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고급 디자이너가 될 거야!”이지현이 몇 걸음을 뛰어가며 화를 내며 말했다. “김민주 씨 디자인 초안 다 됐어요? 여기서 놀고 있으면서 부사장님한테 혼나고 싶나 봐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요!” 지현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회사를 다니는 디자이너인가요, 아니면 동네 마실 나갔다가 수다나 떠는 아주머니들인가요?”김민주 일행이 대꾸하려다가 우청아도 같이 있는 걸 보았다. 며칠 전 황대헌이 청아를 잘 챙기라고 했던 걸 생각하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서 떠났다.“디자인할 때는 멍청이 같이 가만히 있으면서, 수다 떨때는 그 누구보다 집중해서 하시네요! 그럴거면 아예 수다 국가대표를 하시지 왜 여기에 있는거죠?” 지현이 청아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하지만 청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인데요?”그러자 지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하면 청아 씨가 화낼까 봐 걱정되는데, 오늘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더라고요.”“지난 금요일 밤에 청아 씨가 장시원 사장님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방문을 두드렸다고, 그리고 밤새도록 안 나왔다고 하더라고요.”청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덧붙였다. “난 물론 믿지 않지만요!”어이없는 얘기에 청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 소문을 누가 냈는지 사실은 알아보기 쉬워요. 그날 밤 호텔에 간 사람들은 몇 명 안 되니까, 누군지 감이 오는 사람이 있나요?” 지현의 질문에 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요.”고명기는 가능성이 없고, 황대헌도 디자이너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을 테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진도준이었다. 청아가 장씨 그룹 대형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후, 도준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문이 도준에 의해 퍼진 것인지, 아니면 도준의 비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그리고 청아가 도준을 찾아간다 해도, 도준은 분명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어떻게 할 거예요?” 지현이 묻자 청아가 물을 따
“너무 긴장하지 마!” 배강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별거 아니고 그냥 금요일 밤에 우청아가 널 방으로 모시고 가는 걸 누군가가 보고, 그걸 가지고 청아를 비방하고 있어. 청아 씨한테 더러운 물을 끼얹고 있지.”장시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진도준이야?”배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그러자 시원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접어두고 일어나며 말했다. “나 콜드스프링에 한번 가볼게.”그가 몇 걸음 걷다가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멈춰 서며 배강을 돌아보았다. “네가 이 일을 처리해.”“청아 씨를 위해 직접 나서고 싶지 않은 거야?”배강의 말에 시원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다. “네가 청아에게 문제를 일으킨 거니까 네가 해결해. 해결 못 하면 돌아올 필요 없고.”그러자 배강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갈게. 콜드스프링을 뒤집어엎든, 청아 씨도 지키고 내 직장도 지킬 거야.”“떠들지 말고 빨리 가!” 시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배강은 시원이 속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원의 상황을 이해가 돼 씁쓸해졌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어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다. 이에 배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황대헌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있어서 청아가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황대헌의 비서가 배강이 찾아왔다고 전화를 받고서야 서둘러 돌아왔다.“배강 부사장님!” 황대헌이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미리 연락을 주지 않으셔서,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이에 배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아 씨한테 문제가 생겼다고 들어서 한번 보러 왔죠.”“무슨 문제요?” 황대헌이 어리둥절해하자 비서가 서둘러 사무실에서 청아에 대한 찌라시들을 설명했다. 그러자 황대헌의 얼굴색이 급격히 변했다. “이 소문은 어디서 시작된 거야, 조사했어?”비서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있자 배강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그날 술자리에
진도준은 반박할 수 없었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그저 술에 취해 비서에게 몇 마디 투덜거렸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그러자 황대헌이 말했다. “장시원 사장님이 배강 부사장을 직접 보내 조사하게 했어요. 아무리 저라도 당신을 지킬 순 없다는 뜻입니다. 회사 측에서 자르기 전에 자진사퇴 하세요.”원래라면 회사 내부에서 조사해 도준에게 경고나 감봉 정도로 끝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배강이 사무실에 앉아 시원의 명예 문제까지 언급하면서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도준은 눈을 크게 뜨고 황대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부사장님, 이건 너무하지 않나요! 많은 말들이 저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과장해서 퍼뜨린 건데요!”