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심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도 나를 노려보겠다고? 확 눈을 뽑아버릴라!”“아니!” 방설윤은 두려움에 빠져 고개를 숙였다. 아심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갑자기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막대기를 휘둘러 자기를 공격하려던 사람의 얼굴에 맞췄다. 이에 그 사람은 바로 이빨이 2개나 빠졌다. 생각보다 꼬여버린 상황에 그 뒤에 서 있던 다른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아심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심은 차분한 눈빛으로 몸을 날려 돌려차고, 막대기를 휘둘러 그들을 제압했다.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연습을 안 해서,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이자 점점 움직임이 느려졌다. 어깨에 한 방 맞자, 이를 악물며 공중에서 발차기를 날려 두 명을 쓰러뜨리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강시언의 발밑에는 이미 열 명 넘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임성현이 얼마나 큰 금액을 약속했는지 맞아도 도망가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듯 계속 달려들었다.아심과 달리, 시언의 싸움에는 어떤 변수도 없었고, 모든 공격이 정확히 급소를 향했고, 움직임은 빠르고 힘이 넘쳤다. 삼십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시언의 눈에 띈 아심이 시언을 향해 달려가자, 시언은 발로 몇 자루의 긴 칼을 차서 날려 보냈다. 날카로운 칼날이 휘몰아치며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 길을 내었다. 그리고 아심은 날카로운 칼날을 따라 시언을 향해 뛰어가며 말했다.“이길 수 없어!”아심은 달리며 소리쳤고, 곧바로 시언의 품에 안겼다. 시언은 한 팔로 아심을 안아 들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몸을 돌려 한 명의 가슴을 발로 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사람은 3미터나 날아가 다른 사람들과 부딪혔다.방 전체에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고, 오두막 지붕을 뚫고 숲 전체에 메아리쳤다. 이에 날아가는 새들까지 깜짝 놀라 날아올랐다.성현이 데려온 사람들은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고, 시언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들도 훈련된 타격대였지만, 숫자에 의존하지 않으면 눈앞의 남자에
임성현은 몸이 굳어졌고 강아심은 냉소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말할 차례야, 움직이지 마!”성현은 얼굴이 긴장된 채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어디서 총을 구했어?”“주었다고 하면 믿을래?” 아심은 차량에서 뛰어내리며, 성현의 손에서 총을 발로 차서 떨어뜨리고, 이마에 총을 겨누었다. “이제야 알겠어? 너는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어.”“너희가?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성현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난 네가 강시언을 과소평가했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이 뭐 어때서? 한 번 날 건드려봐!”“오빠도 너 때문에 더럽히지 말라고 했지만, 어떡하지, 난 네놈을 직접 처리하고 싶어!” 아심은 총을 성현의 머리에 겨누며, 천천히 내려가며 말했다. “여자를 괴롭히는 걸 좋아해?”성현은 반쯤 앉아 아심을 올려다보며,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뭐, 뭘 하려는 거야?”“너무 오만하면 결국 벌을 받게 되지!” 아심은 총을 장전하는 소리에 성현의 얼굴이 변하며,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강아심, 제발 무모한 짓 하지 마. 네가 날 다치게 하면, 난...”탕! 아심은 직접 총을 쐈고, 이번에는 매우 정확했다.“아아!”성현은 땅에 쓰러지며, 두 다리 사이에서 피가 터졌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고통보다 절망이 먼저 뇌리를 스쳤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심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지금의 고통을 잘 즐겨봐. 앞으로의 날들은 이보다 더할 테니까!”시언이 다가와 바닥에 뒹구는 성현을 한 번 쳐다보고, 자기 외투를 벗어 아심에게 입히며 말했다. “속이 시원해?”아심은 시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미소 지었다.“정말 시원해요!”그러고는 바닥에 쓰러진 타격대를 보며 말했다. “이제 갈까요?”“먼저 널 집에 데려다줄게.”“애서린을 찾아야 해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애서린은 목제 판자 뒤에 숨어있다가 아심이
차량의 전조등이 강아심이 들어가는 방향을 비추고 있었다. 아심이 건물로 들어가고, 불을 켜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강시언은 차를 돌려 떠났다....아심은 아파트에 돌아와 외투를 걸어두고, 샤워를 한 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베란다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가끔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책상 위의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아심은 전혀 불안하지 않았는데 시언이 곧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 아심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맨발로 달려 나가 현관에 있는 검은 셔츠를 입은 시언을 보자마자 그를 껴안았다. “추웠어요?”시언의 몸은 단단하고 차가웠지만, 아심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시언은 아심의 어깨에 멍이 든 것을 보고 눈빛이 깊어졌다. “다쳤어?”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아파요.”시언은 아심을 안고 소파로 데려가며 말했다. “약은 있어?”아심은 시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웃으며 말했다. “처음 훈련할 때 팔을 다쳐서, 오빠한테 약이 있는지 물어봤던 게 기억나요? 그때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해요?”시언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참고 고통을 기억해. 그래야 다음에 피할 수 있지.”아심은 시언의 말투를 흉내 내며 웃었다. “정말 무서웠거든요. 눈물이 바로 쏙 들어가고, 다시는 오빠 앞에서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거든요.”시언은 아심을 소파에 내려놓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다친 후에 약을 쓰기보다는, 스스로 상처를 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게 나아.”아심은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말은 평생 유용할 거예요.”결국 시언은 약을 찾아 아심에게 발라주었다. 그리고 아심을 안고 잠이 들었을 때, 아심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내 방에 약을 놓게 한 거 맞죠?”“썼어?”시언이 묻자 아심은 시언의 품에 파묻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요.”이미 다친 후에는, 약을 쓰든 안 쓰든 그저 심리
