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훈이 감독을 위협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안단희가 찾은 인맥이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일을 해결했으니.물론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건 소유와 소시연이다.시연은 놀랍고도 노여워서 물었다.“왜죠? 처음에 저희가 뽑은 사람이 바로 구성혁 님이었어요. 그분도 제가 온갖 방법을 다 하여 설득한 건데, 왜 갑자기 팀원을 바꾸시겠다는 건데요?”소유도 덩달아 말했다.“저희는 팀원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감독님,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하지만 감독의 태도도 의외로 강경했다.“이건 제작팀에서 내린 결정이야, 바꾸고 싶지 않아도 바꿔야 해. 전반 프로그램의 성공을 중점으로 생각 해야지. 지금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연은 화가 난 나머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전반 프로그램의 성공이 뭔데요? 저희가 프로그램이 잘 되는 걸 막았나요? 애초에 제 친구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구성혁 님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고 하지도 않았어요! 아무리 어느 한 사람을 편애한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이때 소동이 옆에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구씨 쪽 재봉사는 제작팀이 모셔온 거고, 감독님의 심혈이야. 어떻게 네 공이 된 거지? 제작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너 혼자서 그분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워낙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했던 시연은 소동의 말에 바로 손에 든 물병을 들어 물을 소동의 얼굴에 끼얹고 달려들어 소동을 때리려 했다.물을 맞은 소동은 뒷걸음질을 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연을 노려보았다.스태프들이 보더니 바삐 달려들어 시연을 말렸다.소유도 덩달아 달려가 시연을 말리는 척하면서 기회를 틈타 소동을 걷어찼다.이에 지고 싶지 않았는지 단희도 달려들어 소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나머지 한 명의 스타는 말리기는커녕 멀리 서서 웃으며 싸움을 구경하기만 했다, 어차피 어떻게 바꾸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장면이 점점 통제할 수 없게 되자 감독은 순간 대본을 책상 위로 세게 던
하지만 소유가 소시연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시연 씨가 지금 그만두겠다고 하면 우리에겐 더는 카메라 앞에 설 기회가 없어. 심지어 감독님과 방송국의 미움을 살 수도 있고.”시연이 듣더니 화를 내며 물었다.“그럼 타협하고 계속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겠다고요?”이미 많이 냉정해진 소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연예계는 원래 이런 거야. 나 데뷔 초에 당했던 억울함이 이것보다 더 심하고, 더 많아. 그래도 참아야 하는 거잖아. 연예계에서는 잘 나가는 사람이 많은 자원을 가질 수 있어, 이게 바로 감독님이 말한 게임의 규칙인 거고.”시연이 목이 메어 말했다.“하지만 저 이대로 관두지 못하겠어요.”“그만해.”소유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제작팀이 단희 씨의 명성 때문에 그러는 거라 해도 좋고, 누군가가 뒤에서 조작했다 해도 좋아, 어차피 우린 그들을 이길 수 없어. 시연 씨는 집에 돈도 많고, 또 북극의 디자이너 조수라 하지만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거 아니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싶어도 참가할 수가 없는데.”시연은 순간 자신이 소희에게 했던 약속들이 생각나 더 괴롭고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그래, 내가 이대로 제작팀을 떠난다면 정말 소희 언니의 얼굴에 먹칠하는 거고, 북극 작업실의 체면을 짓밟아 버리는 거야.’……소희가 오후에 곧 일을 시작하려 하는데 마침 구성혁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심지어 성혁의 목소리는 엄청 무거웠다.[소희야, 나와 합작하는 사람이 바뀌었던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소희가 듣더니 순간 멍해졌다.“사람이 바뀌다니요? 누구로 바뀌었는데요?”[다른 팀으로 바뀌었고, 이름은 잘 모르겠어. 아무튼 전에 그 아이는 아니야. 말로는 프로그램 측의 결정이라고 그러던데, 뭔가 이상해. 그래서 너한테 연락해서 물어보는 거야.]소희가 차가워진 눈동자로 덤덤하게 말했다.“잠사만 기다려주세요, 선생님. 제가 바로 시연이에게 물어보겠습니다.”[그래, 한번 연락해 봐. 난 네 체면을 봐서 프로그램
