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강솔은 진석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진석이 사랑한 사람이 항상 나였다니!’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전혀 징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진석이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주고, 무조건 감싸준 것. 그리고 이별하던 밤, 진석은 경성에서 급히 달려와 안아주었을 때. 강솔은 진석이 미세하게 떨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강솔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해 왔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진석이었고 늘 자신에게 그래왔기 때문에, 그의 그런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오빠 같고 아빠 같은 존재였기에,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강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서러워할 사람은 강솔이 아니라 진석이었다. 순간, 조금 전의 분노와 수치심이 모두 사라지고, 진석이 빨리 집에 돌아가길 바랐다.진석이 저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돌덩이가 짓누르는 듯 무겁고 답답했다. 강솔은 휴대폰을 들어 몇 초간 쳐다보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집어 들었다.몇 번을 반복한 끝에, 강솔은 결단을 내리고 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진석의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강솔의 창문을 바라보았다.강솔은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숨기고 커튼 뒤로 피했다. 잠시 후, 진석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갔다. 강솔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녀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강솔은 패딩을 벗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거울을 보니, 강솔의 입술은 부어 있었고, 진석에게 물린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강솔은 화가 나고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갑자기 진석이 32년 만의 첫 키스를 자신에게 바쳤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진석은 항상 강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생각에 강솔은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며 급히 찬물을 한 움큼 떠서 얼굴에 뿌렸
진석은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씻고, 창밖에 쌓인 눈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되겠군.’아침 식사 시간에, 허수희가 물었다.“오늘은 왜 뛰지 않니?”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어젯밤에 눈이 왔으니, 아마 강솔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진석은 무심하게 짧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너무 무거웠다.“네.”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을 때, 진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확인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모?”[진석아, 강솔이 오늘 아침 일찍 강성으로 돌아갔어. 알고 있었니?]진석의 눈동자가 잠시 수축하였고,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래요?”[너희들 싸웠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짐을 싸서 나가더라. 얼굴도 별로 안 좋았고.]진석은 고개를 숙이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모, 죄송해요.”윤미래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따지려고 전화한 게 아니니까, 미안하다고 할 필요는 없어. 강솔은 어릴 때부터 네가 돌봐줬잖아.][강솔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빴고, 나도 예전에 바빴으니 너랑 함께 자랐지. 그 사실을 내가 몰랐겠니?]진석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앞으로는 강솔의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요.”앞으로 강솔은 자신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윤미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천천히 말했다.“진석아, 이모가 하나만 묻고 싶구나. 너, 강솔을 좋아하니?”진석은 차분한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아주 아주 좋아해요.”그 말에 윤미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집의 그 바보 같은 강솔만 몰랐던 거지.”진석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제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도망갔죠.[강솔의 성격을 네가 제일 잘 알잖니. 약간 영리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어리석고, 아주 고집도 세지.][네가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거야.][걔는 너 없이는
