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남주역을 맡은 조문이 앞으로 걸어와 입을 열었다."너무 예쁜 드레스네요."이정남이 조용히 소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소희야, 너 진짜 대단해. 정말 드레스를 구해 오다니!"류 조감독은 여전히 눈에 의문을 가득 품고 물었다."어떻게 한 거야?"하지만 소희는 대답하지 않고 맑은 눈동자로 되물었다."제가 새 드레스를 가져왔으니 촬영을 시작해도 되죠?""그건 나중에."류 조감독이 시선을 돌려 이현을 바라보았다."이현 씨, 먼저 드레스를 입어 볼까?""아니요."이현이 일어서서 새 드레스 앞으로 다가가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저 이 드레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의 것이 더 좋아요."이현의 말에 소희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졌고, 이정남은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현, 너무 지나치지 마. 괴롭히고 싶으면 날 괴롭히라고!"이에 이현이 뒤돌아보며 무고한 표정으로 말했다."뭐가 지나쳤는데요? 전의 드레스는 특별히 나를 위해 주문한 거고, 나도 그 드레스가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오늘에 찍을 씬에도 그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난 오로지 작품을 위해서 그러는 건데, 뭐가 잘못된 건가요?"이때 여민도 맞장구를 쳤다."나도 전에 그 드레스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데."이정남이 분노하며 이현을 쳐다보았다."이현, 네 덕분에 난 매번 인간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돼."이현이 듣더니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인간성에 대한 인식이 정말 천박했나 보네요.""젠장!"이정남이 욕설을 퍼부으려는 순간 소희가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류 조감독이 보더니 바로 굳어진 얼굴색으로 소리쳤다."이정남 씨, 뭐 하는 거야? 하기 싫어?"이에 이정남이 냉소하며 말했다."드레스가 고의로 손상되어 소희가 새 드레스를 가져왔는데도 당신들이 물고 놓지 않는 걸 보니, 다 같이 짜고 들어 소희를 괴롭히려는 거네?"류 조감독이 듣더니 바로 화를 냈다."너 헛소리 하지 마. 누가 소희 씨를 괴롭
류 조감독이 화난 얼굴로 소리를 쳤다."아니! 오늘 딱 이 씬만 찍을 거니까, 의견이 있는 놈들은 당장 꺼져!"얼굴색마저 파랗게 질린 이정남은 바로 소희의 손목을 잡고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뒤에서 차가운 남자의 소리가 들려왔다."왜들 이래?"그리고 남자의 목소리에 소희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이현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더니 바로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구택 씨!"류 조감독도 뒤따라 고개를 돌려보고는 순식간에 웃음을 얼굴에 걸고 상대방을 맞이했다."임 대표님, 어떻게 오셨습니까?"주위에 스태프들이 둘러싸인 걸 고려한 듯 이현은 임구택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그러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상처는 어떻게 됐어요?""괜찮아."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소희와 그녀의 조수가 안고 있는 드레스를 쳐다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죠?"류 조감독은 바삐 있는 일 없는 일까지 보태가며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소희에게 돌려 패션 디자이너로서 중요한 드레스를 잘 보관하지 못했다고, 심지어는 자신이 맡고 있는 물건을 탐내고 있다고 덧붙였다.류 조감독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현이 즉시 정색했다."소희 씨는 분명 고의가 아니었을 거예요. 이 일은 그냥 넘어가죠. 난 새로 보내온 드레스를 입어도 돼요, 새 드레스가 더 예쁘기도 하고.""허!"이정남이 듣더니 냉소하며 조롱하는 표정을 지었다.순간 이현이 방금 한 말에 인정을 표했다. 그는 확실히 인간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천박했다.다른 두 얼굴과 고약한 심보를 이렇게 남김없이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니.하지만 임구택의 눈빛은 이정남의 팔을 잡고 있는 소희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작은 일에도 논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류 조감독은 이런 식으로 촬영장을 돌보는 겁니까?"류 조감독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그럼 임 대표님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임구택의 말투는 차고 무거웠다."아
곧 아무도 없는 영상 속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노트북 앞으로 다가왔다. 손가락이 재빨리 노트북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CCTV를 검색하는 듯했다.그리고 노트북 속의 사람을 알아본 후 다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일제히 여민의 뒤쪽을 바라보았다.영상 속에 등장한 사람은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가 간 상의를 입고 있었고, 손톱에는 연핑크색의 매니큐어를 하고 있었으며 약지에는 은색 하트 반지를 끼고 있었다.바로 여민의 조수, 왕연이었다.왕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임구택이 매서운 눈빛으로 왕연을 쳐다보며 물었다."너와 상관없는 일인데, 소희의 노트북은 왜 건드린 거지?""나, 난......"왕연이 놀라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설명했다."난 그냥 누가 드레스를 훼손했는지 궁금해서 먼저 CCTV를 보러 갔을 뿐입니다."여전히 차갑고 무거운 임구택의 목소리는 사람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내가 다시 한번 물을게, 너 맞아?"왕연은 순간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아니요, 나 아닙니다!"그러자 임구택이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정남 씨,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하세요. 훼손된 드레스에 틀림없이 범인의 지문이 남아있을 겁니다. 이 드레스는 적어도 수백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형사처벌을 받기엔 충분할 겁니다.""네!"이정남이 대답하면서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경찰에 신고하지 마요! 신고하지 말라고!"왕연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제발 경찰에 신고하지 마요, 내가 다 말할게요!""정말 너야?"이정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왕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왕연은 놀란 나머지 울부짖으며 대답했다."여, 여민 씨가 시켰어요!"짝-여민은 듣자마자 일어나 왕연에게 뺨을 날렸다. 그러고는 놀란 얼굴로 화를 내며 소리쳤다."헛소리하지 마! 누가 너더러 드레스를 훼손하라고 했어! 정말 네가 한