소시연이 대답했다.“소희 언니에게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유는 그러는 시연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크게 실망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소희 씨는 기껏해야 녹화 거부로 제작진을 위협하라고 구 선생님을 설득할 거야. 하지만 단희의 배후에 있는 분은 함부로 건드려서 안 되는 존재야. 이런 상황에서, 제작진은 구씨 수선집이 가져다주는 이슈를 포기하더라도 단희 배후에 있는 그분의 심기를 건들려 하지 않을 거라고.”‘만약 구 선생님이 끝까지 소동과 합작하는 걸 거부하게 되면 제작진 측은 틀림없이 구 선생님께서 출연 거부를 한 방향으로 동영상을 편집하고, 재봉사를 따로 찾아 시연이와 합작하게 할 건데.’‘어차피 단희의 목적은 우리의 인기를 짓눌러 버리는 거고, 결국엔 그 여인이 이기게 될 거야.’‘반대로 나와 시연이는 제대로 제작진의 미움을 사게 될 거고.’그래서 소희까지 불러와 성혁과 함께 제작진에 맞서려는 시연의 행위에 대해 소유는 반대 의견을 내놓은 거였다, 제작진의 미움을 샀다간 그들은 앞으로 예능에 더 출연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을 터니까.하지만 시연은 결국 소희를 찾아왔고, 이에 소유는 어쩔 수 없이 어떻게 감독과 이 일을 해석해야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을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적어도 난 제작진과 대항할 의향이 없었다는 걸 증명해야 해.’……소희는 도착하자마자 먼저 성혁이네 댁으로 향했다.아직 소희를 보지 못한 성혁은 계속 소동과의 합작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제작진 측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많은 조건을 제기하면서까지 성혁을 설득하게 했다. 심지어 제작진 측에서는 구씨 수선집에 대한 선전에 힘을 쓰겠다고, 출연료도 백만 단위로 올려주겠다고 승낙했다.그러나 성혁은 그들이 준 조건에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단 소희를 만나겠다고, 소희가 합작하라고 한 사람과만 합작하겠다고 명확한 태도를 보였다.그래서 감독이 한창 조급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마침 한 스태프가 달려와 말했다.“구 선생님
“소희 언니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소시연이 다가와 소동을 노려보며 묻자 소동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몇 가지 사실을 알려줬지.”소희의 희고 깨끗한 얼굴은 순간 얼음장 마냥 차가워졌다. 그러면서 소동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작업실안에서 감독과 프로듀서가 소희를 보자마자 열정적으로 일어나 맞이했다.“소희 씨 맞죠? 어서 앉아요!”감독이 직접 소희에게 물을 가져다주며 웃음을 드러냈다.“전에 소유 씨한테서 들었는데, 소희 씨가 구 선생님을 설득했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줄곧 기회를 찾아 소희 씨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거든요.”“고맙긴요. 그건 그렇고, 제가 구 선생님을 설득하면서 합작 상대를 시연이로 정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변동이 생겼다면서요?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네요.”감독이 덤덤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소희 씨, 우리 프로그램에서 구 선생님을 모셔온 건 프로그램의 이슈를 최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구 선생님께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시기로 결정한 것도 그분만의 목적이 있겠죠. 그러니 서로의 목적이 최대한 실현되면 끝난 거 아닌가요? 합작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할까요?”소희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당연히 중요하죠. 구 선생님과 합작할 사람이 소동이라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저는 구 선생님을 설득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저 시연이 때문에 간 거지, 소동이 때문에 간 거 아니라고요.”이때 프로듀서가 다가와 소희를 향해 말했다.“소희 씨도 북국의 디자이너라는 건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북극의 효익을 위해 이러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요.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프로그램에서 북극을 많이 홍보해 줄게요, 시연 씨에게도 화면을 많이 주고. 설령 시연 씨가 이번 회차의 포텐이 아니라고 해도 저번보다 더 대박 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어때요?”그러면서 그는 미리 준비한 카드 한 장을 소희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물론 우리도 소희 씨에게 헛수고를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찬호와 몇 마디를 주고받던 시연은 소유의 호출에 급히 전화를 끊었고, 찬호는 안절부절 못하여 결국 임유민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제작팀과 시연이 대치하고 있는 것때문에 소희가 바로 찾아갔다는 말을 들은 유민도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소희 누나 설마 괴롭힘 당하는 거 아니야?]찬호가 걱정되어 물었다.이에 유민이 눈알을 한번 굴리더니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소희 쌤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생각났으니까.”[누구?]“우리 둘째 삼촌!”유민이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구택은 한창 직원을 훈계하고 있었다. 그러다 수신 번호를 확인한 구택은 손을 들어 임원들을 나가게 하고 전화를 받았다.[둘째 삼촌, 소희 쌤이 지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상관할 거예요, 말 거예요?]구택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뭐?”[소희 쌤이 지금 금강시에 있어요. 아직 소희 쌤과 잘해보고 싶다면 어서 가봐요.]“금강시에는 뭘 하러 간 건데?”구택이 물으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말하자면 길어요. 