진석은 말했다. “어젯밤 충격을 받았는지, 오늘 새벽 일찍 도망갔어!” 다행히 밤중에 도망간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걱정이 되어 밤새 쫓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명주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럼 오늘 너도 강성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며칠 후에 갈 거야.”[좋아. 이번에는 정말 시간을 줘야 해. 너희 둘의 관계 변화를 잘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거야.] “어떻게 됐든, 네가 도와줘서 고마워!” 명주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긴, 네가 내 나쁜 조언 때문에 강솔이 도망간 걸로 날 미워하지 않으면 그걸로 만족이야.] “미워하지 않아.” 진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였으니까. 일찍 고백하고 일찍 넘어가는 게 낫지!” 명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하고, 네가 빨리 강솔을 쫓아다녀서 결혼하길 바랄게. 결혼할 때 잊지 말고 나도 초대해.] “물론이지!” 진석의 목소리는 더욱 결연해졌다....강솔은 오후에 강성에 도착했다. 방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청소부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집을 정리했다. 자신을 바쁘게 만들어야만 진석과 어젯밤의 그 통제 불능의 상황을 자꾸 떠올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솔은 주예형을 피하기 위해 경성으로 도망쳤었는데, 이제는 진석을 피하려고 강성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해가 저물 무렵, 집을 다 정리하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희야, 나 강성에 돌아왔어. 스승님을 뵈러 가고 싶은데, 너도 같이 갈래?”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함께 회사에 가지 않고, 어정에서 디자인 스케치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좋아, 지금 출발할까?] “네 결혼식 드레스 디자인 스케치도 가져와. 내가 다시 한번 봐줄게.” [알겠어. 곧 만나!]약속하고 나서, 강솔은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겨 나섰다. 혼자 차를 몰고 가던 중, 신호등에 걸렸을 때
양재아는 말을 마치고 강솔의 손에 든 떡을 보며 말했다. “강솔 언니, 이렇게 돈 쓸 필요 없어요. 설 때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져다줘서 지금도 주방에 쌓여있어요. 거의 상할 지경이에요.”“외할아버지가 떡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셨어요.” 강솔은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말했다. “그럼 스승님께서 버리라고 하시면 되겠네!” “언니, 화내지 마세요. 전 그냥 언니가 돈 낭비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너무 의미를 두지 마세요!” 강솔이 막 대꾸하려던 순간, 재아는 갑자기 얼굴을 바꾸며, 환한 미소로 갓 들어온 차를 향해 걸어갔다. “소희, 왔어!” 재아는 유난히 상냥하게 말하자, 강솔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차에서 내린 소희가 자신을 향해 서 있었다. 소희도 강솔을 발견하고 재아에게 인사한 후 그녀에게 다가왔다. “난 네가 정월 대보름이 지나야 돌아올 줄 알았어.” 강솔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빨리 돌아왔지.” “네가 그 유명한 떡집에서 떡을 샀구나?” “마침 스승님께서 며칠 전에도 떡 얘기하셨었어.” “그래?” 강솔은 양재아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재아는 스승님께서 떡을 보기도 싫어한다고 하던데, 사와도 스승님이 안 드실 거라고 했어.” 그러자 재아의 얼굴이 굳어졌고, 서둘러 소희에게 변명했다. “제 말은 집에 떡이 많으니까 강솔 언니가 괜히 돈 낭비하지 않도록 하려던 것뿐이에요.” 소희는 재아의 어색한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에 떡이 많이 있어도 스승님은 강솔이 사 온 걸 아주 맛있게 드실 거야.” 소희는 강솔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춥지 않아? 들어가자.” “응!” 강솔은 표정이 풀리며 소희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아는 서 있는 채로 얼굴이 굳어졌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도경수는 강솔을 보며 매우 기뻐했고, 강솔이 사 온 떡집의 떡을 연달아 두 개나 먹으며 말했다. “이 맛은 정말
뒷마당에 있는 정자에는 난로가 있었고, 강솔과 소희는 그곳에 가서 불을 쬐며 이야기를 나눴다. 강솔은 망설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진석 오빠가 나한테 자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어.” 소희는 잠시 놀라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고백했구나!” 강솔은 놀라며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지. 네가 처음 귀국했을 때, 우리가 모였잖아. 그때 선배가 직접 나한테 말했어.” “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 강솔은 당황스러워하자 소희가 대답했다. “선배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그리고 그때 너는 주예형이랑 사귀고 있었잖아. 선배는 네가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걸 원하지 않았어.” 강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렇구나. 결국 나만 모른 거네. 나는 그가 네 마음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건 네가 좀 오해한 거지.” 강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석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믿기 힘들어.”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해?”소희가 묻자 강솔은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너무 뜻밖이라, 진석이랑 나 사이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 난 우리가 아주 순수한 감정이라고만 생각했어.” 소희는 웃음이 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는 널 정말 사랑해.” 강솔은 갑자기 눈을 들어 소희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부드러워졌고, 그녀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화로 속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유로 네가 서둘러 돌아온 거야?” “응.” 강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네가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아직도 주예형을 좋아한다면, 선배에게 거절하면 돼.”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건, 그 사람이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야.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참아왔으니, 선배도 각오하고 있을 거