“하지만 배강 부사장이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데, 제가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황대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어요. 이번 일은 아마 도준 씨 인생에 큰 교훈이 될 겁니다.”“저도 가능한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게 노력할게요.”콜드스프링 건축회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일하며 고생 끝에 고급 디자이너가 된 도준은 단 한마디의 험담 때문에 해고될 처지에 놓이자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도 황대헌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심지어 도준의 비서까지 함께 해고했다. 도준을 해고한 후, 황대헌은 디자인 부서에 가서 말했다. “금요일 밤, 장시원 사장님을 위한 식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청아 씨가 장시원 사장님을 챙겨드린 건 사실입니다.”“하지만, 저와 고명기 부사장이 청아 씨와 함께 호텔을 떠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건 고명기 부사장도 증명할 수 있고요.”“소문들은 모두 고의로 날조된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이 문제에 대해 누군가의 뒷담화를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을 바로 해고시킬 겁니다.”모두가 조용히 듣고 있었고, 도준이 해고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무분별하게 소문을 퍼뜨린 사람
“어떻게 된 거예요? 황대헌 부사장님이 이번에 이렇게 신속하게 처리해서 진도준을 해고하셨는데,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이지현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우청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핸드폰을 집어 들며 장시원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망설이는 순간, 핸드폰 화면이 저절로 밝아지며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청아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우청아 씨 맞으신가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네,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청아가 물었다.“저는 우임승 씨의 동료인데요, 지금 사고를 당하셔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처치 중입니다.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남자가 급하게 말하자 청아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무슨 일이죠?”“병원 주소를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빨리 오세요. 오시면 자세한 얘기를 나누죠!” “알겠습니다.” 청아는 전화를 끊고, 슬그머니 올라오는 공포를 억누르며 일어나서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청아는 택시를 타고 강성대병원으로 향했다. 길을 가는 내내 머리는 멍했고, 몸은 발끝부터 차가워져서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청아는 응급실로 달려갔다.우임승은 아직 응급 처치 중이었고, 밖에서는 몇몇 회사 책임자와 우임승의 동료들이 지키고 있었다.“아빠!” 청아가 달려가며 당황스럽게 물었다. “우리 아빠 어떻게 된 거예요?”회사의 책임자인 강래원이 다가왔다. “우청아 씨 맞나요?”청아가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래원이 말했다. “저희 회사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어요. 당신 아버지께서 불을 끌려고 안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치셨습니다. 지금 응급처치 중이에요.”청아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무릎을 꿇을 뻔했다. 다행히 옆 사람들이 청아를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래원은 사람을 시켜 청아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여기 앉아서 잠시 기다리세요. 무슨 일이 생
성연희가 뒤따라왔고 소희는 운전하며 속도를 높여 병원으로 최대한 빠르게 달려갔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수술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우청아는 복도의 벤치에 앉아 있었고, 소희와 연희를 보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괜찮아, 방금 간호사에게 물어봤어. 다리를 다쳤을 뿐이야,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해!” 소희가 청아의 어깨를 감싸 안자 청아는 눈물범벅이 되었고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온몸이 떨렸다. “정말 너무 미워!”연희도 청아를 안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랑 소희가 여기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우림 테크놀러지의 담당자가 누구죠?”소희가 뒤를 돌아보자 허홍연이 도착했고, 청아의 새 언니인 정소연도 뒤따라왔다. 그러자 강래원과 회사의 다른 두 명의 담당자가 나섰다.“안녕하세요, 우청아 씨 어머니시죠? 우임승 씨가 아직 응급처치 중이니 무슨 일이든 천천히 얘기합시다.”이에 소연이 차갑게 말했다. “보상에 대해 먼저 얘기해야죠. 제 시아버님은 회사의 재산을 구하려다 다치셨어요!”앞서는 소연을 래원이 안심시켰다. “보상 문제는 수술이 끝난 후에 논의해도 될까요?”“당연히 안되죠!” 허홍연이 차갑게 말했다. “제가 알아봤는데, 사람이 죽지 않더라도 확실히 장애가 생길 거예요. 책임 회피하려고 하지 마세요.”“보상은 어떻게 할 건지 지금 당장 명확히 해주세요!”이때다 싶은 소연이 청산유수로 말했다. “최소한 10억은 받아야 해요. 우리 시아버님은 5성급 호텔의 요리사셨어요. 이렇게 크게 다치고 나면 일을 할 수 없게 되겠죠.”“아직 젊으셔서 최소 10년은 더 일하실 수 있었을 텐데, 연봉으로 계산하면 이건 매우 부족하고요.”“이후 노후 자금과 간병비까지 합하면 이 정도 요구하는 건 전혀 과하지 않아요!”연희는 오자마자 돈 얘기부터 꺼내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연의 앞으로 걸어가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왜 100억을 요구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
