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심은 에블리의 그림 도구 가방을 받아 자신에게 메고 말했다.“내가 들 테니까, 에블리 씨가 앞에서 주한결에게 길을 밝혀 줘요. 조심해서 내려가게!”에블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손전등을 들고 한결의 앞에 서서 길을 비추기 시작했다.시언과 아심은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도 발걸음이 가볍고 안정적으로 산길을 걸었다. 가파른 산길을 지나면서 시언은 아심을 돌아보며 말했다.“그림 도구 가방도 나한테 넘겨.”“아니에요.” 아심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괜찮아요. 만약 힘들어지면 그때 부탁할게요.”“이슬이 내려서 돌계단이 미끄러워. 조심해.” 시언은 아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심은 잠시 시언의 손을 보며 설렘을 느꼈지만, 잡지 않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특공 훈련까지 받은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에요?”그리고 농담처럼 덧붙였다.“우수한 특공 대원이라고요!”시언은 더 이상 아심을 타박하지 않고, 그녀가 앞장서게 두었다. 아심은 일행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돌계단이 미끄러우니 모두 조심해요. 천천히 내려가도 되니까!”“알겠어!”“주의할게요!” 한결과 일행이 차례로 응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심의 발밑으로 무언가가 풀숲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그걸 밟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발이 헛디뎌 크게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시언은 즉시 아심의 팔을 붙잡아 반쯤 들어 올리듯 잡아 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심은 놀라 헐떡이며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그게 뭐였지?”시언은 낮게 대답했다.“아마 족제비일 거야.”“무슨 일이야?”“무슨 일 있어요?” 한결과 에블리가 걱정스레 돌아봤다. 아심은 시언의 품에서 벗어나며 담담하게 웃었다.“아니에요, 족제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요.”“족제비?” 주현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그러자 한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내일 산에 다시 와서 너한테 실컷 보여 줄게.”주현은 한결에게 가볍게 어깨를 치며 말했다.“선
주한결과 기주현의 실랑이는 결국 주현이 이긴 듯한 분위기였다.아심은 시언의 반걸음 뒤에서 시언의 든든한 등 뒤에 숨어, 그의 손을 꼭 잡고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주변은 매우 조용했고, 아심은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사삭 하는 소리와 발아래 돌계단을 밟는 소리, 그리고 자기 심장의 고동 소리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산에서 내려오자, 도도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도희는 아심에게서 전화로 안전을 확인받고 대략적인 도착 시간을 들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산 아래까지 차로 마중을 나왔다.도도희는 기주현이 발목을 삐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지만, 주현은 바로 한결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씩씩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방금 삐끗했는데 지금은 다 나았어요!”한결은 힘들어 보였는지 차에 기대어 헐떡였지만, 주현이 태연하게 말했다.“선배가 굳이 나를 업겠다고 했지, 내가 혼자 걸었다면 지금쯤 벌써 도착했을 텐데.”한결은 주현을 노려보며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그러자 도도희는 주현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만 말 돌리고, 내일 한결의 수업을 네가 대신해. 그게 감사의 표시야.”“좋아요!” 주현은 시원하게 대답하며 한결을 향해 외쳤다.“봤죠? 나 정말 깔끔하게 약속하는 사람이라니까요!”한결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다음엔 두고 봐. 정말 안 도와줄 거야!”주현은 그저 한결에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확신에 찬 눈빛을 보냈다. 마치 자신이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한결이 늘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듯했다.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자, 그만하고 어서 차에 타라.”시언은 그림 도구 가방을 차에 실으면서 말했다.“이모, 다른 분들을 데려다주세요. 저는 걸어갈게요.”차는 다섯 명이 타기엔 좁았다. 그러자 주현이 즉시 말했다.“우리 좀 좁게 앉으면 다 같이 탈 수 있을 텐데요!”시언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우린 올 때 걸어왔으니, 돌아갈 때도 걸어가면 돼. 너희는 먼저 가.”모두 산
주변은 지나치게 고요해, 아심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 화제를 꺼냈다.“기주현, 귀엽지 않아요? 팀에 활발한 성격의 사람이 있으면 분위기가 확실히 밝아지잖아요.”“저희 쪽에도 비슷한 성격의 비서가 있어요. 항상 시끄럽지만, 그날 없으면 뭔가 허전하더라고요.”시언은 짧게 대답했다.“응.”시언의 단 한 마디에 강아심은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심이 침묵을 유지하려고 마음먹은 찰나, 시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요 며칠 한가하면 나와 같이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지 않을래?”아심은 약간 멈칫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할아버지, 건강하시죠?”“잘 지내셔.”아심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설날에 운성을 떠날 때, 할아버지께 인사를 못 드리고 가버렸네요.”시언이 대답했다.“할아버지는 괘념치 않으셨어.”아심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제가 조금 철없었어요.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잘해주셨는데, 직접 가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죠.”“그 날은...” 