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함께 계단을 내려왔고, 기주현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덕분에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사실 그 사람에게도 말해줄 수 있을 거예요.” 강아심이 용기를 주자, 기주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꿈 꿔요!” 주현이 밝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잘 자요.”아심도 미소로 답하며 각자 방으로 향했다.아심은 잠자리에 들려고 걸음을 옮기다가, 시언이 발코니의 라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가 없었던 걸 보면, 언제 나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시언과 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어느새 그의 발코니 근처까지 다가가 있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시언이 시선을 주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아심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입가의 미소도 어색하게 굳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심은 주저앉을 듯한 마음으로 시언의 닫힌 커튼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침대에 누워 짐을 정리하며 시간이 흘러,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되었다. 피곤함에 서서히 잠이 들었지만, 한밤중에 번쩍이는 섬광에 눈을 떴다. 바로 뒤이어 쿵! 하는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다.커튼을 닫지 않은 덕분에 번개가 방 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곧이어 천둥소리가 연이어 터지며 하늘을 가르듯 울려 퍼졌다.아심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아심은 발코니로 나가서 밖을 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며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번개와 천둥이 뒤섞인 채, 하늘에서 내리치는 빛이 산을 가를 듯 무섭고도 위엄이 가득했다.세찬 비바람과 천둥소리 속에서, 산속의 비가 주는 압도적인 힘을 아심은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다.그때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언이 밖으로 나와 아심처럼 대리석 난간 앞에 서 있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귀마개를 꺼내 귀에 꽂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천둥소리는 이중으로 차단되어 이제 아심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았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비바람 소리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곧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강아심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오전 여덟 시였다. 커튼을 열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줄기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 발코니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언이 아직 잠들어 있는지, 아니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갔는지 알 수 없었다.비 오는 날 산속의 공기는 더 촉촉하고 신선했으며, 흙과 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안개에 휩싸여 희미한 윤곽만 보였다.아심은 난간에 기대어 잠시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여 내려다보니, 시언이 나타나 말했다.“아래로 내려와서 밥 먹어.”아심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세수하고 갈게요.”아심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준비를 마쳤다. 옷을 갈아입으며 옷장 앞에 놓인 여행 가방을 보자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아마 오늘은 떠나지 못할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내려가자 시형은 평소처럼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아심은 가볍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시언은 아심을 힐끗 쳐다보곤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심도 조용히 앉아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오랫동안 고용된 군인이었지만, 시안은 식사할 때 급하게 먹는 법이 없었다. 시언의 타고난 예절과 품위는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듯했다.한참 후, 도우미가 수프를 들고 왔을 때,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는 두 사람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아심은 프랑스식 긴소매 드레스를 입고,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어깨에 흩날리며, 식사 중에도 곧은 자세와 단정한 매무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살짝 숙인 고개와 우아한 목선이 마치 그림 속 주인공처럼 고혹적이었다.반면 아심의 맞은편에 앉은
