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손바닥이 더욱 단단히 아심의 허리를 감싸며, 얇은 입술이 아심의 귀에 가까이 다가왔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속삭였다.“갑자기 주한결 말이 참 맞는 것 같아.”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타고 전해지며 전류처럼 온몸에 퍼졌다. 아심은 반쯤 마비된 듯 굳어버리고, 움직일 수 없었다.“응?” 아심은 조금 늦은 반응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 떨림은 마치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들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숨소리를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싫다고 하면 계속 키스할 거야, 네가 좋다고 할 때까지.”시언의 저음은 차분하지만, 마치 심장을 두드리는 망치처럼 울렸다. 그의 입술이 다시 아심에게 닿았다.시언의 코끝은 그녀의 은은한 향기 속에 휩싸였고, 이 순간 둘만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빗소리도, 다른 사람들의 소리도 모두 멀어졌다. 시언의 눈에는 오로지 아심만이 존재했다.그와 동시에, 책장 너머에서 기주현과 주한결은 막 사랑을 확인하며 뜨거운 입맞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 또한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여기에서는 시언의 얇은 입술이 아심의 턱선을 따라 내려오며, 아심을 애타게 했다. 아심은 눈을 꼭 감고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계속 밀려오는 키스를 막기 위해 시언의 셔츠를 움켜쥐고 얼굴을 돌렸다.시언은 깊은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그의 숨소리는 무거웠고, 마치 자신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다행히도 한결과 주현은 결국 키스를 멈췄다. 주현의 목소리는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다.“원래 아심 씨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 근데 어디 갔어?”한결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주현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내가 전화해 볼게.”“하지 마!” 한결이 주현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평소에 우리한테 그렇게 예의 바르더니, 오늘 나한테 꽃을 가져다주라고 한 건 뭔가 의도가 있었던 거 아니야?”주현은 놀라며 말했다.“선배 말은 우리를 일부러 여기 오게
아심은 출구를 향해 걸어가던 중, 갑자기 낮고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잡동사니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아심은 발걸음을 멈췄고, 시언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생각났다. 알고 보니 시언은 계속 이곳에 있었다.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우연히 창밖을 바라본 아심은 다시 한번 멈춰 섰다. 창가로 다가가 내려다보니 주한결과 기주현이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다.막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여전히 뜨거운 감정을 나누며, 난간에 기대어 입을 맞추고 있었다.아심은 깊은숨을 내쉬며, 이런 상황에서 아래로 내려가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방향을 바꾸어 잡동사니 방으로 들어갔다. 시언은 이번에도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고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래된 금장 회중시계였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회중시계였지만, 순금으로 된 시계판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반짝였다.옆에는 오래된 축음기가 있었고, 그곳에서 나오는 클래식한 바이올린곡이 방 안을 우아하게 채우고 있었다. 창밖의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그 외의 모든 소리는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언은 회중시계를 분해한 채,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아심이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아심은 방 안으로 더 들어가서 시언이 만지고 있는 작은 부품들을 살피며 말했다.“정말 다 고칠 줄 아네요!”시언은 입술을 얇게 다문 채 대답했다.“어릴 때 아버지한테 배웠거든.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어.”아심은 감탄하며 말했다.“아버지의 모든 장점을 다 물려받았네요.”시언은 눈을 살짝 들어 그녀를 한 번 보고 물었다.“너, 나간 줄 알았는데?”아심은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대답했다.“한결과 주현이 아직 아래에 있더라고요.”시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지금 내려가서 그들이 너한테 고맙다고 하게 하면 되겠네. 네가 둘을 이어준 거잖아.”아심은 시언의 농담에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책장으로 가서 전에 읽던 책을 찾아냈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벽에
“응.” 강시언이 대답하며, 회중시계가 든 상자를 강아심에게 건넸다. 아심은 두 손으로 받으며 눈이 살짝 빛났다. 순금의 시계 판과 돛 모양으로 만든 시침과 분침이 있는 작은 범선 디자인이 정말 아름다웠다.“정말 예쁘네!” 아심이 감탄하자, 시언이 말했다.“가져.”그러나 아심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회중시계를 다시 시언에게 돌려주었다.“더 이상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시언은 상자를 받아 들고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다섯 살 때쯤, 아버지가 해외 경매에 참석해서 큰돈을 주고 이 시계를 사 오셨지.”“어머니께 선물했는데, 나중에 우리가 여기서 휴가를 보낼 때 내가 망가뜨렸어.”아심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소중한 걸 나한테 줄 순 없죠. 그리고 더더욱 받을 수 없고요.”시언은 아심을 한 번 쓱 바라보고, 책장 가장 안쪽에 있는 서랍을 열어 회중시계를 넣어두었다. 아심은 시언이 무언가 말을 덜 한 것 같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더 묻지는 않았다.도도희가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모두 저녁에 함께 바비큐를 먹자고....한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되어도 가랑비는 멈추지 않았다.별장 정원에 커다란 파라솔 두 개가 펴져 있었고, 하나는 바비큐 그릴이 놓여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한결이 먼저 나서서 바비큐를 굽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도왔다. 비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분위기는 활기찼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공기 중에는 물안개와 고소한 바비큐 냄새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고 여유로워졌다.시언은 혼자 한쪽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도도희가 다가와 그녀가 직접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며 부드럽게 웃었다.“굳이 어울릴 필요 없으니, 싫으면 안으로 들어가도 돼.”그러나 시언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차분히 대답했다.“괜찮아요. 들어가도 할 일 없어요.”도도희는 시언의 맞은편에 앉아 창밖에 내리는 잔잔한 비를 바라보았다.“시언아.” 도도희가 부