허홍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믿을 수 없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강래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이게 사실인가요?”래원은 무겁게 말했다. “우임승 씨가 아직 응급처치 중입니다. 저희는 수술이 끝나고 나서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구체적인 보상 문제는 우리 회사의 손실이 법적 감정을 거친 후에 논의하려고 했습니다.”순식간에 바뀐 판도에 허홍연은 이제 전혀 기세가 등등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움만이 남아 있게 된 허홍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대략 얼마나 될까요?”다른 담당자 중 한 명이 말했다. “우청아 씨가 말한 것처럼, 초기 추산에 따르면 실제로 20억이 넘습니다.”확인 사살을 한 허홍연은 눈앞이 캄캄해져서 그 자리에 쓰러졌고 옆에 있던 정소연이 허홍연을 붙잡았다.“어머니! 어머니!”이에 연희는 옆에서 비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상해야 한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행동하시네요.”허홍연이 천천히 눈을 떴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천벌을 받을 놈, 내 인생을 망치더니 이제는 자식들 인생까지 망치려고 하다니! 그냥 살리지 말고 죽게 내버려둬!”그러자 우림 테크놀러지의 담당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는 병원입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환자가 깨어나면 그때 얘기합시다!”“어머니!” 소연이 당황해서 물었다.“정말로 집을 팔아야 해요? 집을 팔면 우리는 어디에 살죠?”소연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청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일은 아가씨가 아버님께 구해준 일자리잖아요. 이건 아가씨가 책임져야 하지 않나요?”소연의 말에 허홍연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집은 절대 팔 수 없었다. 집을 팔면, 소연이 분명히 우강남과 이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가정은 완전히 파탄 날것이다. 그러자 허홍연도 청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청아야, 네 새언니 말이 맞아. 이 일은 네가 해결해야 해!”이런 상황에 청아의 목구멍이 메어 왔고,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미어지는
“오늘 엄마는 나에게 20억을 혼자서 보상하라고 하죠. 근데 내가 내 장기를 싹 팔아도 그 정도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저는 계속 이해하고 참아왔어요. 왜냐하면 엄마의 고충을 알기 때문이고, 엄마 혼자서 나랑 오빠를 키우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하지만 내 배려와 인내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닌 오히려 이용하려고 하죠.”허홍연은 우청아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고,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청아야, 나도 어쩔 수 없어. 정말로, 넌 여자니까 시집이라도 갈 수 있잖아. 근데 네 오빠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청아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오늘부터 확실하게 해두죠. 아버지 일은 제가 보상하고 제가 처리할게요.”“엄마가 저를 키워주신 은혜, 오늘로 다 갚은 거로 마무리 짓자고요. 앞으로 우리는 아무 상관 없는 사이고 엄마는 오빠만 잘 챙겨요.”정소연이 청아의 말을 듣고 눈이 반짝이더니 서둘러 말했다. “그 말, 진심이에요?”청아는 차갑게 대답했다. “진심이에요. 이제 가도 괜찮아요.”“어머니, 아가씨가 그렇게 말했으니 앞으로는 저하고 우강남이 어머니를 챙길게요.”“아가씨가 아버지를 돌보면 나머지 보상 문제는 우리하고는 상관없어요!” 소연이 허홍연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가요!”허홍연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청아를 힐끔 보다가 소연과 함께 가려고 했다.“잠깐!” 이때 성연희가 갑자기 소리쳤고 연희의 눈빛은 차가웠다. “확실하게 할 거면 문서로 작성하자고요. 지금 이렇게 마무리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얼굴 두껍게 청아를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소연은 연희의 말에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서류? 그래요 작성하죠. 나도 아가씨가 마음 바꿀까 봐 걱정이었거든요!”연희는 휴대폰을 들고 자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약서 작성할 거니까 내가 말하면 적어서 바로 가져다줘!”소연은 연희를 힐끔 쳐다보며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협의서에는 두 부분이 있었다. 첫 번째 부분에는 어머니 허홍연이 장남 우강남에 의해 부양되며, 아버지 우임승은 딸 우청아에 의해 부양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후 양측의 삶과 죽음은 서로에게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되어 있었다.하지만 정소연은 한 조항을 더 추가했다. 그들이 현재 거주하는 집은 청아와 우임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아는 아무 말없이 성연희에게 그 조항을 협약서에 추가하도록 했다.양측이 각각 서명하고 손도장을 찍음으로써 협약은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생했다.“청아야!”강남은 청아를 안타까워하며 바라보았다. 강남은 결코 그들 가족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소연은 강남을 황급히 끌고 가며 청아와의 관계를 빨리 정리하고, 가능하면 앞으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우씨 집안 사람들이 떠난 후 복도는 갑자기 조용해졌고, 청아의 마음은 텅 비었다. 사람들은 부모가 자신의 시작이며, 부모가 없으면 돌아갈 곳도 없다고 말한다. 청아 부모는 아직 살아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앞으로의 길은 여전히 혼자서 걸어가야 했다.