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긴장되었다. 진석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어도, 강솔은 지금처럼 떨리지 않았다. 휴대폰이 끊기기 직전에야 강솔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진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나 너희 집 앞이야. 잠깐 나와봐.” 강솔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벽 너머에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나와서 얘기해.” “아.” 강솔은 대답하고 신발과 외투를 챙겨 집 밖으로 나갔다. 진석이 서 있는 모습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강솔은 발걸음을 늦췄지만,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순간 강솔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당장 돌아가고 싶어졌다. 발소리를 듣고 진석이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진석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알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고상하고 차가워 보였다. 강솔은 입을 다문 채 가까이 다가갔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진석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슈크림 빵, 네가 좋아하는 맛으로 샀어.” 진석은 오후에 민명주와 함께 있지 않았고, 그저 같이 나가 친구 두 명을 만나 저녁을 먹고, 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에 가던 길에 어제 들렀던 디저트 가게에 들러 강솔이 좋아하는 슈크림 빵을 샀다. 그러나 강솔은 받지 않았다. “말했잖아. 요즘 살쪄서 밤에는 안 먹어.” “그럼 내일 아침에 먹어. 냉장고에 넣어둬.” 진석은 여전히 슈크림 빵을 내밀자, 강솔은 그제야 받아 들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으니 이제 돌아가.” 진석은 움직이지 않고 강솔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물어볼 말이 없어?” “어?” 강솔은 당황해 눈을 들어 진석을 보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없어?” 진석은 다시 물었으나 강솔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강솔이 말을 마친 순간, 이마에 찬 바람이 스쳐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진석은 강솔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진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응시하며 말했다.“나는 사랑했지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했어. 그래서 내 감정을 숨기고, 친구로서, 상사로서 그 사람 곁을 지키기만 했지.”“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놓을 수가 없었어.”강솔은 온몸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에 진석은 한 발 더 다가오며 말을 이어갔다.“겨우 이별하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날 아버지처럼 생각한다고 말했어.”“그리고 이제는 내가 다른 여자와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하잖아!”“강솔!” 진석의 눈빛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넌 도대체 나를 얼마나 더 아프게 해야겠어?”강솔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오빠가 어떻게...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가 있어?”진석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일 리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왜 안 돼?” 진석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비참해져야 하지? 네가 주예형을 좋아할 때, 매일 그 얘기를 들어주며 걔가 널 사랑하는지 분석해 줘야 했다고.”“네가 걔와 헤어지고 길에서 울 때, 난 너보다 더 고통스러웠어. 네가 널 괴롭히는 게 아니야, 넌 항상 날 괴롭혀 왔다고!”“네가 아파할 때, 나는 매일 네가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너랑 뛰고, 놀이공원에 가고, 영화도 보고. 나 정말로 한가해서 그런 줄 알았어?”“내 감정을 숨기느라 늘 조심스러웠어. 네가 불편할까 봐.”“강솔, 대답해 줘.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진석의 말에 강솔은 또다시 물러서며 벽에 다다랐고, 진석은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나, 나는...” 강솔은 혼란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난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 왔어.”함께 자라온 친구, 마치 가족 같은 존재였다.“이제 알았으면, 네 마음은 어때?” 진석은 강솔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이렇게 눈 내리는 밤,
강솔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본능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는 차갑고 단단한 벽이 있었고, 앞에는 진석의 얼음 같은 기운이 휘감고 있었다. 강솔의 모든 저항은 진석의 키스에 의해 막혀버렸다. “읍!”강솔은 필사적으로 진석의 어깨를 쳤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항에 더욱 격분한 듯, 강솔을 벽에 더 강하게 밀어붙이며 고삐가 풀린 듯 키스를 이어갔다.이런 진석의 모습에 강솔은 무서워졌다. 진석이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놀리고, 비웃을 때도 진석의 눈빛에는 항상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오늘 그는 완전히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진석의 거친 숨결과 술기운이 섞인 입맞춤은 마치 강솔의 입속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파도 같았다.강솔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자, 결국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자신을 내맡겼다. 강솔의 길고 떨리는 속눈썹은 분노와 서러움에 젖어 있었다.‘어디 한번, 네가 나를 어떻게 할지 보자.’강솔은 그런 심정으로 진석에게 입술을 내줬다.진석은 자신이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갑고 어두운 세계가 자기를 감싸는 가운데, 강솔의 따뜻한 입술만이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다.진석은 강솔의 저항과 분노, 그리고 체념했음을 느꼈다. 그 포기가 오히려 진석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강솔은 분명 진석을 미워할 것이었다. 