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섣달그믐날 점심, 거리는 온통 등불과 장식으로 가득 찼다. 도시의 모든 구석구석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분위기로 북적였다.주예형은 섣달그믐날에 비빔밥을 먹는 전통을 따라, 점심에 비빔밥을 만들었다. 마음이 복잡한 예형은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여전히 강솔의 답장은 없었다.강솔이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것에 마음이 아프고 실망스러워 결국 비빔밥도 먹고 싶지 않았다. 예형은 혼자서 술 한 병을 꺼내 가득 따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걸까?’‘심서진이 강성으로 와서 돌봐야 했던 거였는데, 그걸 강솔이 이해해 주지 못한 걸까?’강솔은 전에는 이해심이 많았다. 단순하고 착한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강솔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이제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예형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형은 한 잔 또 한 잔을 마셨고, 금세 술병의 반이 비어졌다.똑똑똑!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예형은 누가 찾아왔는지 의아해하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서진이 보온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사하셨어요? 제가 몇 가지 요리를 해왔어요. 드셔 보세요.”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예형은 놀라며 말했다. “너 집에 안 갔어?”“KTX 표를 못 구했어요. 연말에는 표 구하는 게 너무 힘들잖아요.” 서진은 보온병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며, 부드럽게 예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남아서 설을 쇨 수밖에 없었어요. 또 선배도 남아 있어서 같이 설 쇠러 왔어요.”서진은 말하며 식탁으로 걸어갔다. 식탁에는 이미 손도 안 댄 비빔밥과 반쯤 비어있는 술병이 있자 웃으며 말했다. “이걸 점심으로 드실 생각이었나요?”“별로 배고프지 않아서 대충 먹으려고 했어.”“오늘은 섣달그믐날인데, 대충 먹으면 안 되죠.” 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보온병에서 음식을 꺼내 식탁에 놓았다. “우리 고향 음식이에요. 아직 따뜻해요. 집에 돌아온 기분으로 먹자
두 사람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같은 고향 사람끼리 명절을 밖에서 보내는 것은 평소보다 더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금세 한 병의 술을 다 마셔버렸다. 곧이어 예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술을 더 가져올게, 잠시만 기다려.”“좋아요. 오늘은 취하지 않고는 못 돌아가겠어요!” 심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형이 옆방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서진도 따라가 문틀에 기대어 말했다. “선배, 정말 멋지네요. 옆방에 술장을 만들어 두다니, 일할 때마다 한 잔씩 하려고 그런 거죠?”예형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대충 만든 거야. 너한테 웃음거리나 됐네.”“아니에요, 정말 고급스럽게 꾸며놨어요.” 서진은 방 안으로 들어가 예형의 술장과 책장을 둘러보며 소파에 앉았다. “여기 앉으니까 정말 편하네요. 여기서 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눠요.”예형은 서진의 옆에 앉아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너 주량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아니에요, 오늘은 선배랑 함께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결국 오늘은 우리 둘만 같이 명절을 보내잖아요.” 서진이 다정하게 말하자 예형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너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지?”“선배를 왜 동정해요?” 서진은 물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 강솔 언니와 아직도 화해하지 않았나요? 설마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이미 강솔에게 설명했는데도 믿지 않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예형은 무력한 표정을 짓자 서진의 눈빛이 흔들리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선배가 나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언니가 아직도 선배를 용서하지 않는다니, 정말 지나친 것 같아요.”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솔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 이 기회를 틈타 헤어지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예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 강솔이 나에 대한 감정은 내가 믿어.”“사람 마음은 변하기 마련
예형은 계속 술을 마시며,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 강솔과의 관계에 대해 실망했어. 계속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어.”이에 서진이 갑자기 말했다. “방이 너무 덥네요!”서진은 말하면서 겉옷을 벗었다. 안에는 검은색 레이스 속옷이었고, 넥라인이 커서 가슴 앞부분이 드러났다. 예형은 눈앞이 흐려졌고, 술기운에 취했다. 서진은 예형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선배, 인제 그만 슬퍼해요. 어쩌면 강솔 언니는 지금 진석 씨와 함께 명절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라요. 선배만 혼자 슬퍼하고 있을 필요 없어요.”예형은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둘 다 경성 사람이니까, 이미 함께 있을지도 모르지.”“선배!” 서진은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정말 선배가 안쓰러워요. 