소희가 청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따뜻하면서도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연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두려워하지 마. 우리가 있잖아.”청아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눈물이 다시 쏟아지며 끄덕였다. “응.”세 사람은 복도의 벤치에 앉아 계속 기다렸다. 우림 테크놀러지의 몇몇 사람들은 옆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이런 가족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자식을 괴롭힐 수 있는지 탄식했다.이때 강래원의 휴대폰이 울렸고, 래원은 바로 확인한 후 밖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병원 아래에는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세워져 있었다. 래원은 차 문을 열고 들어가며 공손히 인사했다. “장시원 사장님!”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임승 현재 상태는 어떤가?”“아직 수술 중입니다.”시원의 잘생긴 얼굴에는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앉았고 시원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청
강시언은 오후 네 시가 되도록 강아심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도도희에게 전화를 걸었고, 도도희는 아심이 운성으로 갔다는 사실을 전했다.시언은 아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받지 않았다. 그동안 비교적 침착하던 강재석마저 걱정하기 시작했다.“길이 아무리 멀어도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아야 하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시언은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에 강재석은 뒤에서 당부했다.“아심을 만나거든 꼭 내게도 알려라.”시언은 가볍게 대답했다.“알겠어요.”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시언은 문밖으로 나갔다. 오석이 방으로 들어와 강재석에게 차 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어르신, 오늘의 바둑은 좀 난잡해 보이네요.”강재석은 바둑판 위의 돌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마음이 복잡하니, 바둑이 난잡하지 않을 수 있겠나.”오석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아직 회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요?”강재석은 잠시 바둑판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판은 이미 짜여 있어. 어떤 상황이든 계속 두어야 해. 끝까지 두다 보면 반드시 돌파구가 있을 거야.”...하늘이 점점 어두워지자 서점에도 손님이 줄어들었다. 아심은 마지막으로 서점을 나서며 책 두 권을 계산했다.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밝게 말했다.“혼자 오셨나요? 제가 저녁 식사 대접할게요. 이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곳을 알아요.”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마워요. 하지만 다음에 먹죠.”돈을 지불한 뒤 책을 가방에 넣으며 직원에게 말했다.“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좋아요. 다음에 또 오세요!”“안녕히 계세요.”서점을 나온 아심은 저물어가는 황혼 속 긴 골목길을 걸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고, 곧 어둠이 깔릴 듯했다. 그녀는 만나야 할 사람을 보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골목을 빠져나와 거리에서 무의미하게 산책을 하던 아심은 문득 자신이 왜 이곳에 계속 머무
강아심이 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 하지만 강씨 저택으로 향하던 중, 그녀는 갑작스럽게 마음이 흔들렸다.도로 옆에 차를 잠시 멈추고 고민한 뒤, 아심은 차를 다시 움직여 차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운성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고즈넉한 고장을 향해 운전하기 시작했다.약 두 시간에 걸친 이동 끝에 아심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천천히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볐다. 대부분은 젊은이들로, 배낭을 메거나 카메라를 들고 마을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마을은 산과 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마을 안은 청량하고 상쾌했다. 강아심은 깨끗해 보이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은 뒤,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정오의 햇살 아래 깊고 조용한 골목은 한결 평온했다. 이따금 떠도는 햇빛과 그림자 속, 누군가의 고양이가 담장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담장 위의 꽃잎 하나가 떨어져 이끼 낀 벽돌 구석에 내려앉았다.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서점. 서점 뒤뜰의 붉은 담장 위로 장미꽃 몇 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꽃향기는 골목 특유의 습한 공기와 어우러져 은은하게 퍼졌다.서점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강아심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몇몇 손님들이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책을 정리하던 직원이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어서 오세요!” 직원이 인사하며 웃고는 아심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놀라움과 기쁨이 그녀의 눈에 스쳤다.“아, 손님이시네요!”아심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직원은 연한 하늘색 멜빵 청바지와 동그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책장을 정리하던 사다리에서 내려오더니 아심의 앞으로 다가와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올 줄 알았어요!”아심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그렇
