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우청아는 택시를 타고 어정에 도착했다. 단지에 들어서며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니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때 청아는 이곳에 살았고, 소희와 구택은 윗층에 살며, 시원은 자주 이곳을 방문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대화하고, 술도 마시고, 카드 게임도 즐겼다.해외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마다, 청아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졌고, 어려움 속에서도 힘을 얻었다.청아는 시원을 만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고, 그곳에서의 추억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겼다. 30층에 도착해 문 앞에 멈춰서자, 그 기억들은 더욱 생생해졌다. 마치 문을 열면 그들이 모두 발코니 소파에 앉아 서로를 놀리며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청아는 이전의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살짝 열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밀번호가 3년 전과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청아는 현관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집 안의 모든 가구 배치는 청아가 떠날 때와 똑같았고,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청아가 좋아하던 테이블보까지.저녁 햇살이 넓은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방 안에 옅은 빛을 뿌리자, 순간적으로 몇 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시원은 아직 오지 않았고, 청아는 거실에 앉아 잠시 후 자신이 예전에 살던 방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수십 개의 레고 성이 눈에 들어왔고, 청아는 순간 멍해졌다. 크고 작은 성들이 청아의 침대 위, 책상 위, 가장 큰 것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노을 아래, 화려하고 웅장한 성들이 그렇게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청아의 눈가가 떨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성 위에는 어깨를 나란히 한 왕자와 공주가 서 있었는데, 마치 그날 요요가 그들에게 결혼식을 올려준 것처럼.옛집을 팔던 날, 청아는 짐을 정리하러 갔다가 돌아와 아버지가 찾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시원에게서 2천만원을 뜯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바닥에 내던지며 청아의 성도 함께 부
우청아가 장시원의 셔츠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앞서 자신이 뱉었던 말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청아는 수줍었는지 얼굴이 빨개졌고 그런 모습을 본 시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에 시원은 청아의 턱을 잡고 강렬하게 입을 맞췄다.청아의 긴 속눈썹이 떨리고, 숨이 막혀왔다. 청아의 코끝에는 오직 시원의 향기로만 가득했다. 그 때문에 청아의 불안함, 두려움, 망설임 모든 감정이 시원의 강렬한 압박에 눌려버렸다. 청아가 몸에 힘을 풀자, 시원은 청아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시원의 키스는 오랫동안 참아 온 욕구를 분출하듯 격렬했다. 이때 갑자기 시원의 휴대폰이 울리자 청아는 눈을 떴고, 시원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전화 왔어!”“신경 쓰지 마!” 시원이 청아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숨을 가쁘게 내쉬며 몸을 굽혔지만 시원의 휴대폰 벨 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이에 청아는 시원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보자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리고 시원을 밀어내며 말했다.“당신 어머니야. 먼저 전화부터 받아.”시원은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웬일이세요?”김화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원아, 일 다 끝났어? 빨리 집에 와!”“무슨 일이에요?” 시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집에 와서 알려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을게!” 김화연은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자 시원은 청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같이 집에 가자!”하지만 청아는 이미 마음을 가라앉힌 채 고개를 저었다. “우리 헤어지기 전에,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온 적 있어!”“엄마가 너를 찾아갔어? 무슨 말을 했는데?” 시원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청아를 찾은 건 좋은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의 질문에 청아는 차분하게 말했다.“어머니께서는 우리가 맞지 않는다고 했어. 평범한 가정의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그러자 시원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포기했어?”청아는 고개