선배처럼 멋진 사람은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해요!”“어, 어떤 선택?” 예형은 눈앞에 있는 서진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했다. 서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배, 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선배를 동경했어요. 선배가 강성에 온 걸 알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직장을 그만두고 선배를 찾아왔고요.”“선배는 내 마음을 정말 모르는 건가요?”예형은 숨이 막히며, 서진을 멍하니 바라봤다.서진은 예형에게 다가가 거의 몸에 기대며 애절하게 고백했다. “나는 강솔 언니보다 더 잘할 수 있어요. 선배를 챙기고, 선배의 사업을 돕고 싶어요!”서진은 남자의 손을 잡아 가슴에 대며 말했다. “선배, 우리 둘이 가장 잘 어울려요!”“강솔 언니는 선배를 배신했고 이미 다른 남자와 함께 있어요!”“그리고 선배를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해요!”예형은 술기운에 취해 숨이 가빠졌고, 서진의 향기가 코를 통해 스며들었다. 그래서 예형의 머릿속은 완전히 비어버렸다.“선배, 오늘 우리 함께 있어요!” 서진은 팔을 벌려 예형을 껴안고 가슴에 꼭 붙었다. 예형은 뒤로 밀려나며 머리를 책장에 부딪치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
예형은 술에서 깨자마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을 깨닫고 다시 옷을 찾으러 돌아갔다.그리고 예형이 다시 나왔을 때, 강솔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문 앞에는 강솔의 캐리어만 남아 있었고, 옆에는 꽃다발이 떨어져 있었다. 꽃잎이 흩어져 마치 시든 꽃처럼 보였다. 예형은 멍하니 서 있었는데 이제 자신과 강솔은 완전히 끝났음을 깨달았다.강솔은 예형의 집을 나와, 추운 거리에서 혼자서 멀리까지 걸었다. 그제야 자신의 캐리어를 잊고 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 그 물건들을 두고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추운 바람 속에서 강솔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어리석게도 또 한 번 주예형을 믿었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예형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심서진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또다시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 설날에 그를 만나러 왔던 것이다.강솔은 길가에 앉아, 몸을 멈출 수 없이 떨었다. 슬픔, 절망, 분노, 혐오감이 강솔의 마음을 휘감았다. 강솔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북적이는 거리에서 홀로 흐느꼈다....진석은 점심을 대충 먹고 오후 내내 서재에 머물렀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고, 마음도 공허했다. 아마도 강솔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돌이켜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짝사랑했던 이 시기는 너무도 길고 고통스러웠다. 잠깐의 기쁨이 있더라도 결국 깊은 상처만 남았다. 진석은 자신이 이미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상처가 다시 드러나면 여전히 아픔이 밀려왔다.이제 놓아줄 때가 되었다. 강솔이 행복을 찾도록 하고, 자신도 고통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야 했다. 진석은 오랜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주변 모든 것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솔은 진석의 인생에서 필수적인 존재였지만, 강솔에게도 그랬다. 강솔이 떠
“어디에 있어?” 진석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길에 있어.] 강솔이 울면서 말했다.“일단 집으로 돌아가. 곧 갈게!” 진석은 대답하며 외투를 집어 들고 빠르게 나갔다.[너는 집에서 설을 보내. 나는 괜찮아. 나 혼자서 진정할게!]“네 아파트로 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겠지?” 진석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응!] 강솔이 울면서 대답했다. 진석은 진씨 집안의 인맥을 동원해 전세기를 준비하고, 바로 강성으로 날아갔다. 진석이 강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강솔의 아파트 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안은 어두컴컴하고 아무도 없자 휴대폰을 꺼내 강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강솔의 목소리는 쉰 목소리였다. [너 강성에 왔어? 나 아직 여기 있어.]“일단 집에 가라고 했잖아?” 진석은 더 이상 책망하지 않고 말했다. “위치 보내줘.”전화를 끊고, 강솔은 곧 위치를 보내자 진석은 급히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화려한 불빛과 차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진석은 차에서 내려 멀리서 강솔이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상처받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진석은 길을 건너 강솔에게 다가가며, 강솔을 보며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쌍했다.‘여기서 오후 내내 있었던 걸까?’진석은 강솔 앞에 다다라 5초간 서 있었다. 그제야 강솔은 고개를 들었고, 진석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진석은 강솔 앞에 무릎을 꿇고 묵묵히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집에 가서 만두 다 준비했어. 집도 따뜻하고, 여기서 추위 맞지 말고.”강솔은 진석의 품에 안겨 진석의 옷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자 진석의 마음도 무겁고 아팠다.“정말로 남을 돌아봐야 할 때가 와서야 깨닫는 거야. 지금 어때? 이제는 깨달았어? 그 사람이 몇 마디 좋은 말 하면 다시 그리로 달려갈 거야?” 진석은 강솔을 안고 냉소적으로 말하자 강솔은 진석의 품 안에서 고개를
