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의 눈동자 속엔 화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러다 바닥에 널브러진 펜 조각들을 한 번 보고는 몸을 웅크려 줍기 시작했다.이때 이정남이 들어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여인이 갔어? 뭐라고 했는데?"소희는 다 쓰지 못한 필심을 뽑아내고 깨진 필대를 쓰레기통에 던진 후 담담하게 말했다."별말 안 했어요. 그냥 내가 앞으로 우린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알려줬어요."이정남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잘했어. 그 나쁜 여인이 무슨 낯짝으로 우리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젠장!"소희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평정심을 되찾은 듯했다."자, 업무에 영향 끼치는 얘기는 그만하고요. 이현 씨 얘기도 그만 합시다."이정남도 소희가 슬퍼할까 봐 즉시 말했다."그래, 앞으로 다시는 그 여인을 언급하지 않을 거야!"......저녁에 소희가 1차 디자인에 전념하고 있는데 심명이 페이스톡을 보내왔다.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별장 스위트룸의 안팎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똑똑히 봤지? 여자 없어."소희가 힐끗 쳐다보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심명, 너무 유치한 거 아니야?""난 네가 딴생각할까 봐 그러는 건데, 내가 유치하다니."심명이 소파에 앉아 조각진 자신의 옆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이어갔다."나를 봐봐. 네 생각에 불면증까지 걸리는 바람에 여기에 뾰루지가 난 게 보여?"소희가 한 번 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뜨거운 물 많이 마셔.""나빴어!"심명이 분개하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너 왜 내가 언제 돌아가는 지 한 번도 묻지 않는 거야?""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회피하는 건 모든 사람의 본능이야."소희가 들고 있는 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며 천천히 말했다.그리고 소희의 대답에 심명이 잠깐 멍해지더니 바로 알아차리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가 항상 속마음과 정반대되는 답을 말한다는 걸 나도 잘 알아. 말로는 내가 돌아가는 게 싫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 날 그리고
소희가 바로 미간을 찌푸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돌은 왜 옮기는 겁니까?"팀장이 소희를 보더니 헤헤 웃었다."소희 씨."돌의 크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작은 건 걸상 하나의 무게와 같았고, 큰 건 적어도 백 근은 쉽게 넘었다.이정남이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허리를 펴고는 말했다."오후에 촬영할 때 써야 해."팀장도 옆에서 덩달아 말했다."오후에 실외 생일파티 씬이 있는데, 이현 씨가 가산을 배경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요. 마침 이 돌들이 딱 좋거든요."소희가 아직 다 옮기지 않은 큰 돌 몇 개를 힐끗 보더니 이정남에게 물었다."밥은? 먹었어요?"이정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아니, 다 옮기고 먹으러 가려고."이때 팀장이 귀찮다는 듯 재촉했다."이현 씨가 먼저 효과가 어떤지 봐야 하니까 서둘러!"소희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이정남은 이쪽 업계에서 몇 년간 근무한 자로서 경력도, 능력도 모두 말할 것 없었다. 심지어 이전의 제작팀에서 이미 부주임 자리까지 올라앉은 사람인데 지금 제작팀의 직원들이 감히 그를 막노동꾼으로 부리고있다니."진 팀장님, 이정남 씨가 비록 임시로 우리 제작팀에 가입한 거라지만 이정남 씨의 경력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막 부려 먹어도 되는 겁니까?"진 팀장이 듣더니 바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소희 씨, 말이 좀 심하네요. 막 부려 먹다니요? 위에서 맡겨 준 임무를 착실히 완수하는 게 뭐가 잘못 됐다는 겁니까?""뭐가 잘못됐냐고요? 이정남 씨 혼자서 세 사람의 일을 하고 있고,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밥 먹으러 가지 못하는 게 잘못된 거 아니라는 겁니까?"소희가 물었다.그러자 진 팀장이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촬영 진도는 빡빡하고, 이현 씨와 감독들은 기다리고 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어!""소희야, 그냥 내버려 둬. 금방이면 다 옮겨."이정남이 소희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렸다.소희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는 바로 몸을 돌려 바닥의 돌을 차에 올려
소희가 직원을 차갑게 쳐다보며 물었다."도시락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이에 직원은 소희의 눈빛을 피하며 무언가를 감추려는 사람처럼 화가 난 말투로 대답했다."이건 다른 사람 몫입니다!"소희는 두말없이 도시락들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직원이 보더니 얼굴섹이 어두워져서는 달려가 소희를 잡아당기려 했다.하지만 소희가 바로 몸을 돌려 다리를 들고 옆에 있는 나무 탁자를 걷어찼다. 무거운 나무 탁자가 ‘끽끽’소리를 내며 직원을 향해 날아갔다.직원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뒤쪽 도시락을 담은 상자에 부딪쳤고 상자가 도시락과 함께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직원이 겁에 질려 소희를 바라보았다.가녀린 몸에 심플한 흰 티셔츠와 옅은 색의 청바지를 걸친 소녀는 학생처럼 보였지만 눈동자에는 살기가 넘쳤다. 게다가 방금의 일격에 직원은 얼굴색마저 하얗게 질렸다.소희의 눈동자는 맑고 차가웠다."다시 감히 사람을 업신여겼다간, 다음엔 바로 네 얼굴을 걷어찰 거야."직원은 뒤로 움츠러든 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소희는 이정남을 데리고 자기가 일하는 방으로 갔다. 그러고는 그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일단 먼저 밥 먹어요."이정남은 침울하고 복잡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내가 이곳으로 오면 너를 보호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에게 폐를 끼쳤네."소희가 옆 의자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이게 무슨 폐라고 그래요? 정남 씨야말로 왜 굳이 이곳까지 와서 사서 고생해요? 빨리 사직하고 이전 제작팀으로 돌아가요.""안 돌아가!"이정남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고작 이런 수단으로 날 물리치려고? 그 여인이 어디까지 나가는지 지켜볼 거야."며칠째 ‘특별 대우’를 받고 나니 뒤에서 이정남을 배척하라고 시킨 자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소희의 눈동자가 점점 어두워졌다.‘이현이 감히 직접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암암리에 정남 씨를 괴롭힐 수밖에 없었겠지.’옛정은 역시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오후소희가 한창 통계표를 작성하고