임성현은 놀라서 되물었다. “그게 강시언 때문이라고요? 그 사람이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그 사람은...]임철호는 말하려다 멈칫하더니 결국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들은 모르는 게 좋아. 날이 밝으면 삼촌과 함께 해외로 가라. 내가 돌아오라고 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난 가기 싫어요. 난 복수해야 한다고요!”[무슨 복수를 하겠다는 거야?] 임철호는 분노에 차 소리쳤고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며 말했다. [네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면, 우리 가문 전체가 함께 망할 거야. 네 할아버지와 나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알겠어?]성현은 멍하니 있었고 마침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곧 가야 해. 더는 너와 얘기할 수 없어. 모든 건 삼촌의 지시를 따르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그렇지 않으면, 나도 너를 보호할 수 없어.”전화를 끊은 후였지만, 성현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임철혁은 성현을 위로하려다가,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며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구속영장을 들고 있었다. “임성현, 당신은 불법 무기 소지, 납치, 강간, 불법 집행 및 뇌물 수수 등 여러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계속되는 청천벽력에 성현은 침대 위에서 떨어졌고 임철혁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임씨 가문의 힘이 소용없음을 깨달았고 이번에는 도망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한겨울의 한밤중에도 강성은 여전히 번화했지만, 번화한 겉모습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성현은 체포되었고, 회사는 밤새 감사되었다. 그리고 성현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증거와 증인들이 빠짐없이 발견되었다.서건호는 성현을 도와 여러 일을 했기에 밤사이에 경찰서로 끌려갔다. 방설윤 역시 같은 운명으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설윤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성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자 성현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설윤은 자신의 아버지
임철호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제가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여러모로 폐를 끼쳤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판결이 나든, 저는 절대로 아들을 위해 항소하거나 선처를 구하지 않겠습니다.]강시언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기회를 줬습니다.”[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임철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항상 바빠서 아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임성현의 성격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임성현의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지만, 당신들 내부에서 어떻게 처리할지는 제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당신이 추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배려입니다.][저는 성현의 아버지로서 성현의 행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위에서 어떻게 처리하든, 저는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또한, 앞으로 강성에서 절대로 누구도 강아심 양에게 손을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그럼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시언은 전화를 끊고, 발코니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침실로 돌아갔다. 시언이 눕자마자, 아심은 바로 품에 안겨 왔다. 시언은 아심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후 아심을 꼭 껴안았다....다음 날,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아심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매일 아침 메뉴는 달랐지만, 항상 맛과 품질이 뛰어났다. 밀키트도 오성급 호텔의 음식처럼 보였다. 식사 중에 시언이 말했다. “임성현의 일은 다 해결되었어.”아심은 시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으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이건 우리 둘의 일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 시언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아심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계속해서 수프를 마셨다.“그리고, 오늘은 회사에 함께 가지 않을 거야.”시언이 아심을 바라보며 말하자 아심은 수저를 깨물었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여기 며칠 있었으니, 할아버님이 분명 걱정하실 거예요. 빨리 할아버님을