그날 밤, 강아심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지만,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딘가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밤이 깊어지며 바람이 일었고, 폭우와 천둥, 번개가 이어졌다. 새벽녘이 되자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도도희는 이른 아침에 조깅하러 나가는 습관이 있었지만, 이날은 비 때문에 늦게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이미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려는 아심과 마주쳤다.“운성으로 가는 거니?”이에 아심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작별하려고요. 내일 공항으로 가기 전에 돌아올게요.”도도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잘 다녀와. 아침은 먹고 가는 게 어때?”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가는 길에 먹을게요.”두 사람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도경수는 아심이 강시언을 배웅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딱히 뭐라고 하지 않고, 다만 길에서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심이 떠나자, 도경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둘 다 내일 떠날 텐데, 왜 시언이 우리 아심일 배웅하지 않는 거야?”도도희는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렇게 따지지 마세요. 아심이가 행복하면 되는 거잖아요.”도경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우리 아심이가 삼각주로 끌려가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내가 절대 못 봐!”도도희는 웃으며 답했다.“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요.”그러나 도경수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아심인 아침도 못 먹고 나갔는데, 날씨도 안 좋은데 내가 가지 말라고 막았어야 했는데. 시언은 늘 여유로우니 우리도 좀 참을 수 있었잖아!”도도희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운성, 강씨 저택.강재석은 아침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집사인 오석이 다가와 말했다.“어르신, 어젯밤에 도련님 방의 불이 밤새 켜져 있었습니다.”강재석은 고개를 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얼굴엔 걱정의 기색 없이 여전히 온화한 미소
아심은 눈에 은은한 빛을 띠며 성연희를 바라보았다.“연희야, 고마워.”연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내가 괜히 참견했다고 화내지만 않으면 됐어! 저기 가서 새 친구를 사귀더라도 우리를 잊으면 안 돼.”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절대 잊지 않을 거야.”그날 저녁아심은 이전에 살던 집에 잠시 들렀다. 파티를 마친 후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아 방 안은 이미 얇은 먼지로 덮여 있었다.소파 위에는 강시언의 셔츠가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밤, 세탁소 직원이 가져가 깨끗이 세탁한 후 다시 배달해 놓은 것이었다.강심은 그 옷을 옷장에 다시 걸어두었다. 옷장에는 남성용 셔츠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참 후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대신 가슴 한켠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가져갈 물건들을 정리한 후, 그녀는 발코니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두 권의 책과 고즈넉한 설에 갔던 서점에서 소녀가 건넨 엽서가 놓여 있었다.아심은 책을 들어 첫 페이지를 펼쳤고, 거기엔 남자가 힘 있게 써놓은 글씨가 있었다.강아심 2월 3일, 인가마을특색거리책을 내려놓고, 그녀는 밖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강성에 처음 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무수한 밤들, 아심은 늘 이 자리에서 강성의 밤을 바라보았다.고요하거나, 떠들썩하거나, 혹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거나, 아니면 별빛이 찬란한 밤들. 하지만 아심은 늘 방관자처럼, 조용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봤다.그러나 시언의 등장으로, 그 후의 밤들은 전과는 다른 감정들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심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했지만, 머릿속의 그 기억은 금세 사라져 잡을 수가 없었다.유리창에 비친 아심의 얼굴은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투명한 유리벽 속에 갇힌 포로처럼, 어떻게 이 족쇄를 깨부술지 고민하는 듯했다.‘떠나는 것이 해답일까?’아심은 창문 앞에 오래 서 있다가 테이블 위의 책과 엽서를 모두 여행 가방에 넣었다.도씨 저택으로 돌아오자 도도희는 거실 밖 발
다음 날, 도도희는 금요일 오전 비행기로 Y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늘은 수요일이었다.소희와 성연희는 도경수가 출국하기 전에 송별회를 열고 싶었지만, 도경수는 끝까지 고사했다. 그는 자신이 출국한다는 사실을 소수의 친한 제자들에게만 알렸고, 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함께하며 작별의 아쉬움을 나눴다.점심 식사 후, 강솔은 도경수와 함께 술을 조금 마시고 뒷마당으로 가서 술을 깨기 위해 앉아 있었다. 소희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강솔은 벤치에 앉아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소희는 강솔의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만 울어, 선배 오면 내가 너 괴롭힌 줄 알겠어.”강솔은 소희의 어깨에 기대며 그녀의 티셔츠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훌쩍였다.“별일 아니야. 그냥 마음이 좀 아파.”