시언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내 잘못이었어.”아심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잖아요. 이해해요.”시언은 걸음을 멈추고 아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번에는 나와 함께 갈래?”아심은 순간 망설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할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져올 물건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아심의 침묵이 이미 답변이었음을 알아차린 시언은 고개를 숙이며 그늘진 눈빛을 숨겼다.두 사람은 말을 잃은 채 걷기 시작했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앞쪽 가로등 아래에 벤치가 보이자 아심이 말했다.“잠깐 쉬었다 갈래요?”시간은 이미 어두워졌으니, 조금 늦게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올라와. 내가 업어 줄게.”아심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괜찮아요!”“올라와.”시언의 목소리가 다소 낮아지며 명령조로 들렸다. 아심은 그의
강아심은 어색함을 달래려 변명했다.“차를 타지 않은 건, 당신이 예전에 다른 사람의 선의에 쉽게 마음을 놓지 말라고 했잖아요.”강시언은 애매한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응.”그는 본인이 차를 타지 않은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고, 아심은 왠지 말을 덧붙일수록 더 꼬이는 느낌에 창피함을 느꼈다.“차라리 도도희 이모의 차를 탔어야 했나 봐요. 당신을 보호하려던 게 오히려 짐이 됐네요.”시언은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짐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아심은 시언의 말에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 땅에 겹친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나는 짐인가요?”“아니야.”시언의 대답에 아심은 마음이 풀어졌고, 살짝 시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때 왜 저를 꼭 떠나게 해야 했던 거예요?”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질문이 드디어 아심의 입 밖으로 나왔다.이에 시언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전과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했다.“그때 널 노리는 자들이 있었고, 그 세력은 상당히 강했어. 당장 그들을 처리할 수 없어서 네가 안전하게 떠나는 방법밖에 없었어.”아심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깜박이다가 멀리 어둠 속의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사실, 짐작은 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직접 들어서 고마워요.”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궁금한 건 앞으로도 전부 말해 줄게.”“그래요.”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시언이 물었다.“춥지 않아?”아심은 머리를 저었다.“안 추워요.”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편안함에 잠이 쏟아질 듯했지만, 그의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 깊숙이 한 줄기 쓸쓸함이 밀려와 묘한 슬픔이 가슴을 찔렀다. 아무리 애써도, 눈물이 한 방울 눈가를 타고 흘러내려 시언의 목덜미에 떨어졌다.아심은 당황해 급히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냈지만, 이미 그의 등이 순간적으로 굳어짐을 느꼈다.시언은 잠
아심은 반쯤 눈을 감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었다 짧아지고, 다시 길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 산맥은 마치 야생의 짐승처럼 지평선 위에 웅크리고, 하늘의 초승달은 구름에 가려져 흐릿해졌다.아심은 주머니 속의 부적을 꺼내어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이게 꿈이라면, 조금 더 늦게 깨어나게 해주세요. 길도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어요.’그 순간 아심의 기억은 한때 사막에서의 일로 돌아갔다. 그날, 다리가 붓고 걸을 수 없었을 때도 시언이 아심을 업고 메마른 사막을 걸어 나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현기증이 날 정도였고, 시언은 아심이 잠들지 못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 기억이 가물가물한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헷갈리지만, 분명 그때부터였다. 시언에게 느끼는 감정이 경외와 두려움을 넘어선 다른 무엇이 되었던 것은.다시 시언의 등에 기대자,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해 아심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또다시 같은 길을 걷는 건 아닌지.‘어디서 시작했는지 알았으니, 이제 여기서 끝내자.’새로운 길을 선택했으니, 그 길을 뚜렷이 걸어가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아심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사랑을 원하지 않아. 그저 냉철하게 깨어 있고 싶을 뿐. 그렇게 또다시 결심하며, 스님의 충고가 떠올랐다. 거울 속의 꽃, 물 위의 달과 같은 헛된 꿈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반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장원에 도착했다. 아심은 시언의 등에서 내려와 두 걸음 물러섰다.“수고했어요, 고마워요.” 아심은 이전보다 한층 더 거리감을 두며 차분히 말했다.시언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아심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심은 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다른 일행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휴식 중이었다. 도도희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모두 기다리려 했지만 내가 그냥 먹고 쉬라고 했어.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푹 쉬도록 해.” 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녁은 너희 방으로 보내 뒀으니 천천히 먹고 일찍 자.”
