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우청아는 입술을 깨물었고 그녀의 고집처럼 눈물은 속눈썹에 맺혀 떨리고 있었다.“물지 마요!”“금방 발랐는데 물면 다시 발라야 하잖아.”그의 립스틱은 약간 오렌지빛이 도는 붉은색으로, 부드러움 속에 약간의 장난기가 묻어나 우청아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장시원은 립스틱이 이렇게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특히 우청아가 지금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한 모습과 어울려서 그녀의 부드러운 매력이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두근거리게 했다.원래 연애에 능숙한 그였지만, 지금은 마치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당황스러웠고 그는 숨이 가빠 와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어?”우청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말해봐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나한테 당신을 줘요.”장시원이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속삭였는데 그의 목소리는 유혹적이고 섹시했다.“3개월이면 돼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3개월 이상 한 여자를 만나지 않아요. 3개월이 지나서 내가 당신한테 질리면 우리 사이는 아무런 빚도 없게 될 겁니다.”우청아는 부들부들 떨었고 장시원은 그런 모습에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싫어요?”우청아의 눈물이 갑자기 떨어졌다. “그거 말고는…….”“이거 말고 뭐가 있어요?”장시원의 얼굴이 갑자기 차가워졌는데 더 이상의 인내심도 없어져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우청아 씨, 본인 몸 말고 내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저를 벌하셔도 되잖아요. 제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평생 당신의 조수로 일할게요.”“당신을 벌하라고?”장시원은 갑자기 웃더니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녀 뺨의 눈물을 닦아냈다. “당신이 매일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데, 그게 나에게 벌을 주는 거지 당신을 벌하는 건가?”우청아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끊어 말했다. “그럼 그냥 빚진 걸로 둬요, 난 갚을 생각 없으니까!”“다시
장시원은 그녀의 옷 매무새를 정돈해 주고는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우청아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그를 쫓아갔다.장시원은 현관에 도착해서 문을 열려고 손을 뻗자 우청아는 달려가 문을 막으며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밖에 비 오는데, 어디 가려고 하는 거예요?”장시원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말했다. “우청아 씨, 오늘 밤은 봐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자극하지 마요!”우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돼요, 당신은 못 가요. 게스트 룸에서 자더라 하더라도 상관없고 앞으로 나를 친구로 대하지 못하겠다 해도 괜찮으니까 오늘만큼은 못 가요!” 장시원의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우청아 씨, 난 당신을 봐주고 있다고 말했고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요!”그가 말하면서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지만 우청아는 꿋꿋이 문 앞에서 막으며 말했다.“어쨌든 오늘 밤엔 못 가요!”장시원의 눈빛이 서늘해졌고, 그녀를 옆으로 밀어내며 다시 문을 열려고 했다.우청아는 달려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기 시작했다.“장시원,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요?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장시원은 그녀의 무력하고 슬픈 울음소리를 듣자 마음이 아팠다.“놔요.”“안돼!”우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고집스럽게 말했다.“그럼 내가 놔줄게요. 시카고로 돌아가서 다시 돌아오지도,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요.”장시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청아는 순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불안하고 마음이 아파졌다.“이 정도면 손 놓을 수 있겠어요?”상처받은 눈빛으로 우청아를 응시하는 장시원이었다.우청아는 그를 꽉 안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장시원을 놓아주고 각자 갈 길을 가야 했다.장시원은 자신을 안고 있던 그녀의 팔을 천천히 떼어내고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문이 열리자 밖의 차가운 공기가 훅 들어왔고 우청아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텅