강재석은 평온한 표정으로 도경수를 보며 말했다. “쟤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장기나 둬!”도경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좀 신경 써주면 안 돼? 너처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건 좀 그렇지 않나?”“이게 더 좋지 않나? 나는 걱정이 없고, 그들도 자유로워서 좋잖아!” 강재석은 무심하게 말하자 도경수는 냉소하며 말했다. “네가 예전에 소희를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임씨 집안에 시집가서 3년이나 소외당하지 않았을 거야!”“임씨 집안에 시집간 게 어때서? 그건 소희가 선견지명이 있는 거야!” 강재석은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 임씨 집안의 그 녀석도 소희의 손아귀에 있잖아.”두 사람은 장기를 두며 다투었지만, 말다툼하면서도 장기 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양재아는 입술을 깨물며 시언에게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들이 싸우는 게 참 볼만해요. 옆에서 듣고 있으면 정말 재미있어요!”시언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먼저 위로 올라갈게요.”시언이 올라가려고 하자 재아는 뒤따라가며 말했다. “오빠, 주방에서 만든 대추 꿀떡 먹어볼래요?”“아니, 괜찮아.” 시언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위층으로 걸어갔다. 재아는 계단을 붙잡고, 시언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이 슬프고 어두웠다. 시언이 강성에서 어떤 친구를 사귀었겠는가? 분명 강아심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아심은 정말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고, 모든 여자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재아 역시 아심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강씨 집안 같은 가문에서는 결혼할 때 반드시 가문을 따져야 했다. 소희가 임씨 집안에 시집간 것처럼 시언 역시 아심 같은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리가 없었다. 또한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강재석에게 데려왔을 것이다. 재아는 이렇게 정신 승리를 하자 다시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강재석은 운성에서 온 서류 한 묶음을 시언에게 건네며 말했다.“
며칠 동안 건강을 회복한 강솔은 이미 작업실로 복귀하여 일하고 있었다.[진석!]강솔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까 스승님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으시더라고.][아마도 강재석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 중이신 것 같아. 그러니 내가 못 들어간다고 전해줘.]진석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가면 어디 가는데?”그러자 강솔은 기쁘게 말했다. [주예형이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다고 해서, 같이 저녁 먹으러 갈 거야.]어둠이 깔리면서, 진석 또한 얼굴이 어두워졌고 진석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에 돌아오긴 할 거야?”[모르겠어. 영화표도 예매해 놔서, 저녁 먹고 나서 같이 영화 볼 거야. 너무 늦으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어!]“응.”진석은 전화를 끊고, 어두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갑자기 찬바람의 쓸쓸함을 느꼈다....강솔은 도씨 저택에 들어간 이후로 예형과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영상 통화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고, 오늘 예형이 드디어 시간을 내주었다. 그래서 강솔은 기쁜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영화표도 예매해 두고 데이트를 계획했다.저녁 7시에, 두 사람은 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만났다.“왜 이렇게 비싼 곳을 예약했어?”예형의 질문에 강솔은 예형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요즘 너무 고생했잖아. 제대로 영양보충 해주려고!”이에 예형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 둘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아!”“하지만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프거든.”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한 후, 예형이 물었다. “전에 너에게 소희에게 전화하라고 했던 거, 했어?”강솔은 레몬 물을 마시고 나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아.”생각 밖의 말에 예형은 찡그리며 물었다. “왜?”“소희는 임씨 그룹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까
식사 도중, 주예형의 전화가 울리자 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심서진이 보낸 메시지였다. 예형은 무의식적으로 강솔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야 의자에 기대어 메시지를 열었다.[사장님, 방금 작성한 계획서인데, 이 부분에 문제가 있나요?][이렇게 늦게까지 일해?][집에 가도 혼자 있을 바에야, 차라리 회사에 남아 선배를 위해 일하는 게 나아요!] 서진이 열심히 일하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냈다.[나 지금 밖에서 저녁 먹고 있어서 돌아가서 볼게.][데이트 중인가요? 그럼 강솔 언니랑 시간 잘 보내세요! 맞다, 아침 회의 때 보니 코가 좀 불편해 보이던데, 오늘 날씨가 추워요. 그러니 따뜻하게 입으세요.]문자를 본 예형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괜찮아졌어.][그러면 다행이에요. 더는 얘기하지 않을게요. 강솔 언니가 질투할 수도 있으니까요! 히히.][응. 돌아가서 계획서 본 뒤에 다시 연락할게. 집에 일찍 가.][알겠어요. 기다릴게요!]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는 예형에 강솔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누구야?”예형은 전화를 끄고 손가락을 움켜쥐며,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업무팀의 이혁이야. 팀을 이끌고 야근 중인데, 문제가 좀 생겨서...”곧이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영화는 같이 못 볼 것 같아.”갑작스러운 영화 캔슬에 강솔은 매우 실망하며 말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회사에 가야 해? 내일 해도 되지 않아?”“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내가 사장으로서 데이트를 즐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그럼 가. 영화는 다음에 보면 되니까, 회사 사람들이 너를 안 좋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강솔은 빠르게 체념하며 말했다. “조금 이따가 몇 가지 음식을 포장해서, 야근하는 사람들에게 야식을 보내줄게.”예형은 강솔을 바라보며 갑자기 죄책감을 느껴 얼른 마음을 바꾸고 강솔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강솔이 예형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사실 나도 오늘 피곤해. 식사 후 일찍 돌아가서 쉬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
