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소희를 붙잡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주된 이야기는 서인과의 일이었다. 소개팅 이야기에서부터 백양을 보러 갔던 일, 돌아오는 길에 서인이 백양에 관해 여러 가지 얘기를 했던 것까지. “소희야, 너 생각엔 사장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 유진은 집에 돌아온 뒤로 계속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인이 자신에게 조금 다르게 대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 보면 별 차이가 없었다.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인의 생각은 단순해.” “뭔데?” 유진이 금세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오자,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숙모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거지.” 유진은 순간 멍하더니, 이내 배를 잡고 소파 위에서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나, 전에 이미 삼촌한테 주의를 들었어.” “응?” 이번에는 소희가 궁금해졌다. “우리 삼촌이 그러더라고.” 유진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너는 절대 소희를 원망하지 말라고.” 소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했네.” “너와 관련된 일이니까, 당연히 꼼꼼하게 챙기지.” 두 사람은 밤 10시 반까지 이야기 나누었다. 그때 임구택이 회의를 마치고 와서는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우리 소희 좀 돌려줄 수 있어?” 그러나 유진은 소희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삼촌, 오늘 밤만 소희가 여기서 자면 안 돼요? 딱 하루만!” 그러자 구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돼.” 그는 소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기야, 이제 그만 가서 자자.” 소희는 구택의 손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오늘은 유진이랑 잘게. 당신 혼자 자.” 이에 구택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난 어떻게 자란 말이야?” “난 몰라요, 어쨌든 오늘 소희는 내 거얘요!” 유진은 소희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삼촌, 너무 쪼잔한 거 아니에요?” “맞아!” 소희도 말을 덧붙이자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구택은 회사로 향했고, 소희는 임유진과 임유민을 데리고 운동하러 갔다. 체육관에 도착하자, 휴게실에 앉아 있는 서인을 본 유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는 소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부른 거야?” 소희는 유진에게 격려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기회를 잘 잡아봐.” 유진은 흥분해서 소희를 안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고, 그 모습을 본 유민은 찡그리며 말했다. “좀 참아. 감정을 너무 드러내지 마.” 유진은 그 말에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그래도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서인은 소희의 전화를 받고 온 것이었는데, 이제야 소희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래도 별말 없이 손에 든 라켓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같이 한 팀할래?” 유민은 곧바로 말했다. “저는 소희 선생님이랑 한 팀 할게요. 숙모가 나를 도와줄 거라서요!” 유진은 유민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평소엔 항상 소희를 숙모라고 부르던 그가, 오늘은 자신과 서인을 배려해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서인은 유진을 향해 말했다. “너만 유민에게 지지 않으면, 나도 소희에게 지지 않을게.” 유진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서인은 유진의 손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의 손이 맞부딪혀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함께 코트로 향했다. 유민은 소희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선생님, 이제 부담은 선생님께 넘어갔어요!” 소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누나의 행복을 위해, 내가 좀 봐줄게.” 그러자 유민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서인 삼촌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에요?” 소희는 유민을 째려보며 말했다. “내가 언제 겁먹은 적 있어?” 이에 유민은 말없이 웃으며 말했다. “라켓 가져올게요. 그동안 몸 풀어둬요!”...그들은 하루 종일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냈고, 오후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임구택도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다음 날, 강솔은 회사로 출근했다. 며칠 늦게 출근한 만큼, 강솔은 모두를 위해 작은 선물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었지만, 아무도 진석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강솔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비서인 배석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장님, 진석 사장님이랑 사귀시는 건가요?” 강솔은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를 멈추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석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그러던데요. 그날 회의할 때 팀장님이 진석 사장님 댁에 있었다고.” 강솔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또 뭐라고 했는데요?” “아니에요, 그게 다예요!” 석류가 재빨리 답하자 강솔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집이 진석 사장님 댁이랑 가까워요. 휴가 중일 때 종종 일을 논의하려고 집에 가기도 해요. 그러니 별로 이상한 건 없잖아요.” “그렇군요. 죄송해요!” 석류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만 떠들고 일이나 하죠.” “네!” 강솔은 연말에 일찍 집으로 돌아갔고, 연초에 출근이 늦었기에 일이 많이 쌓여 있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에 몰두했다. 바쁜 게 차라리 낫다. 생각을 덜어낼 수 있으니까. 다만 진석의 사무실 앞을 지날 때마다, 강솔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늦추며 안을 살펴보곤 했다. 진석은 아직 강성에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왔다고 해도, 회사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회사는 진석과 소희가 취미로 만든 곳이었고, 예상외로 큰 성공을 거두어 업계의 선두가 되었다. 강솔은 잠깐 멈췄다가 곧 발걸음을 돌려 자기 일에 집중했다. 그 후 이틀 동안, 진석은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고, 마치 사라진 듯했다. 강솔은 문득 주예형을 쫓아 M 국까지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예형은 매우 화가 났었고, 일주일 동안 연락하지 않았었다. 그 당시 강솔은 예형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몰랐으나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때는 예형을 달래려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진석에