장씨 저택.요요가 정원에서 놀고 있었고, 시원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김화연에 의해 거실로 끌려갔다. 김화연은 자신이 그린 도면을 들고, 설명하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네 아버지랑 상의해서 우리 침실 옆의 작은 방을 아이 방으로 바꾸기로 했어. 물론, 요요는 아직 어려서 필요 없지만, 일단 두자고.”“그 옆의 큰 방은 실내 놀이터로 바꾸고 정원 옆에는 요요를 위한 큰 놀이터를 또 지어요. 앞으로 요요가 집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요요가 작은 동물을 좋아하니, 온실 옆에는 작은 동물원을 만들자. 요요가 좋아하는 새, 기린, 조랑말, 꽃사슴을 모두 거기서 기를 수 있어.” “그리고 오늘 아이 영양사 두 명도 불렀어. 나중에 가서 봐봐. 만든 음식이 요요 입맛에 맞는지?”김화연은 그날 한 모든 것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으나 시원은 이마를 쓸며 말했다.“급히 부른 이유가 이런 거 때문이에요?” “왜? 이 모든 게 요요와 관련된 일인데, 넌 신경 안 써?” 김화연이 냉담하게 말하자 시원이 말했다. “어머니가 결정해도 돼요. 굳이 저한테 물을 필요 없고요.” 이어 김화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하루 종일 요요만 챙기고, 내 말은 전혀 듣지 않아. 나도 누군가랑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니?”그러자 시원은 무심코 웃으며 말했다. “요요는 어머니랑 아버지에게 맡기면 되고, 나는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더 중요한 일이 뭐야?” 김화연이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 몇 가지는 정말로 이야기해 봐야 해. 우청아 씨가 요요를 2년 동안 키웠잖니? 우리도 그렇게 무심한 사람들이 아니야.”“얼마를 원하는지 물어봐, 원하는 대로 다 줄 테니까.” “좋아요!” 시원은 웃음을 거두고 천천히 말했다. “이것도 청아에게 물을 필요 없어요, 어머니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뜬금없는 말에 김화연은 의아해했다. “나한테 물어보라고?” 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자신에게 물어보
“장시원!”김화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원을 부르자 시원은 밖으로 걸어가다가 돌아서며 말했다. “엄마, 나한테 할 말이 있다면, 앞으로 우청아를 따로 만나지 마세요. 제가 알게 되면 기분이 많이 상할 것 같거든요.”김화연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러지 못했고, 자기 아들이 성큼성큼 정원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화연의 미간에는 걱정의 주름이 깊어만 갔다.밤이 되자 요요는 목욕을 마쳤고, 시원은 하인을 내보내고 직접 요요를 침대로 안아 올렸다. “자, 오늘 아빠가 새 이야기를 들려줄게!” 어제는 텅 빈 책상이었지만, 이제는 새 그림책들로 가득했다. 요요는 꾸물거리며 시원의 품에 기대며 말했다. “아빠,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는 왜 아직 안 와요?” 시원은 그림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요요를 꼭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엄마가 요즘 일이 바빠서, 조금 쉬게 해줄까? 며칠 후에 아빠가 널 데리고 엄마한테 갈게!” 요요는 이해했다는 눈빛이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엄마 기다릴게요!” “그래!” 시원은 요요의 작은 머리에 뽀뽀하며 말했다. 이때 옆에 놓인 핸드폰이 환하게 빛났고, 시원은 청아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요요가 보고 싶은데 보여줄 수 있어?]시원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핸드폰 앨범에서 사진 한 장을 골라 청아에게 보냈다. 그리고 청아는 사진을 보고 멍하니 있었는데 사진은 넘버 나인에서 찍은 것이었다. 요요는 검은색 철창에 기대어 있고, 머리에는 직접 엮은 꽃 화관을 하고 있었는데, 요요의 큰 눈이 반달 모양으로 웃고 있었다. 청아는 이 사진을 보내는 시원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청아가 물어보기도 전에, 시원이 메시지를 보냈다. [이전에 요요가 보고 싶을 때 나는 사진밖에 볼 수 없었어. 이제 네 차례야!] 이에 청아는 할 말을 잃었고 시원은 만족스럽다는 듯 핸드폰을 옆에 두고 다시 요요에게 그림책 이야기를 계속해 주었다. 시원이 잔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요요가 자신의
김화연은 요요만 바라보며 웃으며 유혹적으로 말했다. “할머니 침대에는 네가 좋아할 예쁜 인형이 있어. 새로 산 건데, 보러 갈래?” 하지만 요요는 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랑 같이 자고 싶은데 아빠도 같이 갈 수 있어요?” 장시원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요요를 더 꼭 안으며 김화연에게 말했다. “엄마 얼른 주무세요. 요요의 생체 리듬을 흐트러뜨리지 마시고요.” 이에 김화연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손녀를 데려온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어? 