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석에 앉은 강아심은 목도리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지만, 벗지는 않았다. 길을 가며 아심은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라, 강시언에게 묻기 시작했고 시언은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이에 아심은 놀란 표정으로 시언을 바라보며 물었다.“집중 안 했죠?”시언은 담담하게 되물었다.“뭐라고?”아심은 시언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나랑 키스할 때, 집중 안 했죠?”두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왜 아심은 모르는 장면을 시언이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자 시언은 아심을 힐끔 보며 말했다.“밀크티도 취하게 할 수 있나?”아심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새벽의 강성을 바라보며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자마자 아심이 시언을 뒤에서 꽉 끌어안았고 시언은 바로 뒤돌아 아심을 벽으로 밀어붙이며 뜨거운 키스를 하였다. 아심은 시언의 쇄골을 키스하며 손을 셔츠 안으로 넣고는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밤도 목욕시켜 줘요.”아심은 시언을 애교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때요?”시언은 숨이 거칠어지며 오늘의 아심이 특별히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열일곱 살 이전의 장난꾸러기 소녀로 돌아간 듯, 장난치고 애교를 부리는 진짜 소녀 같았다. 그러고는 아심을 안고 침실로 걸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목욕만?”아심은 고개를 들어 머리를 올리고 있던 핀을 풀자, 곱슬머리가 흘러내리며 더 나른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심은 시언의 어깨를 끌어안고 귀에 속삭였다.“하루 종일 내 곁에 있어 준 대가로 보답해 줄게요.”아심의 말에 시언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셔츠 단추를 풀며 안전하지만 사뭇 빠른 걸음으로 안에 들어갔다....다음 날 아침, 해가 막 떠오를 때 아심은 일찍 일어났고 반쯤 감긴 눈으로 잠든 시언을 바라보았다. 시언의 시원시원한 눈썹, 콧대, 얇은 입술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머리에 새겼다. 한참을 바라본 후 아심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시언을 깨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윽
아심은 강재석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긴장한 탓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가락 끝이 저려왔다. 아심은 강재석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소문에는 성격이 못되고 차갑다고 했지만, 전화 목소리는 정말 다정했다.아심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강재석의 말이 아직도 여운에 남았다. 자기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전해달라는 그 말에 아심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얼굴을 닦고 돌아섰다. 아침을 준비한 아심은 침실로 돌아가자 시언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에 아심이 다가가 셔츠 단추를 채워주며 말했다.“미안해요, 아까 당신 전화를 잘못 받았어요. 당신 할아버지한테서 전화 왔어요.”아심의 말에 시언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할아버지?”“네.”시언은 침착하게 말했다.“알겠어. 잠시 후에 전화할게.”“그러면 먼저 전화하세요.” 아심은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식탁에서 기다릴게요.”“응.”시언은 휴대폰을 꺼내 통화 기록을 확인했는데 아심과 강재석이 약 2분 정도 통화한 기록이 있었다.‘뭘 말했을까?’시언은 깊은 생각에 잠기며 전화를 걸었다. 한 네 번 정도 울리자 전화가 연결되었고, 강재석의 기운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 깨어났구나!]이에 시언은 이마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여기 좀 일이 있어서, 며칠 후에 갈게요. 도경수 할아버지께도 대신 말씀해 주세요.”[내가 방해한 거 아니냐?]강재석이 웃으며 묻자 시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에요.”[그 아가씨는 매우 예의가 바르고, 너를 아주 신경 쓰는 것 같더라. 착한 아이 같아.]시언은 창가에 서서 그런지 밝은 햇살에 차가운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착하다고? 계단만 있으면 지붕까지 올라가겠다고 하는 말괄량이인데!’하지만 시언은 담담하게 말했다.“일이 좀 있어서, 며칠 동안 함께 있을 거예요.”[물론이지, 두 달이라도 괜찮다.]강재석이 매우 기뻐하자 시언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 아가씨가
“이거?” 시언은 185cm 이상의 키로 쉽게 손을 들어 찬장을 열고 말한 대로 후추를 꺼내서 건넸다.“고마워요!” 아심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구멍 뚫린 스푼도 좀 꺼내줘요.”‘구멍 뚫린 스푼?’시언은 여러 종류의 스푼을 보고 아심이 설명한 대로 구멍 뚫린 스푼을 꺼내서 건네자 아심이 밝게 웃으며 칭찬했다.“와우, 정말 대단한데요? 제대로 골랐어요!”이에 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생활 상식이 없다고 생각해?”아심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나요?”시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반박하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것이 시언에게는 매우 낯설었다. 시언은 한때 이런 일상적인 생활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속에 있으니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아침에 일어나서 누군가와 함께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함께 먹고, 함께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지루하고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주방에서 나는 진한 음식 냄새와 여자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어우러졌다. 그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향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아심이 요리하는 모습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심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기질과 주방의 음식 냄새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아심은 불을 끄고 웃으며 부드럽게 말하며 국을 담아 시언에게 건넸다. “이건 당신 거예요.”시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국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심은 삶은 달걀과 샌드위치를 준비했는데, 모두가 예쁘게 플레이팅되어 있어 자신처럼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국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아심은 물었다. “제가 받은 전화가 당신에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죠?”“문제없어.”시언이 괜찮다고 하자 아심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행이네요!”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도 저의 보디가드 해줄 거예요?”“응.”무심한 듯