“정말 좋네!” 강솔의 눈빛이 반짝였다. “드디어 기쁜 소식이 있네. 이제 두 달 남았네. 엄청나게 바빠지겠구나?” “웨딩드레스, 들러리 드레스, 그리고 답례품 디자인은 내가 직접 하고, 나머지 일은 전부 임구택에게 맡겼어!” 웨딩드레스 최종 시안은 이미 화영에게 넘겼고, 나머지도 반달 안에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생각해 둔 게 있어?” 강솔은 디자인 이야기만 나오면 흥미를 보였다. “조금.” 소희는 자신이 만든 들러리 드레스의 초안을 강솔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네가 입을 거야. 마음에 들어?” “와!” 강솔은 흥분하며 말했다. “정말 예쁘다!” 디자인 도안을 보자마자, 강솔은 그동안의 고민을 모두 잊고, 들러리 드레스와 답례품 디자인에 대해 소희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다. 어둠이 완전히 깔릴 때쯤, 하인이 두 사람을 불러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맞다, 도도희 이모는 언제 돌아온다고 하셨지?” 이제 설도 지났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서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소식 없어.” 강솔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소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두자. 양재아가 계속 스승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스승님도 마음의 위안이 있을 거야.” 소희는 걸음을 멈추며 차분히 말했다. “재아가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쓰지 마.” 강솔은 웃으며 소희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 스승님이 행복하시다면, 나는 괜찮아. 결국 스승님 곁에 있는 사람은 재아잖아.” 그래서 재아가 자신을 어떻게 몰아세우든, 소희와의 관계를 이간질하려 하든, 강솔은 개의치 않았다. 스승님께 가서 무슨 말을 할 생각도 없었다. 소희는 웃으며 강솔을 바라보았다. “네가 연애할 때도 이렇게 맑은 정신이었다면, 선배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받지 않았을 거야.” 강솔은 순간 마음이 답답해졌다. “오빠 얘기는 그만해!” “알겠어, 그만할게. 이제 가서 밥 먹자!” 소희는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
임유진은 소희를 붙잡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주된 이야기는 서인과의 일이었다. 소개팅 이야기에서부터 백양을 보러 갔던 일, 돌아오는 길에 서인이 백양에 관해 여러 가지 얘기를 했던 것까지. “소희야, 너 생각엔 사장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 유진은 집에 돌아온 뒤로 계속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인이 자신에게 조금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 보면 별 차이가 없었다.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인의 생각은 단순해.” “뭔데?” 유진이 금세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오자,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숙모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거지.” 유진은 순간 멍하더니, 이내 배를 잡고 소파 위에서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나, 전에 이미 삼촌한테 주의를 들었어.” “응?” 이번에는 소희가 궁금해졌다. “우리 삼촌이 그러더라고.” 유진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너는 절대 소희를 원망하지 말라고.” 소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했네.” “너와 관련된 일이니까, 당연히 꼼꼼하게 챙기지.” 두 사람은 밤 10시 반까지 이야기 나누었다. 그때 임구택이 회의를 마치고 와서는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우리 소희 좀 돌려줄 수 있어?” 그러나 유진은 소희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삼촌, 오늘 밤만 소희가 여기서 자면 안 돼요? 딱 하루만!” 그러자 구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돼.” 그는 소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기야, 이제 그만 가서 자자.” 소희는 구택의 손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오늘은 유진이랑 잘게. 당신 혼자 자.” 이에 구택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난 어떻게 자란 말이야?” “난 몰라요, 어쨌든 오늘 소희는 내 거얘요!” 유진은 소희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삼촌, 너무 쪼잔한 거 아니에요?” “맞아!” 소희도 말을 덧붙이자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구택은 회사로 향했고, 소희는 임유진과 임유민을 데리고 운동하러 갔다. 체육관에 도착하자, 휴게실에 앉아 있는 서인을 본 유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는 소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부른 거야?” 소희는 유진에게 격려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기회를 잘 잡아봐.” 유진은 흥분해서 소희를 안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고, 그 모습을 본 유민은 찡그리며 말했다. “좀 참아. 감정을 너무 드러내지 마.” 유진은 그 말에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그래도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서인은 소희의 전화를 받고 온 것이었는데, 이제야 소희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래도 별말 없이 손에 든 라켓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같이 한 팀할래?” 유민은 곧바로 말했다. “저는 소희 선생님이랑 한 팀 할게요. 숙모가 나를 도와줄 거라서요!” 