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심은 무심코 방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나무 격자창에 반사되는 햇빛으로 인해 아지랑이처럼 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곧 스님이 방에서 나와 아심에게 부적을 건넸다.“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모든 일이 명확해질 것이오.”아심은 이런 것들을 별로 믿지 않았지만, 스님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여 부적을 공손히 받아 들고 두 손으로 가슴에 품었다.“감사해요, 스님!”스님은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소, 아가씨. 여기 이것을 보시오.”그는 목에 걸린 줄을 당겨 아래에 걸린 패를 보여주었다. 그 패에는 계좌번호가 찍혀져 있었다.스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4만 원이오. 결제해 주세요.”아심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한편 시언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고, 억제된 웃음 속에 분명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아심은 핸드폰을 꺼내 4만 원을 송금했다....후원을 떠난 뒤에도 시언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 보였고, 그의 인생에서 이보다 우스운 일을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아심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앞서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돌아서서 부적을 그의 손에 쥐어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웃어요!”시언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가지고 있어 봐, 마음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질걸? 저런 걸 하는 스님이라면 평범한 스님은 아닐 테니 꽤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아심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숨을 깊게 들이쉬고,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억눌렀다.“말했잖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시언은 두 손가락으로 아심의 이마를 살짝 튕기며 말했다.“말 안 들으면 이렇게 되는 거야!”아심은 이마의 아픔에 손을 올리며 시언을 올려다보았지만, 시언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커다란 등이 보일 뿐이었다.아심은 아픔을 달래며 미소를 짓고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둘은 절을 나와 바깥의 돌 위에 앉아 주한결 일행을 기다렸다.
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신 승리하는 건 꽤 잘하네!”“당연하죠!” 아심은 멀리 보이는 맞이 소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게다가 스님이 하신 말씀도 꽤 그럴듯했어요.”“어떤 말?” 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물었다. “물속의 달이 하늘의 달이라는 그 말?”시언이 그렇게 묻자, 아심은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눈이 반짝이며 밝게 웃어 보였다. 웃음을 멈춘 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부적 돌려줘요!”“뭐?” 시언이 물었다.“내가 4만 원이나 주고 산, 그 맑은 마음을 준다는 부적이요.” 아심이 말했다. 시언은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집에 가져가서 잘 모셔두려고?”아심은 시언의 농담을 무시하고, 부적을 정성스럽게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매력적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세요!”시언은 아심을 잠시 응시한 후, 고개를 돌리고 눈에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잠시 기다리자, 주한결과 일행들이 나왔다. 한결은 손에 기름종이로 포장된 뭔가를 들고 있었다. 꽤 오래된 느낌을 주는 포장이었다.“절에서 만든 참기름 떡인데 먹을 사람?” 한결이 묻자, 기주현이 신기해하며 물었다.“언제 샀어요? 난 못 봤는데?”“방금 나오면서 샀어. 맛있어 보이길래.” 한결은 떡 하나를 아심에게 내밀었다. 참기름 떡은 일반 기름떡과 같지만, 참기름으로 튀겨 더 기름진 듯 보였다. 그래서 아심은 잠시 망설이다가 떡을 받았다.“이게 다 백가향에서 빌어온 향으로 만든 떡이래. 복이 온다고 하더라고!” 한결이 설명했다.“복은 무슨, 선배 속은 거예요!” 주현이 웃으며 말했다.한결이 떡을 들고 있자, 아심도 떡 하나를 받아 들고 물었다.“얼마야?”“2만 원!” 한결이 답했다.“2만 원?” 주현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선배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진짜 속기 잘하는 사람이구나. 밖에서는 떡 다섯 개에 5천원인데, 2만 원을 썼다고요?”“이건 백가향에서 모아
아심은 산 정상의 바위 위에 서서 시언에게 손짓했다.“저기 좀 봐요.”시언이 다가와 아심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희미하게 중턱에 몇 채의 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왜?” 시언이 물었다.“저기 사람 사는 곳인가요?” 아심이 궁금해하며 묻자 시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무도 살지 않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위한 임시 휴식 공간일 뿐이야.”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기 힘들 것 같아 가보려던 마음을 접었다. 시언은 깊은 눈빛을 드리우며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오면 데려다줄게. 하지만 별로 볼 건 없어. 그냥 나무집 몇 채야.”아심이 웃었다.“거기 가봤어요?”시언은 바위에 앉아 한 쪽 다리를 구부리며 대답했다.“어렸을 때 몇 달 동안 저기서 지냈지. 근처 산도 다 돌아다녔고.”