‘영원할까?’강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수프를 마셨다....별장 사람들은 비가 많이 오는 탓에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고, 도도희는 아침 일찍 학생들에게 하루 휴교한다고 알렸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각자의 별장에 머물면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 별장 밖의 강이 불어나거나 산사태가 발생할 수 있어 별장 안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기 전에 아심은 약상자를 들고 가서 시언의 약을 다시 발라주었다. 약을 바르는 내내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아심은 일을 마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오늘 하루 쉬는 틈을 타서 컴퓨터를 켜고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면서 지승현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후연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승현은 메시지를 받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여기도 비가 오고 있어. 할머니께서는 계속 졸리신 것 같지만 병원에는 끝까지 가지 않으셔. 이제는 뭘 해도 소용이 없어. 그저 그 순간을 기다릴 뿐이지.]아심은 몇 마디로 승현을 위로했다. 승현은 더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와 임시 이사회를 열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에 승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아심은 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가끔 휴대폰을 확인하며 별장 단체 채팅방을 보았고, 사람들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주한결과 친구들은 포커를 치고 있었는데, 한결과 에블리가 한 팀이 되어 계속 이겼고, 기주현과 조규성은 계속 져서 이마에 거북이를 그려야 했다.이번에도 한결이 이겼고, 그는 주현의 얼굴에 거북이를 그리는 장면을 에블리가 찍어두었다. 한결은 전혀 봐 주지 않고 거북이를 주현의 눈 위에 그렸다.눈을 감으면 작은 거북이가 되었다가, 눈을 뜨면 거북이 등껍질이 사라지고 거북이 다리가 길게 속눈썹처럼 서 있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한결은 웃느라 소파에 몸을 기댔다. 주현은 단체 채팅방에 셀카를 올렸고, 강아심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에블리가 말했다.[다음엔
아심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언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오해하게 두는 게 편했다. 그랬기에 아심은 느긋하게 말했다.“하지만 난 빨간 장미도 하얀 장미도 좋아해요. 손에 빨간 장미를 들고 있다고 해서 하얀 장미를 좀 더 보는 게 뭐 어때요?”남자의 기운이 순식간에 싸늘해지며 아심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아심은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발코니 문이 세차게 닫혔다. 시언의 화가 온 건물을 흔드는 것 같았다.아심의 얼굴에 비가 튀어 차갑게 스며들었고, 스스로가 한심하고 우스웠다. 마침 도도희가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아심아, 뭐 하고 있어? 왜 계속 말이 없어?]이에 아심이 답장했다.[하얀 장미를 보고 있었어요.]갑작스러운 말에 도도희가 되물었다.[너희 별장 앞에 하얀 장미가 있어?][지금은 안 보여요. 아까 착각했나 봐요.][그럼 분명 착각이야. 너희 앞 정원에는 몇 그루의 치자나무만 있을 텐데.]아심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럼 내가 치자꽃을 하얀 장미로 착각했나 봐요.]다른 사람들도 도도희와 아심에게 인사를 건네며 포커 게임에서 일어난 웃긴 이야기를 전했다. 한결이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선생님, 에블리는 제가 맡았어요. 안심하세요. 절대 손해 보지 않게 잘 챙길게요.]그리고는 아심에게 말했다.[아심아, 나중에 치자꽃을 따서 방에 놓아줄게. 그러면 착각하지 않을 거야.]아심은 웃으며 답했다.[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꽃은 나무에 있는 게 더 오래가잖아.]한결이 말했다.[내가 촌스러웠네. 그럼 내가 그림으로 그려줄게!]에블리가 덧붙였다.[좋은 생각이야!]한결이 말을 덧붙였다.[그럼 내가 하나 더 그려줄게.]사람들이 채팅방에서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아심은 주현이 여전히 말이 없는 걸 눈치챘다.아심은 머리를 들어 멀리 떨어진 별장을 바라보았다. 정원 너머 희뿌연 빗속에서
아심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고, 도도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자, 내가 너한테 커피 내려줄게.”그러나 아심은 시간을 한 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사양할게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도도희의 별장을 떠난 아심은 한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한결아, 나 지금 도서관 2층에 있어. 치자꽃 몇 송이 따서 가져다줄 수 있어?]이에 한결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알겠어, 금방 갈게.]아심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한결은 우산을 쓰고 나가 치자꽃 몇 가지를 따서 도서관 2층으로 향했다....오늘은 수업이 없어 도서관 전체가 조용했다. 특히 2층은 정리된 책장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빗소리가 가늘게 들리는 가운데 책 향기가 은은히 퍼져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한결은 안쪽으로 걸어가 아심을 찾으려 했지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아심 씨 찾고 있어?”한결은 멈칫하며 돌아봤다. 그 뒤에는 주현이 서 있었다. 그는 밝게 웃으며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야?”주현은 한결의 손에 들린 치자꽃을 응시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물었다.“좋아해요?”한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여기 온 사람들은 다 친구잖아. 난 친구라면 다 좋아해.”주현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나도 선배가 말하는 그 친구들 중 하나겠죠? 선배는 누구나 좋아하면서,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거네요.”어두운 비 오는 날의 빛이 붉은빛 동으로 된 책장에 스며들어, 차가운 색감의 광채를 반사해 방 안은 더욱 고요해졌다.한결은 주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말이야?”“그냥, 몇 가지 깨달은 게 있어서요.” 주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이제 돌아갈게요.”주현은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기주현!”한결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주현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뭘 깨달았다는 거야?”그러나 주현은 돌아보지 않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선배가 아심 씨를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에블리를 얼마나 지켜주려 하는지, 그
