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솔은 전화를 끊고 허리를 살짝 풀어준 뒤, 물컵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햇볕을 쬐었다. 그러다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멀리, 빨간색 포르쉐 911이 진석의 집 앞에 주차되어 있었고, 누군가 차에서 내려 과일 바구니를 들고 진석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록 멀리서였지만, 강솔은 단번에 그 사람이 민명주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순간, 강솔은 어젯밤의 꿈이 떠올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강솔은 물을 다 마시고 자신에게 침착하라고 다짐하며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다. 고운해가 보내준 모든 의상 사진을 고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강솔의 시선은 종종 창밖으로 향했다. 명주가 진석의 집에 갔다니, 분명 진석을 만나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명주가 진석에게 다시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는 걸까? 어젯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진석도 명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강솔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진석에게서는 한 통의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회의에 대한 소식도 없었다. ‘두 사람, 혹시 데이트라도 나간 걸까?’ 강솔은 물을 따르러 내려가면서, 윤미래가 꽃게와 오래 끓인 닭 육수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육수를 보온병에 담아 강솔에게 말했다. “진석이네 집에 좀 다녀오려고 해. 이 꽃게 육수는 네 허수희 아주머니가 보내준 건데, 내가 조금 많이 만들었어. 그래서 그녀에게도 좀 나눠주려고 해.” 강솔은 얼른 대답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지런해?” 윤미래가 농담을 하자 강솔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침 진석에게 디자인 자료도 전해줄 일이 있어서요. 겸사겸사 다녀오면 되니까요.” “그래, 그러면 네가 다녀와. 네 허수희 이모께 따뜻할 때 드시라고 전해줘.” 윤미래는 보온병을 뚜껑을 덮어 강솔에게 건넸고, 강솔은 그것을 받아 들고 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진석의 집에 도착하자, 허수희가 마침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진석은 민명주에게 말했다. “네가 말했던 그 투자 건, 내가 분석해 봤는데, 수익이 꽤 높아. 그리고 리스크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어. 시작해도 괜찮아.” 강솔은 진석을 바라보며, 어젯밤 새벽 2시까지도 그가 잠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명주의 리스크 분석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 그럼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게.” 명주는 진석을 향해 눈에 사랑이 가득한 채 말했다. 진석은 물 한 잔을 따랐다. 원래는 강솔에게 주려고 했으나, 손을 멈추고 결국 명주에게 건넸다. “밖에 추우니까, 따뜻한 물 좀 마셔.” 명주는 따뜻한 물을 두 손으로 받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빠가 이렇게 세심한 줄은 몰랐어!” 강솔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둘이 이야기해. 나는 먼저 가볼게!” 진석은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점심 먹고 가라니까?” 강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오늘 점심에 만두를 만든다고 했어. 제가 좋아하는 소고기 부추 만두요. 이모한테 말씀드려 줘. 난 집에 가서 만두 먹을게요!” 진석은 특별히 뭐라고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솔은 명주에게도 인사를 하며 말했다. “오후에 시간 있으면, 진석 오빠랑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가까워서 금방 갈 수 있어요.” “알겠어!” 명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강솔은 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진석은 강솔이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소파에 몸을 기대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네가 보기엔 그녀가 조금이라도 질투하는 것 같아?” “안 그럴까?” 명주는 물잔을 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히려 강솔이 질투해서 자리를 못 지키고 떠난 것 같던데.” 진석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가 왜 그걸 못 봤지?” 분명 평소와 똑같이 웃고 있었는데 말이다. 명주는 웃으며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 금방 들통날 거야.” 진석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
윤미래는 강솔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강솔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오랜만에 TV를 켜서 그런지 나오는 사람 중 아는 이가 없었다. 결국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골라 조금 보았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마침 윤미래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윤미래의 표정에는 약간 실망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이제 우리 강솔이랑 진석이는 가망이 없겠네.”점심으로 나온 찐빵은 강솔이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 소였지만, 오늘따라 입맛이 없었다. 평소에는 네 개를 거뜬히 먹던 강솔이었지만, 오늘은 하나만 먹고도 배가 불렀다. 강솔은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뒤척이던 끝에, 아마도 어젯밤 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2시 반이었다. 