소희가 듣더니 일어나 이현 쪽으로 향했다.그러자 이현이 눈을 깜박이며 연약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 씨......"짝-소희가 힘껏 이현의 뺨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 힘을 못 이긴 이현은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졌다. 입 안에는 순간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머리속은 계속 윙윙거리고 있었다. 이현은 그대로 멍해졌다.촬영장 전체가 삽시간에 조용해지더니 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이현의 조수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러고는 얼굴이 부은 것도 모자라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이현의 모습에 소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당신 우리 현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오늘 이 일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 딱 기다려!"여민, 조문 및 기타 부감독들은 바로 그들을 에워쌌고 기타 직원들은 구경하는 에스트라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절대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촬영 현장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한 조수가 이현을 부추기자 다른 4~5명의 조수가 급히 달려와 우산을 들어주고 물을 건네주고 소독 물티슈를 건네주었다.조감독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희를 노려보았다."소희 씨!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가 있습니까? 소희 씨가 아무리 북극의 디자이너라고 해도 우리는 경찰에 신고해서 소희 씨를 잡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그럼 경찰에 신고하세요."소희의 얼굴은 무정할 정도로 차가웠다."마침 경찰더러 이정남 씨가 왜 떨어졌는지, 사다리 뒷면에는 왜 누군가가 톱질한 흔적이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하면 되겠네요."모두들 순간 멍해졌다.이현이 듣더니 부은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머금고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래서 나를 의심하고 있어서 나를 때린 건가요?"이정남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보았다."네가 한 짓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소희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만약 찔리는 부분이 없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더러 와서 조사하라고 해. 그리고 너의 행
그러다 조금 멀리 떨어진 후 조수 나나가 즉시 말했다."저 소희라는 여인이 정말 어이없네. 내가 아까 바로 임 대표님에게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임 대표님께서 알게 되면 무조건 저 여인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현의 반쯤 늘어진 눈에서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그윽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관둬요, 이런 작은 일로 구택 씨를 귀찮게 하지 마요."나나가 듣더니 더욱 분개해서 말했다."그렇다고 이렇게 맞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이래 봬도 너 이 드라마의 주연이고 임 대표님의 여자친구야. 그 여인이 뭔데 너를 때려? 임 대표님이 바로 그 여인을 깔아뭉갤 거야.""그만하고 어서 가서 아이스팩이나 찾아줘요. 촬영도 아직 남았는데, 부기 빨리 빼야 해요."이현의 분부에 나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아이스팩을 찾아오라고 하고 이현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현이야, 너는 마음이 너무 약해. 이렇게 맞아도 스스로 참고 있으니까 다들 너를 괴롭히려 하는 거잖아."이현이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나와 소희 씨는 아주 친한 절친이었어요. 지금은 나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고요.""오해?"나나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현이야, 너 정말 너무 단순한 거 아니야? 사람 마음이 얼마나 험악한지 전혀 모르네. 소희는 분명 네가 지금 잘나가고 있고, 임 대표님과 같은 좋은 남자친구까지 있다고 질투하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다들 보는 앞에서 너를 난처하게 한 거라고."이현이 듣더니 부드럽게 웃었다."그러니까요. 난 이미 이렇게 행복한데, 뺨 한 대 맞는 게 뭐가 대수라고요."그러자 나나가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말했다."현이야, 넌 정말 예쁜 것도 모자라 착하기까지 하네. 앞으로 너 반드시 더 잘될 거야. 그때 가서 그 여인을 배 아파 죽게 만들자."같은 시각 이마에 이미 약을 다 바른 이정남의 안색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소희야, 오늘부터 우리는 이현과 남보다 못한 사
다들 듣더니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소희의 시선이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하지만 의외로 임구택을 보지 못했다.이때 간미연이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북극으로 다시 출근했다고 들었는데, 어때?""여전히 제작팀으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그럼 됐어."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장시원이 갑자기 소희를 불렀다."소희 씨, 와서 같이 놀아요."그런데 소희와 간미연이 다가가니 구은서도 덩달아 다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소희 씨를 보니 또 우리 예전에 함께 카드놀이를 할 때가 생각이 나네. 나도 놀래."그러고는 소희의 곁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다들 보는 앞에서 이현을 때렸다며? 나 너무 속 시원해!"이에 소희가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전의 일에 대해 난 누구와도 따지고 싶지 않아. 