아무튼 빨리 가봐요. 한 예능 프로그램이 그곳에서 녹화하고 있는데, 바로 가서 소희 쌤을 찾으면 돼요.]구택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드러냈다.‘소희가 드라마 제작팀으로 출근한 거 아닌가? 언제 또 예능 녹화하러 간 거지?’하지만 구택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차를 몰고 금강시로 질주했다.……한편 작업실 안에서 감독과 소희는 여전히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감독이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지만, 소희는 여전히 조금도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그리고 소희가 북극 작업실을 대표해 그렇게 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프로듀서는 인맥을 통해 진석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냈고, 진석에게 자초지종을 알려주며 타협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다른 방식을 통해서라도 이득을 많이 주겠다는 조건을 걸면서까지.그러나 진석은 덤덤하게 한마디만 내던졌다.[저는 소희의 의견을 존중합니다.]프로듀서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임구택은 제작진의 임시 사무실이 있는 곳에 도착한 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안단희가 구택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경악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구택을 맞이했다.“임 대표님, 안녕하세요. 전화 한통이면 되는 일을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거예요?”소동과 소시연 등도 구택을 보더니 분분히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러면서도 시연은 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구택이 소동을 도와줄지 소희를 도와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구택이 주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소희는?”시연이 듣더니 즉시 대답했다.“안에서 감독님과 이야기하고 있어요.”이에 구택이 바로 긴 다리를 들어 안으로 들어갔고, 그러는 구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동이 단희를 향해 물었다.“임 대표님이 정말로 우리를 도와줄까요?”“당연하지, 이번 일은 임 대표님이 직접 방송국에 연락해서 지시한 건데. 구은서의 체면이 소희보다 더 크다고.”처음엔 단희도 서수연과 마찬가지로 소희가 구택의 조카딸인 줄 알았다. 그러다 나중에 유민의 가정교사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반대로 구은서는 임 대표와 같이 자란 절친인데, 당연히 구은서의 지위가 더 높겠지.’그러나 지난번에 구택이 소씨 가문에서 소희의 편에 섰던 장면이 생각나 다소 불안해진 소동은 단희더러 따라 들어가 보라고 했다.이에 단희가 한참 생각하더니 결국 구택을 쫓아가 함께 감독 만나러 들어갔다.그러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즉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감독님, 프로듀서님, 임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감독과 프로듀서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놀라운 표정을 드러내며 구택을 쳐다보았다.“임, 임 대표님!”프로듀서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구택과 악수했다.“어떻게 직접 오셨습니까? 저희 지금 북극 작업실의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니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소동 씨와 구 선생님이 합작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소희도 고개를 돌려 구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희의 얼굴색은
임구택이 소희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왔다니!제작진은 방금 소희에게 한 말을 생각하며 등골이 서늘해졌다.구택이 제작진과 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이 더 필요한 건가요?”제작진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공손한 태도로 소희에게 사과하자 감독도 연신 사과하였다.“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임구택 사장님과 소희 씨 에게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합니다!”소희는 마음속으로 화가 나 있었지만, 이런 기회주의자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구택도 소희를 따라 나갔다.소희가 나가자, 소시연과 소동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 시연이 긴장한 목소리로 소희를 불렀다.“문제는 해결됐어. 넌 계속 구성혁 선생님과 협력해. 앞으로는 아무도 너희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시연은 놀란 얼굴로 소희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정말이야? 소희야, 너 왜 이렇게 대단해?”소희는 자조적으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내가 대단한 게 아니야, 구택 씨가 대단한 거지.”