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매우 편안하게 잠들었고, 그 어떤 꿈조차 꾸지 않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태양은 하늘 중간에 떠 있었다. 햇빛은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비췄는데 실로 따뜻해 났다.소희는 임구택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소희의 눈썹과 눈에는 빛과 그림자가 서렸고 이윽고 소희는 환하게 웃었다.구택은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며, 소희의 눈매와 입술을 따라 입맞춤을 했다. 구택은 부드럽게 소희의 입술을 감싸며 말했다. “자기야, 사랑한다고 말해줘!”“사랑해!” 소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구택의 목소리는 더욱 섹시하게 울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봐.”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구택의 입술을 피하며 말했다.“구택, 그만 할 거야 아님 계속할 거야?”“계속할 거야!” 구택은 그녀의 턱을 깨물며 말했다.“네가 그전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만큼 백 배로 사랑한다고 말해야 돼!”소희는 구택의 집요함에 못 이겨 말했다. “평생을 같이 보낼 텐데, 뭐가 그리 급해.”그 말을 들은 구택은 하려던 동작이 멈추며 소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맞아, 우리는 평생 같이 있을 거라 천천히 말할 수 있지, 그저 약속 지키기만 하면 돼.”“약속 지킬게.” 소희는 가볍게 웃으며, 구택의 눈동자에 비치는 햇살에 반짝이는 빛을 보냈다.구택은 다시 소희에게 입맞춤을 했다.입맞춤을 하면서도 소희는 마음 한쪽으로 여전히 강재석을 걱정했기에 곧장 일어나 재석의 방으로 갔다.재석은 이미 깨어나 있었고, 어제보다 더 정신이 맑아 보였고 침대에 기대어 오석과 이야기하고 있었다.두 사람이 들어오자 재석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봐, 너희들을 좀 보자.”소희는 의자를 끌어 다가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날 놀라게 하지 않는다면 난 매일 할아버지 곁을 지킬 거예요.”“그건 안 돼, 여자가 어느정도 성숙됐으면 시집가야지, 어떻게 매일 내 옆에 있을 수 있어?” 재석은 웃으며 구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임구택은 소희의 이러한 생각을 없애버렸다. “소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어, 결혼식은 반드시 치를 겁니다.”소희는 그런 구택을 쳐다보며 말했다. “알았어!”그리고는 강재석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결혼식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빨리 회복하는 겁니다, 할아버지만 괜찮아진다면 할아버지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너와 함께하는 30년 동안 문제없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재석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고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약속 지켜야 해요!”구택은 말했다. “나는 증인이 될게요.”재석은 기쁘게 웃자 소희는 재석의 웃음소리를 듣고 마침내 안심하며 마음을 놓았다.재석은 정말로 회복이 빨랐는데 사흘째 되는 날에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아 구택과 바둑을 두었고 나흘째 되는 날, 뒷산으로 가려고 했지만 소희가 말렸다.그러자 재석이 구택에게 말했다.“네 아내를 빨리 데려가, 너희 둘 다 바쁘지 않아?”구택은 웃으며 말했다. “전 아내 말을 듣는 편이라서요.”“임씨 그룹의 사장이 아내를 두려워하다니, 카리스마 하나도 없네!” 재석은 맘에 들지 않는 어투로 말하자 구택은 침착하게 대응했다.“어쩔 수 없죠, 제 아내의 할아버지가 너무 대단해서 저는 그 분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거든요.”“…….”재석은 할 말을 잃었다.결국, 모든 것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었기에 재석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구택의 이런 교활한 기질은 구택의 아버지와 똑같았다.한편 소희는 두 사람이 어떻게 농담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고 어쨌든 재석을 집에 붙잡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결국, 재석은 뒷산에 가지 못하고 구택과 함께 바둑을 계속 두었다.소희는 옆에서 잠시 바둑을 지켜보다가, 따뜻한 햇볕에 몸이 노곤노곤했다. 이윽고 졸음이 몰려오는 바람에 소희는 구택의 다리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구택은 얇은 담요를 소희에게 덮어주고, 눈은 바둑판을 주시하며 다음
