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은 눈살을 찌푸렸다."나는 그가 무슨 나쁜 짓 저지를까 봐 무섭진 않거든. 그냥 그가 자꾸 이렇게 돌아다니면 우리 둘째 큰아버지가 걱정해서 말이야."구택이 말했다."명원도 이 2년 동안 많이 성장했어. 그는 비록 줄곧 나를 따라 배웠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각이 있어. 자꾸 그를 아이 취급하지 마!""응, 그냥 그가 이번에 돌아오면서 강성에 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어!"시원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갑자기 구택을 바라보았다."정말 담배 끊은 거야?"구택은 태연하게 말했다."원래 중독도 아닌데 뭘. 끊었으면 끊었지, 내숭은 무슨!"시원은 유유히 웃었다."설마 소희 씨가 너 못 피게 한 건 아니겠지? 아직 사이도 확정되지 않았는데 벌써 널 간섭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만 하는 말이지만, 여자는 너무 오냐오냐해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네가 당할 거라니까!"구택은 시원의 말에 화가 나지 않았고 속으로 오히려 알 수 없는 기쁨과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소희는 그가 담배를 피우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아이스크림을 먹을 구실이 있었으니까.두 사람이 말을 하고 있을 때 구택은 때때로 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더니 전화가 왔다. 진우행이 전화를 한 것을 보고 그는 일어나서 베란다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시원은 술을 많이 마셔서 뒤이어 일어나며 화장실로 갔다.두 사람이 일어서자마자 소희가 술을 들고 들어왔다.소파 이쪽에는 사람이 없었다. 소희는 술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구택이 소파에 걸쳐 놓은 양복 외투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 가서 주웠다.명원이 술을 가지러 오며 소희가 구택의 외투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인차 어두워졌다."뭐 하는 거죠?"소희는 멈칫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인형 같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잘생겼고 몸짓도 날렵해서 인차 그녀의 앞에 왔다.명원은 소희 앞에 가서 구택의 양복을 뺏어오더니 눈살을 찌푸렸다."물건을 훔치려는
소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아요! 참, 시원 씨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그냥 오빠라고 부르라니까요, 왜 또 이렇게 존댓말 쓰는 거예요? 소희 씨가 날 시원 오빠라 부르면 구택은 기껏해야 기분이 안 좋겠지만 이렇게 존댓말 쓰면 구택은 정말 나한테 화낼 거라니까요!"시원은 농담을 하며 소파를 가리켰다."무슨 일이에요, 앉아서 말해봐요!"소희는 소파에 앉아 카드 한 장을 꺼내 시원 앞으로 건네주었다."이 안에는 2000만 원이에요. 내가 청아 대신해서 그 돈 갚을게요."시원은 의외라 느끼며 테이블 위의 카드를 보고 웃었다."소희 씨, 지금 내 체면을 구기는 거예요!"소희는 즉시 말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단지 청아가 너무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녀 대신해서 이 돈을 갚으려는 거예요. 이 일은 구택 씨와도, 우리의 관계와도 상관이 없어요."시원은 소파에 기대며 부드럽고 우아했다."소희 씨는 청아 씨의 친구니까 틀림없이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녀가 원한다면 나는 아예 그녀더러 이 2000만 원을 갚지 말라고 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소희 씨의 돈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가 이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그녀는 들을 수 있겠어요? 소희 씨가 이 돈을 대신해서 갚았다는 것을 알면 그녀는 틀림없이 또 소희 씨한테 갚으려고 할 거예요!"그는 잠시 멈추다 계속 말했다."아니면 소희 씨는 청아 씨가 소희 씨에게 빚진 돈을 급하게 갚을 필요가 없으니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힘들 거예요!"소희는 눈을 떨구었다. 시원의 말이 맞았다. 청아의 성격은 집요하고 또 솔직해서 소희한테 돈을 빚지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갚도록 자신을 강요할 것이다."그녀의 성격으로 다른 사람이 베푸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건 사실 좋은 일이에요. 앞으로 그녀가 사회에 나가면 적어도 이 방면의 손해를 보지 않을 테니까요!"시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녀더러
소희는 더는 여기에 앉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나 먼저 갈게요. 필요하면 나 부르고요!"구택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바쁘지도 않은데 어딜 가는 거예요?"시원도 말했다."가지 마요, 마침 우리 세 사람 카드놀이할 수 있잖아요. 소희 씨가 가면 내가 또 어디 가서 사람 찾아요!"소희는 구택 그들과 몇 번 놀았지만 여전히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난 틀림없이 질 거예요."시원은 포커를 꺼내 웃으며 말했다."내가 챙겨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편하게 놀아요. 이기면 소희 씨 몫이고, 지면 내 몫이에요!"구택은 그를 흘겨보았다."성벽도 네 낯가죽보다 얇겠다!"시원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내가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그는 두 손으로 카드를 뒤섞다가 갑자기 명원이 달려와 흥분해하며 말했다."뭘 놀아요, 나도 끼워주면 안 돼요!"소희는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세 분이서 놀아요!"시원은 명원을 힐끗 쳐다보았다."왜 거기 가서 안 놀고?"명원이 말했다."백림이 나를 대신해 주고 있어요!"시원은 말했다."그럼 구택이랑 놀아줘, 내가 거기 가서 놀게."명원은 그의 손에 있는 카드를 받았다."응, 그럼 가봐요!"시원은 소희에게 웃으며 말했다."여전히 그 말이에요. 이기면 소희 씨 몫, 지면 내 몫이에요. 이 오빠는 아이스크림도 사줄 수 있어요!"구택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보자 시원은 도발하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고 몸을 돌려 오락 구역으로 갔다.명원은 카드를 씻을 때 소희를 한 번 보았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시원의 사람인지 아니면 구택의 사람인지 좀 헷갈렸다.세 사람이 카드놀이를 시작하자 명원은 카드를 가지고 와서 판돈을 말했다.소희는 깜짝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큰 거 아니에요?"명원은 일부러 그녀한테 겁을 주려고 했기에 담담하게 말했다."커요? 우린 평소에 다 이렇게 노는데!""전혀 안 커!" 구택은