오늘 이후로, 두 사람은 완전히 끝났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진석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민명주의 조언을 듣고 이런 바보 같은 방법으로 강솔을 시험하다니.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해 화를 내고, 더 어리석은 행동을 해버렸다. 하지만 진석의 광기가 깊어질수록, 절망도 함께 커졌다.이제 강솔과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절박하게 만들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나무 조각에 매달리듯이, 진석은 강솔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설령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도, 진석은 끝까지 그 길을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강솔은 진석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진석이 사랑한 사람이 항상 나였다니!’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전혀 징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진석이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주고, 무조건 감싸준 것. 그리고 이별하던 밤, 진석은 경성에서 급히 달려와 안아주었을 때. 강솔은 진석이 미세하게 떨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강솔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해 왔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진석이었고 늘 자신에게 그래왔기 때문에, 그의 그런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오빠 같고 아빠 같은 존재였기에,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강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서러워할 사람은 강솔이 아니라 진석이었다. 순간, 조금 전의 분노와 수치심이 모두 사라지고, 진석이 빨리 집에 돌아가길 바랐다.진석이 저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돌덩이가 짓누르는 듯 무겁고 답답했다. 강솔은 휴대폰을 들어 몇 초간 쳐다보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집어 들었다.몇 번을 반복한 끝에, 강솔은 결단을 내리고 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진석의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강솔의 창문을 바라보았다.강솔은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숨기고 커튼 뒤로 피했다. 잠시 후, 진석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갔다. 강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녀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강솔은 패딩을 벗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거울을 보니, 강솔의 입술은 부어 있었고, 진석에게 물린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강솔은 화가 나고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갑자기 진석이 32년 만의 첫 키스를 자신에게 바쳤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진석은 항상 강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생각에 강솔은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며 급히 찬물을 한 움큼 떠서 얼굴에 뿌렸
진석은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씻고, 창밖에 쌓인 눈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되겠군.’아침 식사 시간에, 허수희가 물었다.“오늘은 왜 뛰지 않니?”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어젯밤에 눈이 왔으니, 아마 강솔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진석은 무심하게 짧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네.”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을 때, 진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확인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모?”[진석아, 강솔이 오늘 아침 일찍 강성으로 돌아갔어. 알고 있었니?]진석의 눈동자가 잠시 수축하였고,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래요?”[너희들 싸웠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짐을 싸서 나가더라. 얼굴도 별로 안 좋았고.]진석은 고개를 숙이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모, 죄송해요.”윤미래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따지려고 전화한 게 아니니까, 미안하다고 할 필요는 없어. 강솔은 어릴 때부터 네가 돌봐줬잖아.][강솔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빴고, 나도 예전에 바빴으니 너랑 함께 자랐지. 그 사실을 내가 몰랐겠니?]진석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앞으로는 강솔의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요.”앞으로 강솔은 자신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윤미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천천히 말했다.“진석아, 이모가 하나만 묻고 싶구나. 너, 강솔을 좋아하니?”진석은 차분한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아주 아주 좋아해요.”그 말에 윤미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집의 그 바보 같은 강솔만 몰랐던 거지.”진석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제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도망갔죠.[강솔의 성격을 네가 제일 잘 알잖니. 약간 영리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어리석고, 아주 고집도 세지.][네가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거야.][걔는 너 없이는