“나 먼저 올라가서 씻을게요.” 아심은 하루 종일 산을 오른 탓에 온몸이 땀에 젖어 빨리 샤워하고 싶었다. 시언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두 발짝 걷던 아심은 문득 돌아서며 말했다.“상처에 물 닿으면 안 돼요.”시언은 고개를 돌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물 안 닿게 샤워할 수 있어?”“잘 감싸면 되잖아요.” 아심이 대답했다.“괜찮아.” 시언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아심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답답함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언은 이미 티셔츠를 벗고 있었고, 탄탄한 상반신이 드러나 있었다. 아심은 순간 심장이 뛰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심이 들어온 것을 본 시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더니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아심은 시언을 따라 욕실로 들어가던 중, 그가 바지를 벗으려는 것을 보고 얼떨결에 외쳤다.“벗지 마요!”시언은 차분한 눈빛으로 아심을 응시하며 물었다.“이 상황이 모순되고 혼란스럽지 않나?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아심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눈가에 희미하게 물기가 맺혔다.잠시 후, 아심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시언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무거워진 마음을 느꼈다. 산을 오른 하루의 피로보다도, 조금 전의 순간이 자신의 에너지를 앗아가는 듯했다.갑자기 문이 다시 열리며, 아심이 의자를 들고 들어와 차분히 말했다.“앉아요.”“뭘 하려고?” 시언은 눈빛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응시했다.“앉으라면 앉아요.” 아심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도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시언은 잠시 주저했지만, 결국 의자에 앉았다.“일부러 화내게 하려는 건 아닌데, 정말 괜찮아. 다치면 원래 스스로 치유하는 법이라.”시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워기가 위에서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아심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작은 승리감이 엿보였다.
아심은 샤워를 도와주는 중 불가피하게 손이 닿을 때마다 시언의 탄탄한 피부에서 전해지는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언의 단단한 근육은 아심의 부드럽고 하얀 손과는 대조를 이루며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아심은 거리낌 없이 시언의 가슴부터 아래로 거품을 발라 내려가며 씻겨 주었고, 다시 위로 손을 올리려는 순간, 시언이 손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의 팔 근육은 긴장으로 인해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됐어, 이제 나가.”아심은 장난스럽게 말했다.“한 번 더 발라야 깨끗해질 텐데요. 다 끝나고 나면 바디크림도 발라줄 수 있는데, 어때요?”시언은 그윽한 눈빛으로 시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더 안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장담 못 해.”아심은 시언의 시선을 피하며 잠깐 내려다보았다가 얼른 거품을 씻어주고 나와버렸다.문을 닫자마자 안에서 시언의 낮은 앓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심은 순간 긴장했지만, 곧 시언의 상처에 물이 닿았을까 걱정되어 손을 문에 올린 채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곧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사실 아심은 바로 위층으로 가려 했지만, 거실을 지나자 진서하가 식탁에 저녁을 세팅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젖은 티셔츠와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심은 이런 상태로 밖에 나가면 오해를 살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시언의 방에 다시 돌아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시언이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머리를 닦으며 방에서 나왔다. 그가 잠시 멈춰 아심을 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아심은 말했다.“진서하 씨에게 나가서 쉬라고 해 주세요.”시언은 아심의 젖은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에서 자기 티셔츠 하나를 꺼내 아심에게 건넸다.“여기서 씻어. 샤워 후에 와서 저녁 먹자.”“저도 제가 쓰는 전용 바디워시와 크림을 써야 해요. 게다가 티셔츠만 갈아입을 수도 없고요. 먼저 내보내 주세요.” 아심이 단호히 말했다. 시언은 아심을 잠시 바라보
강시언의 눈에는 냉랭한 기운이 가득했고, 말투도 차가웠다.“이미 선택한 거 아니야? 뭘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거지?”시언은 말을 마치고 손을 닦은 후, 그대로 돌아섰다. 아심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설거지하다가, 목이 메어 삼키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강성으로 돌아갈 거예요.”시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더욱 차가워졌다.“마음대로 해. 네 일은 네가 알아서 결정해.”시언은 그 말을 남기고 더 이상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아심은 두 손으로 주방 싱크대의 차가운 대리석을 힘껏 짚고,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후에야 남은 설거지를 다시 시작했다.주방과 식당을 모두 정리하고 불을 끄고 나서, 아심은 무의식적으로 1층 방 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침대에 누웠지만 하루의 피로가 몰려와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산속의 별은 유난히 밝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지만, 아심이 올려다본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달도 희미하게 노란빛만 남겨둔 채 숨은 듯했다.