강아심은 강시언의 키가 너무 커서 밖에서 그의 머리 꼭대기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언의 옷깃을 다시 잡아당겨 머리를 더 숙이게 했다.시언은 몸을 굽히며 머리를 숙였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아심의 귓가에 닿았다. 시언의 입술은 아심의 귀에서 겨우 1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그러자 기갑자기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한 말, 무슨 뜻이야?”주한결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보며, 이전처럼 가벼운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했다.“아무 뜻도 없어. 그냥 농담이었어.”주현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속에서 알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때 주현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는 화면을 보며 전화를 받았다.“엄마!”김지순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주현아, 언제 집에 올 거니?]“며칠 후요.” 주현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빨리 와라. 유정호도 이번에 시간이 된다더라. 너희 둘 만나게 할 거야!] 김지순은 신나게 덧붙였다.[네 사진을 보여줬더니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너희 아빠랑 상의했는데, 만나고 나면 5월에 약혼하고, 10월에 결혼하면 되겠다.]주현은 집에서 멋대로 결혼 상대를 정하는 게 싫었지만, 오늘은 반대할 힘조차 없었다. 이에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알았어요, 곧 갈게요.”[잘됐다! 그럼 유정호 연락처를 네게 보낼까? 두 사람 먼저 대화 좀 나누어 보렴.] 김지순은 전에 몇 번 제안했지만 주현이 거절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현의 태도가 부드러워지자, 다시 물었다. 주현 또한 덤덤하게 대답했다.“네, 보내주세요.”주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안녕하세요, 어머니!”한결이 환한 미소로 인사하자, 김지순은 놀란 듯 잠시 멍해졌다.[어, 누구시죠?]“저는 주현과 함께 그림을 배우는 친구이자, 남자친구예요!” 한결은 뒤의 몇 마디를 또렷하고 진지하게 말하자. 주현은 눈이 커지며 휴대폰을 되찾으려고 했다.그러나 한결은 주현의 손목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그녀가 더 달
김지순은 바로 말했다.[괜찮아요, 괜찮아. 우리 딸을 잘 챙겨주기만 하면 돼요. 나는 둘이 돌아오길 기다릴 테니.]“알겠어요.” 주한결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어머니, 안녕히 계세요.”전화를 끊자마자 주현은 재빨리 자신의 휴대폰을 되찾으며 몇 걸음 물러나 한결을 노려봤다.“왜 우리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요?”그러자 한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환하게 웃었다.“네가 정말로 선보러 가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도와준 거야. 내가 좋은 마음으로 도와줬는데, 왜 그러니?”주현의 가슴이 갑자기 아릿하게 아팠고, 눈에 눈물이 차올라, 화난 듯 말했다.“누가 도와달랬어요! 상대방은 키도 크고 잘생겼어요. 정말 마음에 들어서 돌아가면 당장 결혼할 거라고요!”주현은 한결을 한 번 매섭게 쏘아보고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미쳤어, 정말!”그러자 주현의 뒤에서 한결의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그래, 미쳤지. 미치지 않았으면 널 좋아할 리가 없잖아!”주현은 걸음을 멈췄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천천히 돌아서며 물었다.“뭐라고 했어요?”한결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주현을 바라보았다.“내가 너 좋아한다고. 기주현, 너를 좋아해.”주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러고는 입술을 떨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또 장난치는 거죠?”목소리가 점점 잠기며 말했다.“이런 걸로 장난치지 마요. 나 진지하게 믿을 수도 있다고요.”한결은 한 걸음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치자꽃을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두 손으로 주햔의 눈물 젖은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주현은 치자꽃을 얼떨결에 받으며,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도 잊은 채 있었다. 한결은 그녀에게 강하게 키스를 하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하고 싶었던 건 오래전부터였어.”주현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온몸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작게 말했다.“내가 선배 말에 왜 동의해야 하죠?”“그럼 지금 해.” 한결이 멈추고