시연은 놀라서 구택을 바라보았고 구택은 소희의 비꼬는듯한 어투에 표정이 어두워졌다,둘 사이에 이미 오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번 일은 그들의 오해를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소희는 떠나기 전에 구성혁 선생님을 만나 본인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 피해를 주게 된 점을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그러자 성혁은 웃으며 말했다. “이게 뭐가 대수라고. 이익을 위해 서로 물고 뜯는 일은 정말 많이 봤고 내가 쉽게 당할만한 인물은 되지 못해.”소희는 성혁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만약 제작진이 불편하게 만들면 그게 언제가 됐든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해결할 테니까.”“걱정 마.”성혁은 소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소희는 성혁과 작별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성혁은 소희를 배웅하기 위해 같이 집에서 나왔고 밖에 서 있던 남자를 보더니 소희한테 물었다.“네 남자친구야?”“아니에요!”소희는 일말의 망설
구은서는 목이 메 말했다. “나 아직 이지민 감독님 영화 촬영 중이야. 지금 그만두면, 감독님이 내 분량을 다시 촬영해야 하고, 소희 씨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해. 촬영 끝나면 그때 강성에서 떠날게. 떠나기 전까지 소희 씨 안 괴롭히겠다고 약속도 할게. 그리고 이 시점에 떠나면 소희 씨가 당신이 찔리는 점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구택은 눈을 감고, 강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말했다.“소희 건드리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구택의 말에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강성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소희는 자신의 서재에 콕 박혀서 디자인했는데 한번 했다 하면 몇 시간은 걸렸다.소희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되었고 거실 불은 꺼져 사방이 깜깜했다. 구택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의 긴 기럭지도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굉장히 서글프고 외로워 보였다.소희가 나오자 구택은 스탠드 등을 켰고, 따뜻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녁 준비했는데 식었을 거라서 데워줄게.”“괜찮아, 잠깐 나갔다 올 때 먹고. 밖에서 먹고 올게요.” 소희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차가웠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구택이 곧바로 일어나 따라나섰다.“소희야!”구택의 부름에 소희는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비록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소희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따라오지 말고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오지도 마. 안 그러면 내일 바로 이사 갈 거니까.”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소희에 구택의 눈빛은 어두웠고 낮고 느린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소희야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나한테 이러지 마.”구택의 말에 소희는 목이 메어 대답했다.“나한테 생각 할 시간을 줘.”구택은 상처받은 눈빛이었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 결론 나면 알려줘. 여기서 기다릴게.”“지금의 나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소희는 차갑게 말을 뱉고는 돌아서서 문을 ‘쾅’ 하고 닫았다.구
한 시간 후.강아심은 고개를 숙여 오래된 마을을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강성으로 향해 차를 몰았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아심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김후연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차를 밖에 주차하고, 조용한 골목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부터 김후연 할머니 집 마당에 피어난 등나무꽃이 보였다. 활짝 핀 꽃들에서 달콤한 향기가 골목 가득 퍼져 있었다.꽃들은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꽃도 때맞춰 피어 있었지만 이제 그 꽃을 돌보던 주인은 더 이상 없었다.아심은 나무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가며 문턱을 넘을 때, 지난번에 김후연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해졌다.마당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해당화 꽃잎이 바닥을 가득 메웠고, 옆의 빨랫줄에는 예전에 아심이 김후연에게 사준 숄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지승현은 마당에 앉아 있었다. 김후연 할머니가 늘 앉던 등나무 의자에 앉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구부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그는 초췌한 얼굴에 눈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아!”