“전에 스승님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뵐 수 있었고, 아무리 늦게까지 야근해도 와서 저녁이라도 함께할 수 있었잖아.”“그런데 이제 스승님이 멀리 가시면, 보고 싶을 때 어떡해?”소희는 강솔이 구겨놓은 소매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스승님이 외국 생활에 적응 못 하실 수도 있으니, 조금 지나면 다시 돌아오실지도 몰라.”강솔은 코를 훌쩍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스승님은 거기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 스승님이 그동안 가장 걱정하셨던 건 도도희 이모와 아심이었잖아. 이제 가족들이 함께하니 우리가 기뻐해야 해.”소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래도 생각 빨리 정리했네.”강솔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그냥 내가 술 마시고 정신없다고 생각해.”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근데 너 이 술주정, 순전히 내 옷에 묻히려고 작정한 거 아니야?”강솔은 구겨진 소매를 내려다보며 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그때 성연희가 아심과 함께 걸어왔다. 강솔이 소희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강솔은 민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눈물을 닦으며 일부러 변명했다.“소희가
강재석은 차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좋아, 일이 웬만큼 정리되었으니 나도 이제 떠나야겠구나.”도경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지금 당장 운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내가 출국할 때는 안 배웅하실 건가?”강재석은 웃으며 답했다.“도도희랑 아심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내가 배웅하지 않아도 되겠지.”그는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게다가 나를 알잖아. 몇십 년 동안 한결같이 이별 인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오늘 오후에 바로 운성으로 갈 거야.”아심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깜짝 놀랐다.“오늘 바로 가신다고요? 할아버지?”강재석은 온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네가 떠날 때는 내가 배웅하지 않을 거야. 대신 시언이 널 데려다줄 거야.”아심은 시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두 사람의 눈길이 잠시 마주쳤다. 강아심은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그럼 돌아오는 길에 꼭 뵈러 갈게요.”도도희는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한 달 동안 아저씨와 함께 지내면서 익숙해졌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시겠다고 하니 정말 마음의 준비가 안 됐네요.”강재석은 담담하게 말했다.“세상에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는 법이란다. 각자 할 일이 있고, 언젠가는 헤어지게 마련이지.”“중요한 건, 우리가 만났을 때는 기쁘고, 헤어질 때도 여유롭게 보내는 거야.”도경수는 강재석의 말에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다만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강솔은 분위기를 밝히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나중에 시간 나면 우리가 운성으로 찾아갈게요. 할아버지 댁 마당이 너무 좋더라고요.”강재석은 손녀를 바라보듯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언제든지 환영이다. 너도 곧 결혼한다면서? 결혼식 때 내가 꼭 가서 축하해줄게.”강솔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약속이에요!”그렇게 웃고 떠드는 동안 이별의 분위기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소희가 말했다.“할아버지, 오후에 가시면 제가 함께 가서 모셔다드릴게요.”강재석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넌 갓 돌아
재아는 가장 먼저 도경수 앞에 다가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울먹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재아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병을 앓고 난 뒤의 쇠약함과 침울함이 역력했다.“어릴 때부터 진심으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만난 뒤에야 가족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저를 그렇게 잘 대해주셨는데, 저는 오히려 실망만 안겨드렸네요.”“솔직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냥 떠나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떠난다면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 것 같아서요.”“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그 모든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도경수는 처음 재아를 만났을 때 그녀의 밝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잃어버린 손녀에 대한 그리움을 재아에게 투영하며 마음을 달랬다.이제 와서 그는 스스로 물었다. 재아에게 보여준 애정이 결국 그녀를 망친 것은 아닐까?도경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재아는 울먹이며 답했다.“경주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했어요. 기차표도 이미 예매했고요.”도경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몸 잘 챙기도록 해라.”“감사드려요!” 재아는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이며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전에 내가 많이 가식적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사과할게요.”아심은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재아는 눈물을 훔치며 강솔에게도 사과했다.“미안해요.”강솔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나는 크게 신경도 안 썼으니까 그러지 마요. 몸조리 잘하고, 나중에 강성에 놀러 와요.”재아는 항상 강솔의 밝고 걱정 없는 모습이 부러웠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강솔을 질투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재아는 소희에게 다가갔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소희야.”재아는 눈과 코가 붉어지며 훌쩍였다. 깊은 후회와 미안함이 가득했다.“