이제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다니, 이건 나를 일부러 화나게 하는 거지?” “엄마는 적응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와 우청아가 결혼하게 되면, 낮에도 요요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시원은 천천히 말하자 김화연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진짜로 그럴 거야?” 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엄마가 청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요요도 잃게 되실 거니까 잘 결정하세요!” 김화연은 화가 나 얼굴이 붉어졌고 시원을 한번 쏘아보고 돌아섰다. 요요는 시원을 올려다보며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할머니 화났어요?” “괜찮아, 금방 나아질 거야!” 시원은 요요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자, 우리 이야기 계속하자!” ... 다음 날 아침, 시원은 일찍 일어나 청아에게 사진을 보냈다. 두 사람이 욕실 세면대 앞에서 함께 양치하는 사진이었고 요요는 입에 거품을 가득 물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요요는 정말로 시원을 좋아했다. 시원이 경원 주택단지에 자주 왔을 때도, 두 사람은 이렇게 같이 양치하며 웃고 떠들곤 했다. 사진을 바라보는 청아의 눈에서는 꿀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곧 청아는 핸드폰을 접고 일어나서 씻고 출근했다. 오전 내내 바쁘게 보내면서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었지만, 점심 무렵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우청아 씨 맞으시죠? 저는 우임승 씨를 돌보는 간호사입니다.”“최근 이틀간 우임승 씨가 재활 치료에 협조하지 않으셨고, 오늘은 약까지 거부하고 계세요. 한번
‘장시원 회사였던 건가?’우임승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불이 나서 나는 죽을 각오로 뛰어들었죠.”“만약 저렇게 죽는다면, 회사에 약간의 손해라도 만회할 수 있고, 저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그리고 청아가 저를 더 미워하지 않았으면 했죠! 누군가 불을 끄러 들어왔을 때, 저는 소방관에게 저를 구하지 말라고, 저를 죽게 내버려두라고 말했어요.”“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저를 구해낸 거고요.” “청아가 저를 미워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청아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치료받고 싶지 않아요!” 이에 시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여기서 사시면서 반성하십시오, 그렇게 속죄하면서 사세요.”“저는 알고 있습니다. 회사 덕분에 이런 좋은 요양원에 계실 수 있게 된 걸요.”“회사와 당신 덕분에 청아가 배상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알고 다 알고 있어요.”“그렇지만 이럴수록 저는 여기서 편히 있을 수가 없어요.” 우임승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우리 가족을 위해 해주신 것이 너무 많아요. 제가 당신에게 속이고 빼앗은 그 이천만 원도, 결국 당신이 허홍연에게 줘서 그 돈이 청아에게 갔어요.”“청아가 너무 많은 일을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려고 그랬던 거죠.” “나중에 허홍연한테 물어보니 다 말해주더라고요.” “저는 어떤 아버지일까요? 그저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인간일 뿐이에요.” 우임승은 말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청아는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고, 우임승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감정이 북받쳐와 목이 메었다. 그 2천만 원, 허홍연이 청아에게 주었던, 옛집 돈으로 받은 그 2천만 원이 사실은 시원이 준 돈이었다.곧 시원이 말을 이었다. “청아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저 당신이 청아를 너무 실망시켜왔뿐이죠.”“만약 당신이 보상하고 싶다면, 치료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빨리 회복해서 청
한동안 눈물을 닦아낸 우청아는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회사에 돌아온 것은 정오였고, 이지현이 청아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청아의 머릿속에서 장시원이 한 말들을 계속 되새기며, 불안한 마음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작은 기쁨이 솟구쳤다.“청아 씨, 무슨 생각 해요?” 지현이 청아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밥 먹는데도 멍을 때리네요?”그제야 청아는 고개를 들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혹시 사랑에 빠진 건가요? 평소랑 좀 달라 보여요!” 지현이 농담하듯 묻자 청아는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어디가 다른데요?”지현은 생각에 잠기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느낌이요. 예전에는 디자인 작업할 때 빼고는 모든 게 다 무의미해 보였는데, 지금은 달라요.”이에 청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의미해 보였다고요? 과장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이에 지현이 크게 웃었다. 점심을 먹고 일터로 돌아간 청아는 퇴근 시간 직전에 자신이 작업한 건물 설계도를 들고 고명기 부사장을 찾아가 검토를 부탁했다. 