시언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자 아심은 순간 시언의 부모를 떠올리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어둑어둑해질 때쯤, 일행은 짐을 챙겨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턱쯤 내려왔을 때, 하늘은 이미 캄캄해졌다.깊은 산속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고, 발밑에 놓인 돌길만이 현실감을 주었다. 잎이 우거진 나무 사이로 초승달이 서늘하게 빛나고, 가끔 밤새가 날아다니며 메아리치는 울음소리를 남겼다.에블리는 어둠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 불안한 눈으로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 늑대는 없겠죠?”시언은 차분히 대답했다.“늑대는 없어요. 마을 사람들도 자주 올라오지만 늑대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시언의 든든한 말에 일행은 마음이 놓여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다들 밤바람을 맞으며 이런 산속 산책의 독특한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주현이 비명을 질렀고, 모두가 주현을 돌아봤다. 가장 가까이 있던 주한결이 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무슨 일이야?”“돌 위에서 발이 미끄러졌어요. 발목을 삔 것 같아요.” 주현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은 손전등을 켜서 아심의 발을 비췄다. 겉보기에는 큰 이
강아심은 에블리의 그림 도구 가방을 받아 자신에게 메고 말했다.“내가 들 테니까, 에블리 씨가 앞에서 주한결에게 길을 밝혀 줘요. 조심해서 내려가게!”에블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손전등을 들고 한결의 앞에 서서 길을 비추기 시작했다.시언과 아심은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도 발걸음이 가볍고 안정적으로 산길을 걸었다. 가파른 산길을 지나면서 시언은 아심을 돌아보며 말했다.“그림 도구 가방도 나한테 넘겨.”“아니에요.” 아심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괜찮아요. 만약 힘들어지면 그때 부탁할게요.”“이슬이 내려서 돌계단이 미끄러워. 조심해.” 시언은 아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심은 잠시 시언의 손을 보며 설렘을 느꼈지만, 잡지 않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특공 훈련까지 받은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에요?”그리고 농담처럼 덧붙였다.“우수한 특공 대원이라고요!”시언은 더 이상 아심을 타박하지 않고, 그녀가 앞장서게 두었다. 아심은 일행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돌계단이 미끄러우니 모두 조심해요. 천천히 내려가도 되니까!”“알겠어!”“주의할게요!” 한결과 일행이 차례로 응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심의 발밑으로 무언가가 풀숲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그걸 밟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발이 헛디뎌 크게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시언은 즉시 아심의 팔을 붙잡아 반쯤 들어 올리듯 잡아 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심은 놀라 헐떡이며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그게 뭐였지?”시언은 낮게 대답했다.“아마 족제비일 거야.”“무슨 일이야?”“무슨 일 있어요?” 한결과 에블리가 걱정스레 돌아봤다. 아심은 시언의 품에서 벗어나며 담담하게 웃었다.“아니에요, 족제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요.”“족제비?” 주현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그러자 한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내일 산에 다시 와서 너한테 실컷 보여 줄게.”주현은 한결에게 가볍게 어깨를 치며 말했다.“선
주한결과 기주현의 실랑이는 결국 주현이 이긴 듯한 분위기였다.아심은 시언의 반걸음 뒤에서 시언의 든든한 등 뒤에 숨어, 그의 손을 꼭 잡고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주변은 매우 조용했고, 아심은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사삭 하는 소리와 발아래 돌계단을 밟는 소리, 그리고 자기 심장의 고동 소리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산에서 내려오자, 도도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도희는 아심에게서 전화로 안전을 확인받고 대략적인 도착 시간을 들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산 아래까지 차로 마중을 나왔다.도도희는 기주현이 발목을 삐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지만, 주현은 바로 한결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씩씩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방금 삐끗했는데 지금은 다 나았어요!”한결은 힘들어 보였는지 차에 기대어 헐떡였지만, 주현이 태연하게 말했다.“선배가 굳이 나를 업겠다고 했지, 내가 혼자 걸었다면 지금쯤 벌써 도착했을 텐데.”한결은 주현을 노려보며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그러자 도도희는 주현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만 말 돌리고, 내일 한결의 수업을 네가 대신해. 그게 감사의 표시야.”“좋아요!” 주현은 시원하게 대답하며 한결을 향해 외쳤다.“봤죠? 나 정말 깔끔하게 약속하는 사람이라니까요!”한결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다음엔 두고 봐. 정말 안 도와줄 거야!”주현은 그저 한결에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확신에 찬 눈빛을 보냈다. 마치 자신이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한결이 늘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듯했다.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자, 그만하고 어서 차에 타라.”시언은 그림 도구 가방을 차에 실으면서 말했다.“이모, 다른 분들을 데려다주세요. 저는 걸어갈게요.”차는 다섯 명이 타기엔 좁았다. 그러자 주현이 즉시 말했다.“우리 좀 좁게 앉으면 다 같이 탈 수 있을 텐데요!”시언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우린 올 때 걸어왔으니, 돌아갈 때도 걸어가면 돼. 너희는 먼저 가.”모두 산