소희는 구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시원은 소희의 자리에 앉아 "쯧쯧"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다르다니까!"명원은 고개를 들었다."뭐가 달라요?"시원은 웃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구택의 전화가 울리자 그는 시원의 야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받으러 갔다.구택이 떠나자 명원은 안색이 담담해지더니 술 한 잔을 따랐다."형, 구택 형하고 방금 그 소희는 무슨 관계예요?”시원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아무튼 앞으로 소희 씨를 보면 예의 있게 굴어!"명원은 콧방귀를 뀌었다."구택 형이 여자 하나 때문에 나와 싸우겠어요?"시원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했다."너 내 말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명원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구택 형 정말 그녀를 좋아하는 거예요?"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은서 누나는요?"시원은 눈빛이 깊어지며 나지막이 말했다."구은서가 스스로 구택을 포기한 거야!"시원은 명원이 입을 열자마자 그의 말을 끊었다."구택이 도대체 누구를 좋아하는지 묻지 마. 나는 단지 구은서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구택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것만 알아!"명원은 안색이 어두운 채 말을 하지 않고 술잔의 술을 단숨에 마시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만약 구택 형이 결혼을 한다면 난 은서 누나만 인정할 거예요. 은서 누나도 종래로 구택 형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누난 돌아올 것이라고요!"......소희는 휴게실로 돌아와 잠시 책을 보다가 인차 돈을 입금 받았다. 그녀가 방금 이긴 칩이었다. 시원은 다른 사람더러 현금으로 바꾸게 했다.그녀가 케이슬에서 일 년 내내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소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시원이 사실 이런 방식으로 명원을 대신해서 그녀에게 사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경 그녀가 이긴 돈은 대부분 명원의 것이었다.시원은 이렇게 섬세하고 매너가 있었으니 그렇게 많은 소녀들이 그를 떠나면 죽거니 살거니 했던 것이다. 그는 확실히 이런 능력이 있었다.소희는
시원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욕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진 것 같았다."우청아 씨?" 시원은 바로 그녀를 불렀다.그는 재빨리 욕실 문 앞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청아 씨, 왜 그래요?"그는 두 번 소리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시원은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밀었다.욕실 안에는 물기가 감돌았고 그윽한 향기는 은은하게 시원을 향해 덮쳤다. 그는 또 앞으로 두 걸음 다가가서야 욕실 안에 쓰러져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몸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피부는 하얗고 머리카락은 무척 검었다. 그런 시각적 충격에 시원은 제자리에 굳어졌다.샤워 꼭지는 켜져 있었고 콸콸 흐르는 물은 소녀의 몸에 내리쳤다. 마치 시원이 오늘 창문 앞에서 본 정경과 같았다. 큰비는 소녀를 향해 쏟아졌고 그녀의 얼굴은 비에 젖어 하얬지만 두 눈은 맑고 강인했다. 분명 그렇게 비참했지만 여전히 생활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시원은 무려 3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물을 끈 다음 바닥에 있는 소녀를 안았다.청아는 조용하게 그의 두 팔에 누워있었고 시원도 눈빛을 피하지 않아 모든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그의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이 바로 이 여자애는 보기엔 매우 말랐지만 옷을 벗었는데도 여전히 매우 말랐다는 것이었다.그래도, 나름 괜찮았다…...시원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매끄러운 그녀의 피부의 촉감을 최대한 무시하고 목욕 수건으로 그녀를 감싸서 욕실에서 안고 나왔다.청아를 침대에 놓은 뒤 시원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줬고 그는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니 무척 뜨거웠다.그동안 청아는 배달 때문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몸이 원래 허약한 데다가 오늘 또 비를 맞고 젖은 옷을 입고 배달하다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으니 감기에 걸린 것이었다.시원은 먼저 그녀에게 이불을 잘 덮어 준 뒤 본가 쪽 개인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하 의사는 이미 잠이 들었지만 시원의