고명기 부사장은 설계도를 한 번 훑어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네요, 잘했어요. 장시원 사장님께도 보여드릴게요.”청아는 잠시 멈칫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 퇴근 시간이니, 조금 일찍 나가서 직접 장씨 그룹에 가서 장시원 사장님께 보여드리려고요.”이에 고명기 부사장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직접 갈 건가요?”이에 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좋아요, 가보세요. 만약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직접 대면해서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러면 저 먼저 가볼게요!”“그래요!”고명기 부사장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청아는 자신의 물건을 챙겨 장씨 그룹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후, 청아는 장씨 그룹 빌딩으로 들어갔고,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청아를 알아보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눌러주었다.39층에 도착한 청아는 자신이 예전에 일했던 곳을 바라보며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번에
신주영은 고개를 들고 여전히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장시원 사장님과 약속이 없는데도 당신을 여기 기다리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거예요. 조금 도와주면 몸에 가시가 돋나요?”“네! 싫어요!”우청아는 주영의 가식에 찬 얼굴을 보며 혐오감을 느꼈다. 원래 주영의 온화함이 모두 가식이었다니, 그것도 정말 진짜처럼 연기하다니!그리고 주영의 표정이 어두워지려는 찰나, 갑자기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급히 달콤한 미소로 바꿨다. “사장님!”시원은 차가운 얼굴로 주영의 사무실 책상 앞에 다가와 전화기를 들고 내선을 눌렀다. “인사팀에서 사람 한 명 올라오세요. 신주영을 해고하고 다른 사람 올려보내서 인수인계하도록 하세요.”“그리고 장씨 그룹 내부에 공고를 내세요. 장씨 그룹 소속 모든 회사에서 신주영을 다시 고용하지 않도록 하라고요!”그러자 주영은 얼굴색이 급변하며 당황해서 시원을 불렀다.“장시원 사장님!”하지만 시원은 주영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청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청아는 비틀거리며 시원의 뒤를 따라가며 낮게 말했다. “디자인 초안이요!”시원은 소파를 지나며 청아의 디자인 초안을 한 손에 쥐고 청아를 이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후, 시원은 청아의 손을 놓고 돌아서며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나를 찾아온 거야?”이에 청아는 입술을 깨물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디자인 초안 일부를 마쳤는데, 보여주고 싶어서.”시원은 웃으며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 청아의 디자인 초안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잘했네, 괜찮아!” 시원은 두 페이지를 보고는 고개를 들어 청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청아는 고객을 대하듯 온화하게 말했다. “만족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만족할 때까지 수정하겠습니다.”이에 시원은 하하 크게 웃다가 말을 멈췄다. 잠시의 침묵 후, 청아는 조심스레 입술을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에, 시간 있어요?”그러자 시원의 눈썹이 한번 꿈틀거리며
잠깐 네 눈이 마주친 뒤, 아심은 시선을 피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성을 바꾸는 건 급하지 않아요. 관련된 서류도 많고, 회사 법인 자료나 도장 같은 것들도 처리해야 해서 조금 번거롭거든요.”도경수는 단호하게 말했다.“어차피 바꿀 거니 걱정하지 마라. 할아버지가 다 알아서 해줄게.”강재석은 웃으며 시언에게 물었다.“시언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시언은 여전히 냉담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건 아심의 일이니, 제 의견은 중요하지 않죠.”아심은 속눈썹을 살짝 떨며 정원의 꽃나무를 바라보았다. 저녁이 깊어지면서 낮 동안 화려했던 목련꽃은 저무는 빛 아래서 쓸쓸해 보였다.도도희는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며 부드럽게 웃었다.“성을 바꾸지 않아도 호적은 올릴 수 있어요. 천천히 해도 되니까요. 대신 파티는 언제 열지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강재석은 말했다.“파티 준비도 생각보다 많아. 초대장을 몇 장 보낼지, 누구를 초대할지도 결정해야 하고.”도경수는 금세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초대장은 내가 직접 쓰지!”강재석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준비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는데.”도도희는 달력을 살펴보며 말했다.“그러면 이달 말에 하는 게 어떨까? 그때까지 초대장을 준비해서 발송하면 되겠네.”현재는 5월 중순이었고, 말까지는 열흘 남짓 남아 있었다.도도희는 강아심을 바라보며 물었다.“재희야, 네 생각은 어때?”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와 엄마께서 알아서 정해 주세요. 저는 괜찮아요.”강재석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그렇게 정하자. 성을 바꾸는 건 아심이 번거롭다고 하니, 파티 이후에 해도 늦지 않겠지.”도경수는 강재석의 의도를 눈치채고 반박하려 했으나, 아심이 말했다.“그럼 저는 강재석 할아버지 말씀을 따를게요.”도경수는 한마디 더 하려다 말을 삼키고 씩씩거리며 입을 다물었다.그때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어르신, 여정 씨 오셨어요!”도경수는 고개를 들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여정,