유진은 유민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평소엔 항상 소희를 숙모라고 부르던 그가, 오늘은 자신과 서인을 배려해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서인은 유진을 향해 말했다. “너만 유민에게 지지 않으면, 나도 소희에게 지지 않을게.” 유진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서인은 유진의 손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의 손이 맞부딪혀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함께 코트로 향했다. 유민은 소희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선생님, 이제 부담은 선생님께 넘어갔어요!” 소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누나의 행복을 위해, 내가 좀 봐줄게.” 그러자 유민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서인 삼촌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에요?” 소희는 유민을 째려보며 말했다. “내가 언제 겁먹은 적 있어?” 이에 유민은 말없이 웃으며 말했다. “라켓 가져올게요. 그동안 몸 풀어둬요!”...그들은 하루 종일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냈고, 오후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임구택도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도경수는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때 너는 동의 안 했잖아? 뭐라 그랬더라, 젊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연애해야 한다고 했었지?”“요즘은 맞선이 유행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내가 손녀를 찾으니까 이제 와서 네가 자유연애를 반대하는 건가?”강재석은 시언을 향해 물으며 말했다.“누가 맞선이 유행하지 않는다고 했어?”시언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기억이 안 나요.”이에 도경수는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할아버지와 손자가 둘이 함께 일부러 얼버무리는 거야? 내가 한 말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강재석은 웃으며 시언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냐?”시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자유롭게 연애하는 걸로 할게요. 그것도 문제없거든요.”그 말에 강재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모든 걸 예상하였다는 듯했다. 그러나 도경수는 곧바로 반대했다.“안 돼! 안 된다고! 우리 손녀를 건드리려 하지 마. 나와 도도희는 절대 그렇게 서둘러 재희를 시집보낼 생각이 없어. 최소 몇 년은 집에 두고 보고 싶단 말이야.”강재석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아까까지는 강시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감사를 표하더니, 이게 그에 대한 보답이야?”도경수는 서둘러 말했다.“시언아, 내가 너한테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말해봐라. 내 수집품 중에 골라.”“골동품이든 진품 그림이든 상관없어. 너희 할아버지가 평생 탐내던 서화도 내줄게. 원하는 건 뭐든 가져가!”그러나 시언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도경수 할아버지,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 강아심뿐이예요.”당당한 시언에 도경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강재석은 흐뭇하게 웃으며 도경수를 바라보았다.“들었지? 우리 시언이 널 대신해 손녀를 찾아줬잖아?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으면 그것에 걸맞은 보답을 해야지.”도경수는 화가 난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너희 집안은 이걸 빌미로 우리 손녀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야? 정말
도도희는 강시언에게 물었다.“아심이 어렸을 때 사진은 없어?”시언은 아심을 한 번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있을 거예요. 돌아가서 찾아보도록 할게요.”“꼭 찾아줘.” 도도희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아심이 지난 2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녀에게는 모두가 공백이었다. 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마음이 조급했다.식탁은 오래된 황화리 목재로 만들어져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아심은 창가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고, 창밖에는 꽃이 만개한 목련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도경수와 도도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녀는 다시금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익숙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걸 느꼈다.아심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저기요. 예전에 그 자리에 꽃받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 꽃병이 놓여 있지 않았나요?”도경수와 도도희는 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경수는 놀라 눈물을 머금은 채 물었다.“그걸 기억하고 있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냥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도도희는 흥분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맞아, 맞아! 거기에 분채 꽃병이 있었어. 할아버지가 그 안에 사탕을 숨겨두고는 널 안아 그 안에서 꺼내보라고 했잖니.”“너는 사탕을 집어 들 때마다 그렇게 행복하게 웃었어.”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기억에 남았나 봐요.”익숙함의 원인을 알게 된 아심의 마음에는 조금 더 따뜻한 친근함이 스며들었다....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거실로 돌아왔다. 곧 도도희는 강아심에게 물었다.“또 기억나는 게 있니?”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른 건 생각나지 않아요.”“그럼 내가 너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들을 보여줄게. 그러면 뭔가 떠오를 수도 있지.”도도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아심을 데리고 뒷마당으로 향했다.이에 이반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도희가 정말 행복해 보이네요.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강솔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모두가 행복한 날이니까요!”그녀는 소희를