소희는 어린 시절의 서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삼각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절,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그렇게 무기력하지도 않았고, 이처럼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때의 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그때의 서인이 임유진을 만났다면, 분명 그런 복잡한 집안과 신분 문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을 깊이 사랑하고, 망설임 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임무가 실패한 순간부터, 서인은 변했다.서인은 과거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빛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행복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모든 것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소희는 서인을 이해했기에 그래서 안타까웠다.서인은 말하는 것처럼 유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구택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어깨뼈를 감싸 쥔 채, 천천히 얼굴을 숙여 소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그만 생각해. 유진이는 서인을 잊을 거야. 그게 운명이야.”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쩌면, 어떤 일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유진이가 정말 영원히 서인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둘의 결말일 것이다.구택의 가운이 풀어지면서, 튼튼한 몸이 드러났다. 구택의 피부는 탄탄하고 섹시했으며, 몸을 숙여 소희의 어깨를 입맞출 때, 그의 손은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움직였다.소희는 구택의 손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기야, 아까는 씻고 나면 바로 잘 수 있다고 했잖아.”구택은 낮고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아직 열 시야.”“그렇지만 나 졸려.”구택은 소희가 요즘 바쁘고, 유진이 걱정으로 지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구택은 소희를 부드럽게 품에 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같이 자자.”소희는 구택의 품에 기대면서도, 머릿속이 서인과 유진이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구택의
수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당신을 좋아하긴 해요. 하지만 당신이 집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이 가게에서 살겠다는 거예요?”그러나 서인의 마음은 이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욱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그 문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없어요.”수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듯,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다시 생각해 봐요. 당신은 구씨 집안의 장남이야. 당연히 돌아가서 그룹을 이끌어야죠.”“이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 머물러서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난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서인은 수아를 바라보며, 불현듯 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앞으로 순수하게 좋아해 줄 유진이 같은 아이는 다시 못 만날 거야. 한 번 놓치면, 영영 없는 거야.”서인의 가슴이 죄어들 듯 아팠고,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수아 씨, 더 이상 여기 오지 마세요.”그 말과 함께 서인은 주저 없이 돌아서 걸어 나갔다. 수아는 서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화가 난 듯 핸드백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인은 구씨 집안으로 돌아가 왕처럼 살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이런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서 지내려 하는 걸까?수아가 꿈꿨던 재벌가 사모님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서인은 후원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장미 덩굴이 늘어서 있고, 계화나무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양이 집, 새로 바뀐 나무 테이블...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인의 마음을 찔러댔다.이곳의 모든 것이 유진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유진은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작은 고양이 애옹이는 불안한 듯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며 약한 울음소리를 냈다.야옹이조차도 초조한 듯,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서인은 묵묵히 의자
유진의 다리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기에, 침대에 누워 있거나 침대 머리를 높여 반쯤 기대는 상태로 있어야 했다.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린 뒤, 소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구은정 삼촌이 여기 와서 이상한 말을 많이 했어. 그리고 자기가 날 친 거라고 했어!”소희는 조용히 물었다.“아무런 기억도 안 나?”유진은 잠시 생각하려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는데, 고개를 저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소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기억이 안 나면 그냥 두는 게 좋겠어. 너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너무 애쓰지 마.”유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소희, 엄마도 갔고, 이제 우리 둘뿐이잖아!”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래서?”유진은 더욱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맛있는 거 좀 먹자!”그녀는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고, 치킨을 먹고 싶었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이에 소희도 웃으며 말했다.“좋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을 두 바퀴쯤 뛰어다닌 뒤, 소희에게 커다란 포옹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기에, 대신 눈빛으로 기쁨을 표현했다.소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의사에게 먼저 문의하여, 유진이가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확인한 뒤, 철저히 지시를 따르며 간식을 골랐다....유진의 머릿속에서 서인과 관련된 기억은 마치 흐릿한 공백이 된 듯했다. 그와 연관된 오현빈 같은 사람들조차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 유진은 침대 곁에서 말을 걸던 구은정 삼촌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고, 머리도 아팠다.그래서 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한편, 서인은 샤부샤부 가게로 돌아왔는데, 마침 진수아도 와 있었다.수아는 자리에서 일