“무서워요!” 우청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뭐가 무서운데요?”우청아는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아이도 낳았으면서 뭐가 무서운 거지?” 장시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 그 남자랑 몇 번 했는데?”우청아의 볼이 뜨거워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번이요.”장시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우청아, 당신 혹시 강제로 당한 거에요?”우청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고 장시원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찼다. “그러니까 당신은 무서운 겁니까, 아니면 하기 싫은 겁니까?”우청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생각 좀 해보고요.”“성인인데 뭐가 그렇게 고민인 거죠? 본인은 필요 없다 이건가?”장시원이 비웃듯 말하자 우청아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화가 났다.“난 당신처럼 잠자리를 밥 먹듯이 하진 않거든요. 아무나랑은 안 하니까.”“내가 아무 나라고요?”장시원이 화를 내자 우청아는 모르는 척 머리를 돌렸다.장시원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몸을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우청아 씨는 정말 나를 괴롭히는데 선수신 거 같네요.”“아니면 다른 사람을 찾으시던지요.”우청아는 여전히 삐져 있자 장시원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내가 여기서 당신의 화를 받아주고 있겠어요?”하지만 우청아는 그를 무시했다.“화내지 마요. 아까는 당신이 하도 괴롭히길래 급해서 말을 심하게 했네요.”우청아의 볼에 가까이에 얼굴을 묻고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나랑 할 것도 아니면서 못 가게 하는 거 일부러 그러는 거죠?”그의 말에 우청아가 입을 열었다.“비도 너무 오고 주성 씨도 안 왔잖아요. 그런데 어디 가려고요?”우청아의 말에 장시원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도 나한테 조금은 관심 있나 봐요, 맞죠?”우청아의 긴 속눈썹은 떨고 있었고 그녀는 조용히 있었다.장시원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지만, 그의 말투는 비꼬는 듯했다. “당신 마음속에 아직도 그 남자가 있다면 강요하지
오랫동안, 우청아는 여전히 자신의 몸 위에 반쯤 누워있는 남자를 밀며 물었다.“잠들었어요?”“음, 움직이지 마요.” 장시원은 투덜거리며 말했다.“방으로 돌아가서 자요, 벌써 늦었어요.”우청아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장시원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하지만 여기는 장시원의 것이 아니었고 우청아는 그와 친구로 지내길 원했기에 장시원은 낙담했고 무력감을 느꼈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생각나고도 얻을 수 없는 여자는 처음이었다.장시원은 천천히 일어나 소파 위에 두었던 우청아의 목욕 가운을 집어 들고 욕실로 향했다. 몇 걸음 걷더니 장시원은 뒤돌아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다른 가운 준비해 줄 순 없어요?” 우청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에 계속 머물 계획인가?’장시원은 키티 가운을 다시 한번 싫어하는 눈으로 보더니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안방으로 가자 우청아가 침대에 앉아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았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은 그렇게 평온하고 온화해 보였다.장시원이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밤에도 여기 안방에서 잘 거니까, 샤워하고 자요.”우청아는 그가 지난번 잘 못 잔 걸 알고 서둘러 말했다. “당신이 게스트룸에서 자요. 요요가 밤에 잠을 깨울 수도 있으니까. 난 이미 익숙해져서 괜찮거든요.”“아니면 여기서 같이 잘래요?”장시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하자 우청아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아까 내가 했던 말은 잊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장시원은 침대에 앉아 그녀가 문을 나갈 무렵 다시 입을 열었다.“굿나잇 인사하는 거 잊지 말고요!”우청아는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요.”밤중에 비가 더 세게 내리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며, 우청아는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항상 옆방에 가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잠이 들
우청아는 한숨을 살며시 내쉬고, 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겼다. 마음속은 말로 표현할 수없이 혼란스러웠지만 방금 장시원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고 예전처럼 평온했다. ‘그러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걸까? 어제 술을 어느 정도로 마신 거지?’우청아는 애써 생각을 해보려 하지만, 머리는 어제처럼 복잡했다.“늑장 부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요!”장시원이 갑자기 문을 두드리자 우청아는 깜짝 놀랐다.“오!”장시원이 욕실 안에서 자신이 당황해하고 고민하는 표정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우청아가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장시원은 식탁에 앉아서 요요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요요는 우청아를 보자마자 반가워했다.“엄마!”“안녕!”우청아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고 요요가 말했다.“밥 먹을 때 엄마를 깨우려고 했는데, 삼촌이 엄마가 늦게 자서 좀 더 자게 하자고 했어요. 엄마, 잘 잤어요?”우청아는 자연스럽게 장시원을 바라보았다.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계란말이를 집어주면서 말했다. “어때? 