“자, 먼저 밥부터 먹자고! 밥 먹자!” 도경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목소리마저 떨렸다.식사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고, 모두 함께 식탁으로 향했다. 도도희는 여전히 강아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고, 감정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그러니까, 세상에 이유 없는 호감은 없는 거야. 우리 첫 만남에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도 다 피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어.”아심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신기해요.”도도희는 그녀를 식탁에 앉히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자. 밥 먹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자.”모두가 둘러앉아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은 그때, 도경수는 갑작스럽게 한쪽에 서 있던 가정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양재아는 어디 갔지?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데.”그러자 도우미가 대답했다.“아가씨께서 회사에 일이 있다고 하셔서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그 말을 듣자 강시언은 아침에 유전자 검사기관에서 만난 권수영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도도희는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라고요? 아심은 나의 유일한 딸이고, 우리 아버지의 유일한 외손녀예요. 그런데 집에서 다른 사람이 아가씨라고 불린다면, 아심은 뭐가 되는 거죠?”그 말에 도우미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도경수가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며 말했다.“예전에 습관적으로 그렇게 부른 거야. 이제부터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하지만 도도희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처음부터 양재아를 이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해요. 재아가 마치 이 집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요.”“아심이 내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아이가 얼마나 불만을 가질지 모르겠네요.”소희가 나서서 말했다.“도도희 이모, 그건 제 불찰이에요. 저를 탓하세요. 스승님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임구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 잘못은 아니야. 네 의도는 선의였으니까. 애초에 양재아가 유전자 검사를 하기 전에 도경수 어르신을 먼저 찾아간 게 문제였지
임구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결과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결말이네요!”처음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진석은 강솔과 도경수에게 휴지를 건네며 강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만 울어. 네가 이렇게 울면 스승님도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워.”강솔은 휴지를 받아 도경수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스승님, 이제 울지 마세요. 울지 말아요!”강재석 역시 소희가 건넨 휴지를 받아 눈가를 훔쳤다. 그는 강시언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손자, 잘했구나!’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아심에게 돌렸다.아심은 울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딘가 불안하고 복잡해 보였다.이런 기분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 마지막으로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온두리에서 시언에게 끌려가던 날이었다.그때 아심은 시언의 차 안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될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지금의 감정도 그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경하면서도 따뜻한 감정이 스며들었다.‘이제 나에게도 가족이 생겼어.’도도희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흘리며 아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애틋함과 따스함이 가득했다. 도도희는 울면서도 웃고 있었고, 목소리는 떨렸다.“내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딸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어. 우리가 조금만 더 서로를 알았더라면, 진작에 만날 수 있었을 텐데...”아심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지금도 충분히 좋아요.”“맞아, 놓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도도희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가 너를 데려간 거니?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어?”아심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그때 저는 자주 맞았고, 기억이 흐릿해요. 조금 더 자랐을 때의 기억은 양부모님 댁에서예요.”“그분들은 제가 친딸이 아니라고 했어요. 강가에서 주웠다며,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더군요.”“널