“외할아버지가 기쁜 건 좋은데, 네가 행복하지 않을까 봐서 걱정이야.”도경수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진중했다.“네가 행복한 게 무엇보다 중요하단다.”아심은 갑작스러운 울컥함이 목을 막아버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고마워요, 할아버지.”도경수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막 집에 돌아왔으니, 우선 가족끼리 이렇게 모여 즐겁게 지내는 게 중요하지. 다른 건 천천히 해결하면 돼.”“강시언이 너를 괴롭히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다. 내가 나이가 들긴 했어도, 우리 손녀를 지킬 힘은 아직 있어!”그는 다부지게 말했다.“우리 재희를 괴롭히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직접 찾아가 혼쭐을 내주마.”아심은 문득 설날 때 시언이 강재석에게 먼지떨이로 혼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아심을 데리고 강씨 집안으로 찾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아심의 웃음은 화사하게 번지며 저녁 햇살처럼 따뜻했다.도도희는 청석길을 따라 걸어오며, 아심과 도경수가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그녀의 눈길은 부드럽고, 마음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 가득했다. 오랜 세월 쌓여있던 응어리가 이 따뜻한 저녁 속에서 말끔히 사라진 것 같았다.‘이런 게 정말 행복이구나.’ 도도희는 속으로 생각했다.거실에서는 강재석이 시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바쁘냐? 저녁에 와서 같이 식사하자.”시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요.]그러자 강재석은 약간 성을 내며 말했다.“맨날 일이 바쁘다고 얼굴도 안 보이고. 아심이랑 오해가 있으면 빨리 풀어라. 계속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냐?”시언은 여전히 침착하게 대답했다.[피한 게 아니라 정말 바빴어요.]강재석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내 말도 안 들을 작정이냐? 좋아, 네가 안 오면 오늘 밤 내가 운성으로 돌아갈 거야!”[할아버지!] 시언의 목소리에 드디어 약간의 감정이 묻어났다.[그렇게 하지 마세요.]“내가 떠들썩하게 굴고 있는
승현은 양재아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솔직히 말했다.“감정은 결국 느낌의 문제예요. 아마 내가 강아심을 먼저 만나서 선입견이 생겼을 거고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동작에 따라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아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지승현 씨, 푹 쉬세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내가 한 말은 꼭 지킬게요. 재아 씨가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이든 내가 최선을 다해 보상할게요.”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는 부족한 게 없어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냥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할게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병실을 떠났다. 병실 밖으로 나온 재아는 눈물을 닦고 표정을 다잡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이대로 끝낼 순 없어.’재아는 이를 악물었다....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심은 강시언을 보지 못했다. 시언은 중간중간 도씨 저택을 방문해 강재석과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떠나곤 했다. 하지만, 아심과는 마주치지 않았다.아심에게는 그가 오든 가든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시언은 원래 자신의 일정을 굳이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고, 아심도 이미 다시 떠났겠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승현은 이미 퇴원했다. 아심은 그와 두어 번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아심은 낮에는 일에 몰두했고, 밤에는 도경수와 그림을 배우며, 자기 전에 도도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방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은 혼자였던 시절과 완전히 달랐다.이날은 일찍 퇴근해 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했다. 아심이 정원을 지나던 중, 도경수가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다가가며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도와드릴게요!”도경수는 기뻐하며 말했다.“오늘은 일찍 끝났구나.”아심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네, 내일이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하고 싶었어요.”도경수는 아심을 말리며 말했다.“넌 아