유진은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눈앞에 서인이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고, 이내 놀란 기색과 함께 경계심이 스며들었다.서인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 밑과 덥수룩한 수염, 깊고 어두운 시선으로 인해 영락없이 위협적인 인상으로 보였다.“구은정, 삼촌?”유진은 낮게 중얼거리며 본능적으로 거실 쪽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정숙이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왜 낯선 이상한 아저씨가 자신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걸까?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깊은 상처를 숨긴 채, 갈라진 목소리로 묻듯이 말했다.“너, 정말 날 잊었어?”유진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기억하는데요. 어릴 때 한 번 본 적 있어요.”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는 꽤 많이 달랐지만, 그의 깊고도 아픈 시선 속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녹아 있었다.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낯설고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잊어버린 게 차라리 잘된 거야.”서인은 시선을 떨구며, 굳게 다문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알아서는 안 됐어.”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고, 목소리는 더욱 잠겨 있었다.“유진아, 미안해.”유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문득 놀란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설마, 삼촌이 날 친 건 아니죠?”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아프고 쓸쓸했다.“내가 직접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와 관련이 있어.”유진은 아, 하고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이상했다. 이에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삼촌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믿어요. 난 괜찮아요
“전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이미 회복됐어. 의사도 유진이가 잘 회복했다고 했고!”소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우리, 의사에게 한번 물어보자!”두 사람은 임유진의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이런 사례가 있긴 해요. 환자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스트레스 반응이죠.”“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뇌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기억을 지워버리고요.”“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리적 장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죠.”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그럼, 다시 기억할 수 있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었다.“확신할 수 없어요.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고, 영영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고요.”서인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충격과 당혹감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유진이가 나를 잊었다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깊숙이 퍼져나가며 그의 심장을 온통 뒤덮었다.유진이는 중상을 입고 깨어난 후 모든 사람을 기억했으며, 심지어 구은태도 알아봤다. 그런데, 유독 서인만 잊어버렸다.이윽고 갑자기 그날 밤을 떠올렸다. 유진이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울기만 했던 그녀.그 슬프고 억눌린 흐느낌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다. 유진이는 언제나 서인을 향해 밝고 용감하게 다가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응답을 주지 않았다. 늘 차갑게 대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서인이 유진에게 준 건 오직 고통뿐이었고, 그랬기에 유진은 결국 그를 잊어버렸다.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자기 삶에서 서인을 내쫓아 버린 것이다.서인은 늘 유진이가 자신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지만, 정말 그렇게 되니, 왜 이토록 허망하고 아플까?소희는 불안에 휩싸인 서인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의사가 다시 기억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그러나 소희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여진구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저 멍한 눈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더욱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무슨 일을 엄마한테 말했다는 거예요?”진구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떠봤다.“서인, 너 정말 모르는 사람이야?”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모르는 사람이에요.”그 대답에 진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아, 내가 착각했네. 내 친구인데, 네가 본 적 없는 사람이야.”그러나 유진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고, 그녀는 다시 진구를 추궁했다.“그런데 아까는 나와 그 사람 얘기를 엄마한테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데요?”이에 진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급히 변명을 지어냈다.