시언은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호칭을 다르게 해야지. 외할아버지께서 오빠라 부르라 하지 않았어?”강아심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턱을 살짝 얹고 귀엣말처럼 낮게 속삭였다.“그날, 파티에서 외할아버지가 당신을 오빠라 부르라 했을 때요, 제 머릿속엔 다 말 못 할 상상뿐이었어요.”아심은 매혹적인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당신은 어땠어요?”시언도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태연히 대답했다.“똑같았어.”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기대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한참 동안 웃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잘생긴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저, 곧 떠나요. 시간을 소중히 쓰는 게 어때요?”시언은 고개를 약간 돌리며 그녀의 달빛 아래 빛나는 부드러운 눈동자를 응시했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아심, 넌 내가 돌아올 때마다 널 찾는 이유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나?”아심은 더욱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렇다면, 이유를 말해줘요. 왜 날 찾는 건데요?”아심은 떠나기 전에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넌 왜 나와 함께였을까?”‘습관이었을까? 의지였을까? 아니면 필요해서였을까?’아니면, 그 모든 이유였을지도 모른다.아심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내려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시언의 어깨에 기대며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정말로 듣고 싶어요?”시언은 단호하게 말했다.“듣고 싶어.”하지만 아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떠나기 직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을지 고민이 밀려왔다....다음 날 아침강재석은 시언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시언을 마당으로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었다.두 사람은 작은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강재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심이 도도희와 함께 떠난다더라고. 도경수도 따라간다고 하던데.”시언은 변함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알고 있어요.”강재석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소희는 재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들 모두 어릴 적에 친부모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면, 재아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며 늘 무시당하고 학대받았다는 점이었다.이로 인해 재아는 스스로를 부정하며, 강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소희는 재아의 마음속에 여전히 선함이 남아 있다고 믿었다. 재아가 임예현을 찾으러 갔던 것도, 단순히 예현이 그녀가 의지할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온두리에서 함께한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 의지했고, 재아 역시 선한 마음에서 도왔다.소희는 재아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심도 너를 용서할 거야. 스승님도 마찬가지일 거고. 이번 일을 너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빨리 몸부터 회복해.”재아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며 계속해서 말했다.“소희 미안해. 정말 미안해.”...재아가 다시 힘없이 잠든 후, 소희는 병실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임구택에게 말했다.“가자. 간병인을 붙였고, 입원 수속도 맡겼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구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무슨 이야기를 나눴어?”소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재아가 계속 뉘우치고 있었어.”구택은 담담하게 말했다.“한 생명을 잃고 얻은 깨달음이라면, 진짜 뉘우치길 바래야겠지.”소희는 구택의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말했다.“나는 진심으로 잘못을 깨달았다고 믿어요. 아까 나한테 부탁하더라고. 스승님께 임신했던 것과 사고로 다친 일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스승님께 더 큰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다고 했어.”구택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도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야?”소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마 아닐 거야.”...깊은 밤.이미 늦은 시각, 아심은 회사에서 마지막 업무를 마무리하고 자료를 정리했다. 컴퓨터를 끄고 모든 서류를 정리한 후, 그녀는 발코니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낮게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강시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