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심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언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오해하게 두는 게 편했다. 그랬기에 아심은 느긋하게 말했다.“하지만 난 빨간 장미도 하얀 장미도 좋아해요. 손에 빨간 장미를 들고 있다고 해서 하얀 장미를 좀 더 보는 게 뭐 어때요?”남자의 기운이 순식간에 싸늘해지며 아심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아심은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발코니 문이 세차게 닫혔다. 시언의 화가 온 건물을 흔드는 것 같았다.아심의 얼굴에 비가 튀어 차갑게 스며들었고, 스스로가 한심하고 우스웠다. 마침 도도희가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아심아, 뭐 하고 있어? 왜 계속 말이 없어?]이에 아심이 답장했다.[하얀 장미를 보고 있었어요.]갑작스러운 말에 도도희가 되물었다.[너희 별장 앞에 하얀 장미가 있어?][지금은 안 보여요. 아까 착각했나 봐요.][그럼 분명 착각이야. 너희 앞 정원에는 몇 그루의 치자나무만 있을 텐데.]아심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럼 내가 치자꽃을 하얀 장미로 착각했나 봐요.]다른 사람들도 도도희와 아심에게 인사를 건네며 포커 게임에서 일어난 웃긴 이야기를 전했다. 한결이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선생님, 에블리는 제가 맡았어요. 안심하세요. 절대 손해 보지 않게 잘 챙길게요.]그리고는 아심에게 말했다.[아심아, 나중에 치자꽃을 따서 방에 놓아줄게. 그러면 착각하지 않을 거야.]아심은 웃으며 답했다.[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꽃은 나무에 있는 게 더 오래가잖아.]한결이 말했다.[내가 촌스러웠네. 그럼 내가 그림으로 그려줄게!]에블리가 덧붙였다.[좋은 생각이야!]한결이 말을 덧붙였다.[그럼 내가 하나 더 그려줄게.]사람들이 채팅방에서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아심은 주현이 여전히 말이 없는 걸 눈치챘다.아심은 머리를 들어 멀리 떨어진 별장을 바라보았다. 정원 너머 희뿌연 빗속에서
아심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고, 도도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자, 내가 너한테 커피 내려줄게.”그러나 아심은 시간을 한 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사양할게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도도희의 별장을 떠난 아심은 한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한결아, 나 지금 도서관 2층에 있어. 치자꽃 몇 송이 따서 가져다줄 수 있어?]이에 한결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알겠어, 금방 갈게.]아심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한결은 우산을 쓰고 나가 치자꽃 몇 가지를 따서 도서관 2층으로 향했다....오늘은 수업이 없어 도서관 전체가 조용했다. 특히 2층은 정리된 책장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빗소리가 가늘게 들리는 가운데 책 향기가 은은히 퍼져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한결은 안쪽으로 걸어가 아심을 찾으려 했지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아심 씨 찾고 있어?”한결은 멈칫하며 돌아봤다. 그 뒤에는 주현이 서 있었다. 그는 밝게 웃으며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야?”주현은 한결의 손에 들린 치자꽃을 응시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물었다.“좋아해요?”한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여기 온 사람들은 다 친구잖아. 난 친구라면 다 좋아해.”주현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나도 선배가 말하는 그 친구들 중 하나겠죠? 선배는 누구나 좋아하면서,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거네요.”어두운 비 오는 날의 빛이 붉은빛 동으로 된 책장에 스며들어, 차가운 색감의 광채를 반사해 방 안은 더욱 고요해졌다.한결은 주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말이야?”“그냥, 몇 가지 깨달은 게 있어서요.” 주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이제 돌아갈게요.”주현은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기주현!”한결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주현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뭘 깨달았다는 거야?”그러나 주현은 돌아보지 않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선배가 아심 씨를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에블리를 얼마나 지켜주려 하는지, 그
강아심은 강시언의 키가 너무 커서 밖에서 그의 머리 꼭대기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언의 옷깃을 다시 잡아당겨 머리를 더 숙이게 했다.시언은 몸을 굽히며 머리를 숙였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아심의 귓가에 닿았다. 시언의 입술은 아심의 귀에서 겨우 1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그러자 기갑자기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한 말, 무슨 뜻이야?”주한결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보며, 이전처럼 가벼운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했다.“아무 뜻도 없어. 그냥 농담이었어.”주현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속에서 알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때 주현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는 화면을 보며 전화를 받았다.“엄마!”