지승현의 목소리는 약간 힘이 없었다.[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훨씬 나아졌어. 지금은 약간 어지러운 것 빼고는 큰 문제는 없어.]강아심은 차분히 말했다.“아까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널 친 운전자는 음주 운전으로 차량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해.”“하지만 난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아. 너도 조심하고, 안전에 신경 써.”승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알겠어. 고마워, 아심아. 그리고 어제도 고마워. 병원에 데려다주고, 모든 절차도 네가 대신해 줬다고 간호사가 말해줬어.]아심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너도 예전에 날 도와준 적 있었잖아. 우린 친구니까, 그런 건 따질 필요 없어.”[어제 우리 엄마가 와서 너한테 무례하게 굴진 않았어?]아심은 짧게 대답했다.“아니.”[그렇다면 다행이야.]“너는 몸 잘 추스르고, 다른 건 너무 신경 쓰지 마.”[그럴게.]...승현이 전화를 끊자마자, 양재아가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승현 씨, 몸은 좀 괜찮아요?”승현의 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아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재아는 꽃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꽃은 여기 둘게요.”승현은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재아 씨, 일부러 돈 쓸 필요는 없었는데.”재아는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승현 씨, 우리 좀 진지하게 얘기해 봐요.”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재아 씨랑 분명히 말해야 할 게 있어요.”재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귀여운 얼굴에는 진지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그동안 여사님께서 우리를 이어주려고 하셨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요.”“그날 밤의 일도 승현 씨만의 잘못은 아니예요. 나 역시 술에 취했고, 내 잘못도 있었으니까요.”승현은 재아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휘말려 이런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재아를 보며 약간의 연민을 느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두 사람이 대화 중이던 중, 이반스가 측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도도희를 보며 놀란 듯 물었다.“도도희, 바둑을 두고 있었어?”강재석이 웃으며 말했다.“도도희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잘 뒀지. 학교 다닐 때 상도 받았었다고. 정말 대단했어!”이반스는 눈을 반짝이며 감탄과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배우고 싶어요!”도도희는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넌 바둑보단 오목을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아.”이반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도도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오목이 더 어려워. 너의 높은 지능에 딱 맞을 거야.”이반스는 칭찬을 들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고마워, 도도희!”강재석은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크게 웃었다....양재아는 요즘 매일 늦게 귀가했다. 이날도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와, 강재석과 도도희에게 인사를 건넨 뒤 물었다.“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도도희는 대답했다.“서재에 계셔.”재아는 거실 옆의 작은 서재로 향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쪽의 모습을 보았다.도경수와 강아심은 커다란 화판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크고 작은 붓과 각종 채색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도경수는 가끔 아심의 붓질을 살펴보며 친절하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그의 눈에는 뿌듯함과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은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재아는 그 모습을 보고 괜히 속이 쓰리고,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발길을 돌려 나와버렸다.잠시 뒤, 도도희는 밤참을 들고 서재 문을 열며 들어왔다.“이제 그만하고 쉬세요. 너무 늦었어요.”도경수는 얼굴 가득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우리 재희는 정말 재능이 있어! 너랑 똑같아!”도도희는 딸을 보며 기쁜 미소를 지었다.“그러게요. 역시 혈연은 속일 수가 없네요.”아심의 얼굴 한쪽에는 물감이 살짝 묻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더욱 생기 있고 사랑스럽게 보였다.“할아버지가 훨씬 대단하세요! 오