심서진은 여전히 주예형의 집에 있었다. 옷을 다 입고는 방을 치우고 식당도 깨끗이 정리했다. 서진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예형이 여전히 침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책하며 말했다. “오빠, 잘못했어요. 제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어요. 미안해요.”예형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다. “일단 돌아가.”“안 돌아가요!” 서진은 두려운 눈빛으로 예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가 저를 혼내줘야 마음이 편해요. 혼자 돌아가면 더 괴로워요.”“그냥 돌아가. 나 혼자 있고 싶어.” 예형은 차분하게 말했다.“선배, 아직도 강솔을 좋아하나요?” 서진의 눈에 슬픔이 비쳤고 예형은 후회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강솔은 나랑 설을 보내기 위해 돌아왔어. 원래 우리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었는데.”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예형은 강솔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만약 서진이 없었다면, 강솔이 돌아와서 그들은 분명히 다시 잘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끝났다.서진은 눈물을 머금고 눈을 닦으며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을 지었다. “다 내 잘못이에요.”“네 잘못만은 아니야, 나도...” 예형은 머리를 움켜잡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 자책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당시에는 어떻게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는지 몰랐다.“선배, 그러지 마세요!” 서진은 불쌍한 표정으로 울며 말했다. “선배가 이렇게 하면, 나는 차라리 죽고 싶어요. 이렇게 큰 문제를 일으켜서 미안해요.”예형이 막 말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급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서진의 눈에 순간적으로 빛이 스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솔 언니가 돌아온 거 아니에요?”예형은 급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키가 크고 냉정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 남자는 주예형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예형은 그 충격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입가의 피를 닦으며 놀란 눈으로 진석을 바라보
서진은 얼굴을 맞고 뒤로 물러나며 얼굴이 일그러졌고 다시 술병을 잡고 다시 강솔을 때리려 했다. 진석은 예형을 때리면서도 강솔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서진이 흥분한 것을 보자 재빨리 다가가 손에서 술병을 발로 차 날려버렸다.서진은 비틀거리며 넘어졌고, 강솔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시 꽃다발을 들고 서진을 향해 다가갔다. 서진은 몸을 일으켜 반격하려 했으나, 강솔의 꽃다발이 커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몇 번 치지 않았는데도 서진의 하얀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서진은 계속 뒤로 물러나며 비명을 질렀다. 강솔은 승기를 잡고 꽃다발을 서진의 얼굴에 계속 내리쳤고 꽃이 떨어지면 꽃줄기로 때렸다.“예전부터 네가 좋은 사람일 리 없다는 걸 알았어. 남의 남자친구를 유혹하는 게 그렇게 기분 좋았니?”“네가 애써 빼앗지 않아도 돼, 줄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니면 볼 때마다 팰 거니까!”강솔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진 채 꽃다발을 서진에게 던졌고, 서진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속이 시원해졌다. 진석도 예형을 때려 쓰러뜨리고 맥을 못 추자 진석은 손을 털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방 안의 한 쌍의 불쌍한 남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강솔의 캐리어를 들고 다른 손으로 강솔을 잡고 나섰다.“가자, 집에 가자!”강솔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진석과 함께 나갔다. 아파트를 나와서, 강솔은 조금 전의 상황을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마음이 조금 나아졌지?”강솔은 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짐을 가지러 간 게 아니라, 나랑 화풀이하러 간 거였네!”“누군가가 너를 괴롭히면, 바로 응징해야지. 왜 네가 눈물을 흘리며 숨어 있어야 하겠어?” 진석은 강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남의 잘못으로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마.”강솔은 진석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와줘서 다행이야!”“그래, 너 때문에 속이 터질 뻔했어!” 진석이 냉소적으로 말하자 강솔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부끄러워!”“부끄러운 건 네
하지만 오늘 와서 그런 추악한 장면을 보게 되어, 주예형에 대한 헛된 기대를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솔은 또다시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랬기에 진석에게 고마워해야겠다. 강솔을 완전히 실망시키게 만들어줘서.강솔은 이미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석양을 바라보며, 한 해의 마지막 날에 그 사람에게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거의 9년에 걸친 짝사랑과 완전히 작별을 고했다. 그동안의 청춘을 그냥 개에게나 줘버린 셈이었다. 진석은 따뜻하고 힘찬 손으로 아무 말 없이 강솔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비행기를 타기 전에 진석은 강솔에게 감기 예방용 생강차를 사주었다. 강솔이 찬바람 속에서 오후 내내 있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릴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비행기에 오른 후, 강솔은 피곤했는지 약물의 영향으로 진석의 어깨에 기대어 금세 잠들었다. 