일어나서 고운해에게 보내줄 모델 사진들을 정리했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모든 작업을 마쳤다. 물을 마시러 일은 정말 끝났구나.” “무슨 일인데요?” 가사도우미인 오해현이 차를 따라 윤미래에게 건네자 윤미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방금 진씨 저택에 갔는데, 진석을 찾아온 여자애가 있더라고. 점심도 진씨 저택에서 먹고, 방금 두 사람이 함께 나가는 걸 봤어.” 강솔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에 말했잖아요. 저랑 진석이로 농담하지 말라고요.” “그땐 몰랐으니 그랬지. 이제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윤미래는 아쉬운 듯 말했다. “정말 아쉽구나!” 오해현이 물었다. “그 여자애는 어땠나요? 설마 아가씨보다 예쁘진 않겠죠?” 강솔이 대답했다. “저보다 예쁜 건 물론이고, 말도 잘하고 능력도 있고, 외모도 출중하더라고요. 진석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이죠.” 윤미래가 손을 들어 강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딸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아!” 강솔은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며, 윤미래 품에 기대어 입술을 깨물고 웃었다.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네요!” “기분 좋지
이상하게도 긴장되었다. 진석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어도, 강솔은 지금처럼 떨리지 않았다. 휴대폰이 끊기기 직전에야 강솔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진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나 너희 집 앞이야. 잠깐 나와봐.” 강솔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벽 너머에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나와서 얘기해.” “아.” 강솔은 대답하고 신발과 외투를 챙겨 집 밖으로 나갔다. 진석이 서 있는 모습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강솔은 발걸음을 늦췄지만,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순간 강솔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당장 돌아가고 싶어졌다. 발소리를 듣고 진석이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진석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알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고상하고 차가워 보였다. 강솔은 입을 다문 채 가까이 다가갔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진석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슈크림 빵, 네가 좋아하는 맛으로 샀어.” 진석은 오후에 민명주와 함께 있지 않았고, 그저 같이 나가 친구 두 명을 만나 저녁을 먹고, 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에 가던 길에 어제 들렀던 디저트 가게에 들러 강솔이 좋아하는 슈크림 빵을 샀다. 그러나 강솔은 받지 않았다. “말했잖아. 요즘 살쪄서 밤에는 안 먹어.” “그럼 내일 아침에 먹어. 냉장고에 넣어둬.” 진석은 여전히 슈크림 빵을 내밀자, 강솔은 그제야 받아 들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으니 이제 돌아가.” 진석은 움직이지 않고 강솔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물어볼 말이 없어?” “어?” 강솔은 당황해 눈을 들어 진석을 보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없어?” 진석은 다시 물었으나 강솔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강솔이 말을 마친 순간, 이마에 찬 바람이 스쳐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진석은 강솔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진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응시하며 말했다.“나는 사랑했지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했어. 그래서 내 감정을 숨기고, 친구로서, 상사로서 그 사람 곁을 지키기만 했지.”“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놓을 수가 없었어.”강솔은 온몸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에 진석은 한 발 더 다가오며 말을 이어갔다.“겨우 이별하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날 아버지처럼 생각한다고 말했어.”“그리고 이제는 내가 다른 여자와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하잖아!”“강솔!” 진석의 눈빛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넌 도대체 나를 얼마나 더 아프게 해야겠어?”강솔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오빠가 어떻게...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가 있어?”진석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일 리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왜 안 돼?” 진석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비참해져야 하지? 네가 주예형을 좋아할 때, 매일 그 얘기를 들어주며 걔가 널 사랑하는지 분석해 줘야 했다고.”“네가 걔와 헤어지고 길에서 울 때, 난 너보다 더 고통스러웠어. 네가 널 괴롭히는 게 아니야, 넌 항상 날 괴롭혀 왔다고!”“네가 아파할 때, 나는 매일 네가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너랑 뛰고, 놀이공원에 가고, 영화도 보고. 나 정말로 한가해서 그런 줄 알았어?”“내 감정을 숨기느라 늘 조심스러웠어. 네가 불편할까 봐.”“강솔, 대답해 줘.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진석의 말에 강솔은 또다시 물러서며 벽에 다다랐고, 진석은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나, 나는...” 강솔은 혼란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난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 왔어.”함께 자라온 친구, 마치 가족 같은 존재였다.“이제 알았으면, 네 마음은 어때?” 진석은 강솔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이렇게 눈 내리는 밤,