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하 의사는 계속해서 말했다."열은 곧 내려갈 겁니다. 근데 땀을 좀 많이 흘릴 수도 있으니 도련님께서도 따뜻한 하나 수건 준비해서 닦아주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음!"하 의사는 떠나기 전에 처방한 약을 어떻게 먹고 또 주사를 어떻게 뽑는지 신신당부했고 시원은 그의 말을 모두 마음속으로 새겼다.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시원은 작은방으로 돌아가서 청아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그녀는 아주 깊이 잠들었다. 긴 속눈썹은 드리워진 채 마치 달빛을 가린 얇은 면사포처럼 얼굴에 잔잔한 그림자를 비추며 무척 고요했다.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 정도로 고요했다.시원은 링거 다 맞기를 기다리며 한쪽의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붙였다.그는 눈을 감자마자 침대에서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고 눈빛은 한순간 희미해지다 점차 멈칫해졌다.청아는 링거를 맞고 열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온몸에서 땀이 났고 그녀의 몸은 또 시원에 의해 꽁꽁 이불로 덮여 있었기에 너무 괴로워서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리며 스스로 자신의 몸에 덮은 이불을 젖혔다.그녀는 몸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의식도 아직 회복하지 않았으며 눈을 감은 채 고통스럽게 잠꼬대를 했다.시원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일어나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잘못 움직여서 왼쪽 팔에 있는 주사를 누를까 봐 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소녀의 하얗고 섬세한 피부에는 땀이 났고 마치 아침 이슬처럼 어두컴컴한 등불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시원은 한 번만 보고 인차 고개를 돌려 링거를 보았다. 눈앞의 정경은 그의 마음을 좀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종래로 청아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그는 한 남자였다!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 의사가 당부한 말을 생각했다. 그는 이불을 청아에게 잘 정리해 준 다음 욕실로 가서 따뜻한 수건을 가지러 갔다.그가 돌아왔을 때, 청아는 또 이불을 걷어찼다.시원, "…..."그는 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가 잠잠해진 후에야 그는 계속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30분 뒤, 그는 재차 따뜻한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이번에 청아는 여전히 가만있지 않고 침대에서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다. 시원은 또 그녀가 주사를 누르는 것까지 주의해야 했기에 엄청 지쳤다.몇 번 시도한 뒤, 그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한 사람의 시중을 든 적이 없었다.땀을 닦고 나니 소녀는 편안해졌는지 마침내 움직이지 않고 다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시원은 잠든 소녀를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안방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했다. 돌아왔을 때, 링거는 거의 다 맞아 갔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해 주삿바늘을 뽑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니 열은 이미 다 내려갔다.그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그녀의 옷장에서 잠옷을 찾아 그녀에게 입혔고, 또 그녀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서야 조심스럽게 방을 떠났다.시간은 이미 3시가 다 되어갔다. 안방으로 돌아온 시원은 분명 무척 졸렸지만 또 잠이 안 왔다. 그는 자꾸 청아가 다시 이불을 걷어찼을까 봐 걱정했다.한참 뒤척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자 시원은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 또 청아의 방에 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달콤하게 자고 있었고 이불도 그가 덮어준 그대로였다.그는 그녀를 도와 문을 닫고 나오며 왠지 이러는 자신이 좀 우습다고 느꼈다.......날이 곧 밝을 때에야 시원은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6시에 외출해야 하기 때문에 알람이 울릴 때 그는 두 시간도 자지 못했다.날은 이미 어느 정도 밝아졌다. 시원은 먼저 작은방으로 갔고 청아가 열도 나지 않고 이불도 차지 않은 채 푹 자고 있는 모습을 잠시 동안 지켜보다가 방에서 나왔다.6시에 시원은 소희에게 전화를 했다.소희는 청아가 아프다는 말을 듣자 바로 잠에서 깨며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시원이 말했다."미안해요, 이때 깨워서."소희는 고개를
소희가 말했다."난 청아 보러 갈 테니, 구택 씨는 위층으로 돌아가서 좀 더 자요."구택이 말했다."이미 일어난 이상 잠도 안 오네요. 가서 우청아 씨 어떤지 보러 가요. 난 소파에 가서 좀 앉을게요.""넵!" 소희는 대답하고는 혼자 작은방으로 향했다.청아는 아직 자고 있었다. 소희는 그녀의 이마를 한 번 만져보니 열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그녀는 방에 잠시 앉아 있다가 청아가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살금살금 방에서 나왔다.소파에 앉은 남자는 팔걸이에 기대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또 잠든 것 같았다.소희가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덮으려고 하자 구택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그윽하고 또 좀 어렴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짓했다."