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렸다."여민 씨, 그만 해요.""뭘 그만 해요!"여민이 고개를 돌려 왕연을 노려보았다."내가 평소에 너한테 못 해준 게 있어? 왜 나를 모함하는 건데?"왕연은 고개를 숙인 채 울고만 있었다."나도 잠시 머리가 잘못돼서 너의 말을 믿은 거지."여민은 달려들어 왕연을 때리려 했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여민을 말렸다.여민은 왕연를 가리키며 노발대발하여 말했다."너 딱 기다려, 나 반드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여민 씨!"이현이 여민의 손을 잡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만하라고요. 류 조감독님도 여민 씨를 어떻게 하겠다고 아직 말하지 않았잖아요.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웠다간 정말로 좋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임구택을 바라보았다."구택 씨, 왕연 씨만 해고하고 이 일은 여기서 끝내요. 틀림없이 왕연 씨가 여민 씨를 종용해서 여민 씨가 이런 어리석은 일을 했을 거예요."여민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삼켰다.임구택이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입을 열었다."난 단지 의견을 제출해 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주고 싶었을 뿐이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제작팀의 일이고, 난 끼어들지 않을 거야. 그러나......"임구택이 말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풀숲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이렇게 많은 다이아몬드가 너무 아깝네. 방금 누가 소희에게 다이아몬드를 하나씩 주우라고 했죠?"류 조감독이 즉각 대답했다."여민 씨가요.""그럼 말한 사람이 주워요, 낭비하지 말고."류 조감독이 듣더니 바로 여민에게 말했다."여민 씨와 왕연 씨! 다이아몬드를 하나씩 다 주워!"왕연은 고분고분 쪼그리고 앉아 다이아몬드를 줍기 시작했다. 여민은 비록 달갑지 않았지만 또 임구택이 정말 화를 내게 되면 고명계조차도 그녀를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이아몬드를 주을 수 밖에 없었다.이때 임구택이 조감독을 힐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이번 일은 류 조감독님의 불찰도
그는 소희와 여민을 전부 증오했다. 그러나 여민은 고 사장의 사람이라 감히 미움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난 어투로 여민에게 말했다."직접 다이아몬드를 소희 씨에게 가져다줘. 나머지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류 조감독이 떠나자 여민은 바로 손을 들어 왕연의 머리카락을 잡았다."네 이 년......"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연이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에 옆에 있던 스태프들이 분분히 쳐다보았다.여민은 힘껏 왕연을 밀쳤다."천한 년!"왕연은 바닥에 쓰러져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여민은 그러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다이아몬드가 든 상자를 들고 소희 찾으러 갔다.소희는 노트북에 마주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여민은 밖에 한참 서 있다 차가운 얼굴로 들어가 다이아몬드가 담긴 상자를 책상 위에 놓았다."전부 여기에 있어."한 시간 동안 햇볕을 쬐고 나니 여민의 머리카락은 이미 땀에 젖었고, 얼굴의 메이크업도 번져서 유난히 낭패해 보였다.소희는 그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여민은 바로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다시 발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난 왕연에게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어. 네가 믿든 말든 알아서 해."그러고는 발길에 화를 담고 방을 나갔다.소희는 마우스에 손을 얹은 채 옆에 놓인 다이아몬드 상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때 방으로 들어온 이정남이 여민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저 여인이 왜 왔어?""다이아몬드를 가져다주러요."소희가 담담하게 말했다."뭐라고 하던?"이정남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난 류 조감독이 너를 괴롭히려는 줄 알았는데, 여민일 줄은 정말 몰랐네. 너 언제 저 여인에게 미움을 산 거야?"소희는 그날 밤의 광경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오해였어요.""여민은 그렇다 치고. 이현이 정말 너무 어이없는 거 아니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너를 난처하게 만들더니, 임 대표가 오자마자 바로 표정을
임구택은 줄곧 소희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다가 차가 멀리 떠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가자."그러는 그의 모습에 이현의 눈동자에 순간 빛이 번쩍였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임구택을 따라갔다.......이튿날, 소희가 일하고 있는데 구은서가 손에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와서는 창가에 기대 말했다."내가 오지 않은 사이에 또 재밌는 구경을 놓친 것 같던데?"소희가 종이 위에 설계도를 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보고 싶으면 스스로 찍던가."구은서가 소희를 보며 냉소했다."설마 너도 정말 여민 씨가 너를 해치려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소희의 펜끝이 순간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은서가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말을 이어갔다."내가 장담하는데, 이 일은 무조건 이현이 한 짓이야. 