심서진이 더 말하려던 순간, 주예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해. 우리 가자.” 예형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떠났지만, 강솔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분명 그 두 사람이 더럽고 치사한 짓을 했으면서, 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할 수 있는 걸까? 참으로 뻔뻔했다. 이때 허경환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는 분인가요?” “아니에요!” 강솔은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일로 돌아왔다. “아까 이어서 말씀드린 귀걸이는요, 사모님의 얼굴형을 고려해서 물방울 모양으로 디자인해 봤어요. 한 번 보시겠어요?” ...식사를 마친 후, 디자인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고, 몇 군데 수정할 부분도 생겼다. 허경환의 설명을 듣고, 강솔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레스토랑 앞에서 허경환과 헤어진 후, 강솔이 차를 찾으러 가려던 순간, 뒤에서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강솔!” 강솔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예형이 뒤쫓아와 강솔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강솔!” 강솔은 손을 세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주예형, 너랑 심서진이랑 둘이 사귀잖아. 그럼에도 나한테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 예형은 침통한 표정으로 강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서진이랑 사귀는 거 아니야. 오늘은 야근 끝나고 늦어서 그냥 밥 먹은 것뿐이야.” “너희가 어떤 관계든 나랑은 상관없어. 그러니 설명할 필요도 없어!” 강솔은 돌아서며 빠르게 걸어갔다. “강솔!” 예형은 다시 강솔을 쫓아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날은 내가 술에 취해서 그랬던 거야. 한 번만 기회를 줘.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난 너 없이 못 살아!” 강솔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딴 짓을 해놓고도 날 사랑한다고?”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후회하고 있어!” 예형은 깊이 찡그리며 뉘우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윤미가 보낸 메시지였다. 내일 아침 고객을 만나러 가야 해서 오전 회의에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윤미에게 답장을 보낸 뒤, 강솔은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지며 핸드폰을 아래로 스크롤 했다. 손가락이 진석의 이름 위에서 멈췄다. 대화창을 열어보니, 여전히 강솔이 그날 밤에 보낸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진석은 강솔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강솔의 마음은 허전함과 함께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직도 경성에 있는 걸까? 힘들면 민명주를 찾으러 가는 건 아닐까? 강솔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일어났다. 물을 마셨지만, 차가운 물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시계를 확인한 강솔은 핸드폰을 들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요?” 윤미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강솔은 종이에 엉뚱하게 선을 그으며 말했다. “엄마 생각나서 전화한 건데. 감동받았어요?” [감동했지.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아!]윤미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28살 딸이 드디어 철들었네!] 강솔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빠도 집에 있어요?” [방금 들어와서 서재에서 통화하고 있어. 아빠 찾는 거야?] “아니요, 그냥 바쁘시니까 내버려둬요.” 강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떠날 때 허수희 이모에게 인사도 못 했는데, 오늘 진씨 저택에 갔었어요?” [갔지. 너 대신 인사도 해뒀어. 네 이모는 이미 네가 워낙 자유분방한 거에 익숙하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윤미래는 웃음을 지었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근데 진석이...] 강솔은 바로 물었다. “그 사람 무슨 일 있어요?” 윤미래는 답했다. [걔도 네가 떠난 걸 알더라.] 강솔은 말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당연한 거잖아!' 강솔은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그... 아직도 집에 있어요?” [그럴 거야. 오늘 내가 갔을 때는 못 봤어. 외출한 것 같더