강솔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본능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는 차갑고 단단한 벽이 있었고, 앞에는 진석의 얼음 같은 기운이 휘감고 있었다. 강솔의 모든 저항은 진석의 키스에 의해 막혀버렸다. “읍!”강솔은 필사적으로 진석의 어깨를 쳤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항에 더욱 격분한 듯, 강솔을 벽에 더 강하게 밀어붙이며 고삐가 풀린 듯 키스를 이어갔다.이런 진석의 모습에 강솔은 무서워졌다. 진석이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놀리고, 비웃을 때도 진석의 눈빛에는 항상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오늘 그는 완전히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진석의 거친 숨결과 술기운이 섞인 입맞춤은 마치 강솔의 입속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파도 같았다.강솔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자, 결국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자신을 내맡겼다. 강솔의 길고 떨리는 속눈썹은 분노와 서러움에 젖어 있었다.‘어디 한번, 네가 나를 어떻게 할지 보자.’강솔은 그런 심정으로 진석에게 입술을 내줬다.진석은 자신이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갑고 어두운 세계가 자기를 감싸는 가운데, 강솔의 따뜻한 입술만이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다.진석은 강솔의 저항과 분노, 그리고 체념했음을 느꼈다. 그 포기가 오히려 진석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강솔은 분명 진석을 미워할 것이었다. 오늘 이후로, 두 사람은 완전히 끝났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진석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민명주의 조언을 듣고 이런 바보 같은 방법으로 강솔을 시험하다니.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해 화를 내고, 더 어리석은 행동을 해버렸다. 하지만 진석의 광기가 깊어질수록, 절망도 함께 커졌다.이제 강솔과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절박하게 만들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나무 조각에 매달리듯이, 진석은 강솔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설령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도, 진석은 끝까지 그 길을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강솔은 진석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진석이 사랑한 사람이 항상 나였다니!’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전혀 징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진석이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주고, 무조건 감싸준 것. 그리고 이별하던 밤, 진석은 경성에서 급히 달려와 안아주었을 때. 강솔은 진석이 미세하게 떨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강솔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해 왔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진석이었고 늘 자신에게 그래왔기 때문에, 그의 그런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오빠 같고 아빠 같은 존재였기에,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강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서러워할 사람은 강솔이 아니라 진석이었다. 순간, 조금 전의 분노와 수치심이 모두 사라지고, 진석이 빨리 집에 돌아가길 바랐다.진석이 저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돌덩이가 짓누르는 듯 무겁고 답답했다. 강솔은 휴대폰을 들어 몇 초간 쳐다보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집어 들었다.몇 번을 반복한 끝에, 강솔은 결단을 내리고 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진석의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강솔의 창문을 바라보았다.강솔은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숨기고 커튼 뒤로 피했다. 잠시 후, 진석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갔다. 강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녀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강솔은 패딩을 벗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거울을 보니, 강솔의 입술은 부어 있었고, 진석에게 물린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강솔은 화가 나고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갑자기 진석이 32년 만의 첫 키스를 자신에게 바쳤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진석은 항상 강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생각에 강솔은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며 급히 찬물을 한 움큼 떠서 얼굴에 뿌렸