‘비가 오려나. 내일은 산에서 내려간 후에 비가 왔으면 좋겠어.’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아심은 문득 아래층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시언 역시 잠들지 않은 듯했다. 베란다에서 몸을 살짝 기울이면 시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아심은 그 충동을 꾹 참으며 다시 하늘의 별을 찾기 시작했다.목이 뻐근할 정도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멀리 있는 작은 별장을 보았고, 무언가에 끌리듯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핏 보니 기주현이었다.발목을 다친 주현이 왜 방에 들어가 쉬지 않고 풀밭에 앉아 있는지 의아했다. 아심은 의아해하며 외투를 걸치고 주현에게 다가갔다....가까이 다가가자 역시 주현이 맞았다. 주현은 혼자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심을
강아심이 거실로 들어오자, 소희와 가볍게 포옹하며 부드럽게 웃었다.“결혼 축하해. 정말 완벽한 결혼식이었어. 모든 사람이 감동했어!”“고마워!” 소희도 따뜻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심은 한발 물러서서 소희에게 소개했다.“여기는 도도희 이모야!”소희는 눈앞의 여성을 보고 순간 멍해지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혹시 스승님의 딸, 도도희님이세요?”도도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나도 소희 씨 이름을 들어봤어. 우리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제자라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니 아쉬웠어요.”소희는 자신의 결혼식에 도도희가 찾아올 줄 몰랐기에 마음이 벅차올랐다.“스승님도 오신 걸 알고 계세요?”양재아의 일로 스승님과 도도희 사이의 일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소희는, 스승님이 딸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도도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우리는 이미 만났어요.”“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소희도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도도희는 부드럽게 물었다.“듣기로 양재아를 삼각주에서 찾아내 데려온 게 소희 씨라던데, 내 친딸이든 아니든 우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소희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할 것까지는 없어요. 다만, 두 분께 헛된 기대를 드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었어요.”도도희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일은 수없이 겪어봤거든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도도희의 담담한 태도에서 그녀가 왜 지금까지 친자 확인을 하지 않았는지 소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도도희는 처음 만난 소희에게서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고요하고 담백한 성품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투명함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런 면모가 아심과도 닮아 자연스레 호감을 느끼게 했다.도도희는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운성에서 산간 지역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틀 후면 일이 끝나니, 강성으로 돌아
멀리서 도경수와 강아심이 지나가다가 멈춰 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소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고, 구택과 눈이 마주쳤다.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두 손으로 잡은 소희는 가볍게 손을 들어 부케를 뒤로 던졌다.햇살이 소희를 온통 감싸고, 드레스의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그녀의 웃음은 그림처럼 찬란했다. 앞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부케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몇몇 사람들은 점프했지만, 손끝과 부케는 20에서 30cm쯤 차이가 나 닿지 않았다. 시원은 부케가 멀리 날아갈 것을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소희의 던지기 실력을 과소평가했다.시원과 백림은 함께 점프했으나 손가락 끝이 꽃잎에 닿았을 뿐 결국 부케를 놓치고 말았다.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니, 부케는 무려 10미터 이상 날아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들고 있는 손에 정확히 떨어졌다.아심은 꽤 멀리 서 있었고, 부케가 자신에게 떨어질 줄 몰랐는지 놀라 손에 들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도경수는 아심이 손에 든 부케를 보며 뜻밖이라는 듯 기뻐하며 말했다.“이건 정말 하늘의 뜻인 것 같아!”아심은 말없이 웃으며 부케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곤 소희와 군중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현장의 분위기를 함께 즐겼다.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아심 쪽으로 몰려가 그녀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소희도 멀리서 아심을 향해 웃었지만, 당장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먼저 할아버지께 가서 술을 올리자. 그 뒤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서 있는 아심을 한 번 더 바라보고 구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소희는 웨딩드레스를 갈아입고 피로연 드레스를 입은 뒤 강재석 쪽으로 가서 술을 올렸다. 그곳에는 임씨 집안의 어른들과 강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가 소희를 아끼며 환대했다.가볍게 술 한 잔을 권한 뒤, 소희에게 충분히 쉴 시간을 주었다. 소희는 오후 내내 쉴 수 있었고, 연희와 몇몇 친구들이 함께 시간을