“점심으로 뭐 먹을래요?” 아심의 피부는 옥처럼 부드럽고, 약간의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으며, 핑크빛 입술은 탐스러워 보였다. 강시언도 사람인지라, 아심의 손을 잡아 무릎에 앉히고 입술을 잠깐 탐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가리는 게 없어. 네가 고르면 돼.”아심은 눈빛이 약간 흐려지며, 촉촉해진 입술이 더욱 부드럽게 보였다. 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몸을 기댔는데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몸이 시언의 품에 안긴 모습이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아심은 시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가리는 게 없다고 했지만, 싫어하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아.’아심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웃으며 말했다. “해산물 먹어요. 해산물을 정말 잘하는 가게가 있어요.”“응, 네가 정해.”아심이 선택한 장소는 셸은 이었고 내비게이션을 켜자 시언은 차를 몰았다. 음식을 주문할 때, 아심은 와인 한 병을 주문하자 시언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오후에 일 안 해?”“네, 오후에는 떙땡이 치고 쇼핑 갈 거거든요.”“쇼핑?”“그럼요, 사장이 된 이후로 한 번도 보디가드를 데리고 쇼핑할 생각을 못 했거든요. 이제 보디가드가 생겼으니 이 기회를 당연히 잘 활용해야죠.” 아심은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이 기회에 써먹을 수 있는 가치는 쥐어짜 내서라도 써먹어야죠.”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심에 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시고는 은근히 즐기는 듯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심이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러 간 사이, 직원이 과일을 가져왔고, 시언은 그사이에 계산했다. 와인이 비싸서 1400만 원이 넘었지만, 아심은 반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이 시언의 의견을 묻더니 와인을 킵해 두기로 했다. 아심이 돌아와서 계산하려고 보니 시언이 이미 계산을 마쳤다고 하자 눈살을 찌푸리며 시언을 바라보았다. “왜 나 안 기다렸어요?”그러자 시언은 담담하게 아심을 보며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아심은 와인을 조
아심은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괜찮네요.”직원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분이 고객님의 남자친구인가요? 저희 매장에는 이 코트와 같은 디자인의 남성용도 있어요. 컬러가 블랙인데, 남자친구분을 위해 한번 보실래요?”“커플룩인가요?”“네, 맞습니다.”“그럼 한 벌 가져와 주세요.” 아심은 사이즈를 알려주며 말했다. “먼저 볼게요!”이에 직원은 바로 같은 디자인의 코트를 가져왔고 아심은 슥 한번 보고는 말했다.“두 벌 다 포장해 주세요.”“고가의 맞춤형 제품이라 교환이 안 되는데, 남자친구분이 입어보시는 게 어떠세요?”하지만 아심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입어보지 않아도 돼요.”시언의 옷 사이즈는 아심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알겠습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이 커플을 부러워하며 말했다.한편, 시언은 잡지를 보다가 휴대폰이 진동하자 메시지를 하나 답장했다. 그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시언?”시언은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방설윤이 다가오며 꽤 그윽한 시선으로 시언을 바라보았다. “정말 너구나!”시언은 일어서며 말했다. “오랜만이야.”설윤은 순간 눈을 떼지 못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별로 변하지 않았네!”변했을지도 몰랐는데 시언의 이목구비는 여전히 선명하고, 차가운 기질은 예전보다 더 강해졌다.“너도 그래.” 시언이 담담하게 말하자 설윤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며칠 전 강훈석이 네가 강성에 왔다고 전화했어. 다 같이 모이자고 했는데, 내가 출장 중이어서 못 갔어.”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제대 후에는 연락이 없었는데,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해외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어.”설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또 해외로 나갈 거야?”시언이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 만났어요?”설윤은 시언의 뒤를 바라보며 아주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아심은 아주 젊고 순백색 양털 코
강훈석은 약간 놀랐다.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났어?]“우연히 만났어!” 방설윤은 조소하며 말했다. “강아심이랑 함께 있더라고.”훈석은 설윤의 어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 [너 아심 씨를 알아?]“우리 아빠 회사가 그 사람의 회사와 한 번 협력한 적이 있어서 이름을 들어본 적 있어. 역시 소문대로 아주 예쁘더라.”훈석은 설윤의 어조에서 약간의 질투를 느꼈는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아직도 시언이 형을 못 잊은 거 아니야?]“못 잊고 못 잊고가 뭐가 중요해. 날 좋아하지 않잖아. 그냥 웃긴 건 천하의 강시언이 어떻게 살았길래 여자가 옷을 다 사줘? 정말 웃겨!”[네가 오해한 거겠지. 시언이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형이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왜 반말해?]“미안한데 나는 예전부터 나는 반말했어. 그리고 그동안 못 봤으니까, 사람이 달라졌을 수도 있어!”설윤은 냉랭하게 말했다. “나 바빠서 끊을게.”[그래, 시간 나면 같이 보자.] 훈석은 예의상 말했다.“그러면 그때 보자.”