진석은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씻고, 창밖에 쌓인 눈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되겠군.’아침 식사 시간에, 허수희가 물었다.“오늘은 왜 뛰지 않니?”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어젯밤에 눈이 왔으니, 아마 강솔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진석은 무심하게 짧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네.”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을 때, 진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확인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모?”[진석아, 강솔이 오늘 아침 일찍 강성으로 돌아갔어. 알고 있었니?]진석의 눈동자가 잠시 수축하였고,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래요?”[너희들 싸웠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짐을 싸서 나가더라. 얼굴도 별로 안 좋았고.]진석은 고개를 숙이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모, 죄송해요.”윤미래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따지려고 전화한 게 아니니까, 미안하다고 할 필요는 없어. 강솔은 어릴 때부터 네가 돌봐줬잖아.][강솔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빴고, 나도 예전에 바빴으니 너랑 함께 자랐지. 그 사실을 내가 몰랐겠니?]진석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앞으로는 강솔의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요.”앞으로 강솔은 자신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윤미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천천히 말했다.“진석아, 이모가 하나만 묻고 싶구나. 너, 강솔을 좋아하니?”진석은 차분한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아주 아주 좋아해요.”그 말에 윤미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집의 그 바보 같은 강솔만 몰랐던 거지.”진석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제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도망갔죠.[강솔의 성격을 네가 제일 잘 알잖니. 약간 영리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어리석고, 아주 고집도 세지.][네가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거야.][걔는 너 없이는
강시언은 강아심을 데리고 도경수의 집으로 돌아왔다. 정원을 지나던 중, 아심은 마당의 풍경을 바라보며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낯익은 감정이 가슴 속 깊이 몰려왔다. 아주 오래전,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그녀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왜 그래?” 시언이 멈춰 선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에 아심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본가에 돌아오니 긴장됐나? 그 용감한 강아심도 이런 상황은 무섭나 보네?”시언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나자 도경수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결과가 나왔어?”“나왔어요.”시언은 결과지를 세 부로 나누어 도경수, 도도희, 그리고 강재석에게 각각 건넸다. 도경수는 떨리는 손으로 결과지를 받아 들고 급히 훑어 내려갔다. 거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고, 모두의 시선이 결과지를 쥔 세 사람에게 집중되었다.가장 먼저 결과를 확인한 것은 도도희였다. 그녀는 결과를 본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아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도도희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아, 정말, 우리가...”도도희는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무려 이십 년. 그 모든 세월이 그녀에게는 과거를 묻어버린 긴 시간이었지만, 이제 그 모든 기억이 한순간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마치 긴 꿈을 꾼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도경수 역시 보고서를 들고 손을 떨며 아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반응만 보고도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심을 향했고, 다들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감격과 놀라움이 가득했다.아심은 시언의 손을 꼭 잡으며 도도희를 향해 천천히 고개
“기뻐?” 강시언이 묻자, 강아심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멍하나 보네?” 시언이 웃었다. 그리고 아심은 그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시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천천히 받아들이면 돼. 모든 건 내가 함께할 거니까.”아심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도도희 이모를 찾아가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하자.” 시언은 미소 지으며 아심을 놓아주고 차 시동을 걸었다. 아심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만약 도도희 이모가 제 엄마라면 제 아빠는 누구예요?”시언은 그녀의 질문에 설명했다.“너의 아버지는 도도희 아줌마의 대학 동기였어. 나중에 유학을 떠나고는 돌아오지 않았지.”“아마도 이미 다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을 거야. 지금 네 혈육은 도도희 아줌마와 도경수 할아버지뿐이야.”아심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그럼, 나는 버려진 게 아니었네요.”“당연히 아니지!” 시언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누군가에게 납치된 거야. 네가 사라진 뒤, 도도희 이모와 도경수 할아버지는 큰 고통을 겪었어. 그들은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어.”아심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살이 창가로 비추고 있었고, 그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던 어둠과 상처가 서서히 풀어져 가는 듯했다.‘나는 버려진 게 아니었어. 내 가족은 나를 찾으려고 했었어.’...한편, 권수영은 아직 유전자 검사 기관을 벗어나지도 못한 상황에서 양재아의 전화를 받았다.재아는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결과 가져왔어요? 나 지금 검사소 뒤쪽에 있는 작은 공원에 있어요. 빨리 결과를 가져다줘요!]권수영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결과는 미리 받았는데 강시언이 그걸 가져갔어요.”[뭐라고요?] 재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분명 한 시간이나 일찍 준비했는데, 어떻게 시언이 자신보다 먼저 올 수 있었단 말인가?이에 권수영이 서둘러 말했다.“진정해요, 재아 양. 그래도 내가
