓아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조건이 있다는 뜻이다. 우해민은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조건은 아주 간단해. 첫째, 앞으로 우씨 가문과 연을 끊고 살아야 해.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우씨 가문과 상관이 없는 거야. 넌 이제 우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니 다신 우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어. 우리의 눈에 띄지 않게 멀리 도망가서 네 삶을 살아!” “…….” 우해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이런 조건은 그녀에게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씨 가문은 그녀에게 좋은 기억이 있는 집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그곳에서의 기억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이었고 악몽과도 같았다. 이제 드디어 그곳에서 벗어나 자기의 삶을 살 수 있으니 다시
“해민씨, 이건 충동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김승엽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그러자 우해민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없다 해도 난 아직 발이 있고 눈도 있고 입도 있어. 우리가 함께라면 어떻게서든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했었지? 당신과 함께라면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순정적인 사람인지 몰랐네!” 우해영이 피식 웃더니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잘 생각해. 우씨 가문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손까지 없고, 네가 사랑하는 이 남자도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야. 앞으로 정말 서로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언니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내 마음을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우해민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그러자 우해영이 데일에게 눈짓했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앞에 퍼런빛이 서려 있는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네 뜻을 따르지. 칼이 닿는 순간, 더 이상 후회할 수 없는 거 알지?” 한소은은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바닥에 떨어진 칼은 머리카락이 떨어져도 두 동강 날 정도로 날카로워 보였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우해민을 한번 쳐다보았다. 우해민은 여전히 굳건히 결심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이것이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직접 자를게!” 이렇게 말하면서 우해민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려 허리를 숙으렷다. 손이 칼에 닿으려던 순간 데일이 발로 칼을 콱 밟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우해영이 다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가 그렇게 급해!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세 번째 조건이 아직 남았단 말이야!” 우해영이 잠시 멈칫하다 김승엽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 번째, 김승엽의 다리 하나도 잘라야 해!” 이 말을 듣자, 김승엽은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우해민도 충격을 받고 소리를 질렀다. “뭐? 안돼!” “안돼!” 김승엽과 우해
“난 언니를 너무 잘 알아. 승엽 씨의 다리를 자르고도 다른 조건을 더 걸 거잖아. 언니는 우리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 조금도 없던 거야. 난 떠나지 않을게. 날 죽여줘!” 우해민은 한껏 의로운 모습으로 우해영에게 말했다. 우해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김승엽만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기의 태도를 표명할 뜻도 없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며? 서로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왜? 기회를 주겠다는데 다리 하나 아쉬운 거야?” 우해영은 비웃으며 한 글자 한 글자 김승엽을 향해 말했다. “작은아버지.” 한소은이 작은 목소리로 김승엽을 불렀다. “우해민 씨가 이렇게 많은 걸 포기한다는데 작은아버지는…… 할 말이 없는 건가요?”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김승엽이 고개를 들어 한소은을 바라보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투에는 조금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어? 내 다리를 자르라고? 미안한데, 난 싫어!” “너희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잖아. 높은 곳에서 쥐새끼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잖아. 난 이제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내 다리까지 빼앗아 가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다리가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고? 김씨 가문이 날 먹여 살려 준대? 평생 먹여 살려 줄 거냐고? 해민 씨는 어떻고?” 김승엽을 우해민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어서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받아주지 않을 거잖아! 당신들은 그저 사람을 가지고 놀 줄만 알지!” “난 그저 살아가고 싶을 뿐이야.” 김승엽은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이게…….” 우해영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내 마지막 조건이라고 장담하지. 해민이의 두 손과 당신의 다리 한쪽만 내놓는다면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어. 앞으로 다시는 너희를 찾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심지어 여기를 떠날 돈도 준비해 줄게. 어디에 가서 뭘 하든 다 나와 상
“해민아!” 우해영은 깜짝 놀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막으려 했다. 옆에 있던 한소은도 깜짝 놀라 손을 뻗었지만 조금 늦어졌다. 아무도 우해민이 자결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우해영이 우해민에게로 몸을 날리자, 데일은 우해민이 자기의 주인에게 해를 가할까 봐 몸으로 우해영을 막아 나섰다. 뾰족한 칼끝이 살을 뚫고 들어오자, 우해민은 고통으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윽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한껏 찡그렸던 미간을 피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해민아!” 우해영은 빠르게 그녀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우해영도 버틸 힘이 없어 두 사람 모두 쓰러져 내렸다. 마침 데일이 달여와 두 사람을 지탱했다. “해민아! 이 계집애야! 미친 거야? 이딴 남자 때문에 죽으려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우해영은 있는 힘껏 소리쳤다.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가슴 아픈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우해민은 어느 때보다 더 활짝 웃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칼을 부여잡고 피범벅이 된 다른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기분 정말 좋아. 이제 난 드디어 자유야. 더 이상 언니의 그림자가 아니란 말이야.” “승엽 씨…….” 우해민은 고개를 돌려 김승엽을 바라보았다. 미약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돼. 사실 난 당신이 날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 난…… 난 당신을 좋아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내가 당신을 좋아한 거면 됐어.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됐어! 그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 우해영이 그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의사 불러. 빨리 의사 부르란 말이야!” 그러자 우해민이 손을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필요 없어.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언니, 나 너무 힘들어…….” 우해민의 시선이 서서히 우해영에게로 가며 점점 작아지는 목소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