남궁민은 잠시 멍해졌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심명을 바라보았다.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찌릿해졌다.남궁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확실히 당신은 나보다 서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심명은 남궁민의 말을 듣고 흘긋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당연하죠. 당신은 그게 좋아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남궁민은 반박하며 말했다.“왜 아니죠? 난 서희 말고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 없거든요.”심명은 그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햇빛을 향해 걸어가는 심명의 모습은 빛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흐려져 보였다. 남궁민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따라가며 물었다.“설마 도망치려는 거예요?”심명의 귀에 달린 흑요석 귀걸이가 햇빛에 반사되어 매혹적인 광채를 뿜었다.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도망치긴 뭘 도망쳐요?”만약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오늘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남궁민은 심명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말했다.“오늘은 우리 둘 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말아요. 이 세상에서 너와 나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거잖아요. 술 마시고 취할 때까지 놀아보는 건 어때요?”심명은 남궁민의 손을 곁눈질하며 투덜거렸다.“손 치워요.”그러나 남궁민의 제안은 거절하지 않았다.“좋아요. 멀리서 여기까지 온 네 성의를 봐서라도, 서희 대신 내가 너를 잘 챙겨 주도록 하죠.”...결혼식의 하이라이트가 지나고, 커다란 케이크가 나왔다. 케이크 커팅식이 끝나고 결혼식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축하 파티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구택은 소희의 입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닦아내며 말했다.“와이프, 신혼 축하하고 사랑해.”수많은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예식장의 조명은 더욱 환하게 빛났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는 축복과 환희로 가득했다.소희는 구택만을 바라보았다. 소희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세상의 그 어떤 소란도, 부귀와 영화를 쫓는 욕망도 담겨 있지
“그때, 나는 마침내 깨달았어. 네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그 이외의 어떤 의미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임구택은 소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분홍빛 다이아몬드는 그녀의 눈부신 피부 위에서 완벽하게 어우러졌고, 빛을 받아 반짝이며 찬란한 광채를 뿜어냈다.소희도 손에 든 반지를 꺼내 들었고, 구택의 손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손바닥과 손가락의 비율은 완벽했고, 마치 차가운 백옥으로 조각한 듯 뚜렷한 관절선에는 부드러운 온기와 견고함이 동시에 느껴졌다.구택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며 조용히 미소 짓고는 물었다.“내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왜 나를 다시 데려왔어?”구택은 그녀의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가만히 응시하며 천천히 답했다.“왜냐하면 또 하나를 깨달았으니까.”“뭔데?”“내가 주는 행복만이 진짜 행복이라는 거야.”소희는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고 고개를 들어 구택을 바라보았다. 구택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단호했다.“우리 둘이 함께 있을 때만이 진짜 행복을 느낄 수 있어. 그러니까 넌 도망칠 수 없고, 나도 도망칠 수 없어.”“처음 우리가 만난 순간부터 오늘 이 순간이 정해져 있었어. 네가 나와 결혼하게 될 운명 말이야.”구택은 말을 마치고 몸을 숙여 강렬한 키스로 소희의 입술을 덮자, 주변에서는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임유민은 요요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한 번 돌아보았다.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역시 우리 삼촌은 다르지.”요요도 뒤를 보려고 하자, 유민은 손으로 요요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어린아이는 이런 거 보면 안 돼!”요요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는 어른이에요?”그 말에 유민이 당황하며 대답했다.“나, 나는 반쯤 어른이야!”요요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더 궁금해졌다.“그럼 오빠는 머리 쪽이에요, 아니면 발 쪽이에요?”유민은 요요의 진지하고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차분히 설명했다.“머리가
예식장 안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고, 주례자는 차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제 신랑과 신부의 결혼 서약을 낭독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서도 함께 느껴 보시고, 곁에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주례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엄숙해졌다.“임구택 군, 당신은 이 아름다운 소희 양을 아내로 맞이하시겠습니까?”“소희 양의 손을 맞잡고 백년해로하며, 그 어떤 간난신고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곁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서약하시겠습니까?”구택은 깊은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단호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예, 서약합니다. 