김지순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주현아, 언제 집에 올 거니?]“며칠 후요.” 주현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빨리 와라. 유정호도 이번에 시간이 된다더라. 너희 둘 만나게 할 거야!] 김지순은 신나게 덧붙였다.[네 사진을 보여줬더니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너희 아빠랑 상의했는데, 만나고 나면 5월에 약혼하고, 10월에 결혼하면 되겠다.]주현은 집에서 멋대로 결혼 상대를 정하는 게 싫었지만, 오늘은 반대할 힘조차 없었다. 이에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알았어요, 곧 갈게요.”[잘됐다! 그럼 유정호 연락처를 네게 보낼까? 두 사람 먼저 대화 좀 나누어 보렴.] 김지순은 전에 몇 번 제안했지만 주현이 거절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현의 태도가 부드러워지자, 다시 물었다. 주현 또한 덤덤하게 대답했다.“네, 보내주세요.”주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안녕하세요, 어머니!”한결이 환한 미소로 인사하자, 김지순은 놀란 듯 잠시 멍해졌다.[어, 누구시죠?]“저는 주현과 함께 그림을 배우는 친구이자, 남자친구예요!” 한결은 뒤의 몇 마디를 또렷하고 진지하게 말하자. 주현은 눈이 커지며 휴대폰을 되찾으려고 했다.그러나 한결은 주현의 손목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그녀가 더 달
김지순은 바로 말했다.[괜찮아요, 괜찮아. 우리 딸을 잘 챙겨주기만 하면 돼요. 나는 둘이 돌아오길 기다릴 테니.]“알겠어요.” 주한결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어머니, 안녕히 계세요.”전화를 끊자마자 주현은 재빨리 자신의 휴대폰을 되찾으며 몇 걸음 물러나 한결을 노려봤다.“왜 우리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요?”그러자 한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환하게 웃었다.“네가 정말로 선보러 가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도와준 거야. 내가 좋은 마음으로 도와줬는데, 왜 그러니?”주현의 가슴이 갑자기 아릿하게 아팠고, 눈에 눈물이 차올라, 화난 듯 말했다.“누가 도와달랬어요! 상대방은 키도 크고 잘생겼어요. 정말 마음에 들어서 돌아가면 당장 결혼할 거라고요!”주현은 한결을 한 번 매섭게 쏘아보고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미쳤어, 정말!”그러자 주현의 뒤에서 한결의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그래, 미쳤지. 미치지 않았으면 널 좋아할 리가 없잖아!”주현은 걸음을 멈췄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천천히 돌아서며 물었다.“뭐라고 했어요?”한결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주현을 바라보았다.“내가 너 좋아한다고. 기주현, 너를 좋아해.”주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러고는 입술을 떨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또 장난치는 거죠?”목소리가 점점 잠기며 말했다.“이런 걸로 장난치지 마요. 나 진지하게 믿을 수도 있다고요.”한결은 한 걸음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치자꽃을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두 손으로 주햔의 눈물 젖은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주현은 치자꽃을 얼떨결에 받으며,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도 잊은 채 있었다. 한결은 그녀에게 강하게 키스를 하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하고 싶었던 건 오래전부터였어.”주현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온몸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작게 말했다.“내가 선배 말에 왜 동의해야 하죠?”“그럼 지금 해.” 한결이 멈추고
시언의 손바닥이 더욱 단단히 아심의 허리를 감싸며, 얇은 입술이 아심의 귀에 가까이 다가왔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속삭였다.“갑자기 주한결 말이 참 맞는 것 같아.”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타고 전해지며 전류처럼 온몸에 퍼졌다. 아심은 반쯤 마비된 듯 굳어버리고, 움직일 수 없었다.“응?” 아심은 조금 늦은 반응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 떨림은 마치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들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숨소리를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싫다고 하면 계속 키스할 거야, 네가 좋다고 할 때까지.”시언의 저음은 차분하지만, 마치 심장을 두드리는 망치처럼 울렸다. 그의 입술이 다시 아심에게 닿았다.시언의 코끝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 속에 휩싸였고, 이 순간 둘만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빗소리도, 다른 사람들의 소리도 모두 멀어졌다. 시언의 눈에는 오로지 아심만이 존재했다.그와 동시에, 책장 너머에서 기주현과 주한결은 막 사랑을 확인하며 뜨거운 입맞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 또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여기에서는 시언의 얇은 입술이 아심의 턱선을 따라 내려오며, 아심을 애타게 했다. 아심은 눈을 꼭 감고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계속 밀려오는 키스를 막기 위해 시언의 셔츠를 움켜쥐고 얼굴을 돌렸다.시언은 깊은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그의 숨소리는 무거웠고, 마치 자신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다행히도 한결과 주현은 결국 키스를 멈췄다. 주현의 목소리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다.“원래 아심 씨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 근데 어디 갔어?”한결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주현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내가 전화해 볼게.”“하지 마!” 한결이 주현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평소에 우리한테 그렇게 예의 바르더니, 오늘 나한테 꽃을 가져다주라고 한 건 뭔가 의도가 있었던 거 아니야?”주현은 놀라며 말했다.“선배 말은 우리를 일부러 여기 오게