단 내 주변 사람을 다치게 했다간 상대가 누구든 난 반드시 그 사람을 죽는 것보다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구은서가 듣더니 눈에 순간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눈썹을 올리며 의자에 앉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규칙은 예전 그대로입니다."장시원이 다가와 카드를 들고 말했다."그리고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그렇게 각자 자리에 앉은 후 장시원이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장명원은 간미연의 뒤에 앉아 가끔 귀띔해 주군 했다.첫판이 끝나자마자 구은서의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그녀는 전화를 받으러 갔고 조백림이 그녀의 위치에 앉아 대신 놀아주었다.소희는 게임이나 카드놀이 같은 거에 대해 능통한 축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간미연이 바로 소희의 전 순서라 때때로 그녀에게 유리한 카드를 한 장씩 던져준 덕분에 너무 비참하게 지지는 않았다.그러다 카드 한 장을 손에 들고 버릴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오진수 등의 소리가 들려왔다."구택이 형!"손에 카드를 꽉 잡고 있던 소희의 동장이 순간 멈추었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손에 든 카드를 던졌다.장시원이 보더니 바로
소희가 테라스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간미연이 곧 다가와 주스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무슨 일이 있어?"소희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조 도련님도 이미 약혼했는데 미연 씨와 명원이는요?""마침 너에게도 말하려고 했어."간미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양쪽 집안에서 이미 준비하고 있어. 빠르면 이번 달에 할 것 같아."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있었고, 양쪽 집안에서도 줄곧 서둘러 약혼식을 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장명원과 간미연은 이심전심으로 소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지금까지 끌었던 것이다.소희가 돌아와야만 그들이 시름 놓고 약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소희가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축복해 주었다."축하해요.""넌? 심명 씨가 너에게 정말 잘해 주는 것 같던데. 그 사람을 한 번 고려해 보는 건 어때?"간미연은 줄곧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야만 진정으로 옛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난 급하지 않아요. 인생에는 연애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소희가 웃으며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시선을 돌려 바깥의 빛나는 밤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룸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소리를 치며 들어왔다."조백린, 너 나와!"룸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카드를 놀고 있던 조백림이 소리에 일어나 들어온 여인을 한 번 보더니 바로 멍해졌다."수정아!""조백림, 너 나랑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어? 왜 다른 여자랑 약혼했어?"조수정이 슬프고 분개한 표정으로 조백림을 바라보았다.테라스에 있던 소희가 여인을 보더니 놀라움에 빠졌다. 눈앞의 여인은 거의 알아보지 못할 지경으로 변해 있었다.조백림이 예전에 청아를 꼬셔내지 못한 후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바로 조수정이었다. 그때 모임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주 온순하고 청아한 소녀였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된 것 같았다.도를 넘은 성형 때문에 동글동글했던 얼굴은 길쭉하고 뾰족해졌고, 눈도 더욱 커져 예전보다는 성숙해
이때 조용히 조백림의 곁에 서 있던 유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백림 씨, 아무래도 조 아가씨와 잘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내가 자리를 피해줄까요?"소희는 다소 놀랍다는 눈빛으로 유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약혼녀의 신분으로 조백림에게 따지고 조수정과 우열을 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토록 냉정하다니.간미연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역시 유정 씨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하지만 조백림이 곧 대답했다."아니, 난 해야 할 말들을 전부 다 했어. 그러니 더 이상 할 말도 없어.""네가 바로 유정이야?"조수정이 갑자기 유정을 쳐다보며 물었다.이에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자 조수정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그쪽과 단독으로 몇 마디 해도 될까?"유정은 그녀가 불쌍하게 우는 모습에 마음이 순간 약해져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세요?""가지 마요!"소희가 낮은 소리로 외쳤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조수정이 갑자기 한 손을 뻗어 유정을 잡아당겨 연거푸 뒤로 물러섰고, 다른 한 손으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유정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나쁜 년! 백림 씨는 너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 왜 그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거야?"조수정이 이성을 잃자 다들 깜짝 놀랐다.조백림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 화를 냈다."조수정, 너 미쳤어?""나 미치지 않았어! 난 단지 나 자신을 위해, 우리의 죽은 아이를 위해 복수하고 싶을 뿐이야!"조수정이 고함을 질렀다. 비수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떨고 있었고 날카로운 칼날이 끝내는 유정의 하얀 목을 살짝 베었다. 그러자 피가 이내 흘러내렸다.유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조수정의 손에 있는 비수와 최대한 거리를 두고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요. 두 분의 일은 나와 무관합니다.""백림 씨와 결혼 할 사람이 바로 당신인데, 어떻게 당신과 무관할 수 있지?"조수정이 질투하는 눈빛으로 유정을 노려보았다."수정아, 진정해!""조수정!"황정아와 조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