[미안할 걸 왜 말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 나잖아.] 윤미래는 목이 메인 듯 말했다.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강솔은 윤미래 달래며 말했다. “윤미래 여사님, 너무 쉽게 감정적으로 굴지 마세요. 나이도 있으시니 좀 차분해지셔야죠.” 윤미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난 괜찮은데, 진석이가 너한테 오랫동안 마음을 줬으니, 그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지는 마라.] 강솔은 엄마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 나도 지금 마음이 혼란스러워요. 나 방금 주예형이랑 헤어졌잖아요. 아직 오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 사람에게 느끼는 게 오랜 의존인지, 다른 감정인지 구별이 안 돼요. 나도 제대로 생각해 보고 싶어요. 그게 그 사람한테도 공평하니까.” 윤미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도 괜찮아. 진석이는 기다릴 거야.] 그 말은 강솔의 마음을 울컥하게 했지만, 동시에 달빛처럼 부드러운 위로가 되었다. 강솔은 창가로 걸어가 차가운 바람을 한 모금 들이마시며 머리를 맑게 했다. “알았어요, 엄마. 나 이제 디자인 수정 좀 하고, 금방 잘게요.” [너무 늦지 않게 자라.] “네.” 강솔은 전화를 끊고, 어지러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진석이 했던 말은 강솔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때문에 이틀 동안 마음이 어지러워 편히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천천히 생각하고, 진석을 다시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솔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디자인 수정에 집중했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에 빠지지 않았다....다음 날, 강솔은 드디어 회사에서 진석을 보았는데 소희와 함께 왔다. 소희가 회사에 온 건, 그녀의 신분이 공개된 이후 처음이었다. 직원들은 흥분했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존경과 호감을 표했다. 진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소희가 앞으로 자주 올
“당연한 일이죠.” 소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온옥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King인 줄 몰랐어요. 혹시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면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걸 마음에 두었더라면, 부총감님이 아직 여기 앉아 있지 않았겠죠.” 온옥은 더욱 자책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해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너그럽게 대해주셔서요.” 소희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전 일은 모두 지나간 일이니, 다들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앞으로 회사에 새로운 직원들이 올 텐데, 부총감님도 새 직원들에게 더 너그럽게 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온옥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명심할게요.” “소희!” 기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소시연이 달려 들어왔다. 시연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구나!” 소희는 웃으며 물었다. “어디서 이렇게 급하게 달려왔어?” “오늘 잡지 촬영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시연은 미소를 띠고 대답하자, 그 틈을 타 온옥은 자리를 떠났다. 강솔은 턱을 괴고 반짝이는 눈으로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희, 너 아직 모르지? 우리 시연이가 이제 꽤 유명해졌어. 조만간 연예인으로 데뷔해도 무방해!” 시연은 소희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본업이 디자이너야. 북극 디자인 작업실의 일원이 됐으면, 영원히 그곳의 사람이 될 거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해. 꼭 회사에만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사람마다 목표가 다르잖아. 그게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는 아니지.” 소희의 말에 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 회사 떠날 생각 없어. 너 모르는 거지? 지금 북극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연예인보다 훨씬 가치가 높아!”“내가 지금 이 정도로 주목받는 것도 북극 디자이너라는 타이틀 덕분이야. 회사 떠나면 나도 아무것도 아니지.” 시연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
강솔은 진석의 사무실 앞에 도착해 손을 들어 노크했다. 곧 안에서 진석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강솔의 심장은 이미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강솔은 속으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오빠가 나를 좋아하지, 내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게 아니잖아!' 그날 밤도 자신을 강제로 키스한 거고, 만약 잘못이 있다면 진석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말도 안 돼!' 강솔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다독였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침착해야 해. 무심한 척해야 해.'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 밑이 약간 검게 변한 것이 걱정되었다.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지? 추궁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주예형 때문이라고 말하면 더 화를 낼까?’ 강솔이 머뭇거리던 찰나, 갑자기 문이 열렸다. 진석이 서서 강솔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문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강솔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반발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어떻게 제가 감히 사장님께 문까지 열어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진석은 쌀쌀하게 말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성질은 대단하네.” 강솔은 그를 노려보았고, 진석은 사무실 안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문 닫아.” 강솔은 진석을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두 사람의 말다툼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졌기 때문인지, 강솔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진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물었다. “왜 불렀어요, 사장님?” 진석은 자신의 책상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모가 너한테 줄 물건을 내게 맡기셨어.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가져가.” “우리 엄마가 뭘 보냈는데?” 강솔은 호기심에 물었는데, 엄마에게서 들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직접 와서 보면 알겠지.” “왜 직접 가져오지 않고, 굳이 내가 가야 하지?”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