주변은 지나치게 고요해, 아심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 화제를 꺼냈다.“기주현, 귀엽지 않아요? 팀에 활발한 성격의 사람이 있으면 분위기가 확실히 밝아지잖아요.”“저희 쪽에도 비슷한 성격의 비서가 있어요. 항상 시끄럽지만, 그날 없으면 뭔가 허전하더라고요.”시언은 짧게 대답했다.“응.”시언의 단 한 마디에 강아심은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심이 침묵을 유지하려고 마음먹은 찰나, 시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요 며칠 한가하면 나와 같이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지 않을래?”아심은 약간 멈칫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할아버지, 건강하시죠?”“잘 지내셔.”아심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설날에 운성을 떠날 때, 할아버지께 인사를 못 드리고 가버렸네요.”시언이 대답했다.“할아버지는 괘념치 않으셨어.”아심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제가 조금 철없었어요.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잘해주셨는데, 직접 가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죠.”“그 날은...” 시언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내 잘못이었어.”아심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잖아요. 이해해요.”시언은 걸음을 멈추고 아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번에는 나와 함께 갈래?”아심은 순간 망설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할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져올 물건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아심의 침묵이 이미 답변이었음을 알아차린 시언은 고개를 숙이며 그늘진 눈빛을 숨겼다.두 사람은 말을 잃은 채 걷기 시작했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앞쪽 가로등 아래에 벤치가 보이자 아심이 말했다.“잠깐 쉬었다 갈래요?”시간은 이미 어두워졌으니, 조금 늦게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올라와. 내가 업어 줄게.”아심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괜찮아요!”“올라와.”시언의 목소리가 다소 낮아지며 명령조로 들렸다. 아심은 그의
강아심은 어색함을 달래려 변명했다.“차를 타지 않은 건, 당신이 예전에 다른 사람의 선의에 쉽게 마음을 놓지 말라고 했잖아요.”강시언은 애매한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응.”그는 본인이 차를 타지 않은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고, 아심은 왠지 말을 덧붙일수록 더 꼬이는 느낌에 창피함을 느꼈다.“차라리 도도희 이모의 차를 탔어야 했나 봐요. 당신을 보호하려던 게 오히려 짐이 됐네요.”시언은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짐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아심은 시언의 말에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 땅에 겹친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나는 짐인가요?”“아니야.”시언의 대답에 아심은 마음이 풀어졌고, 살짝 시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때 왜 저를 꼭 떠나게 해야 했던 거예요?”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질문이 드디어 아심의 입 밖으로 나왔다.이에 시언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전과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했다.“그때 널 노리는 자들이 있었고, 그 세력은 상당히 강했어. 당장 그들을 처리할 수 없어서 네가 안전하게 떠나는 방법밖에 없었어.”아심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깜박이다가 멀리 어둠 속의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사실, 짐작은 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직접 들어서 고마워요.”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궁금한 건 앞으로도 전부 말해 줄게.”“그래요.”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시언이 물었다.“춥지 않아?”아심은 머리를 저었다.“안 추워요.”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편안함에 잠이 쏟아질 듯했지만, 그의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 깊숙이 한 줄기 쓸쓸함이 밀려와 묘한 슬픔이 가슴을 찔렀다. 아무리 애써도, 눈물이 한 방울 눈가를 타고 흘러내려 시언의 목덜미에 떨어졌다.아심은 당황해 급히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냈지만, 이미 그의 등이 순간적으로 굳어짐을 느꼈다.시언은 잠