아심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반쯤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왔어.”“힘내.”승현의 눈이 더욱 붉어지며 목이 메어 조용히 말했다.“할머니가 가셨어. 날 가장 아껴 주신 분이 영원히 떠나셨어.”아심은 그의 슬픔을 함께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할머니는 네 곁을 떠난 게 아니야. 다른 모습으로 곁에 남아 계시는 거야.”“널 곁을 스치는 바람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 그 모든 게 할머니가 돌아와 널 지켜보고 계신 걸지도 몰라.”승현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거의 간절하게 이마에 가져다 댔다.“아심아, 이제 나에겐 너밖에 없어.”아심은 낮게 대답했다.“내가 곁에 있을게.”잠시 후, 양세민 아주머니가 나와 아심에게 말했다.“할머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도련님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계세요.
도도희는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에게 다시 인연이 있기를 바랄게.”도도희의 말뜻을 짐작한 아심은 미소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난 가볼게. 수업 들어가요!”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그녀가 짐을 든 걸 보고 창가에 머리를 내밀며 작별 인사를 했다.“언니!”“아심 언니, 다시 돌아올 거예요?”“누나, 우리 모두 누나를 그리워할 거예요!”아심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강성에 있는 대학에 와야 해!”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아심은 작별 인사를 길게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에 더 머물지 않고 도도희에게 인사를 남긴 뒤,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짐을 차에 싣고, 그녀는 자신의 차를 몰아 저택을 떠났다....강시언은 2층으로 올라가 그 오래된 창고 방에 들어갔다. 그의 키 큰 몸은 벽에 기대어 앉아 밖의 흐릿하고 어두운 날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 후, 그는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시언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강아심, 너 나한테 복수하는 거냐?”이 시간 동안 그녀의 애매한 태도와 고통스러운 모습이 모두 자신에게 일부러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시언은 처음으로 차갑게 아심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불렀고,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다. 그간의 온기와 친밀함이 마치 빗속의 안개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텅 빈 회색만이 남아 있었다.아심은 운전 중이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눈을 살짝 깜빡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시언의 목소리는 어두웠다.“넌 모든 걸 계산했겠지만, 네 마음은 계산해 봤냐?”아심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본인이 분명히 말씀해 주셨잖아요. 특수 요원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시언이 말했다.“그럼 네가 내게 했던 말 중 진심이 뭐야?”아심은 천천히 대답했다.[당신에 대한 존경과 애정, 그리고 당신에
다음 날.강아심은 전화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날이 밝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방 안은 회색빛으로 어두웠다. 그녀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귀에 대고 받았다. “여보세요?”[아심아!] 전화기 너머에서 지승현의 슬픔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그 말에 아심은 눈을 번쩍 뜨며 순식간에 잠이 깼다. 몸은 깨었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 온화하던 김후연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심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고 아심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그 후, 별장의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급한 일이 생겨 강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배웅은 사양하니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보자고 했다.채팅방에서 모두가 놀라며 아쉬워했고,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며 나중에 강성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몇 개의 메시지를 답장하고 난 후 그녀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집을 떠나기 전 며칠 동안 머물렀던 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보고, 문을 닫고 나섰다. 계단을 내려올 때 마침 강시언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단체 채팅방의 메시지를 보고 아심을 찾으려 올라가던 중이었다.아심의 손에 들린 여행 가방을 본 그는 마음이 답답해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아심이 대답했다. “강성에 일이 좀 생겨서요.”