바둑판 위의 바둑돌들이 서서히 채워지고, 흑돌과 백돌의 치열한 대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희의 휴대폰이 옆에서 갑자기 진동하자, 임구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음으로 설정하려고 했는데 소희가 갑자기 깼다.소희는 금방 잠에서 깬 터라 정신이 몽롱한 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소희는 구택의 다리를 베개 삼아 휴대폰을 보자 소시연이 보낸 문자를 읽었다.[소희야, 어제 방송 봤어? 나랑 소유 이번에 일등 했어.]그리고 활짝 크게 웃는 이모티콘도 보냈다.소희는 맑은 눈과 입술을 다물고 가볍게 웃으며 축하 인사를 했다.[축하해.]이 며칠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있느라 시연의 방송을 보지 못했지만, 시연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듯싶었다. [구성혁 선생님 정말 대단하셔. 지금 인터넷에는 그의 수놓은 자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해. 봤어? 오늘 아침에 바로 실시간 검색어 1등에 올랐어.]이는 소희가 예상한 일이었다. 성혁의 자수 기술은 독특하고, 하루에 자수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모든 자수 모양이 다르고 생생하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랬기에 국내에는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단언할 수가 있었다.소희는 성혁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반드시 화제가 될 것을 알았고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를 보니, 정말 예상대로 실시간 검색어1위에 올랐고 댓글은 온통 찬양으로 가득했다.그리고 소동을 지지하는 댓글도 몇 개 있었다.[소동이 디자인한 옷도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나?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어.][맞아, 소동이 안단희를 위해 디자인한 옷을 봤을 때 정말 마음에 들었음. 동대문에서 카피 뜨면 바로 사러 간다. 소동이 디자인한 건 데일리로 입어도 괜찮을 듯.][사실 소시연이 마지막에 이길 수 있었던 건 완전 구성혁 덕분이지. 사실 구성혁의 자수가 없었으면 소동이 디자인한 옷이 1등 했을 거야.][나도 그렇게 생각 함.]……소희는 몇 가지 댓글을 훑어봤는데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계속 읽어 나갔다.그때 구택과 강재석 할아버지의
소희는 이해했다는 듯, 어디서 본 적 있는 듯한 여자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이미 가게의 매니저가 되어 있었고, 소희에게 서비스로 작은 사이즈 아이스크림을 큰 사이즈로 업그레이드해 주며 기뻐서 말했다. “업그레이드는 서비스요, 앞으로도 또 만나면 좋겠어요.”소희는 아이스크림 박스를 받고 환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가게를 나올 때, 입구에서 두 여자가 길가에 앉아 있는 임구택을 쳐다보며 얘기하고 있었다.“정말 잘생겼어!”“아우라가 장난 아닌데, 혹시 연예인인가?”“아닐 거야, 그런 연예인이 있으면 우리가 모를 리 없어.”“전화번호를 물어볼까?”“무뚝뚝해 보여서 못 갈 것 같아!”“한번 시도해 봐. 혹시 알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지!”“그럼 같이 가자. 겁내지 말고!”소희는 걸음을 늦추며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유리창 너머의 구택을 보고 눈앞의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소희는 발걸음을 돌려 두 여자 쪽으로 걸어갔고 두 사람이 일어나 구택에게 전화번호를 물으려 할 때, 소희가 갑자기 다가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저 남자 잘생겼나요?” 청바지 점프수트를 입은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잘생겼어요!” “고마워요. 저 사람의 여자친구인 제가 여러분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드릴게요.” 소희가 웃으며 바로 두 사람의 아이스크림 값을 지불했다.소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멍해 있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당황스러워 말했다.“안 그러셔도 돼요. 저희는 여자친구가 있을 줄 몰라서 그런거여서. 정말 죄송해요!”“괜찮아요. 제 남자친구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소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여자들은 멍하니 쳐다보다가, 소희가 이런 방식으로 오해를 풀어준 것에 감사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가서 전화번호를 묻다가 여자친구가 짠 하고 나타나면 그것보다 더 어색할 수가 없었다.소희가 밖으로 나와 구택에게 레몬수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네 것.” 하