집에 도착하자 도도희가 직접 부엌에서 음식을 데우고 있었다.도경수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반가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며 말했다.“왜 맨날 야근이야? 회사에 직원들 많다며. 그 사람들이 일을 안 해?”도도희가 다가오며 말했다.“직원들은 직원들 할 일이 있고, 사장님은 사장님 할 일이 있죠. 아버지는 그만 신경 쓰세요. 우리 재희가 알아서 잘할 거예요.”아심도 따뜻하게 웃으며 설명했다.“오후에 일이 조금 밀려서 늦었어요. 다음엔 조심할게요.”“일단 가서 저녁 먹자.”도도희가 강아심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도경수는 따라가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결국 서재로 돌아가 강재석과 함께 차를 마시러 갔다.식탁에서는 도도희와 강아심이 마주 앉았다. 도우미들이 음식을 차려 놓고는 자리를 비워, 두 사람이 조용히 식사할 수 있도록 했다.아심은 놀라며 물었다.“엄마도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응, 네가 혼자 먹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랑 다른 분들 먼저 먹으라고 했어. 난 네가 오길 기다렸다 같이 먹으려고.”도도희는 딸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말했다.“이 족발 요리는 내가 한 거야. 한 번 먹어봐!”아심은 가슴이 따뜻해지며 한 입 먹고 미소를 지었다.“정말 부드럽고 맛있어요.”“내가 요리를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자신 있는 메뉴는 있지. 앞으로 내가 다 해줄게.”아심이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우리 같이 요리해요. 제가 엄마한테 배울게요.”두 사람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이어갔다.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아심은 무심코 물었다.“오늘 시언 씨는 안 보여요. 안 왔어요?”도도희는 대답했다.“아까 아저씨가 그러시는데, 시언이 오늘 바빠서 집에 안 온다고 하더라.”그녀는 아심을 보며 물었다.“시언이 네게 말 안 했어?”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저도 오늘 너무 바빴어요.”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자 도도희가 강아심에게 말했다.“예전에 그림 배우고 싶다고
강아심은 택시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돌아가 자신의 차를 찾으려 했다. 택시에 앉아 있던 그녀는 문득 오늘 점심 원래는 고객과 미팅이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아심은 급히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고객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기에, 태도가 매우 너그러웠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레스토랑 밖에서 교통사고가 난 걸 다 알고 있어요. 전화를 했는데도 안 받으셔서 다들 걱정했어요. 괜찮아요?]“네, 괜찮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그녀는 몇 마디 더 예의를 차린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정말로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중에는 강시언의 전화도 포함되어 있었다....자신의 차를 찾은 뒤 회사로 돌아오자 곧바로 퇴근 시간이 되었다. 사무실에 앉아 오후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던 아심은 이 모든 일이 참으로 절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권수영은 분명 지승현과 양재아를 이어주기 위해 그들을 레스토랑으로 불러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과 승현이 우연히 마주쳤다.그 후에 차량이 승현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 차량은 명백히 승현을 노리고 있었고, 그의 동선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승현을 해치려 한 사람은 그와 가까운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승현을 레스토랑으로 부른 사람은 권수영이었다. 그러나 권수영이 자기 아들을 해치려고 했을 리는 없었다. 만약 승현이 목적이라면 재아까지 그 자리에 부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최근 승현은 회사를 인수하며 내부의 적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반감을 샀다. 회사의 복잡한 세력 다툼 속에서 그의 동선을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아심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경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지금은 다른 문제가 골치를 아프게 했다. 바로 시언이 화가 난 문제였다. 아심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시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는 계속 울리다가 끊겼고, 시언은