진석은 살짝 고개를 돌려 강솔의 약간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눈썹과 눈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 후 강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꼭 안아주었다.진석의 소중한 여자가 돌아왔다. 비록 상처를 입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활발하고 착한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 상처는 치유될 것이고, 과거는 잊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석은 항상 강솔의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경성에 도착한 것은 이미 밤 8시쯤이었다. 강씨 저택은 집 안팎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진씨 저택에서 설을 보내고 있었다.“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와. 아래층에서 기다릴게. 엄마에게 우리가 돌아왔다고 말했으니까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응.”강솔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몸 상태도 훨씬 좋아졌다. 진씨 저택에 도착하자, 강솔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비웃지 않더라도 엄마는 비웃을 것이었다. 진석은 강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미소를 지으며 강솔의 어깨를 감싸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유진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구은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생각했다.‘그분이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방연하한테 연락처를 물어봐 준다고 한 건 너무 성급했던 거 아닌가?’유진은 여진구를 돌아보며 물었다.“선배, 구은정 삼촌이랑 친해요?”그러자 진구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잘 몰라. 왜 갑자기?”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방연하가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더라고요. 혹시 여자친구 있는지 알아요?”진구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며 자연스럽게 웃었다.“한 번 보고 마음에 든 거야?”유진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연하는 잘생긴 남자만 보면 좋아해서, 하나도 이상할 거 없어요.”진구는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네가 그 사람 연락처를 알게 된다면, 방연하한테 줄 거야?”“당연하죠. 그런데 나도 몰라요.”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만약 다시 마주치게 되면, 그때 한 번 물어볼 수도 있죠.”진구는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곧 생일이지? 원하는 선물 있으면 미리 말해. 사실 하나 준비해 두긴 했지만.”유진의 눈동자가 살짝 빛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선물은 필요 없어요. 생일날 내가 걸어서 다닐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그 말에 진구는 호탕하게 웃었다.“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의사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말해 봐.”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요.”유진은 짐짓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누가 생일 선물을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놀랄 일도 없잖아요!”이에 진구가 웃으며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걸 주는 것보다, 네가 진짜 원하는 걸 주는 게 낫잖아.”유진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그럼 난 안 어렵게 할게요. 내가 회사 출근하면, 휴가 좀 더 주는 걸로 해요.”이에 진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휴가 쿠폰 만들어 줄게. 네가 원할 때마다 쓸 수
방연하는 임유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우산을 씌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제가 들게요!”서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산을 넘겨주고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때, 한 차량이 서점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여진구는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서인의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곧장 긴장한 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아!”유진은 진구를 보자 놀란 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어? 선배 왜 왔어요?”유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본 서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다물었다. 진구는 서인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한 손으로 우산을 높이 들어 유진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그리고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비가 올 것 같아서 걱정됐어. 운전기사가 제때 도착하지 못할까 봐 직접 데리러 왔어.”진구는 오는 길에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했지만, 차가 막혀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유진은 고개를 들어 진구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선배는 정말 빈틈이 없네요!”“이제 집에 가자.”진구는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에 걸쳐 주었고, 유진은 연하를 돌아보았다.