소희야, 이리 와요!"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소희야”라고 불렀는데, 소희는 가슴이 설레며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시간은 방금 6시였고, 아침 햇살은 이미 온 방을 가득 비추었다. 잔잔한 빛에서 뿜어 나오는 은은한 금색은 남자의 온몸을 둘러싸며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정교하게 비추었다.그윽한 눈빛은 부드러웠고 얇은 입술은 빨갰으며 하얀 셔츠에는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고 손바닥은 길고 힘이 있었다.소희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가볍게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당기며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따뜻했다."어젯밤에 늦게 잤는데 또 이렇게 일찍 일어났으니 안 졸려요? 내 품 안에서 좀 더 자요."남자는 몸에 소희가 익숙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고 셔츠 안의 근육은 튼튼하면서도 탄탄했다. 소희는 편안하게 그의 품 안에 기대였다. 아침 6시의 강성은 너무 조용했고 방 안도 조용했기에, 그녀의 마음은 무척 평온했다.구택은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손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옷깃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좀 더 자요, 7시 될 때 내가 깨울게요!"소희는 원래 별로 안 졸렸지만, 이렇게 그의 품에 누워있으니 왠
서인은 안토니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윤석경 씨, 잠깐 나와 보세요! 이 사람이 당신네 집 손님 맞나요?”서인은 순간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예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밖으로 향했다. 토니의 부모도 급히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곱슬머리로 말려 있었다. 여자는 토니네 가족을 보자마자, 곧장 손가락으로 한쪽에 서 있는 유진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당신네 손님 맞아요?”유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제발 소리치지 마세요! 제가 돈 드린다고 했잖아요!”유진은 당장이라도 땅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서인은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박민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이 여자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내 난초를 뽑아서 토끼 먹이로 줬어요! 내 난초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조금만 늦었어도 다 뽑혀 나갔을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이건 엄연한 도둑질이라고요!”유진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고, 작은 목소리로 서인에게 변명했다.“난초인 줄 몰랐어요. 그냥 잡초인 줄 알았어요.”유진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위축되었다. 그러나 박민란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쏘아붙였다.“변명하지 마요! 어쨌든 내 난초를 뽑은 건 사실이잖아요!”그때, 윤석경이 나서서 말했다.“우리 집에도 난초가 있으니까, 그걸로 대신 보상해 줄게요. 어린애한테 그렇게 큰소리칠 필요까지야 있나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하지만 박민란은 완강했다.“안 돼요! 당신네 집 난초랑 내 난초는 품종이 달라요! 그러니 난 절대 못 받아요!”윤석경도 화가 났다.“똑같은 난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박민란이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내 난초는 특별히 돈 들여 키운 거예요. 이미 손님이 예약한 거라고요! 근데 이제 어쩌란 말이에
안토니는 이미 저들과 한 차례 몸싸움을 벌였는지,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 그는 부모님 앞을 가로막고 서서, 강제로 계약서에 서명시키려는 남자들과 격렬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때, 서인이 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서인을 바라봤다. 서인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이윽고 한 손으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차갑게 말했다.“안토니네 가족은 이사하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요!”그때, 상대편의 우두머리 격인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 누구야? 당신이 뭔데 결정해?”서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금부터 이 집안일은 내가 결정해.”임유진도 단호하게 나섰다.“당신들, 합법적인 철거 허가서라도 있어요? 없으면, 지금 이건 불법으로 민가에 침입한 거고,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범죄예요! 신고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고요!”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신고? 해보시지, 이 계집애가!”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서인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이며 그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이내 남자는 수치심에 휩싸여 분노를 터뜨렸고 뒤에 있던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우락부락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주먹을 쥐고 서인을 향해 돌진했다.그러나 서인은 간단하게 공격을 막았다. 팔을 낚아채어 비틀어버린 후,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쿵! 남자는 그대로 공중으로 튕겨 올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으악!”놀란 안주설과 토니네 부모님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토니는 같이 싸우려 했지만, 서인이 손을 들어 막았다.“넌 신경 쓰지 마.”서인의 태도는 한결같이 차분했지만, 움직임은 날카롭고 거칠었다. 몇 초 만에 남은 두 명까지 모두 쓰러졌다.우두머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부하들을 보며, 서인이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정면으로 붙었다가는 자기들이 더 크게 당할 것이 뻔했다.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기