아심은 반쯤 눈을 감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었다 짧아지고, 다시 길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 산맥은 마치 야생의 짐승처럼 지평선 위에 웅크리고, 하늘의 초승달은 구름에 가려져 흐릿해졌다.아심은 주머니 속의 부적을 꺼내어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이게 꿈이라면, 조금 더 늦게 깨어나게 해주세요. 길도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어요.’그 순간 아심의 기억은 한때 사막에서의 일로 돌아갔다. 그날, 다리가 붓고 걸을 수 없었을 때도 시언이 아심을 업고 메마른 사막을 걸어 나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현기증이 날 정도였고, 시언은 아심이 잠들지 못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 기억이 가물가물한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헷갈리지만, 분명 그때부터였다. 시언에게 느끼는 감정이 경외와 두려움을 넘어선 다른 무엇이 되었던 것은.다시 시언의 등에 기대자,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해 아심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또다시 같은 길을 걷는 건 아닌지.‘어디서 시작했는지 알았으니, 이제 여기서 끝내자.’새로운 길을 선택했으니, 그 길을 뚜렷이 걸어가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아심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사랑을 원하지 않아. 그저 냉철하게 깨어 있고 싶을 뿐. 그렇게 또다시 결심하며, 스님의 충고가 떠올랐다. 거울 속의 꽃, 물 위의 달과 같은 헛된 꿈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반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장원에 도착했다. 아심은 시언의 등에서 내려와 두 걸음 물러섰다.“수고했어요, 고마워요.” 아심은 이전보다 한층 더 거리감을 두며 차분히 말했다.시언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아심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심은 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다른 일행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휴식 중이었다. 도도희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모두 기다리려 했지만 내가 그냥 먹고 쉬라고 했어.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푹 쉬도록 해.” 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녁은 너희 방으로 보내 뒀으니 천천히 먹고 일찍 자.”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
“흥성.”흥성은 강성의 옆도시로, 관광 도시였다. 이에 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도 같이 갈게요!”꽤 발랄하게 말하는 유진에 서인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가겠다고?”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도 갈 거니까요!”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오늘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 이틀은 머물러야 하는데, 네가 따라오면 불편해.”“그냥 여행 가는 셈 치면 되잖아요!”서인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음 사거리에서 임씨 저택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이에 유진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러면 집에 데려다줘요. 집에 가서 짐 챙기고 내 차로 흥성으로 갈게요. 어쩌면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는데요?”“임유진.”서인은 얼굴을 굳히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동료들은 다 놀러 갔는데, 난 너 때문에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나를 두고 혼자 나가겠다고요? 그게 맞는 거예요?”서인은 설명했다.“나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가는 거야.”“몰라요. 어쨌든 따라갈 거예요. 나 어린애 아니니까 방해 안 할게요. 그냥 나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유진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사장님은 일 보러 다니고, 난 혼자 놀러 다닐게요. 절대 방해 안 할 거예요. 됐죠?”서인은 시간을 확인했는데, 더 미루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럼 말 잘 들어야 해.”서인이 신신당부했다.“약속할게요!”유진은 신나서 손까지 들며 맹세할 기세였다.서인은 고속도로에 올라탄 뒤 오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잘 봐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유진도 노정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설명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만 말했다. 노정순은 오전에 여진구가 찾아와 회사 워크숍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줄 알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전화를 끊
강성의 한 묘지.홍복과 표용을 비롯한 전우들의 묘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우들은 이제 백랑의 곁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었다.서인은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씩 놓았고, 임유진도 묘지 밖에서 사 온 꽃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돌계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유진도 서인의 곁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서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얘기했잖아.”유진은 묘지를 찾을 때마다 늘 삼각주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서인이 기억하는 건 이미 다 말해 준 상태였다. 그러나 유진은 질세라 다시 말했다.“이번에 전우들 묘지가 새로 생겼잖아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없어.”서인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느슨하게 앉아 있었고, 말투 역시 어딘가 귀찮아 보였다.