시언의 손바닥이 더욱 단단히 아심의 허리를 감싸며, 얇은 입술이 아심의 귀에 가까이 다가왔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속삭였다.“갑자기 주한결 말이 참 맞는 것 같아.”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타고 전해지며 전류처럼 온몸에 퍼졌다. 아심은 반쯤 마비된 듯 굳어버리고, 움직일 수 없었다.“응?” 아심은 조금 늦은 반응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 떨림은 마치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들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숨소리를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싫다고 하면 계속 키스할 거야, 네가 좋다고 할 때까지.”시언의 저음은 차분하지만, 마치 심장을 두드리는 망치처럼 울렸다. 그의 입술이 다시 아심에게 닿았다.시언의 코끝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 속에 휩싸였고, 이 순간 둘만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빗소리도, 다른 사람들의 소리도 모두 멀어졌다. 시언의 눈에는 오로지 아심만이 존재했다.그와 동시에, 책장 너머에서 기주현과 주한결은 막 사랑을 확인하며 뜨거운 입맞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 또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여기에서는 시언의 얇은 입술이 아심의 턱선을 따라 내려오며, 아심을 애타게 했다. 아심은 눈을 꼭 감고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계속 밀려오는 키스를 막기 위해 시언의 셔츠를 움켜쥐고 얼굴을 돌렸다.시언은 깊은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그의 숨소리는 무거웠고, 마치 자신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다행히도 한결과 주현은 결국 키스를 멈췄다. 주현의 목소리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다.“원래 아심 씨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 근데 어디 갔어?”한결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주현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내가 전화해 볼게.”“하지 마!” 한결이 주현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평소에 우리한테 그렇게 예의 바르더니, 오늘 나한테 꽃을 가져다주라고 한 건 뭔가 의도가 있었던 거 아니야?”주현은 놀라며 말했다.“선배 말은 우리를 일부러 여기 오게
강아심은 강시언 맞은편 의자에 앉아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한 번 바라봤다. 아심은 테이블 위에 있던 술잔을 들고 머리를 살짝 젖혀 술을 한 모금에 들이켰다.시언은 아심이 고개를 젖히며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을 바라보았다. 삼킬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목선이 더욱 선명해졌다.이에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강아심, 넌 그저 약간의 잔재주 말고는 다른 건 할 줄 모르지?”아심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더 큰 처벌을 피하려고 미리 그를 자극하며 시언의 입을 막으려는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아심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가는 술기운에 촉촉해졌고, 붉어진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그런 순진한 표정은 아심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시언의 눈빛이 깊어지며 목소리는 더욱 낮고 묵직해졌다.“네가 매번 처벌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 잔재주 때문이 아니야. 그건 내가 네게 관대했기 때문이지, 이해했어?”아심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술기운은 더욱 올라와 눈동자는 한층 더 촉촉해졌다.시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권수영과 양재아가 웃으며 멀어지는 모습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는 다시 아심을 보며, 다소 조롱 섞인 어조로 물었다.“네 남자친구 어머니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아심은 입가에 묻은 술 자국을 가볍게 닦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진정한 사랑은 여러 가지 시련을 겪어야죠.”그 말에 시언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고, 웃음에서도 냉기가 느껴질 정도였다.“진정한 사랑? 겨우 한 잔 마시고 취한 거야?”아심은 그의 말에 되받아칠 말을 찾으려 했지만, 어딘가 찔리는 마음 때문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결국 아심은 침묵을 유지했다. 침묵은 때로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법이었다.시언은 아심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읽으려는 듯 바라봤다. 그러다 미소를 띠며 물었다.“내가 도와줄까?”아심은 놀란 듯 시언을 돌아보며 물었다.“뭘 도와준다는 건데요?”“네가 버틸
강아심은 고개를 끄덕이고 양재아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권수영은 아심이 떠나자 안도한 듯 숨을 내쉬며 지승현에게 말했다.“너는 재아 씨랑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 젊은 사람들끼리 통하는 이야기가 더 많을 테니까.”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거절했다.“저는 재아 양과 잘 모르는 사이예요. 특별히 나눌 얘기도 없고요. 엄마 친구분이시니까 엄마가 알아서 모시세요.”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재아를 향해 간단히 묵례하고 자리를 떴다.재아는 표정을 잃지 않았지만, 손을 꼭 움켜쥐었다. 재아가 승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재아의 마음일 뿐이었지만, 승현이 재아를 무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권수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속으로는 승현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생각했다.‘승현이가 저 모양이라니! 만약 수철이 결혼할 나이가 됐으면 그에게 재아를 소개했을 텐데!’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권수영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승현이는 원래 좀 부끄럼이 많아서 그래요.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잘 못해요.”“게다가 평소엔 일에 치여서 여자들을 만날 시간도 없거든요.”재아는 냉소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데 보니까 승현 씨는 아심 씨와 대화는 잘하던데요.”권수영은 당황했지만 재빨리 웃으며 말을 돌렸다.“강아심 씨는 공공 관계 일을 하잖아요. 그러니 이 사람 저 사람 모두와 친한 거죠.”“하지만 재아 씨는 진짜 명문가의 아가씨에다가 품위 있고 아름다우니 비교가 되겠어요?”권수영의 말에 재아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람들은 강아심 같은 사람을 더 좋아하더라고요.”권수영은 속셈이 담긴 태도로 재아의 심리를 읽으며 대답했다.“그건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예요.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대하는 남자가 얼마나 있겠어요?”재아는 가볍게 웃으며 대화를 다른 주제로 돌렸다.“지아윤은 안 왔나요?”“왔죠. 친구들이랑 놀고 있을 거예요. 내가 전화해서 불러볼게요.”권수영은 곧장 대답하며