설윤은 전화를 끊고는 다시 시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쥔 손을 꽉 쥐었는데 갑자기 아주 큰 불만이 생겼다.그날 밤.시언은 샤워를 마치고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설윤의 전화를 받았다. 설윤은 굉장히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너를 봐서 정말 놀랐어. 우리 이번 생에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거든.]시언의 눈빛은 호수처럼 깊었고, 냉담하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좁으니까, 만나는 게 이상하지 않지.”설윤은 웃으며 옛 친구와 대화하듯 말했다. “나 아직 결혼 안 했어. 남자친구 몇 명 사귀었지만 다 맞지 않아서 결국 끝났어. 너는?]“없어.”이에 설윤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똑같네. 구속되기 싫어하는 거지.]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설윤이 계속해서 말했다. [너 어디야? 나와서 한잔하자. 내가 살게.]“괜찮아.”그 순간, 아심이 다가와 뒤에서 시언을 안았다. 아심은 얇은 실크 잠옷을
아심은 시언을 끌어안고 발끝을 들어 응답하자 시언은 바로 아심을 들어 올려 침대로 향했다. 안방에 도착하자 아심을 침대에 내려놓고 몸을 굽혀 입 맞추며 물었다.“아까 나 뭐라고 불렀어?”아심은 눈에 봄빛을 담고 요염하게 시언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부를 수 있는데, 나는 안 돼요?”시언이 대답하기 전에 아심은 고개를 들고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싫으면, 앞으로 안 부를게요.”“싫어!” 시언은 입맞춤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호칭은 부르지 마. 그냥 앞에 글자를 빼고 불러 봐.”아심은 눈을 굴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빠.”“응.” 시언은 낮고 쉰 목소리로 대답하며 더 강하게 입 맞추었고 아심은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을 느끼며 더욱 열정적으로 응답했다....한편, 방설윤은 전화가 끊긴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얼굴이 어두워지고 분노가 치밀었다.‘한낱 별 볼 것 없는 여자가 내 남자를 뺏으려 하다니!’과거에 설윤은 시언에 첫눈에 반해 시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전 부대에 알려졌었다. 설윤은 시언의 숙소까지 찾아가면서 쫓아다녔지만, 시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설윤은 송년회에서 시언에게 고백했지만, 시언은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고 돌아서서 떠났다. 그때 설윤은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했고, 홧김에 임성현과 사귀기로 결정했다.이후 성현이 전역하고 설윤은 성현은 함께 강성으로 돌아왔지만, 성현이 여러 여자와 문어 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두 사람은 크게 싸운 끝에 헤어졌다. 그 이후로 설윤은 몇몇 남자 친구를 사귀었지만, 모두 무의미하게 끝났다.며칠 전 강훈석이 전화를 걸어 시언이 강성에 왔다고 했을 때, 시언의 이름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후 설윤은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계속 흔들렸다. 그래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서둘러 돌아왔고, 마침내 시언을 만나게 되었다.시언을 본 순간, 설윤은 왜 이 몇 년 동안 어떤 남자도 마음
다음 날.강아심과 강시언이 함께 점심을 먹고 돌아와 차에서 내리자, 다섯 명에서 여섯 명의 남자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며 아심을 불쾌하게 쳐다봤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한 남자가 아심의 다리를 만지려 했다.이에 아심은 남자의 손을 쳐내며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로 한 대 때렸다. 맞은 남자는 한 걸음 물러나 아심을 노려보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잡아!”하지만 시언은 아심을 뒤로 잡아당기며, 다가오는 남자의 팔을 잡아 태양혈에 주먹을 날렸다. 이에 남자는 바로 정신을 잃고 뒤로 물러나 넘어졌다. 시언의 움직임은 번개처럼 빠르고 강력해서 상대방이 제대로 볼 틈도 없었다. 상대방의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함께 달려들었다. 시언은 한 손으로 아심을 잡고도 다섯 명을 여유롭게 상대했고 아심은 시언의 뒤에서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저 가끔 한 대씩 때렸는데, 시언처럼 날카롭고 강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하고 힘이 있었다.한동안 고통스러운 비명이 주차장 전체에 울려 퍼졌고,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곧 여섯 명 모두 바닥에 쓰러졌고, 그중 한 명은 차 뒤로 굴러떨어지면서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자기 다리에 찔렀다. 다리에 찌르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단호하게 자기 복부에도 한 번 더 찔렀다.피가 빠르게 흘러나왔고, 남자는 고통을 참으며 밖으로 기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주차장의 입구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시언과 아심은 눈을 마주치며 서로 차가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시언은 아심의 손을 놓고 차 문을 열며 말했다.“안에서 앉아 있어. 내가 말할 때까지 나오지 마.”아심은 시언의 말에 그저 시언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가, 말 잘 들어.” 시언은 아심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타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시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경찰차가 도착하자, 시언에게 맞은 사람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린 경찰에게 달려갔다.“살인 사건이 발생했어요!”“누군가가 사람을 죽였어요!”“도와주세요!”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