시언은 그녀를 주시하며 물었다. “어젯밤 일 때문이야? 아직도 화난 거야?”“아니요!” 아심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아심은 짐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려 하자, 시언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아심!”아심은 걸음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가 말을 이어 나가길 기다렸다.“안 가면 안 될까?” 시언은 깊은 눈빛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힘겹게 끌어낸 말처럼, 간절하게 이어졌다. “안 가면, 안 돼?”아심은 가방 손잡이를 꽉 쥐고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강시언이 말했다. “별일 아니에요.”도도희가 강아심의 손을 놓으며 웃으며 말했다. “됐어,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어.”이에 아심이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쉬세요.”“그래!”세 사람은 함께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길목에서 헤어졌다. 시언과 아심은 각자 사는 별장으로 돌아갔다. 별장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도우미는 이미 퇴근해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시언이 말했다. “저녁을 못 먹었으니, 뭐라도 좀 준비해 줄게.”“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심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피곤해서 입맛도 없어요. 그냥 올라가서 자고 싶어요.”“그럼 그렇게 해. 만약 밤에 배고프면 언제든 전화해.”시언의 말투는 다정했고, 아심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걸어갔다. 시언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달라 보이는 듯해 말문을 열었다.“이번 일, 나도 미리 알지 못했어.”아심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알아.”“하지만.” 시언의 목소리는 밤처럼 깊고 잔잔했다. “시야가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치챘어. 몸을 감추려고 일부러 옷을 더 입고, 변성기를 썼지만, 그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차렸지.”“걔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라서 모른 척했어.”아심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조금 진정이 되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함께 묶였을 때 시언이 빠져나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던 점이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또한, 그 용병들이 두 사람에게 밧줄을 묶을 때 시언의 상처 부위를 피해서 묶었다는 것도 이상했다.다만 그 당시 아심은 마음이 급하고 혼란스러워서, 시언이 자신을 신경 써서 움직이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난 원망하지 않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진짜 노도의 부하들이 사람을 사서 복수하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심은 얕게 웃으며 다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는 멈춰
아심은 말을 마치고 바로 물었다.“조하루는 어떻게 됐나요?”시야는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무사히 집에 데려다줬어요. 집이 꽤 가난해서 할아버지가 아프신데도 병원에 갈 돈이 없다고 해서 저희가 그 집에 돈을 좀 두고 왔어요.”“놀라게 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하루 군에게도 여러분이 무사하다는 걸 전했습니다. 그저 장난이었다고 말했어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천만에요! 예전엔 우리가 잘 몰랐지만, 이제 앞으로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시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농담 그만하고, 빨리 떠나!” 시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야는 아심에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기 사람들을 불러 함께 산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아심을 향해 말했다.“이 일은 진언 님과는 아무 상관 없어요. 전부 제 생각이라서, 절대 진언 님을 탓하지 마세요!”아심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탓 안 해요. 장난이었다면서요?”시야는 아심에게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시언의 차가운 눈빛이 번쩍이자 급히 사라졌다.잠시 후, 아까까지 살기와 긴장으로 가득 찼던 오두막은 다시 조용해졌다. 원래의 고요하고 텅 빈 분위기로 돌아갔다. 방 한가운데의 불만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고, 나뭇가지가 탁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시언은 아심 앞에 앉아 물병을 건네며 물었다.“놀랐어?”아심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모두 무사하니 더 좋은 거 아니에요? 그렇죠?”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시야 대신 사과할게.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아심은 방금 전의 격렬한 감정이 갑자기 멈추자 머릿속이 멍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아니요, 물어볼 건 없어요. 다 알겠으니 우리 내려가요. 벌써 늦었어요. 도도희 이모가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방금도 전화했었어요.”시언은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지금 내려가자.”두 사람은 자리에서