“집까지 태워 줄게.”“괜찮아!”연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곧 효성이 차 가지고 올 거야. 우리 둘이 같은 방향이니까, 넌 먼저 가. 도착하면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 남길게.”“알겠어. 효성이랑 나 대신 인사해 줘. 나 먼저 갈게!”유진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진구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 휠체어를 밀며 그녀를 자신의 차로 데려갔다. 그는 일부러 공간이 넉넉한 SUV를 타고 왔다.조심스럽게 유진을 들어 올려 차에 태운 뒤, 문을 닫았다. 그제야 유진은 무언가 떠올랐다.유진은 고개를 돌려 서인을 바라보았고, 서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 너머로 그의 표정이 희미하게 보였고, 어깨 한쪽이 젖어 있었다.유진에게 우산을 씌워 주느라 비를 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유진이 서인을 바라본 것은 한순간이었다.진구는
유진은 병원에 있을 때 서인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깊게 파인 눈두덩과 덥수룩한 수염,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로 피폐한 기운이 가득했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남자는 크림색 캐주얼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면도를 한 상태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단단한 인상은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서인은 책을 내려서 유진에게 건네며 반쯤 무릎을 굽혀 마주 앉았고, 깊고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다리는 좀 어때?”유진은 공손하게 미소 지었다.“많이 좋아졌어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앞으로 반 달 정도면 걸을 수 있을 거래요.”서인은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할 시기야. 뼈가 아직 약하니까, 부상 조심해야 해.”“감사해요!”유진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삼촌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삼촌?’유진이 마침내 자신을 삼촌이라고 불렀으나 서인의 가슴 한편이 묘하게 저려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나도 책을 사러 왔어.”“정말 우연이네요!”희미하게 붉어진 노을이 책장 사이로 스며들어 유진의 옆얼굴을 감쌌다.살며시 흔들리는 눈동자는 맑고 생기 있었으며,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담담함과 거리감만 남아 있었다.유진은 반쯤 무릎을 굽혀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서인을 보며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와 친절한 태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유진은 책을 받아들며 말했다.“제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잘 가.”유진은 가볍게 웃었다.“안녕히 계세요, 삼촌!”유진은 휠체어를 조종해 몸을 돌렸고, 다시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가볍게 스쳐 지나간, 특별할 것 없는 우연한 만남처럼.서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유진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서인의 눈빛은 점점 더 깊고 어두워졌다. 마치 구름에 삼켜진 석양처럼,
우정숙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노정순은 도우미를 붙여 임유진을 돌보게 하려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은 탐탁지 않아 했다.“할머니, 저를 돌봐 줄 친구들도 있어요. 굳이 도우미까지 따라오면, 친구들이랑 편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요.”노정순은 손녀를 아끼는 마음에 그녀가 기분 나빠할까 걱정되었지만, 결국 장효성에게 유진을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다.효성과 친구들은 긴장한 듯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집을 나서자마자 효성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아까 너희 할머니가 나한테 말씀하실 때, 너무 긴장해서 혀가 꼬일 뻔했어.”그러자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할머니 엄청 온화하신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효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우, 넌 몰라. 그 분위기라는 게 있어. 아무 말 안 해도, 그냥 위엄이 철철 넘치는 그 느낌 말이야!”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데, 여진구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유진아, 어디 가는 거야?”그러자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친구들이랑 좀 돌아다니려고요.”효성이 슬쩍 친구에게 눈짓을 보내자, 진구는 곧바로 말했다.“나도 같이 가도 돼?”유진이 눈썹을 찌푸렸다.“친구들이랑 모임인데, 선배가 왜 따라와요?”진구는 그녀의 다리를 걱정하며 물었다.“다리는 괜찮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걸어 다니는 것도 아닌데요, 뭐.”이에 진구는 할 수 없이 물러났다.“몇 시에 돌아올 거야? 데리러 갈게.”“그걸 지금 내가 어떻게 알아요?”“그러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해.”“알았어요!”임씨 저택에서는 휠체어를 올릴 수 있도록 특별히 개조한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다.진구는 직접 휠체어를 밀어 그녀를 차에 태운 후, 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 효성이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사람 네 남자친구야? 완전히 잘생긴 데다가 다정하기까지 하네!”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친구야.