기주현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우리 엄마가 아까 또 전화하셔서, 우리 둘의 일을 자세히 물어보셨어요. 비록 그 처장 아들을 포기하는 게 아쉽지만, 선배를 집에 데리고 오라는 걸 허락하셨어요.”아심은 머리를 묶어 올리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손에는 도도희가 직접 끓여준 홍차가 들려 있었다. 아심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축하해요!”주현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아심 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둘이 이렇게 마음을 열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다면 정말로 서로를 놓쳤을지도 모르고요.”아심은 웃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이런 일을 처음 해봐서, 괜히 잘못된 참견이었나 걱정했는데, 둘이 잘 돼서 다행이죠!”주현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심 씨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 그런 의미로 우리 말 놓죠. 앞으로 무슨 일이든 내게 맡겨요!”주현은 가슴을 두드리며 약속했고, 아심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좋아. 말 놔!”에블리가 바비큐 소스를 바르며 외쳤다.“아심, 주현! 고추장 넣을까?”주현이 아심에게 물었다.“매운 거 먹을 수 있어?”아심은 시언의 상처가 떠올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못 먹어. 담백한 게 좋을 것 같아. 너희는 먹어도 돼.”주현은 바로 돌아서서 에블리에게 말했다.“매운 건 빼줘! 나도 담백한 게 먹고 싶어.”이에 한결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와우, 남자친구 생기더니 입맛도 바뀌었네!”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주현도 따라 웃었다.바비큐 파티는 밤 8시까지 이어졌다. 다들 배가 부르지만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8시 반쯤, 학생 쪽 관리자가 급히 뛰어와 말했다.“도도희 선생님, 문제가 생겼어요.”도도희는 즉시 일어나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관리자는 말했다.“학생 열 명 이상이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다른 사람들도 놀라 일어섰고, 한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어쩌다 이렇게 많은 학생이 동시에 열이
시언은 키가 커서 두 사람이 함께 우산을 쓰는 게 아심이 혼자 쓰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아심의 몸은 시언의 팔에 거의 닿아 있었고, 우산이 가로등 불빛을 가려 우산 아래는 더 어두워졌다. 마치 둘만의 작은 공간이 형성된 듯했다. 그 공간에는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와 두 사람의 얕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다.도도희는 학생들이 머무는 별장으로 향하다가 멀리서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시언이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우산이 아심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 아심을 비에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반면 시언의 어깨는 반쯤 비에 젖어 있었다.기주현도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말했다.“제가 가서 우산 하나 더 가져다줄게요.”“괜찮아!” 도도희는 웃으며 주현을 막았다.“우리 먼저 아픈 학생들부터 보러 가자.”비록 한쪽 어깨가 젖었어도,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기분이 좋을 것이다. ...아심은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가려 했지만, 시언이 말했다.“뒷자리에 앉아.”아심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설마 그렇게 운이 나빠서 산사태를 만날 리는 없겠지?”아심은 안전벨트를 매고 자리를 잡았다. 시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별장에서 마을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길 대부분이 산길이었고, 이미 어두워진 데다 비까지 내려 길 위에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산길 한쪽은 절벽, 반대쪽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가로등도 멀찍이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아심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어둠 속에서 빗물이 차의 속도에 따라 빠르게 흘러갔고, 시언의 날카로운 옆모습이 창에 비쳤다.아심은 계속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시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에 비친 아심의 눈길이 자기 눈과 마주쳤다. 이에 아심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길은 평탄하게 이어졌다. 산길을 거의 빠져나갈 즈음, 아심이 앞을 보고 급히 말했다.“