“아, 그게 그 친구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해서 이모께 한번 여쭤봤던 거지.”“아직 너한테 얘기하기도 전에 그냥 조언을 구한 거야.”유진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런 거였어요? 일하는 문제인데 우리 엄마한테 왜 물어보려고 했어요?선배 친구라면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요.”진구는 유진의 얼굴에서 조금의 위화감도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은 정말로 서인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표정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진구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밀려왔지만, 그것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별말 없이 다 깎은 사과를 유진에게 건네주며 화제를 돌렸다.진구는 이 사실을 우정숙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임씨 집안 사람들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그날 아침, 구은태가 오랜만에 유진을 병문안 가고 싶다고 했다. 이제 유진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니 병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임구택은 바로 간병인을 시켜 의사를 호출했다.“유진아, 유진아!”우정숙이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유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유진의 눈동자는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그리고 눈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꼭 잡았는데,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할머니 여기 있어. 우리 모두 네 곁에 있어. 어때? 어디 많이 아프니?”하지만,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듯 주변을 둘러봤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팔과 다리는 이미 고정된 상태였다.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고통에 겨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그 모습에 모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괜찮아. 괜찮아, 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랬다.곧, 의사가 도착했고, 그는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뇌 손상의 영향이고, 환자는 지금 막 깨어난 상태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조용히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우정숙은 다급히 물었다.“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되나요?”의사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예측하기 어려워요.”그 대답에 모두의 가슴이 무거워졌다.유진은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의사는 그 모습을 보며 긍정적으로 말했다.“환자는 지금 극도로 쇠약한 상태라, 수면을 통해 회복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이건 오히려 좋은 신호예요.”유진이 다시 잠에 든 후 소희는 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이가 깨어났어.”그러고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진의 몸이 너무 약하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전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서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부탁할게. 잘 돌봐 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줘.”“알겠어.”서인이 돌아가고, 소희의 마음도 마치 우중충한 날씨처럼 무겁
어둑한 조명이 드리운 긴 벤치에 서인이 앉아 있었다. 서늘하고 적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서인의 앞에 멈춰 섰는데, 임유민이었다. 유민은 미간을 좁히고 냉정하게 말했다.“이제 가세요.”서인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난 유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그러자 유민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 눈빛으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전 삼촌을 원망하지 않아요. 누나가 삼촌을 혼자 좋아한 거, 그건 우리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누나와의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하세요.”“이제 누나는 삼촌을 찾지 않을 거니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마세요.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다시 찾아오지도 마세요.”유민의 말은 칼날처럼 서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머리가 더 깊이 숙여졌고, 눈동자는 공허했다.유민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등을 돌려 병실로 돌아갔다.새벽녘이 되자, 임지언이 병원에 도착했다. 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그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임지언은 병실로 향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유진이는? 상태가 어때?”상황을 전해 들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깊게 숨을 내쉬었다.임지언은 곧장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없이 애틋한 눈빛을 드리웠다.그러고는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아, 아빠가 너를 잘 지켜주지 못했구나. 그러니까, 제발 어서 일어나거라.”우정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라 참을 새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날 밤, 임지언과 우정숙은 잠도 자지 않고 유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밤에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서인은 그 비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서인은 온몸이 흠뻑 젖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해가 떠오를 무렵 소희가 서인을 찾았다. 소희는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