2년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했고, 벤치의 위치조차 변하지 않았다.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도 있었고, 연을 날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해가 서서히 질 때, 노을 아래에서 퍼져나가는 웃음소리는 마치 이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임구택은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소희랑 물었다.“도대체 지금 몇번째로 날 속이는 거야?”처음은 힐드랑 협업을 하던 때였다. 강씨 집안 본가에 가서 옥팔찌를 찾던 중 우연히 이 광장에 왔고, 그때 소희가 집이 근처에 있다고 했다. 두 번째는 추석 때였다. 소희는 이 곳에서 구택과 영상통화를 하며, 여전히 강씨 집안의 본가에 온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소희는 살짝 찝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때 소씨 집안이랑 파혼하려고 혈안이었던 너랑, 이 얘기를 어떻게 하겠어?”노을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더욱 운치 있게 빛났다. 구택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니까 내 탓이라는 소리야?”“당연하지!”구택은 소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나중에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언제 나랑 얘기할 생각이었어?”소희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사실 그때 말할까 말까 많이 고민했고 망설이었어.”소희는 구택과 함께할 때의 안정과 편안함을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면서도, 사실을 말하게 되면 둘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걱정이었다구택은 소희의 손을 꼭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건 맞아, 내 잘못이지. 내가 널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너도 숨기지 않았겠지.”소희는 구택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가늘게 뜬 채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하늘이 도와서 그나마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는데, 우린 또 서로를 의심하느라 쓸데없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네.”구택은 소희를 감싸 안았고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난 무얼 의심한 적이 없어.”‘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건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 내 노력이야. 내 노력의 결과를 의심할 리가 없지.’소희는 살짝 고개를 들어 구택의 눈을 바라봤다.“임구택,
“아니었어?”임구택은 농담으로 말했다.“아니, 인정하진 않을 거야!”소희는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매우 생기발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은 활기 넘치고 매력적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널 좋아했고 넌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을 받아줬다고 얘기해줄게.”“그럼 날 위해 쉴드 쳐주고 있다고 생각하실 거야!”“우리 엄마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네가 일부러 접근해도 엄청 기뻐하실거야.”“그럼 아버님은요?”소희는 그래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계속 물었다.“그건 오해야. 추소용이 일부러 우리 아빠 앞에서 난동을 부려서 아빠가 우리 사이를 의심한 거였어. 지금은 오해도 풀렸으니 당연히 반대하시지 않을 거야.”“반대하시면 어떡해?”“그럴 리가. 내가 있는 한 그런 상황은 없을 거야.”구택의 말투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았지만, 그의 확고함과 결단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마다 확고한 의지와 결심이 묻어났다. “그나저나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추소용 그 자식을 잊을 뻔했어.”2년 전, 소희가 다친 후, 구택은 절망에 빠졌고, 이후 해외로 도주한 주시후와 불곰의 남은 세력을 상대로 복수하는 데 집중했다. 그 일로부터 눈을 떼고 소용을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소희는 입꼬리를 올렸다.“추소용은 상관하지 마, 아직 쓸모가 있어서 잠시 남겨뒀어.”“어디에 있는지 알아?”“알지, 소정인의 회사에 있어.”차는 계속 달려갔고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소희는 또 불안해졌다.“선물이라도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니야?”‘오늘 구택의 여자 친구로서 찾아뵙는 건데 빈손으로 가면 안되지 않을까?’“아니, 우리 부모님도 알고 계셔, 금방 운성에서 와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걸 아니까 몸만 가면 돼.”소희는 내색하지 않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신분을 속인 일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불안감을 남겨두고 있었다.반 시간 후, 차가 멈췄다.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갔고 하인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작은 도련