양재아는 권수영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권수영은 병실에 들어가 지승현의 상태를 확인한 뒤,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올라 강아심을 향해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강아심 씨, 대체 언제까지 우리 아들을 괴롭힐 거예요? 헤어졌다면서 왜 아직도 우리 승현이를 붙잡고 있는 거냐고요?”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아심을 향해 계속 비난을 퍼부었다.“얼굴 하나 믿고 여기저기 남자를 꾀고 다니고, 부끄럽지도 않아요?”병원이라는 장소에서 시끄럽게 싸우고 싶지 않았던 아심은 권수영과 언쟁을 벌이기보다 돌아서서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그러나 권수영은 포기하지 않고 아심을 쫓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층 더 공격적인 어조로 경고를 쏟아냈다.“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 승현이의 여자 친구는 재아예요. 그러니 당신 다시는 치사하게 달라붙지 마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당신 같은 여자가 우리 아들을 꾀려고 한다는 걸 온 강성에 소문내서, 여기서 발도 못 붙이게 할 거예요!”권수영 뒤에서 재아는 일부러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경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아주머니, 무슨 일이 있으면 차분히 말하세요. 폭력을 휘두르지 마시고, 이분의 손을 놓으세요!”권수영은 경찰의 말에도 아심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비웃으며 말했다.“이 여자는 천하의 나쁜 여자예요! 쓰레기 같은 여자라고요!”그 말에 아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권수영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힘을 주자 권수영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고통스럽게 손을 놓았다.아심은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이 양재아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당신의 모욕을 참고 있는 건 내가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에요.”“당신은 정말로 웃음거리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말다툼하는 건 제 시간 낭비라고 생각돼서예요.”권수영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아심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경찰이 재빨리
재아는 시언의 냉랭한 시선을 받자, 등골이 오싹해졌다.자기 말에 허점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시언이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에 불안감이 밀려왔다.검사실 밖시언이 검사실에 도착했을 때, 아심은 문밖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시언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뒤늦게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시언은 아심에게 다가가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팔에 약간의 긁힌 상처가 있었다.“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아심이 먼저 물었다. 시언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날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지?”아심은 잠시 멈칫했다. 곧바로 그날 저녁 그의 별장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시언은 그녀에게 다시는 승현과 얽히지 말라고 했었다.아심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일 외에는 사적인 연락은 없었어요.”시언은 아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건 아니겠지?”아심은 그의 질문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시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답하려던 찰나,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검사 끝났어요. 보호자 분, 빨리 오세요!”아심은 시언을 한 번 바라본 뒤, 검사실로 향하는 침대로 먼저 달려갔다. 시언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기운이 마음속 깊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시언은 재아의 이간질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심은? 승현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아심은 간호사들과 함께 승현을 검사실에서 병실로 옮겼다.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복도를 살피며 시언을 찾았지만,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속에서 차오르는 불안을 애써 누르며, 그녀는 승현을 돌보는 데 집중했다.잠시 후, 의사가 결과를 들고 와 말했다.“다행히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진 것 말고는 내장이 다치지 않았어요. 머리 외상으로 출혈이 많고 가벼운 뇌진탕이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