소희를 평생 소중히 여기고, 챙기고, 제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충실히 사랑하겠습니다.”주례자는 이번에는 소희를 향해 물었다.“소희 양, 당신은 임구택 님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임구택 군과 함께 인생의 길을 나란히 걷고, 그 어떤 간난신고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곁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서약하시겠습니까?”소희는 구택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약합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며,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구택의 눈에는 감정이 빛나고 있었고, 그의 따뜻한 마음과 온기는 오직 소희를 위해 존재했다.주례자는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이제 임구택 군과 소희 양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두 사람을 위해 축복의 박수를 보내주세요!”예식장은 다시 한번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모든 하객은 이 감동적인 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보냈다. 그 박수 소리는 끝없이 이어졌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울려 퍼졌다.연희는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는 뜨거웠지만,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우청아 또한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했다.주례자는 박수 소리 속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신랑과 신부께서 결혼의 영원함과 순수함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를 교환하시겠습니다.”그 순간, 뒤쪽 계단에서 임유민이 요요를 안고 나타
강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소희의 손을 임구택의 손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마치 신성한 임무를 완수한 듯 그는 말했다.“행복하길 바랄게.”임구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마워요.”주변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소희는 시언을 깊이 바라보았다.그 시선에는 어린 시절 그가 자신을 가르쳐 주고 곁에서 함께해 주었던 시간, 그리고 두터운 남매의 사랑과 가족 간의 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시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소희를 응원했다. 마치 어린 시절 소희의 손을 잡고, 약하고 외롭던 소녀를 강하고 단단한 소희로 성장시켜 주었던 순간처럼.앞으로도 각자의 길을 걷더라도, 그들은 서로의 곁에 있을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관계는 공기와 햇빛처럼 언제나 존재하며, 그들의 삶 속 깊이 자리할 것이었다.소희는 구택의 팔을 붙잡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시언이 바로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발걸음은 더욱 단단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는 남자는 소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어떤 망설임도 없게 했다.레드카펫은 길었고, 앞으로 함께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도 길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란히 걷는다면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구택은 옆에서 소희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었다.예식장의 한구석, 커다란 부조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심명이 소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심명의 시선은 소희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오늘 정말 아름답네.’소희의 모습, 그녀의 미소,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그때, 뒤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서희, 정말 예쁘네요!”심명은 눈초리를 치켜들며 뒤를 돌아보자, 남궁민이 걸어오며 그의 옆에 섰다.햇빛이 남궁민의 짙은 갈색 눈에 반사되어 깊고 매혹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왜 강성에 있는 구은서를 놔두고 여기까지 왔어요?”남궁민은 이미 자신이 심명의
음악 소리에 맞춰, 분위기가 최고조로 달아오를 때, 신랑인 임구택이 중앙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그 순간, 거대한 아치형 정문이 열리며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수천 갈래의 황금빛이 예식장 안을 가득 채운 듯했다.찬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피어난 꽃들, 그리고 붉은 카펫은 그 빛에 의해 생명을 얻은 듯 더욱 생동감 있고 화려해졌다.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과하며 무지갯빛 광채를 만들어냈고, 이 환상적이고 웅장한 장면에 하객들은 숨을 멈추고 정문 중앙에 서 있는 한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소희는 시언의 팔을 잡고 붉은 카펫을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예식장 안은 하객들로 가득 찼지만, 고요한 정적 속에 우아한 현악 연주만이 홀 안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소희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가슴 위를 덮는 깔끔한 디자인에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레이스로 이루어져 있었다.얇은 꽃잎 모양의 레이스가 어깨를 감싸며 은은하게 살결을 드러냈고, 그 아래로는 매끈한 쇄골과 길고 고운 목선이 돋보였다.허리선 아래부터는 화려한 자수 문양이 드레스 끝자락까지 펼쳐졌고, 풍성한 치마는 소희의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며 단순함과 정교함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소희의 머리에는 구택이 준비한 티아라가 얹혀 있었고, 티아라에 박힌 찬란한 다이아몬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고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긴 베일이 드레스 끝까지 내려와 천천히 레드 카펫 위를 스치며 움직였다. 소희는 그림 같은 미모와 함께 단아하면서도 청아한 기품을 자아내며 성스러워 보였다.시언은 깔끔한 흰 셔츠에 검정 조끼를 입고 있었고, 훤칠하고 듬직한 모습으로 소희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함께 걸어왔다.두 사람이 함께 입장하는 순간, 예식장의 조명이 한층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질 만큼 두 사람의 존재감은 강렬했다.구택은 레드 카펫 끝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세상에 울려 퍼지는 모든 소리가 멀어진 듯, 구택의 눈에는 소희만