구은정이 갑작스럽게 회사로 돌아오자, 그룹 내에서는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안해하는 이들은 바로 외척인 서씨 집안이었다.한편, 구은서는 서선영을 원망하며 말했다.“엄마가 굳이 진수아를 구은정에게 소개해 줄 필요가 없었어요. 그게 결국 회사로 돌아오게 만든 거잖아요.”하지만 서선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태도로 담담하게 말했다.“구은정은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올 사람이야. 진수아가 아니었어도, 결국 돌아왔겠지.”은서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외삼촌께서 아직 완전히 회사를 장악한 것도 아니잖아요.”서선영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파우더를 두드리면서 비웃듯 말했다.“너희 아버지를 몰라? 왜 그렇게 외삼촌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해? 그건 결국 구은정을 돌아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구은태는 모든 걸 철저히 계산하고 있어. 너희 외삼촌들에게 맡긴 일들은 죄다 돈이 되는 자리야. 설령 실수하더라도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줬지.”“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대단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룹의 핵심 의사결정에는 단 한 번도 관여하지 못했어.”“구은태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구은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거야. 심지어 구은정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도 않을 거야.”“나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구은정만 돌아오면, 구은태도 경계를 늦출 테니까.”서선영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구은태가 철저한 전략가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구은태가 살아 있는 한, 서씨 집안은 그저 작은 이득을 취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구씨 그룹의 핵심 권한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은정은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었고, 타고난 기질이 자유분방했다. 오랫동안 밖에서 떠돌며 방탕하게 살아왔고, 배운 것도 없으며, 늘 무기력하고 한심한 태도를 보였다.은정이 회사를 맡는다는 것은, 곧 회사를 한심한 인물의 손에 맡기는 것이나 다
유진은 서인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도 참회할 수 없었고, 자기 잘못을 만회할 수도 없었다.소희는 서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함께 저려왔다.“유진이를 좋아한다면, 다시 찾아가서 붙잡아.”서인은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다시 여기로 오지 않을 거야.”소희는 단호하게 말했다.“여기로 오지 않는다면, 네가 직접 찾아가. 구은정의 신분으로 다시 그녀를 만나봐! 너희는 혈연관계도 아니잖아.”“족보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어. 네가 그녀를 좋아한다면, 도덕적인 문제도 없고, 다른 건 전부 중요하지 않아.”서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나보고 구은정으로 돌아가라는 거야?”소희의 시선이 깊어졌다.“그래. 정말로 구씨 가문을 서씨 집안 사람들에게 넘길 생각이야? 네 어머니가 생전에 쏟아부은 정성과 노력이 원수에게 돌아가도 괜찮아?”“네가 말했잖아. 임유진은 샤부샤부 가게의 사장이 될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구씨 집안의 안주인으로 만들어. 네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거야!”“유진이는 이미 충분히 노력했어. 이제 네가 노력할 차례야!”“내가 아는 서인은 혹독한 훈련 끝에 무적의 저격수가 된 사람이야.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할 정도였잖아.”“네가 가졌던 영광은 절망과 패배감 속에서 얻은 게 아니었어! 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잃어버린 것들은 전부 되찾을 수 있어!”서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나한테도 기회가 있을까?”그는 구씨 가문의 운명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상관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유진뿐이었다.“당연하지!”소희는 따뜻하면서도 힘이 실린 미소를 지었다.“서인은 유진을 잃었지만, 구은정은 그렇지 않아. 다시 사랑하게 만들어. 네가 유진에게 빚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돌려줄 기회를 가져!”“임구택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도 기쁨도 상대방이 전부라고. 네가 유진이에게 주는 행복이야말로 유진이 진정으로 원하는 거야!”