서인이 약속한 장소는 호텔 맞은편에 있는 찻집이었다. 두 사람이 몇 분을 기다리자, 상대가 도착했다.그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짙은 남색의 운동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멀리서 서인을 발견한 남자는 곧바로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걸어오면서 팔을 벌렸고,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한 뒤, 어깨를 가볍게 맞댔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았다.“이렇게 오래 못 봤는데, 네가 갑자기 연락할 줄이야. 아직도 믿기지 않네!”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그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에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이에 서인은 담담하게 웃었다.“정말 오랜만이긴 하죠.”“예전에 너희 작전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아 있어서 다행이네.”서인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은 남자를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남자는 놀란 듯 서인을 쳐다보았다.“여자친구야?”서인은 짧게 답했다.“아니요. 그냥 같이 온 친구예요. 임유진.”그는 이어서 남자를 소개했다.“이한우라고 해요.”유진은 그를 한 번 보더니 따라 불렀다.“한우 씨!”한우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서인의 친구라면 나한테도 친구나 다름없죠. 편하게 있어요.”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고, 서인과 한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진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다실에서 나온 말차 케이크와 재스민 차를 즐겼다.서인은 흥성에서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한우는 지역에 오래 정착한 사업가로, 여러 방면에 인맥이 있었다.서인은 안토니네 가족을 돕기 위해 한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한우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흔쾌히 말했다.“리조트 호텔 사장은 모르지만, 철거 보상 담당자는 잘 알지. 같이 술도 마셨던 사이라, 내
서인이 자신을 바라보자, 임유진은 재빨리 침대 옆 협탁에서 안대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눈을 가릴 거라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이미 씻었어.”서인은 무심하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물었다.“불 꺼도 돼?”방 안에는 서인의 쪽에만 벽 등이 켜져 있었다. 이에 반쯤 몸을 돌린 채 유진을 바라자, 유진도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공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고작 오초였지만,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유진의 눈빛은 마치 깊고 맑은 호수 같았다. 그 안에 잔잔한 물결이 퍼지는 듯했다.어둠 속에서도 유진의 눈빛이 한층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헐렁한 티셔츠의 목 부분이 흘러내려, 가느다란 어깨가 반쯤 드러났다. 유진의 피부는 눈이 부시게 하얗고 매끄러웠다. 마치 만지기라도 하면 부서질 듯한 촉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방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그 짧은 순간에 묘한 분위기도 함께 사라졌다. 유진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은 서인의 침대 너머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야외 수영장의 물이 조명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마치 유진의 들뜬 마음처럼,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곧, 자동으로 커튼이 내려졌다.그 작은 물결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인이 일부러 그런 것임을 알고, 유진은 살짝 토라진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이불을 단정하게 덮고 눈을 감았다.서인도 조용히 눈을 감았으나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유진의 상쾌한 바디워시 향이 공기 속에 가볍게 떠돌았다. 희미하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 서인은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곧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게 뭐지?’유진은 원래 잘 때 얌전한 모습이었으나 자고 나면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이불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침대 위에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