강시언은 강아심을 데리고 도경수의 집으로 돌아왔다. 정원을 지나던 중, 아심은 마당의 풍경을 바라보며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낯익은 감정이 가슴 속 깊이 몰려왔다. 아주 오래전,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그녀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왜 그래?” 시언이 멈춰 선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에 아심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본가에 돌아오니 긴장됐나? 그 용감한 강아심도 이런 상황은 무섭나 보네?”시언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나자 도경수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결과가 나왔어?”“나왔어요.”시언은 결과지를 세 부로 나누어 도경수, 도도희, 그리고 강재석에게 각각 건넸다. 도경수는 떨리는 손으로 결과지를 받아 들고 급히 훑어 내려갔다. 거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고, 모두의 시선이 결과지를 쥔 세 사람에게 집중되었다.가장 먼저 결과를 확인한 것은 도도희였다. 그녀는 결과를 본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아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도도희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아, 정말, 우리가...”도도희는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무려 이십 년. 그 모든 세월이 그녀에게는 과거를 묻어버린 긴 시간이었지만, 이제 그 모든 기억이 한순간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마치 긴 꿈을 꾼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도경수 역시 보고서를 들고 손을 떨며 아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반응만 보고도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심을 향했고, 다들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감격과 놀라움이 가득했다.아심은 시언의 손을 꼭 잡으며 도도희를 향해 천천히 고개
“기뻐?” 강시언이 묻자, 강아심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멍하나 보네?” 시언이 웃었다. 그리고 아심은 그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시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천천히 받아들이면 돼. 모든 건 내가 함께할 거니까.”아심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도도희 이모를 찾아가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하자.” 시언은 미소 지으며 아심을 놓아주고 차 시동을 걸었다. 아심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만약 도도희 이모가 제 엄마라면 제 아빠는 누구예요?”시언은 그녀의 질문에 설명했다.“너의 아버지는 도도희 아줌마의 대학 동기였어. 나중에 유학을 떠나고는 돌아오지 않았지.”“아마도 이미 다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을 거야. 지금 네 혈육은 도도희 아줌마와 도경수 할아버지뿐이야.”아심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그럼, 나는 버려진 게 아니었네요.”“당연히 아니지!” 시언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누군가에게 납치된 거야. 네가 사라진 뒤, 도도희 이모와 도경수 할아버지는 큰 고통을 겪었어. 그들은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어.”아심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살이 창가로 비추고 있었고, 그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던 어둠과 상처가 서서히 풀어져 가는 듯했다.‘나는 버려진 게 아니었어. 내 가족은 나를 찾으려고 했었어.’...한편, 권수영은 아직 유전자 검사 기관을 벗어나지도 못한 상황에서 양재아의 전화를 받았다.재아는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결과 가져왔어요? 나 지금 검사소 뒤쪽에 있는 작은 공원에 있어요. 빨리 결과를 가져다줘요!]권수영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결과는 미리 받았는데 강시언이 그걸 가져갔어요.”[뭐라고요?] 재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분명 한 시간이나 일찍 준비했는데, 어떻게 시언이 자신보다 먼저 올 수 있었단 말인가?이에 권수영이 서둘러 말했다.“진정해요, 재아 양. 그래도 내가
“여기 결과야. 정말로 검사 의뢰인의 대리인 맞아?”그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렇게 결과를 빼돌리는 건 나한테도 큰 리스크와 책임이 따른다고!”권수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맞아, 의뢰인이 부탁해서 제가 대신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 문제 될 일 없을 거니까.”권수영은 결과지를 받아 들고는 그 사람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조용히 보고서를 펼쳤다.앞부분의 글귀들은 건너뛰고, 그녀는 바로 결과 부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막 확인하려는 찰나, 보고서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깜짝 놀라 고개를 든 권수영은 앞에 서 있는 고고하고 냉랭한 남자를 보고 얼어붙었다. 강시언은 결과지를 한눈에 훑어본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권수영 씨? 이 보고서가 당신과 무슨 관계죠? 검사 직원에게 돈을 주고 결과를 빼돌리다니, 이게 불법인 건 알고 있나요?”권수영은 강시언을 알아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변명했다.“이건 오해예요! 제가 아는 사람 대신 결과를 받으러 온 것뿐이에요. 아침에 양재아가 부탁해서요.”시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러니까 양재아가 당신을 보낸 건가요?”권수영은 순간 아침에 재아가 혹시라도 들키게 된다면 자신의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말이 떠올랐다.이에 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꾸며 웃었다.“아, 아니에요. 재아는 몰라요. 제가 여기서 검사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미리 확인하려고 온 거예요.”강시언은 더욱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더 따질 시간 없으니 그대로 전하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요.”권수영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언이 자리를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양재아가 검사한 게 맞는데, 왜 쓸데없는 짓이라고 한 걸까?’권수영은 생각에 잠긴 사이, 아까 결과지를 전달해 준 직원이 급하게 달려왔다.“아직 안 갔네. 정말 검사 의뢰인의 친구 맞아? 상사가 이 일에 대해 저를 추궁하고 있어. 그러니 와서 설명 좀 해줘!”“나, 나도 어떻게