진석은 말했다. “어젯밤 충격을 받았는지, 오늘 새벽 일찍 도망갔어!” 다행히 밤중에 도망간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걱정이 되어 밤새 쫓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명주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럼 오늘 너도 강성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며칠 후에 갈 거야.”[좋아. 이번에는 정말 시간을 줘야 해. 너희 둘의 관계 변화를 잘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거야.] “어떻게 됐든, 네가 도와줘서 고마워!” 명주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긴, 네가 내 나쁜 조언 때문에 강솔이 도망간 걸로 날 미워하지 않으면 그걸로 만족이야.] “미워하지 않아.” 진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였으니까. 일찍 고백하고 일찍 넘어가는 게 낫지!” 명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하고, 네가 빨리 강솔을 쫓아다녀서 결혼하길 바랄게. 결혼할 때 잊지 말고 나도 초대해.] “물론이지!” 진석의 목소리는 더욱 결연해졌다....강솔은 오후에 강성에 도착했다. 방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청소부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집을 정리했다. 자신을 바쁘게 만들어야만 진석과 어젯밤의 그 통제 불능의 상황을 자꾸 떠올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솔은 주예형을 피하기 위해 경성으로 도망쳤었는데, 이제는 진석을 피하려고 강성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해가 저물 무렵, 집을 다 정리하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희야, 나 강성에 돌아왔어. 스승님을 뵈러 가고 싶은데, 너도 같이 갈래?”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함께 회사에 가지 않고, 어정에서 디자인 스케치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좋아, 지금 출발할까?] “네 결혼식 드레스 디자인 스케치도 가져와. 내가 다시 한번 봐줄게.” [알겠어. 곧 만나!]약속하고 나서, 강솔은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겨 나섰다. 혼자 차를 몰고 가던 중, 신호등에 걸렸을 때
양재아는 말을 마치고 강솔의 손에 든 떡을 보며 말했다. “강솔 언니, 이렇게 돈 쓸 필요 없어요. 설 때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져다줘서 지금도 주방에 쌓여있어요. 거의 상할 지경이에요.”“외할아버지가 떡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셨어요.” 강솔은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말했다. “그럼 스승님께서 버리라고 하시면 되겠네!” “언니, 화내지 마세요. 전 그냥 언니가 돈 낭비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너무 의미를 두지 마세요!” 강솔이 막 대꾸하려던 순간, 재아는 갑자기 얼굴을 바꾸며, 환한 미소로 갓 들어온 차를 향해 걸어갔다. “소희, 왔어!” 재아는 유난히 상냥하게 말하자, 강솔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차에서 내린 소희가 자신을 향해 서 있었다. 소희도 강솔을 발견하고 재아에게 인사한 후 그녀에게 다가왔다. “난 네가 정월 대보름이 지나야 돌아올 줄 알았어.” 강솔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빨리 돌아왔지.” “네가 그 유명한 떡집에서 떡을 샀구나?” “마침 스승님께서 며칠 전에도 떡 얘기하셨었어.” “그래?” 강솔은 양재아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재아는 스승님께서 떡을 보기도 싫어한다고 하던데, 사와도 스승님이 안 드실 거라고 했어.” 그러자 재아의 얼굴이 굳어졌고, 서둘러 소희에게 변명했다. “제 말은 집에 떡이 많으니까 강솔 언니가 괜히 돈 낭비하지 않도록 하려던 것뿐이에요.” 소희는 재아의 어색한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에 떡이 많이 있어도 스승님은 강솔이 사 온 걸 아주 맛있게 드실 거야.” 소희는 강솔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춥지 않아? 들어가자.” “응!” 강솔은 표정이 풀리며 소희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아는 서 있는 채로 얼굴이 굳어졌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도경수는 강솔을 보며 매우 기뻐했고, 강솔이 사 온 떡집의 떡을 연달아 두 개나 먹으며 말했다. “이 맛은 정말
뒷마당에 있는 정자에는 난로가 있었고, 강솔과 소희는 그곳에 가서 불을 쬐며 이야기를 나눴다. 강솔은 망설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진석 오빠가 나한테 자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어.” 소희는 잠시 놀라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고백했구나!” 강솔은 놀라며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지. 네가 처음 귀국했을 때, 우리가 모였잖아. 그때 선배가 직접 나한테 말했어.” “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 강솔은 당황스러워하자 소희가 대답했다. “선배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그리고 그때 너는 주예형이랑 사귀고 있었잖아. 선배는 네가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걸 원하지 않았어.” 강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렇구나. 결국 나만 모른 거네. 나는 그가 네 마음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건 네가 좀 오해한 거지.” 강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석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믿기 힘들어.”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해?”소희가 묻자 강솔은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너무 뜻밖이라, 진석이랑 나 사이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 난 우리가 아주 순수한 감정이라고만 생각했어.” 소희는 웃음이 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는 널 정말 사랑해.” 강솔은 갑자기 눈을 들어 소희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부드러워졌고, 그녀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화로 속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유로 네가 서둘러 돌아온 거야?” “응.” 강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네가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아직도 주예형을 좋아한다면, 선배에게 거절하면 돼.”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건, 그 사람이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야.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참아왔으니, 선배도 각오하고 있을 거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