아심은 출구를 향해 걸어가던 중, 갑자기 낮고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잡동사니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아심은 발걸음을 멈췄고, 시언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생각났다. 알고 보니 시언은 계속 이곳에 있었다.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우연히 창밖을 바라본 아심은 다시 한번 멈춰 섰다. 창가로 다가가 내려다보니 주한결과 기주현이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다.막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여전히 뜨거운 감정을 나누며, 난간에 기대어 입을 맞추고 있었다.아심은 깊은숨을 내쉬며, 이런 상황에서 아래로 내려가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방향을 바꾸어 잡동사니 방으로 들어갔다. 시언은 이번에도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고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래된 금장 회중시계였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회중시계였지만, 순금으로 된 시계판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반짝였다.옆에는 오래된 축음기가 있었고, 그곳에서 나오는 클래식한 바이올린곡이 방 안을 우아하게 채우고 있었다. 창밖의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그 외의 모든 소리는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언은 회중시계를 분해한 채,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아심이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아심은 방 안으로 더 들어가서 시언이 만지고 있는 작은 부품들을 살피며 말했다.“정말 다 고칠 줄 아네요!”시언은 입술을 얇게 다문 채 대답했다.“어릴 때 아버지한테 배웠거든.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어.”아심은 감탄하며 말했다.“아버지의 모든 장점을 다 물려받았네요.”시언은 눈을 살짝 들어 그녀를 한 번 보고 물었다.“너, 나간 줄 알았는데?”아심은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대답했다.“한결과 주현이 아직 아래에 있더라고요.”시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지금 내려가서 그들이 너한테 고맙다고 하게 하면 되겠네. 네가 둘을 이어준 거잖아.”아심은 시언의 농담에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책장으로 가서 전에 읽던 책을 찾아냈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벽에
“응.” 강시언이 대답하며, 회중시계가 든 상자를 강아심에게 건넸다. 아심은 두 손으로 받으며 눈이 살짝 빛났다. 순금의 시계 판과 돛 모양으로 만든 시침과 분침이 있는 작은 범선 디자인이 정말 아름다웠다.“정말 예쁘네!” 아심이 감탄하자, 시언이 말했다.“가져.”그러나 아심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회중시계를 다시 시언에게 돌려주었다.“더 이상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시언은 상자를 받아 들고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다섯 살 때쯤, 아버지가 해외 경매에 참석해서 큰돈을 주고 이 시계를 사 오셨지.”“어머니께 선물했는데, 나중에 우리가 여기서 휴가를 보낼 때 내가 망가뜨렸어.”아심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소중한 걸 나한테 줄 순 없죠. 그리고 더더욱 받을 수 없고요.”시언은 아심을 한 번 쓱 바라보고, 책장 가장 안쪽에 있는 서랍을 열어 회중시계를 넣어두었다. 아심은 시언이 무언가 말을 덜 한 것 같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더 묻지는 않았다.도도희가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모두 저녁에 함께 바비큐를 먹자고....한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되어도 가랑비는 멈추지 않았다.별장 정원에 커다란 파라솔 두 개가 펴져 있었고, 하나는 바비큐 그릴이 놓여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한결이 먼저 나서서 바비큐를 굽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도왔다. 비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분위기는 활기찼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공기 중에는 물안개와 고소한 바비큐 냄새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고 여유로워졌다.시언은 혼자 한쪽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도도희가 다가와 그녀가 직접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며 부드럽게 웃었다.“굳이 어울릴 필요 없으니, 싫으면 안으로 들어가도 돼.”그러나 시언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차분히 대답했다.“괜찮아요. 들어가도 할 일 없어요.”도도희는 시언의 맞은편에 앉아 창밖에 내리는 잔잔한 비를 바라보았다.“시언아.” 도도희가 부