“유진이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본 서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분위기는 한층 더 어두워졌고, 그 무엇도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듯한 무기력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소희는 가슴 한쪽이 시큰해져,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조용히 옮겼다.서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차갑고 고독했던 눈빛은 이제 빛을 잃어버린 채, 텅 비어 있었다.이윽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왜 왔어?”소희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너 보러 왔어.”서인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희에게 차를 따라주었다.“내가 뭐 볼 게 있다고. 여전한데.”소희는 서인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짜 네가 여전하다고 생각해?”서인은 찻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손가락이 살짝 떨리더니, 컵에 떨어지는 차가 잔 속에서 잔물결을 일으켰다. 그 투명한 소리는 고요한 오후에 묘하게 날카롭게 들려왔다.서인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이 더욱 피곤하고 초췌해 보였다.이윽고 서인은 조용히 물었다.“최근에 유진이를 봤어?”유진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서인의 눈빛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희미한 빛은 마치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듯, 다시 사라져 버렸다.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회복하고 있어. 오른손도 가벼운 물건은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고, 정신 상태도 아주 괜찮아.”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잘됐네.”서인의 목소리는 더욱 가벼워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나를, 기억해 냈어?”소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서인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입가를 살짝 비틀며, 마치 스스로를 조롱하듯이 중얼거렸다.“기억 못 해도 괜찮아.”소희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이게 원했던 거 아니야? 근데 왜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리는 거야?”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았지만, 막상 담배를 손에 쥐고 나서야,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그대로 담배
서인은 돌아왔지만,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지 않았다. 혼자 후원에 머물러 있었고, 도대체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임유진이 사고를 당한 이후, 서인은 점점 더 후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오현빈은 서인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걸려 했지만, 문득 이 순간만큼은 그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머뭇거리던 현빈은, 결국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서인은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 구은태는 의식을 되찾았고, 그는 직접 서인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와 회사를 맡으라고 말했다.병을 앓은 뒤라 기력이 쇠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절실하고 진심 어린 듯 들렸다.[은정아, 돌아와라. 예전의 일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네가 아무리 아빠를 미워해도, 네가 구씨 집안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이제 나는 더 이상 그룹을 이끌 힘이 없어. 그러니 네가 이 책임을 맡아야 해!]서인은 미소인지 냉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씨 사람들이 좋다면서요? 그럼 그룹도 구은서에게 넘기면 되겠네요. 그럼 그쪽도 더 이상 싸울 필요 없겠죠?”구은태는 숨을 한 번 거칠게 들이쉬었다.[은정아, 정말 나를 그토록 미워해서, 우리 집안 사업까지 함께 외면하려는 거냐? 하지만 잊지 마. 회사에는 네 어머니의 노력과 땀도 스며 있어.]서인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이제서야 그게 기억났나 보죠?”구은태는 목소리를 낮추며, 한층 더 간절한 톤으로 말했다.[난 네 어머니에게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반드시 회사를 네 손에 넘겨야 해.]그러나 서인은 비웃듯, 차갑게 내뱉었다.“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죠?”이에 구은태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서인은 아무런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구은태가 자신에게 설득당하지 않자, 어디선가 알아낸 정보를 이용해 소희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