굉음이 천둥같이 울려 퍼지며, 마치 지붕을 뚫을 듯했다.아심은 눈앞의 상황을 보고 멍하니 굳어버렸고, 시언은 아심을 두 팔로 꽉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아. 시야가 장난친 거야.”“시야?” 아심은 멍한 얼굴로 시언이 발로 차서 바닥에 쓰러뜨린 거면 남자를 바라보았다.가면 남자가 몸을 일으켜 목소리 변조기를 벗고, 이어서 얼굴에 쓴 가면까지 벗었다. 그제야 드러난 것은 미소를 띤 잘생긴 얼굴이었다.“넘버세븐, 나 기억하지?”아심의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눈물은 여전히 그녀의 눈에 고여 있었고, 격렬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아심은 시야를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이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시언은 그녀를 풀어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배고프지 않아? 뭐 좀 먹고 여기서 잠시 기다려.”시언은 아심을 의자에 앉히고 나서 시야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나와!”시야는 아심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건 내 생각이었어. 그냥 장난치려던 거야. 진언 님과는 아무 관련 없어. 혼나고 올 테니까, 이따가 와서 제대로 사과할게.”아심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너무나 강렬했던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멍한 상태였다.시언과 시야가 밖으로 나가자, 나머지 용병들은 일제히 일어나 벽 쪽으로 물러섰다. 그들은 총을 안고 긴장감 있게 서 있었다.뒤에 있던 면수건을 쓴 남자도 면수건을 벗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전 시야의 부하예요. 시야가 명령을 내린 거라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화가 나셨다면 그를 탓하세요!”그는 말이 끝나자 아심 앞에 놓인 구운 고기를 깨끗한 칼로 잘라 작은 조각들로 내밀었다....오두막 밖, 시언은 거대한 나무 아래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야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갑자기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보고하듯 말했다.“진언 님, 보고드릴 일이 있어요.”나무 아래 걸린 백열등이 차갑게 빛났고, 시언의 눈빛도 차갑고 무미건조했다.“말해.
“안 돼!” 강아심은 손에 쥔 줄을 힘껏 당겼다. 가면 남자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심은 줄을 약간 풀며 다시 외쳤다.“우릴 보내 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살아남을 생각 하지 마!”갑자기 꽉 닫혀 있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불길이 휙휙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팽팽한 긴장감에 한층 더 싸늘한 기운이 더해졌다.새로 들어온 열 명이 넘는 무리가 무장한 채 총을 들고 아심과 시언을 겨누었다. 이에 시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새로 들어온 무리의 리더는 역시 용병 차림을 하고 얼굴을 면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는 가면 남자를 향해 눈길을 주며 말했다.“네가 진언을 제압하지 못할 줄 알고 위에서 날 보냈다.”그러자 가면을 쓴 남자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여자를 과소평가했을 뿐이지!”면수건을 쓴 남자는 아심을 향해 말했다.“너에겐 한 생명밖에 없어. 목숨 하나로 하나를 바꿀 수 있어. 네가 나갈지, 진언이 나갈지 선택해.”또한 가면을 쓴 남자는 아심을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날 죽여도 소용없어. 여기에 있는 이 많은 총과 사람들이 있어. 나를 죽이면 너희 둘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그러고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알아둬.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야. 네가 남든, 진언 대인이 남든.”“네가 날 잡고 있으면 내 사람들은 조금은 신경 쓸지 몰라도, 그의 부하들은 내 목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 가면 남자는 새로 들어온 리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심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시언을 올려다보았고, 목소리는 쉰듯하지만 차분했다.“좋아, 내가 남을 테니 진언을 보내줘.”시언의 눈빛은 깊어지고, 아심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가면을 쓴 남자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의리만 생각하지 말고, 남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아둬. 내가 충고하건대, 잘 생각하고 결정해.”“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아심은 줄을 세게 죄며, 차가운 눈빛을 빛냈다.