권수영은 의자에 앉아 있는 강아심을 일부러 무시한 채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양재아 씨, 여기는 내 아들 지승현이예요. 경성대 졸업생이고, 졸업 후 집안 사업을 도와주고 있죠. 지금 우리 집안은 승현이 혼자 다 책임지고 있어요!”권수영은 아들을 한껏 칭찬한 뒤, 다시 승현에게 말했다.“여기는 도재아 양, 국화 대가인 도경수 선생님의 손녀야. 외모도 빼어나지만 재능도 대단하단다!”승현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도재아 씨, 반가워요.”재아도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지승현 씨, 반가워요.”사실 재아는 권수영에게서 여러 차례 연락을 받았다. 세 번이나 전화로 만남을 요청하길래, 받은 선물도 많았고 관계를 틀고 싶지는 않아 마지못해 만나기로 했다.그녀는 권수영과 이야기를 나누며 꽃밭으로 안내받았고, 승현을 보자마자 권수영의 의도를 눈치챘다.승현은 깔끔하고 점잖은 인상이었고, 예전 남자친구인 임예현과 닮은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시언과 비교하면 그 격차는 상당히 컸다.그래서 재아는 자신의 태도를 차분하고 품위 있게 유지하면서도, 적당히 거리감을 두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아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승현에게 말했다.“승현아,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하자. 나는 먼저 가볼게.”“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어!”승현은 다급히 그녀를 막아섰으나 강아심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시계를 흘낏 보았다. 이미 2분이 지나 있었다.권수영은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아니, 이게 누구야? 강아심 씨 아니신가. 이제 공공 관계 사업까지 린 씨 결혼식장에 진출한 건가?”“어머니, 그런 말씀은 삼가세요.”승현이 얼굴을 굳히며 강하게 말렸다.“아심 씨는 연희 씨의 친구이자, 신부 소희 씨와도 친한 사이예요.”이때 재아가 입을 열었다.“아심 씨, 저를 못 알아보겠어요?”재아는 승현이 아심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한 회사 개업식에서 아심이 어려움을 겪던 중, 승현이 그녀
“승현아.”강아심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먼저 뭐라도 먹어봐.”승현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밀어놓으며 말했다.“점심은 아직 못 먹었을 것 같은데.”아심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조금 전에 뭔가 먹어서 별로 배가 고프진 않아.”지승현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늘 만난 이유는 할머니의 유산 문제 때문이야. 할머니 유언장에 따르면, 돌아가신 지 한 달 뒤에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했어.”“할머니의 뜻에 따라 네가 상속받을 부분을 꼭 받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진심이야.”아심이 상속을 포기할 경우, 법정 상속에 따라 유산은 승현의 아버지와 큰아버지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승현은 그들의 성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유산을 받게 되면 즉시 팔아치우고, 자금을 회수할 게 뻔했다.승현은 그런 방식으로 할머니의 유품이 처분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우려를 솔직히 전했다.“할머니의 유품이 엉뚱한 사람 손에 넘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꼭 네가 받아줬으면 해.”아심은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할머니께서 나에게 유품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야.”“하지만 지금은 이미 헤어진 상태에서 제가 그걸 받는 건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몰라.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승현은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봤다.“할머니는 널 진심으로 좋아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말씀하셨어. 언젠가 당신이 나를 떠날 수도 있으니 절대 억지로 붙잡지 말라고.”“그렇게 모든 걸 알고 계시면서도 유품을 당신에게 남기셨잖아. 그러니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어.”...파티장 2층.강시언은 프랑스풍의 큰 창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은 정원에서 대화 중인 두 사람을 담담히 응시하고 있었다.얇은 입술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자 그의 표정은 연기로 흐릿해졌지만, 눈빛만큼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강아심이 거실로 들어오자, 소희와 가볍게 포옹하며 부드럽게 웃었다.“결혼 축하해. 정말 완벽한 결혼식이었어. 모든 사람이 감동했어!”“고마워!” 소희도 따뜻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심은 한발 물러서서 소희에게 소개했다.“여기는 도도희 이모야!”소희는 눈앞의 여성을 보고 순간 멍해지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혹시 스승님의 딸, 도도희님이세요?”도도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나도 소희 씨 이름을 들어봤어. 우리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제자라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니 아쉬웠어요.”소희는 자신의 결혼식에 도도희가 찾아올 줄 몰랐기에 마음이 벅차올랐다.“스승님도 오신 걸 알고 계세요?”양재아의 일로 스승님과 도도희 사이의 일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소희는, 스승님이 딸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도도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우리는 이미 만났어요.”