소희는 어린 시절의 서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삼각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절,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그렇게 무기력하지도 않았고, 이처럼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때의 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그때의 서인이 임유진을 만났다면, 분명 그런 복잡한 집안과 신분 문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을 깊이 사랑하고, 망설임 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임무가 실패한 순간부터, 서인은 변했다.서인은 과거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빛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행복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모든 것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소희는 서인을 이해했기에 그래서 안타까웠다.서인은 말하는 것처럼 유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구택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어깨뼈를 감싸 쥔 채, 천천히 얼굴을 숙여 소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그만 생각해. 유진이는 서인을 잊을 거야. 그게 운명이야.”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쩌면, 어떤 일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유진이가 정말 영원히 서인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둘의 결말일 것이다.구택의 가운이 풀어지면서, 튼튼한 몸이 드러났다. 구택의 피부는 탄탄하고 섹시했으며, 몸을 숙여 소희의 어깨를 입맞출 때, 그의 손은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움직였다.소희는 구택의 손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기야, 아까는 씻고 나면 바로 잘 수 있다고 했잖아.”구택은 낮고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아직 열 시야.”“그렇지만 나 졸려.”구택은 소희가 요즘 바쁘고, 유진이 걱정으로 지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구택은 소희를 부드럽게 품에 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같이 자자.”소희는 구택의 품에 기대면서도, 머릿속이 서인과 유진이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구택의
수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당신을 좋아하긴 해요. 하지만 당신이 집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이 가게에서 살겠다는 거예요?”그러나 서인의 마음은 이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욱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그 문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없어요.”수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듯,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다시 생각해 봐요. 당신은 구씨 집안의 장남이야. 당연히 돌아가서 그룹을 이끌어야죠.”“이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 머물러서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난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서인은 수아를 바라보며, 불현듯 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앞으로 순수하게 좋아해 줄 유진이 같은 아이는 다시 못 만날 거야. 한 번 놓치면, 영영 없는 거야.”서인의 가슴이 죄어들 듯 아팠고,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수아 씨, 더 이상 여기 오지 마세요.”그 말과 함께 서인은 주저 없이 돌아서 걸어 나갔다. 수아는 서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화가 난 듯 핸드백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인은 구씨 집안으로 돌아가 왕처럼 살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이런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서 지내려 하는 걸까?수아가 꿈꿨던 재벌가 사모님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서인은 후원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장미 덩굴이 늘어서 있고, 계화나무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양이 집, 새로 바뀐 나무 테이블...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인의 마음을 찔러댔다.이곳의 모든 것이 유진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유진은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작은 고양이 애옹이는 불안한 듯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며 약한 울음소리를 냈다.야옹이조차도 초조한 듯,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서인은 묵묵히 의자
유진의 다리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기에, 침대에 누워 있거나 침대 머리를 높여 반쯤 기대는 상태로 있어야 했다.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린 뒤, 소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구은정 삼촌이 여기 와서 이상한 말을 많이 했어. 그리고 자기가 날 친 거라고 했어!”소희는 조용히 물었다.“아무런 기억도 안 나?”유진은 잠시 생각하려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는데, 고개를 저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소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기억이 안 나면 그냥 두는 게 좋겠어. 너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너무 애쓰지 마.”유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소희, 엄마도 갔고, 이제 우리 둘뿐이잖아!”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래서?”유진은 더욱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맛있는 거 좀 먹자!”그녀는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고, 치킨을 먹고 싶었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이에 소희도 웃으며 말했다.“좋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을 두 바퀴쯤 뛰어다닌 뒤, 소희에게 커다란 포옹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기에, 대신 눈빛으로 기쁨을 표현했다.소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의사에게 먼저 문의하여, 유진이가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확인한 뒤, 철저히 지시를 따르며 간식을 골랐다....유진의 머릿속에서 서인과 관련된 기억은 마치 흐릿한 공백이 된 듯했다. 그와 연관된 오현빈 같은 사람들조차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 유진은 침대 곁에서 말을 걸던 구은정 삼촌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고, 머리도 아팠다.그래서 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한편, 서인은 샤부샤부 가게로 돌아왔는데, 마침 진수아도 와 있었다.수아는 자리에서 일