“여기 결과야. 정말로 검사 의뢰인의 대리인 맞아?”그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렇게 결과를 빼돌리는 건 나한테도 큰 리스크와 책임이 따른다고!”권수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맞아, 의뢰인이 부탁해서 제가 대신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 문제 될 일 없을 거니까.”권수영은 결과지를 받아 들고는 그 사람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조용히 보고서를 펼쳤다.앞부분의 글귀들은 건너뛰고, 그녀는 바로 결과 부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막 확인하려는 찰나, 보고서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깜짝 놀라 고개를 든 권수영은 앞에 서 있는 고고하고 냉랭한 남자를 보고 얼어붙었다. 강시언은 결과지를 한눈에 훑어본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권수영 씨? 이 보고서가 당신과 무슨 관계죠? 검사 직원에게 돈을 주고 결과를 빼돌리다니, 이게 불법인 건 알고 있나요?”권수영은 강시언을 알아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변명했다.“이건 오해예요! 제가 아는 사람 대신 결과를 받으러 온 것뿐이에요. 아침에 양재아가 부탁해서요.”시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러니까 양재아가 당신을 보낸 건가요?”권수영은 순간 아침에 재아가 혹시라도 들키게 된다면 자신의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말이 떠올랐다.이에 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꾸며 웃었다.“아, 아니에요. 재아는 몰라요. 제가 여기서 검사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미리 확인하려고 온 거예요.”강시언은 더욱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더 따질 시간 없으니 그대로 전하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요.”권수영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언이 자리를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양재아가 검사한 게 맞는데, 왜 쓸데없는 짓이라고 한 걸까?’권수영은 생각에 잠긴 사이, 아까 결과지를 전달해 준 직원이 급하게 달려왔다.“아직 안 갔네. 정말 검사 의뢰인의 친구 맞아? 상사가 이 일에 대해 저를 추궁하고 있어. 그러니 와서 설명 좀 해줘!”“나, 나도 어떻게
강아심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중간에서 저희를 위해 고생하셨잖아요. 제가 밥 한번 대접할게요.”그 말에 강시언은 비꼬듯 말했다.“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힘을 써서 네가 밥을 사준다는 거야?”아심은 눈을 빛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수고비를 원하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이윽고 휴대폰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얼마면 적당할까요, 강시언 씨?”그 말에 시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또 돈을 보내기만 해봐!”아심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얼굴선이 빛을 받아 더욱 뚜렷하고 우아하게 빛났다. 눈가에 번진 따스한 빛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아심의 집에 도착한 후, 그녀는 말했다.“먼저 앉아 계세요. 물 좀 가져올게요.”아심은 냉장고에서 물 두 병을 꺼내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시언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아심은 물을 내밀며 무심하게 물었다.“바빠요?”그러자 시언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물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가볍게 끌어당기자 아심은 시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검사도 끝났으니, 이제 우리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아심은 시언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우리 문제라뇨?”시언은 차갑고 또렷하게 말했다.“그날 돈을 보낸 건 무슨 뜻이었지?”그 말에 아심은 그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시언은 얼굴을 더욱 차갑게 굳히며 그녀의 뺨을 살짝 잡았다.“돈은 보낼 줄 알면서 말은 못 해?”아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시언의 손은 아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강아심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고, 한참 후에야 시언의 어깨를 밀어내며 중단시켰다. 아심은 시선을 피하며 나직이 말했다.“우리 관계는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선 안 돼요.”그 말에 시언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예전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강솔과 진석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강솔은 기쁜 표정으로 소희를 부르며 소희에게 달려갔다.오늘은 모두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비록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불안감도 여전히 있었지만 말이다.진석과 임구택도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옆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희는 강솔과 함께 대화를 이어갔다.