“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소희도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도도희는 부드럽게 물었다.“듣기로 양재아를 삼각주에서 찾아내 데려온 게 소희 씨라던데, 내 친딸이든 아니든 우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소희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할 것까지는 없어요. 다만, 두 분께 헛된 기대를 드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었어요.”도도희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일은 수없이 겪어봤거든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도도희의 담담한 태도에서 그녀가 왜 지금까지 친자 확인을 하지 않았는지 소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도도희는 처음 만난 소희에게서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고요하고 담백한 성품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투명함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런 면모가 아심과도 닮아 자연스레 호감을 느끼게 했다.도도희는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운성에서 산간 지역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틀 후면 일이 끝나니, 강성으로 돌아
멀리서 도경수와 강아심이 지나가다가 멈춰 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소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고, 구택과 눈이 마주쳤다.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두 손으로 잡은 소희는 가볍게 손을 들어 부케를 뒤로 던졌다.햇살이 소희를 온통 감싸고, 드레스의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그녀의 웃음은 그림처럼 찬란했다. 앞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부케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몇몇 사람들은 점프했지만, 손끝과 부케는 20에서 30cm쯤 차이가 나 닿지 않았다. 시원은 부케가 멀리 날아갈 것을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소희의 던지기 실력을 과소평가했다.시원과 백림은 함께 점프했으나 손가락 끝이 꽃잎에 닿았을 뿐 결국 부케를 놓치고 말았다.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니, 부케는 무려 10미터 이상 날아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들고 있는 손에 정확히 떨어졌다.아심은 꽤 멀리 서 있었고, 부케가 자신에게 떨어질 줄 몰랐는지 놀라 손에 들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도경수는 아심이 손에 든 부케를 보며 뜻밖이라는 듯 기뻐하며 말했다.“이건 정말 하늘의 뜻인 것 같아!”아심은 말없이 웃으며 부케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곤 소희와 군중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현장의 분위기를 함께 즐겼다.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아심 쪽으로 몰려가 그녀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소희도 멀리서 아심을 향해 웃었지만, 당장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먼저 할아버지께 가서 술을 올리자. 그 뒤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서 있는 아심을 한 번 더 바라보고 구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소희는 웨딩드레스를 갈아입고 피로연 드레스를 입은 뒤 강재석 쪽으로 가서 술을 올렸다. 그곳에는 임씨 집안의 어른들과 강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가 소희를 아끼며 환대했다.가볍게 술 한 잔을 권한 뒤, 소희에게 충분히 쉴 시간을 주었다. 소희는 오후 내내 쉴 수 있었고, 연희와 몇몇 친구들이 함께 시간을
남궁민은 잠시 멍해졌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심명을 바라보았다.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찌릿해졌다.남궁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확실히 당신은 나보다 서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심명은 남궁민의 말을 듣고 흘긋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당연하죠. 당신은 그게 좋아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남궁민은 반박하며 말했다.“왜 아니죠? 난 서희 말고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 없거든요.”심명은 그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햇빛을 향해 걸어가는 심명의 모습은 빛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흐려져 보였다. 남궁민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따라가며 물었다.“설마 도망치려는 거예요?”심명의 귀에 달린 흑요석 귀걸이가 햇빛에 반사되어 매혹적인 광채를 뿜었다.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도망치긴 뭘 도망쳐요?”만약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오늘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남궁민은 심명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말했다.“오늘은 우리 둘 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말아요. 이 세상에서 너와 나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거잖아요. 술 마시고 취할 때까지 놀아보는 건 어때요?”심명은 남궁민의 손을 곁눈질하며 투덜거렸다.“손 치워요.”그러나 남궁민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았다.“좋아요. 멀리서 여기까지 온 네 성의를 봐서라도, 서희 대신 내가 너를 잘 챙겨 주도록 하죠.”...결혼식의 하이라이트가 지나고, 커다란 케이크가 나왔다. 케이크 커팅식이 끝나고 결혼식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축하 파티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구택은 소희의 입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닦아내며 말했다.“와이프, 신혼 축하하고 사랑해.”수많은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예식장의 조명은 더욱 환하게 빛났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는 축복과 환희로 가득했다.소희는 구택만을 바라보았다. 소희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세상의 그 어떤 소란도, 부귀와 영화를 쫓는 욕망도 담겨 있지