먼저 여민 곁에 붙어있는 왕연을 매수한 후 류 조감독의 손을 빌려 너를 제작팀에서 쫓아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똑똑할 줄은 몰랐던 거야. 게다가 구택 씨의 도움으로 일이 들통나자 아예 또 왕연더러 모든 일을 여민 씨에게 뒤집어씌우게 하고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구경만 하고, 겸사 겸사 구택 씨 앞에서 좋은 사람 역할을 한 거지."구은서가 "쯧쯧"거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어린애가 속은 참 깊네."소희가 듣더니 비웃듯이 물었다."은서 씨의 진수를 전수받은 게 아닐까?""그런 말은 넣어둬. 난 그렇게 오랫동안 계획했는데도 구택 씨를 얻지 못했으니 감히 그 여인과 비교할 수 없는 거야.""겁 먹지말고 다시 한 번 겨뤄봐.""뭐야, 지금 이간질하는 거야?""아니, 둘 중에 누가 이기든 나와 상관없거든."구은서가 듣더니 갑자기 다가와 짙은 메이크업을 한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았다."구택 씨가 사실 너를 해치려고 한 게 이현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소희는 조용히 구은서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구은서가 눈썹을 올린 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나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을
조백림이 전화를 끊고 바로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구택 형, 회사에 있어요?"임구택은 방금 회의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공문을 보고 있었다."왜?""전에 구택 형을 다치게 한 일 때문에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저녁에 우리 같이 밥 먹어요, 내가 조용하게 구택 형에게 밥 살게요."조백림이 아주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관둬."하지만 임구택이 담담하게 거절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 없어.""인사치레가 아니에요!"조백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희 씨도 부를 거거든요. 유정이 줄곧 소희 씨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던데, 저녁에 같이 만나요."임구택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이 순간 멈추었다."그럼 저녁에 다시 결정하지.""그래요, 내가 저녁에 전화할게요!""응."전화를 끊은 후 임구택이 잠시 생각하고는 사무실 안의 전화를 눌러 분부했다."저녁에 나 다른 볼일이 있으니까 호명의 파티엔 네가 가."진우행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전화를 내려놓고 임구택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창밖의 햇빛은 따듯했지만 그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녹여주지는 못했다.그의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 깊은 곳에는 유감스러운 정서가 비쳐져 있었지만 그 유감스러움은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오후에 유정이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구해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소희가 웃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그날 룸안의 모든 사람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나도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선 거였으니까."유정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러나 당시 가장 위험했던 사람이 나였잖아요. 그러니까 밥은 무조건 대접할 겁니다. 백림 씨의 뜻이기도 하고요. 밥만 먹는 건데, 친구 한 명 사귀는 셈 치고 나오면 안 될까요?"소희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결국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위치가 어디죠?""내가 주소를 보내드릴게요.""네."전화를 끊자
"늦지 않았어요. 우리도 방금 도착했는걸요!"조백림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이때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백림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임구택은 아무 말도 없이 소희의 옆쪽 의자에 앉았다.붙어 앉은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갑자기 미묘해졌다.유정이 메뉴판을 들고 주문하기 시작했다."소희 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조백림이 웃으며 대신 말했다."소희 씨는 단 음식을 좋아하니까 디저트 같은 것들을 많이 주문해 줘.""단 음식을 좋아하는 건 아마 우리 여자들의 공통성일 거예요. 이곳의 아이스크림이 괜찮은데, 우리 한 사람당 2인분씩 주문하는 게 어때요?"먹는 얘기가 나오니 유정의 눈이 순간 빛나고 있었다.하지만 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임구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1인분이면 됩니다. 소희가 요 며칠 차가운 걸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거든요."다들 어린애도 아니라 순간 임구택의 뜻을 알아차렸다.유정은 멍하니 소희와 임구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소희는 줄곧 소외감이 묻은 얼굴을 하고 있어 임구택과의 관계가 자신과 조백림과의 관계보다는 친밀하지 않은것 같았지만 임구택의 말을 들으면 또 왠지 이유 모를 정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그러다 유정은 갑자기 그날 넘버 나인에서 소희가 폭탄을 들고 베란다로 달려갈 때 필사적으로 같이 달려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소희를 품으로 감싼 임구택의 모습이 생각났다.그런 본능적인 보호는 절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설마 임구택 씨가 소희 씨를 좋아하는 건가?’이때 소희가 유정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2인분으로 주문해 줘요."임구택이 눈을 길게 뜨고 소희를 흘겨보았다."1인분.""2인분."임구택이 실눈을 뜨고 차갑게 물었다."꼭 그렇게 나와 맞서야 해?"이에 소희가 평온하게 대답했다."임 대표님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의 일을 제가 알아서 결정하는 건데, 맞선다고는 할 수 없죠."임구택이 조용하게 어두운 눈빛으로 소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