소희가 강솔에게 물었다.“양재아는 어디 있어?”강솔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아침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있었어. 상태도 괜찮아 보였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도경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며 말했다.“걔도 마음이 복잡할 테니 억지로 불러내지 말게. 혼자서 마음을 가라앉히게 둬.”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아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어색했으니, 혼자 위층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언젠가는 모든 걸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아침 8시, 아심은 시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 시언은 그녀에게 내려오라고 했다.몇 분 후, 아심은 차에 올라탔다.“도도희 이모는요?”“먼저 가셨어.” 시언은 도로 상황을 살피며 말했다.“우리는 먼저 아침을 먹고 나서 합류할 거야.”“저는 이미 아침을 먹었어요.”시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심을 돌아보자, 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왜요?”“아무것도 아니야.” 시언은 무심하게 대답하고 차를 출발시켰다.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조그만 아침 식당이 보였고, 아심이 말했다.“여기 아침 식사가 괜찮아요. 당신은 여기서 아침을 먹고 오세요. 저는 차에서 기다릴게요.”그러자 시언은 무심하게 말했다.“괜찮아, 안 먹어.”“안 먹으면 배고프지 않아요?” 아심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안 고파.” 시언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운전만 계속했다. 아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가방에서 따뜻한 우유 한 병과 직접 만든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샌드위치는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시언은 그녀를 흘긋
[내가 그 사람을 좀 찾아볼게요. 문제없을 거예요. 그냥 미리 보는 거잖아요. 결과를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절대 못 하죠!] 권수영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아는 권수영의 숨겨진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척 말했다.“당연히 결과를 바꿀 필요 없죠. 그냥 한 시간만 미리 알게 되면 전 그걸로 충분히 기쁠 거예요.”[걱정하지 말아요. 내일 시간 알려주면 미리 가 있을게요.]“정말 감사드려요!” 재아는 감격해서 말했다.“내일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그래요!]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눈 후, 재아는 약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듯, 씻어야 한다는 핑계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은 재아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리 볼 수만 있다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재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설령 자신이 도도희의 딸이 아니더라도, 도도희가 아심을 인정하게 두진 않을 거라고.‘만약 강아심이 진짜라면, 내가 이 집에 계속 있을 수 있을까?’재아는 절대 도경수가 친손녀를 찾게 둘 수 없었다. 진짜 재희가 돌아오지 않는 한, 자신이 가짜라도 진짜가 될 수 있었다.재아는 속으로 끝없이 계산하며 내일의 계획을 철저히 준비했다....다음 날 아침, 재아는 이층 창가에 서서 도도희가 차를 몰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다.도경수는 도도희를 따라가며 몇 마디 당부를 건넸다. 그의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에서 도도희와 강심의 결과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에 재아는 비웃음을 지었다.‘할아버지는 입만 열면 나를 친손녀처럼 여긴다고 하지만, 결국엔 강아심이 진짜 손녀이길 더 바라고 있어.’재아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창가의 커튼을 움켜쥐었고, 손아귀의 힘 때문에 커튼에 구멍이라도 뚫릴 것만 같았다.한편, 아래층으로 소희와 임구택이 도착했고, 도경수는 소희에게 도도희가 이미 나갔다고 말했다.소희는 도경수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안으로 들
소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조금 옅어져 있었다.“오늘 양재아랑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예상대로 도씨 저택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하더라고.”임구택은 눈빛을 깊게 가라앉히며 말했다.“그건 예상했던 일이야.”소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래서 그게 문제예요. 만약 아심이 스승님의 외손녀로 밝혀진다면, 양재아는 어떻게 해야 할까?”소희는 이 상황이 자신이 만든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소희가 책임지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소희는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재아가 요즘 지씨 집안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아.”구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내가 양재아를 주시하도록 사람을 붙여둘게. 어찌 되었든, 가 너나 도씨 집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그 외의 일은 문제없을 거야.”...한편, 재아는 저녁 내내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도도희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에 상실감과 걱정이 가득했고, 또 한편으로는 도도희가 친딸을 찾을 가능성에 대해 기뻐하는 척해야 했다.이 모순된 감정들로 인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미소는 억지스럽고 어색했다. 