기주현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우리 엄마가 아까 또 전화하셔서, 우리 둘의 일을 자세히 물어보셨어요. 비록 그 처장 아들을 포기하는 게 아쉽지만, 선배를 집에 데리고 오라는 걸 허락하셨어요.”아심은 머리를 묶어 올리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손에는 도도희가 직접 끓여준 홍차가 들려 있었다. 아심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축하해요!”주현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아심 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둘이 이렇게 마음을 열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다면 정말로 서로를 놓쳤을지도 모르고요.”아심은 웃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이런 일을 처음 해봐서, 괜히 잘못된 참견이었나 걱정했는데, 둘이 잘 돼서 다행이죠!”주현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심 씨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 그런 의미로 우리 말 놓죠. 앞으로 무슨 일이든 내게 맡겨요!”주현은 가슴을 두드리며 약속했고, 아심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좋아. 말 놔!”에블리가 바비큐 소스를 바르며 외쳤다.“아심, 주현! 고추장 넣을까?”주현이 아심에게 물었다.“매운 거 먹을 수 있어?”아심은 시언의 상처가 떠올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못 먹어. 담백한 게 좋을 것 같아. 너희는 먹어도 돼.”주현은 바로 돌아서서 에블리에게 말했다.“매운 건 빼줘! 나도 담백한 게 먹고 싶어.”이에 한결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와우, 남자친구 생기더니 입맛도 바뀌었네!”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주현도 따라 웃었다.바비큐 파티는 밤 8시까지 이어졌다. 다들 배가 부르지만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8시 반쯤, 학생 쪽 관리자가 급히 뛰어와 말했다.“도도희 선생님, 문제가 생겼어요.”도도희는 즉시 일어나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관리자는 말했다.“학생 열 명 이상이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다른 사람들도 놀라 일어섰고, 한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어쩌다 이렇게 많은 학생이 동시에 열이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
“흥성.”흥성은 강성의 옆도시로, 관광 도시였다. 이에 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도 같이 갈게요!”꽤 발랄하게 말하는 유진에 서인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가겠다고?”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도 갈 거니까요!”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오늘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 이틀은 머물러야 하는데, 네가 따라오면 불편해.”“그냥 여행 가는 셈 치면 되잖아요!”서인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음 사거리에서 임씨 저택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이에 유진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러면 집에 데려다줘요. 집에 가서 짐 챙기고 내 차로 흥성으로 갈게요. 어쩌면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는데요?”“임유진.”서인은 얼굴을 굳히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동료들은 다 놀러 갔는데, 난 너 때문에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나를 두고 혼자 나가겠다고요? 그게 맞는 거예요?”서인은 설명했다.“나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가는 거야.”“몰라요. 어쨌든 따라갈 거예요. 나 어린애 아니니까 방해 안 할게요. 그냥 나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유진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사장님은 일 보러 다니고, 난 혼자 놀러 다닐게요. 절대 방해 안 할 거예요. 됐죠?”서인은 시간을 확인했는데, 더 미루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럼 말 잘 들어야 해.”서인이 신신당부했다.“약속할게요!”유진은 신나서 손까지 들며 맹세할 기세였다.서인은 고속도로에 올라탄 뒤 오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잘 봐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유진도 노정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설명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만 말했다. 노정순은 오전에 여진구가 찾아와 회사 워크숍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줄 알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전화를 끊
강성의 한 묘지.홍복과 표용을 비롯한 전우들의 묘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우들은 이제 백랑의 곁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었다.서인은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씩 놓았고, 임유진도 묘지 밖에서 사 온 꽃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돌계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유진도 서인의 곁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서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얘기했잖아.”유진은 묘지를 찾을 때마다 늘 삼각주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서인이 기억하는 건 이미 다 말해 준 상태였다. 그러나 유진은 질세라 다시 말했다.“이번에 전우들 묘지가 새로 생겼잖아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없어.”서인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느슨하게 앉아 있었고, 말투 역시 어딘가 귀찮아 보였다.