“그때, 나는 마침내 깨달았어. 네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그 이외의 어떤 의미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임구택은 소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분홍빛 다이아몬드는 그녀의 눈부신 피부 위에서 완벽하게 어우러졌고, 빛을 받아 반짝이며 찬란한 광채를 뿜어냈다.소희도 손에 든 반지를 꺼내 들었고, 구택의 손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손바닥과 손가락의 비율은 완벽했고, 마치 차가운 백옥으로 조각한 듯 뚜렷한 관절선에는 부드러운 온기와 견고함이 동시에 느껴졌다.구택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며 조용히 미소 짓고는 물었다.“내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왜 나를 다시 데려왔어?”구택은 그녀의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가만히 응시하며 천천히 답했다.“왜냐하면 또 하나를 깨달았으니까.”“뭔데?”“내가 주는 행복만이 진짜 행복이라는 거야.”소희는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고 고개를 들어 구택을 바라보았다. 구택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단호했다.“우리 둘이 함께 있을 때만이 진짜 행복을 느낄 수 있어. 그러니까 넌 도망칠 수 없고, 나도 도망칠 수 없어.”“처음 우리가 만난 순간부터 오늘 이 순간이 정해져 있었어. 네가 나와 결혼하게 될 운명 말이야.”구택은 말을 마치고 몸을 숙여 강렬한 키스로 소희의 입술을 덮자, 주변에서는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임유민은 요요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한 번 돌아보았다.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역시 우리 삼촌은 다르지.”요요도 뒤를 보려고 하자, 유민은 손으로 요요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어린아이는 이런 거 보면 안 돼!”요요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는 어른이에요?”그 말에 유민이 당황하며 대답했다.“나, 나는 반쯤 어른이야!”요요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더 궁금해졌다.“그럼 오빠는 머리 쪽이에요, 아니면 발 쪽이에요?”유민은 요요의 진지하고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차분히 설명했다.“머리가
예식장 안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고, 주례자는 차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제 신랑과 신부의 결혼 서약을 낭독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서도 함께 느껴 보시고, 곁에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주례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엄숙해졌다.“임구택 군, 당신은 이 아름다운 소희 양을 아내로 맞이하시겠습니까?”“소희 양의 손을 맞잡고 백년해로하며, 그 어떤 간난신고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곁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서약하시겠습니까?”구택은 깊은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단호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예, 서약합니다. 소희를 평생 소중히 여기고, 챙기고, 제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충실히 사랑하겠습니다.”주례자는 이번에는 소희를 향해 물었다.“소희 양, 당신은 임구택 님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임구택 군과 함께 인생의 길을 나란히 걷고, 그 어떤 간난신고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곁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서약하시겠습니까?”소희는 구택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약합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며,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구택의 눈에는 감정이 빛나고 있었고, 그의 따뜻한 마음과 온기는 오직 소희를 위해 존재했다.주례자는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이제 임구택 군과 소희 양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두 사람을 위해 축복의 박수를 보내주세요!”예식장은 다시 한번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모든 하객은 이 감동적인 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보냈다. 그 박수 소리는 끝없이 이어졌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울려 퍼졌다.연희는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는 뜨거웠지만,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우청아 또한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했다.주례자는 박수 소리 속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신랑과 신부께서 결혼의 영원함과 순수함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를 교환하시겠습니다.”그 순간, 뒤쪽 계단에서 임유민이 요요를 안고 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