예전 노정순은 소희를 잘 돌봐 주었지만, 소희는 오히려 그녀를 속였다.임지언이랑 임시호도 일어났고 옅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소희보고 먼저 앉으라고 해, 애가 불편하겠어.”“자, 내 옆에 앉아.”정순은 소희를 데리고 소파로 갔다.소희가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웃는 유민의 눈길을 마주쳤다. 이 순간 더욱 난처해졌다. 소희는 정순 옆에 앉았다. 정순은 신이 난 듯 소희에게 과일을 건네주며 물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하인에게 분부했다. “소희가 단것을 좋아하니까 아까 만든 치크 케이크를 가져와 봐요.”구택은 맞은편에 앉아 낮게 웃으며 말했다.“엄마, 이러지 마요. 안 그래도 긴장한 애가 더 긴장하겠어요.”소희는 구택을 가볍게 째려봤다.‘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우정숙은 웃으며 말했다.“처음도 아니고 다 아는 사인데, 뭘 그렇게 긴장하겠어?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모두 웃기 시작했다.시호는 소희랑 묻기 시작했다.“강 어르신이 편찮으시다고? 우리도 오늘 금방 알았어. 원래 내일에 병문안하러 운성에 가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마침 오늘에 돌아왔지. 뭐니.”소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이미 다 나으셨어요. 관심해 주셔서 감사해요.”“아버님이라고 해야지.”구택은 웃음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정순은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천천히 적응하게 놔둬. 호칭이야 뭐 급하지 않으니까, 소희가 익숙해지면 그때 가서 고쳐도 늦지 않아.”시호가 물었다.“결혼식은 언제 올리려고?”옆에 있던 정순이가 말했다.“당연히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두 사람 이미 결혼했으니까 식도 가능한 빨리 올려야죠.”구택은 소희가 결혼식을 빨리 올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쑥스러워하거나 입을 열지 못할까 봐 먼저 얘기했다. 결혼식에 대한 소희의 마음을 고려하여 주는 모습이었다. “소희쪽 일이 아직 몇 달은 더 걸려야 해요. 우
모두 웃고 떠들면서 분위기는 계속해서 가볍고 즐거웠다.가끔 소희는 구택과 눈이 마주치곤 했는데, 그의 활짝 웃는 표정을 보면서 소희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정말 소희는 구택의 가족이 자신을 이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받아들일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진실을 속인 자신을 용서해주고, 구택을 접근한 목적에 대해 묻지 않았다.소희는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구택 부모님의 배려와 따뜻한 마음은 소희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중, 구택이 시간을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소희가 오후 내내 차를 타느라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소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좀 쉬다가 다시 내려올게요.”노정순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 소희가 너무 반가워서 너희들이 금방 돌아온 것도 다 까먹었네. 소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쉬어, 이따가 저녁 때에 부를게.”“네.”구택은 대답하고 일어서서 소희의 손을 잡았다. 구택의 가족 앞이라 소희는 다소 부끄러웠다. 그래서 구택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의 힘을 쉽게 이기긴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소희는 담담한 척하며 다른 사람들과 인사한 후, 구택의 뒤를 따랐다.계단을 오르자, 소희는 비로소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아직도 떨려?”구택의 표정은 아주 부드러웠다.“봐봐, 거짓말 아니라고 했잖아. 우리 가족 널 엄청 좋아하고 있어. 바로 식을 올려서 세상 사람이랑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거 꾹 참고 있잖아.”소희는 고개를 들어 맑은 눈동자로 구택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기 부모님, 정말 좋은 분들이셔.”“앞으로 자기 부모님이 될 사람이기도 해.”소희는 부정하지 않았다.그들이 위층으로 올라간 후 문을 열자마자, 구택은 소희를 문에 눌렀다. 뜨거운 키스가 소희의 얼굴과 입술에 쏟아졌고, 구택은 소희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소희야, 보고 싶었어.”소희는 이마를 찌푸렸다.“우리 요 며칠 계속 같이 있었잖아.”“같이 있었지만 그저 볼 수밖에 없었잖아.”구택은 소희의 귓가에 입술을 맞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