도경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다가와 말했다.“재아야, 인제 그만 올라가 쉬어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재아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문을 닫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는 억지로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과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다.‘내가 친딸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절망스러운데...’‘이제 강아심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니?’재아는 손으로 옷을 움켜잡고, 억울함과 분노에 눈물을 흘렸다.‘어떻게 강아심일 수 있지? 왜 꼭 그 여자여야 하는 거야?’온두리에서 자신을 데리고 온 사람은 소희였고, 도경수도 자신을 좋아해 줬는데, 왜 마지막에 와서 모든 것이 아심 쪽으로 기울어져야 하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재아는 아심을 처음부터
강시언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그때 들어보니, 친자식이 아팠고 치료비가 급히 필요해서였던 것 같아요.”그 말에 도도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심을 팔아넘길 정도였던 양부모라면, 아심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었을 리가 없었다.“그럼 그 양부모는 어디에 있는 거니? 아심은 언제부터 그들에게 맡겨졌던 거야?”도경수가 이어서 묻자, 시언은 차분히 대답했다.“그들이 말하길, 아심은 강가에서 주운 아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어요.”“그 사람들도 강 씨였나?”“아니에요.”강시언은 잠시 말을 멈추다 덧붙였다.“제가 강 씨라서, 아심도 제 성을 따라 강 씨가 된 거예요.”방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각자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도경수가 다시 무언가 물으려는 순간, 소희가 나섰다.“내일 아침이면 도도희 아줌마와 아심의 친자 검사가 진행될 텐데, 스승님께서 너무 서두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내일 결과가 나오면 그때 더 자세히 알아봐도 늦지 않잖아요.”소희는 아심의 과거에 대해 성급한 판단이나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이 대화를 중단시키고 싶었다. 소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시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아심의 과거는 내일의 검사 결과와 무관해요. 결과를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더 중요하죠.”도경수는 고개를 숙이며 자책하듯 말했다.“내가 조금 조급했구나.”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시간 동안 이반스가 C국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이끌었고, 도경수도 몇 마디 거들었다.강솔은 중간중간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풀었고, 덕분에 식사는 비교적 밝은 분위기에서 끝났다.식사가 끝난 뒤 밤이 깊어지자, 소희와 임구택은 먼저 도도희 집을 떠났다. 강재석은 도씨 저택에 머물렀고, 시언 역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떠나기 전, 시언은 도도희에게 말했다.“내일 아침에 아심을 데리러 가고, 그 후에 이모를 모시러 올게요.”도도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굳이 오지 않아도 돼. 오늘 가는 길을
강아심은 고개를 숙이고 국물을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그렇게 우연한 일이 있을까요?”아심과 도도희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들이 친 모녀라고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드라마 같았다.“지금의 삶이 바뀌는 게 두려운 거야?”강시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말에 아심은 멍하니 시언을 바라보다가,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마주쳤다.길고 고운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이윽고 아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며 말했다.“내가 설거지할게요.”“내가 할게.”시언이 그녀를 막아섰다.“자기 그릇은 자기가 씼는 거예요.”아심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언은 약간의 불만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설거지가 끝난 뒤, 시언은 냉장고에서 요구르트 한 병을 꺼내 아심에게 건넸고, 아심은 요구르트를 마시며 거실로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강시언을 보며 그녀는 약간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밥도 다 먹었는데, 아직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시언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날 쫓아내려는 거야?”시언은 아심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눈빛을 고정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게 울렸다.“만약 네가 도도희 이모의 딸이라면, 넌 재희인 거야.”아심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는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재희라면요?”“별다른 건 없어.”시언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그저 내가 널 만나게 된 걸 무척 기쁘게 생각할 거야.”시언의 손끝이 약간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아심의 뺨을 스치자, 아심의 가슴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두근거렸다.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시언은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오늘 밤은 여기 안 남아. 지금 상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