강아심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중간에서 저희를 위해 고생하셨잖아요. 제가 밥 한번 대접할게요.”그 말에 강시언은 비꼬듯 말했다.“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힘을 써서 네가 밥을 사준다는 거야?”아심은 눈을 빛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수고비를 원하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이윽고 휴대폰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얼마면 적당할까요, 강시언 씨?”그 말에 시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또 돈을 보내기만 해봐!”아심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얼굴선이 빛을 받아 더욱 뚜렷하고 우아하게 빛났다. 눈가에 번진 따스한 빛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아심의 집에 도착한 후, 그녀는 말했다.“먼저 앉아 계세요. 물 좀 가져올게요.”아심은 냉장고에서 물 두 병을 꺼내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시언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아심은 물을 내밀며 무심하게 물었다.“바빠요?”그러자 시언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물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가볍게 끌어당기자 아심은 시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검사도 끝났으니, 이제 우리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아심은 시언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우리 문제라뇨?”시언은 차갑고 또렷하게 말했다.“그날 돈을 보낸 건 무슨 뜻이었지?”그 말에 아심은 그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시언은 얼굴을 더욱 차갑게 굳히며 그녀의 뺨을 살짝 잡았다.“돈은 보낼 줄 알면서 말은 못 해?”아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시언의 손은 아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강아심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고, 한참 후에야 시언의 어깨를 밀어내며 중단시켰다. 아심은 시선을 피하며 나직이 말했다.“우리 관계는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선 안 돼요.”그 말에 시언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예전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강솔과 진석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강솔은 기쁜 표정으로 소희를 부르며 소희에게 달려갔다.오늘은 모두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비록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불안감도 여전히 있었지만 말이다.진석과 임구택도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옆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희는 강솔과 함께 대화를 이어갔다.소희가 강솔에게 물었다.“양재아는 어디 있어?”강솔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아침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있었어. 상태도 괜찮아 보였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도경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며 말했다.“걔도 마음이 복잡할 테니 억지로 불러내지 말게. 혼자서 마음을 가라앉히게 둬.”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아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어색했으니, 혼자 위층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언젠가는 모든 걸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아침 8시, 아심은 시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 시언은 그녀에게 내려오라고 했다.몇 분 후, 아심은 차에 올라탔다.“도도희 이모는요?”“먼저 가셨어.” 시언은 도로 상황을 살피며 말했다.“우리는 먼저 아침을 먹고 나서 합류할 거야.”“저는 이미 아침을 먹었어요.”시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심을 돌아보자, 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왜요?”“아무것도 아니야.” 시언은 무심하게 대답하고 차를 출발시켰다.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조그만 아침 식당이 보였고, 아심이 말했다.“여기 아침 식사가 괜찮아요. 당신은 여기서 아침을 먹고 오세요. 저는 차에서 기다릴게요.”그러자 시언은 무심하게 말했다.“괜찮아, 안 먹어.”“안 먹으면 배고프지 않아요?” 아심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안 고파.” 시언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운전만 계속했다. 아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가방에서 따뜻한 우유 한 병과 직접 만든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샌드위치는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시언은 그녀를 흘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