아심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나랑 키스해줘, 제발.”시언은 고개를 숙여 아심의 부드럽지만 결연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깊어졌다.아심은 그의 턱에 입을 맞추고 살짝 깨물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시언의 피부에 닿으며 얕은 숨결과 촉촉한 감촉이 시언을 감쌌다. 아심의 눈빛은 비에 젖은 듯 촉촉했고, 마치 갈고리처럼 그를 끌어당겼다.바깥에서 몰아치는 바람과 빗소리처럼, 남자의 분노가 서서히 진정되었다.시언은 눈꼬리를 날카롭게 치켜세우며 가면 남자를 한 번 노려본 후, 고개를 숙여 아심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맞추었다. 아심은 곧바로 그의 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멀리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두 사람은 깊은 산속에 홀로 있는 듯 서로만을 바라보며 키스를 나눴다. 아심은 눈을 반쯤 감고 시언에게만 집중했다. 아심의 귀에는 오직 빗소리와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이 들렸다.아심은 시언을 더 유혹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매혹적이고 나긋나긋하게 행동했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낮고 부드러운 신음은 시언과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은밀한 소리였다. 마치 화려하게 피어난 꽃처럼, 그 소리는 남자의 정신을 단숨에 빼앗아 갔다.한참 후, 아심은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희미하게 말했다.“약속해 줘. 기회가 생기면, 곧바로 떠나요. 나 신경 쓰지 말고.”시언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아심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묶여 있던 줄이 느슨해졌다. 아심은 재빨리 손을 뽑아내고 시언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몸을 돌려 가면 남자 쪽으로 날아들다.가면을 쓴 남자와 그의 부하들은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아심이 방 가운데까지 나아갔을 때야 그들은 아심을 막으려고 했다.“쾅!”아심은 손에 쥔 줄을 휘둘러 덤벼드는 용병의 목에 감았다. 그는 줄에 맞아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아심은 발을 멈추지 않고, 한 손으로 줄을 휘두르며 방어하고, 다른 발로 다가오는 용병을 걷어차며 날려버렸다. 강렬한 눈빛이 목표를 향
강아심은 그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살짝 빛났다. 아심은 가능한 시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벽 구석에 깨진 도자기 조각이 보여. 우리가 어떻게든 가서 그걸 손에 넣어야 해.”깨진 도자기 조각은 절반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고, 아마도 산에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서 밥을 먹다 그릇을 깨뜨리고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여자의 숨결이 부드럽게 시언의 귀를 간질이며 퍼졌다. 아심의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닫히며 그의 귀밑 민감한 피부를 살짝 스쳤다. 시언은 몸이 순간 굳어졌다가 늦게서야 대답했다.“소용없어.”“뭐?” 아심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이 줄엔 합금 섬유가 섞여 있어. 칼로도 자를 수 없으니 도자기 조각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해.”시언이 낮게 말하자, 아심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정말 당신을 특별대우해 주긴 하네요!”이번엔 시언이 이해하지 못했다.“응?”“아니, 그런 거지! 일부러 합금 줄까지 써서 묶어놨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이런 대접 못 받을걸요!” 아심이 말하자, 시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느새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들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교대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마지막 교대 때는 가면을 쓴 남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모두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텅 비었던 방은 순식간에 꽉 찼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방 안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시언과 아심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섰다. 시언은 벽에 몸을 대고 서서 손으로 아심의 등을 감싸며 가면 남자를 주시했다.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는 방 한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용병들은 방 안에 나무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방금 비가 내린 터라 산속은 밤이 되면서 습기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