유진은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눈앞에 서인이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고, 이내 놀란 기색과 함께 경계심이 스며들었다.서인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 밑과 덥수룩한 수염, 깊고 어두운 시선으로 인해 영락없이 위협적인 인상으로 보였다.“구은정, 삼촌?”유진은 낮게 중얼거리며 본능적으로 거실 쪽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정숙이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왜 낯선 이상한 아저씨가 자신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걸까?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깊은 상처를 숨긴 채, 갈라진 목소리로 묻듯이 말했다.“너, 정말 날 잊었어?”유진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기억하는데요. 어릴 때 한 번 본 적 있어요.”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는 꽤 많이 달랐지만, 그의 깊고도 아픈 시선 속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녹아 있었다.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낯설고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잊어버린 게 차라리 잘된 거야.”서인은 시선을 떨구며, 굳게 다문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알아서는 안 됐어.”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고, 목소리는 더욱 잠겨 있었다.“유진아, 미안해.”유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문득 놀란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설마, 삼촌이 날 친 건 아니죠?”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아프고 쓸쓸했다.“내가 직접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와 관련이 있어.”유진은 아, 하고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이상했다. 이에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삼촌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믿어요. 난 괜찮아요
“전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이미 회복됐어. 의사도 유진이가 잘 회복했다고 했고!”소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우리, 의사에게 한번 물어보자!”두 사람은 임유진의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이런 사례가 있긴 해요. 환자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스트레스 반응이죠.”“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뇌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기억을 지워버리고요.”“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리적 장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죠.”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그럼, 다시 기억할 수 있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었다.“확신할 수 없어요.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고, 영영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고요.”서인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충격과 당혹감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유진이가 나를 잊었다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깊숙이 퍼져나가며 그의 심장을 온통 뒤덮었다.유진이는 중상을 입고 깨어난 후 모든 사람을 기억했으며, 심지어 구은태도 알아봤다. 그런데, 유독 서인만 잊어버렸다.이윽고 갑자기 그날 밤을 떠올렸다. 유진이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울기만 했던 그녀.그 슬프고 억눌린 흐느낌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다. 유진이는 언제나 서인을 향해 밝고 용감하게 다가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응답을 주지 않았다. 늘 차갑게 대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서인이 유진에게 준 건 오직 고통뿐이었고, 그랬기에 유진은 결국 그를 잊어버렸다.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자기 삶에서 서인을 내쫓아 버린 것이다.서인은 늘 유진이가 자신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지만, 정말 그렇게 되니, 왜 이토록 허망하고 아플까?소희는 불안에 휩싸인 서인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의사가 다시 기억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그러나 소희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여진구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저 멍한 눈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더욱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무슨 일을 엄마한테 말했다는 거예요?”진구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떠봤다.“서인, 너 정말 모르는 사람이야?”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모르는 사람이에요.”그 대답에 진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아, 내가 착각했네. 내 친구인데, 네가 본 적 없는 사람이야.”그러나 유진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고, 그녀는 다시 진구를 추궁했다.“그런데 아까는 나와 그 사람 얘기를 엄마한테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데요?”이에 진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급히 변명을 지어냈다.“아, 그게 그 친구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해서 이모께 한번 여쭤봤던 거지.”