결혼식장이 웃음과 이야기로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주례가 결혼식 무대로 올라서자 점차 차분해졌다.결혼식장 가장 앞줄 귀빈석에는 임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사람들이 각각 자리했다. 시언이 입장하며 뒤쪽 하객석을 한번 훑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단번에 맨 뒷자리 가까이 앉아 있는 강아심을 찾아냈다.아심은 도도희와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이 아심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옆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며 즐거워 보였다.시언은 별다른 표정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강재석이 나타나자, 결혼식장은 잠시 숨소리마저 조용해졌다. 이내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를 화제로 삼기 시작했다.“저분이 강씨 집안의 어르신인가 봐. 정말 카리스마 넘치시네!”“옆에 있는 젊은 사람은 강재석 어르신의 손자겠지?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왜? 마음에 들어? 꿈 깨. 강씨 집안이랑 혼인을 맺으려면 임씨 가문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고.”“현실은 안 되더라도 꿈꾸는 건 내 자유잖아? 결혼식 끝나고 가서 연락처라도 물어볼 거야.”“좋아, 한번 해봐. 강씨 집안의 도련님이 연락처를 줄지 안 줄지 보자고. 근데 얻으면 나랑 공유하는 거 알지?”“내가 얼굴에 철판 깔고 얻은 연락처를 왜 너랑 공유해? 너도 도전해 보든가!”...아심은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이들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도도희도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봤니? 강시언이 얼마나 인기 많은지.”아심은 나른하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 거죠.”도도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아심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소희를 못 봤네요. 오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은 정말 예쁠 것 같아요!”도도희가 물었다.“소희랑 친한 사이인가?”아심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그렇게
도도희는 강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심이 왔어.”시언의 눈빛이 깊어졌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보였다. 강재석은 그보다 훨씬 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심양도 왔어?”도도희는 약간 놀라며 물었다.“아저씨도 아심을 아세요?”“당연히 알지.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인 줄 아니?”강재석은 의미심장하게 시언을 한 번 쓱 보고는 환한 미소로 말했다.“지금 어디 있나?”“아마 이미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을 거예요.”도도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미리 알았다면 데리고 여기로 왔을 텐데.”강재석은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온 것만으로도 아주 좋아. 어차피 곧 볼 테니까.”도경수의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재아는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올라왔다.‘엄마가 강아심을 알다니... 그리고 강재석과 강시언은 아심에게 훨씬 더 호의적이잖아. 그런데 엄마도 강아심과 더 가깝다니...’자시느이 엄마가 아심과 이렇게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재아는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도도희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아저씨, 예식장에 가셔야 할 시간이에요. 저는 여기서 이만 물러날게요. 아심을 찾아보려고요.”도경수는 다급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재석이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도도희에게 말했다.“결혼식 끝난 후에는 서두르지 말고, 우리와 시간을 좀 더 보내. 오랜만에 만났으니 제대로 얘기 나눠야지.”도도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결혼식이 끝나면 다시 찾아뵐게요.”“좋아!”강재석은 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도경수도 말했다.“내 전화번호 알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렴.”도도희는 알겠다고 답한 뒤, 몇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도경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강재석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그래도 드디어 도도희를 만났잖아. 그리고 직접 강씨 집안으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좋은 소식 아닌가?”도경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우리 부녀가 어쩌다 이렇게 서먹서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