이에 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면 다음에 소희한테 물어봐야겠네!”그제야 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봤다.“진짜 듣고 싶어?”“당연하죠!”유진은 활짝 웃으며 턱을 괴고, 이야기 들을 준비를 했다. 유진은 과거가 늘 궁금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맨날 말하는 내 229명의 여자친구들 얘기, 하나씩 다 해 줄까?”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옆에 있던 꽃을 집어 들어 서인에게 던졌다.서인은 피식 웃으며, 거친 목소리 속에 장난기가 묻어났다.“이야기 듣고 싶다며? 229개의 이야기가 있지. 아마 내년까지도 다 못 들을걸.”“아직도 그 말을 해요?”유진은 씩씩거리며 서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서인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밀어낼 수 없었다.마치 큰 회색 늑대 앞에 선 어린 토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잠시 후,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문신 남자는 점점 짜증이 났다.“겨우 서빙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맞팔 달라는 것도 네 급을 봐준 거라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사장님! 여기서 행패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주변 공기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의 싸늘한 눈빛이 문신 남자를 향하자, 그는 마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찔린 듯 등골이 서늘해져,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유진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돈을 내기 전에 제 SNS 맞팔하라고 요구했어요.”그제야 문신 남자의 일행이 이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일어나 힐끗거리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고,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오현빈과 이문이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현빈은 본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주방칼까지 들고 있었다.문신 남자의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때, 서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문신 남자를 향해 말했다.“좋아. 내꺼를 추가해요. 나랑 얘기 좀 하자고요.”문신 남자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동료들을 불러 가게를 빠져나갔다.사람들이 나가자, 현빈이 비웃으며 말했다.“이런 겁쟁이 녀석들. 다음에 또 이런 쓰레기들이 나타나면 말도 필요 없어. 바로 나를 불러.”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알겠어요!”서인은 유진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문은 그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임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 찻주전자를 훔쳐 가겠어요? 안심하세요!”서인은 유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님이 너 찾으러 왔으면, 할 얘기 끝났으면 나가라. 가게 바쁘다.”유진은 서인의 표정이 더 이상 좋지 않자, 정말로 화를 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먼저 보낼게요!”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황급히 돌아서서 여진구를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가 서인의 찻주전자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그거 내려놔요!”유진은 깜짝 놀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놀란 진구는 손을 헛디뎌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래?”유진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낚아채듯 빼앗았다.“이거 사장님이 2,00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깨지면 감당할 수 있어요?”“뭐? 2,000만 원?”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2,000만 원짜리 골동품 같지는 않은데?”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선배 골동품에 대해 알아요?”“아니?”“그럼 됐죠!”유진은 찻주전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2,000만 원인데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어요.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거죠. 깨지면 당연히 화내겠죠!”진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난 잘 모르지만, 우리 작은아버지는 골동품 전문가야. 가져가서 감정받아 볼까?”그리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혹시라도 바가지를 썼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이 찻주전자가 아무리 봐도 2,000만 원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내려놓더니, 진구를 밖으로 밀어냈다.“무슨 바가지요? 마음에 들면 2,000만 원이든 2억이든 가치가 있는 거고, 마음에 안들면 2천원도 아까운 거죠.”“그러니까 선배도 선배 할 일 하러 가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요!”진구는 서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마지못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아,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