아심은 잠시 멍해지며 시언의 어깨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우산을 고르려고 손을 뻗었지만, 시언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하나면 충분해!”“우산 여러 개 사면 둘 데도 없어!”그렇게 말하며 아심을 끌고 걸어갔다. 아심은 우산을 파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약국을 찾아 들어갔다. 아심은 카운터로 가서 약사에게 필요한 약을 말하려 했지만, 시언이 먼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약사에게 내밀었다.“이대로 준비해 주세요.”아심은 그 종이를 보고 놀라며 시언을 쳐다보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관리자가 준 목록이야. 도도희 이모는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어.”아심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알고 있더라도 어쩌겠는가?’약이 준비되는 동안 강아심은 약국을 돌아다니다가 진열대에 놓인 여러 가지 비타민 젤리를 보고, 작은 소리로 시언에게 물었다.“이거 효과 있어요?”시언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네가 먹으려고?”아심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학생들에게 주려고요. 작은 선물로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시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근데 왜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해? 무슨 숨길 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아심은 시언을 째려보았다.“당연히 약사한테 들릴까 봐 그런 거죠.”“왜 들리면 안 되는데?” 시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이런 건 당신도 잘 모르는구나?” 아심은 자신이 드디어 남자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는 듯이 우쭐해하며 말했다.“약사가 듣기만 하면 엄청나게 홍보해 대면서 판단을 흐리게 만들 거예요.”“흥!” 시언이 코웃음을 쳤다.“네 머리가 그렇게 똑똑한데, 누가 네 판단을 흐릴 수 있겠어?”시언의 말이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심은 무시하고 비타민 젤리의 효능을 검색했다.약사가 필요한 약들을 다 준비한 후, 아심은 비타민 젤리 과일 맛 60병도 달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사탕처럼 줄 수 있는 선물로, 그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금발의 남자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아심은 잠시 멍하니 있었지만, 이내 강시언의 팔을 뒤집어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오해했어요. 이 외국인 분은 도도희 이모를 찾고 있어요.”그러자 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해했다.“도도희 이모를 찾는다고?”“정말로 도도희를 아세요? 혹시 만나게 해주실 수 있나요?” 금발 남자의 눈빛은 간절하고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시언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찾아서 뭐 하려는 거죠?”금발 남자는 즉시 대답했다.“제 친구이고 C국까지 특별히 찾아왔어요. 만약 아신다면,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왜 직접 전화하지 않죠?”“원래는 깜짝 놀라게 해주려 했어요. 그런데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잃어버려 전화도 못 하고, 어디 있는지 정확히 몰라요.” 금발 남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마을에서 하루 종일 찾아 헤맸어요.”“이렇게 멀리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번호를 기억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시언은 의심을 품은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은 첫날 도도희가 전화를 받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시언을 끌어당기고, 금발 남자에게 말했다.“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따라오세요.”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으나, 아심은 시언을 무시하고 금발 남자에게 말했다. “따라오세요!”“정말 고마워요!” 금발 남자는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아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언의 손목을 잡고 차로 향했다.그러나 시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낮게 말했다.“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가려고?”아심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언 님, 여긴 삼각주가 아니에요. 모든 사람을 간첩처럼 심문할 필요는 없잖아요.”아심은 도도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시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거짓말을 하
아심은 웃음을 지으며 창문을 내리고 뒤따라온 금발 남자를 바라보았다.“차에 타세요. 도도희 이모는 마을에 안 계시고, 조금 더 가야 해요.”“고마워요!” 금발 남자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시언은 핸들을 잡고 있다가, 백미러에 비친 금발 남자의 미소를 보고 짜증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금발 남자는 차가 안정되자 아심에게 명함을 내밀며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웃었다.“안녕하세요, 제 명함입니다.”아심은 명함을 받았다. 검은 갈색 카드에 이반스라는 이름과 뒤에 길게 이어진 성씨가 적혀 있었다.명함의 왼쪽 위에는 어떤 가문의 문양 같은 룰렛 모양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었다.아심은 그 룰렛 모양의 문양이 어딘가 익숙했지만,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시언이 옆눈으로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고, 아심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강아심이에요.”“도도희가 말하길 여기에서 제 성을 이씨고 이름을 반스라고 소개하라고 하더군요.”아심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이름이 반스?”남자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네?”아심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니에요. 반스? 정말 독특한 이름이네요!”이반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도도희가 지어준 이름이에요.”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반스 씨와 도도희 이모는 친구세요?”“네,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죠.” 이반스는 기쁘게 말했다.“하지만 이번이 처음으로 고향에 왔거든요.”“우리나라에 오신 걸 환영해요. 여기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심은 다정하게 말했다.“고마워요!” 이반스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행동과 말투에는 귀족 같은 품위가 배어 있었다.그 후로는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다시 돌아갈 때, 그들은 이전에 자갈이 쌓였던 곳을 지나갔다.아심은 뒤를 돌아보며 이반스에게 말했다.“자갈이 있어서 조심하셔야 해요.”이반스는 차분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