이에 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면 다음에 소희한테 물어봐야겠네!”그제야 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봤다.“진짜 듣고 싶어?”“당연하죠!”유진은 활짝 웃으며 턱을 괴고, 이야기 들을 준비를 했다. 유진은 과거가 늘 궁금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맨날 말하는 내 229명의 여자친구들 얘기, 하나씩 다 해 줄까?”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옆에 있던 꽃을 집어 들어 서인에게 던졌다.서인은 피식 웃으며, 거친 목소리 속에 장난기가 묻어났다.“이야기 듣고 싶다며? 229개의 이야기가 있지. 아마 내년까지도 다 못 들을걸.”“아직도 그 말을 해요?”유진은 씩씩거리며 서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서인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밀어낼 수 없었다.마치 큰 회색 늑대 앞에 선 어린 토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잠시 후,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문신 남자는 점점 짜증이 났다.“겨우 서빙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맞팔 달라는 것도 네 급을 봐준 거라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사장님! 여기서 행패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주변 공기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의 싸늘한 눈빛이 문신 남자를 향하자, 그는 마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찔린 듯 등골이 서늘해져,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유진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돈을 내기 전에 제 SNS 맞팔하라고 요구했어요.”그제야 문신 남자의 일행이 이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일어나 힐끗거리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고,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오현빈과 이문이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현빈은 본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주방칼까지 들고 있었다.문신 남자의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때, 서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문신 남자를 향해 말했다.“좋아. 내꺼를 추가해요. 나랑 얘기 좀 하자고요.”문신 남자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동료들을 불러 가게를 빠져나갔다.사람들이 나가자, 현빈이 비웃으며 말했다.“이런 겁쟁이 녀석들. 다음에 또 이런 쓰레기들이 나타나면 말도 필요 없어. 바로 나를 불러.”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알겠어요!”서인은 유진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문은 그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임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 찻주전자를 훔쳐 가겠어요? 안심하세요!”서인은 유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님이 너 찾으러 왔으면, 할 얘기 끝났으면 나가라. 가게 바쁘다.”유진은 서인의 표정이 더 이상 좋지 않자, 정말로 화를 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먼저 보낼게요!”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황급히 돌아서서 여진구를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가 서인의 찻주전자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그거 내려놔요!”유진은 깜짝 놀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놀란 진구는 손을 헛디뎌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래?”유진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낚아채듯 빼앗았다.“이거 사장님이 2,00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깨지면 감당할 수 있어요?”“뭐? 2,000만 원?”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2,000만 원짜리 골동품 같지는 않은데?”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선배 골동품에 대해 알아요?”“아니?”“그럼 됐죠!”유진은 찻주전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2,000만 원인데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어요.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거죠. 깨지면 당연히 화내겠죠!”진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난 잘 모르지만, 우리 작은아버지는 골동품 전문가야. 가져가서 감정받아 볼까?”그리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혹시라도 바가지를 썼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이 찻주전자가 아무리 봐도 2,000만 원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내려놓더니, 진구를 밖으로 밀어냈다.“무슨 바가지요? 마음에 들면 2,000만 원이든 2억이든 가치가 있는 거고, 마음에 안들면 2천원도 아까운 거죠.”“그러니까 선배도 선배 할 일 하러 가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요!”진구는 서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마지못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아,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