“아직 너한테 얘기하기도 전에 그냥 조언을 구한 거야.”유진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런 거였어요? 일하는 문제인데 우리 엄마한테 왜 물어보려고 했어요?선배 친구라면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요.”진구는 유진의 얼굴에서 조금의 위화감도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은 정말로 서인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표정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진구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밀려왔지만, 그것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별말 없이 다 깎은 사과를 유진에게 건네주며 화제를 돌렸다.진구는 이 사실을 우정숙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임씨 집안 사람들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그날 아침, 구은태가 오랜만에 유진을 병문안 가고 싶다고 했다. 이제 유진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니 병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임구택은 바로 간병인을 시켜 의사를 호출했다.“유진아, 유진아!”우정숙이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유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유진의 눈동자는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그리고 눈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꼭 잡았는데,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할머니 여기 있어. 우리 모두 네 곁에 있어. 어때? 어디 많이 아프니?”하지만,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듯 주변을 둘러봤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팔과 다리는 이미 고정된 상태였다.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고통에 겨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그 모습에 모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괜찮아. 괜찮아, 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랬다.곧, 의사가 도착했고, 그는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뇌 손상의 영향이고, 환자는 지금 막 깨어난 상태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조용히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우정숙은 다급히 물었다.“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되나요?”의사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예측하기 어려워요.”그 대답에 모두의 가슴이 무거워졌다.유진은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의사는 그 모습을 보며 긍정적으로 말했다.“환자는 지금 극도로 쇠약한 상태라, 수면을 통해 회복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이건 오히려 좋은 신호예요.”유진이 다시 잠에 든 후 소희는 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이가 깨어났어.”그러고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진의 몸이 너무 약하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전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서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부탁할게. 잘 돌봐 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줘.”“알겠어.”서인이 돌아가고, 소희의 마음도 마치 우중충한 날씨처럼 무겁
어둑한 조명이 드리운 긴 벤치에 서인이 앉아 있었다. 서늘하고 적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서인의 앞에 멈춰 섰는데, 임유민이었다. 유민은 미간을 좁히고 냉정하게 말했다.“이제 가세요.”서인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난 유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그러자 유민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 눈빛으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전 삼촌을 원망하지 않아요. 누나가 삼촌을 혼자 좋아한 거, 그건 우리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누나와의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하세요.”“이제 누나는 삼촌을 찾지 않을 거니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마세요.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다시 찾아오지도 마세요.”유민의 말은 칼날처럼 서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머리가 더 깊이 숙여졌고, 눈동자는 공허했다.유민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등을 돌려 병실로 돌아갔다.새벽녘이 되자, 임지언이 병원에 도착했다. 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그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임지언은 병실로 향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유진이는? 상태가 어때?”상황을 전해 들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깊게 숨을 내쉬었다.임지언은 곧장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없이 애틋한 눈빛을 드리웠다.그러고는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아, 아빠가 너를 잘 지켜주지 못했구나. 그러니까, 제발 어서 일어나거라.”우정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라 참을 새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날 밤, 임지언과 우정숙은 잠도 자지 않고 유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밤에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서인은 그 비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서인은 온몸이 흠뻑 젖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해가 떠오를 무렵 소희가 서인을 찾았다. 소희는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