몸이 불편하면 오늘 월차 써도 돼요.”“아뇨, 정신 차렸어요.”우청아는 떨떠름해서 계란말이를 받아먹으며 말했다. “요요 돌봐줘서 고마워요.”날이 밝자 장시원은 어제저녁 우청아가 봤던 자아 통제가 안 되고 우울해하는 모습이 아닌 예전의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라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우청아도 어젯밤의 일은 없었던 걸로 생각하려 했지만 장시원이 그녀를 바라보며, 냉랭하고 조금 놀리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어젯밤 일, 고려해 보는 거 잊지 마요!”우청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아무래도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금요일 밤, 소희는 소정인의 전화를 받았다.내일 가족 모임에 오라고 했고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다.소정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임씨 집안에서 과외 선생님으로 일하는 걸 알아. 좀 늦게 와도 괜찮으니까 아빠가 널 데리러 갈게.”하지만 소희는 단호하게 거절했
“이미 유화연 부인과 약속을 잡았어요. 오늘 낮에 해연빌딩에서 만나기로 했죠.”그의 질문에 진연은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조금 스쳤다.“그럼 소동이 보고 예쁘게 꾸미라고 해.”“걱정 마요!”이때 소동은 자기 방에 앉아 있었고 소파 위에 진연이 골라준 드레스를 바라보며 멍해있었다.진연이 말하길 유씨 집안의 아들이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는데, 훤칠한 외모지만 키가 조금 작을 뿐이라고.소동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키가 조금 작다니, 유빈은 자기보다도 작았다.심란한 소동은 휴대폰을 들어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결되자마자 소동은 억울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지훈이 놀라며 물었다. “소동아, 무슨 일이야?”소동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부모님이 저 더러 디자인 스튜디오를 닫고 빨리 결혼하라고 해요!”지훈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런 일이 있었어?”“결혼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 좀 도와줘요.”소동이 입을 막고 울음을 터뜨렸다.“울지 마! 네가 울면 내 마음도 아파.”지훈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위로했으나 소동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무슨 일이든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녀를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지훈에 소동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번에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기다릴게요.”“알았어, 바로 갈게!”소동은 전화를 끊고 금방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씻고 화장을 했다. 이어서 진연이 새로 사준 드레스로 갈아입고, 문을 열고 좌우를 살펴본 뒤, 진연이 거실에 없음을 확인하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소동은 진연에게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차를 타고 지훈을 만나러 갔다.저번에 만났던 레스토랑에 소동이 도착하자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훈은 이미 자리를 예약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소동이 들어서자, 지훈은 바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소동의 손목을 잡고 앉게 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동아,
“정말이에요?” 소동이 놀라며 기뻐하자 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이 예능 프로그램에 별로 기대가 없어서, 시청률도 그다지 높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후원금도 비싸다며 거절했어.”소동은 순간 실망했다. “거절했다고요?”하지만 그녀는 눈동자가 반짝이며 설명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꽤 인기가 있어요. 방송도 시작하기 전에 벌써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어요.”소동의 말에 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제작진이 전에 King을 심사위원으로 모셔오겠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얘기하기 어려워.”그는 말을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아버지한테 프로그램 후원을 부탁한다면, 너를 도와줄 수 있겠지?”소동은 부끄러움을 감추며 말했다. “당신 집이 프로그램 후원사가 되고, 당신 제작진에게 나를 추천한다면, 나도 기회가 있겠죠!”지훈이 일어나 소동 옆에 앉으며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소동아, 나는 예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너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내가 아버지한테 부탁할 수 있어.”소동은 고마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정말 나를 도와줄 수 있어요?”“물론이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지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반쯤 농담처럼 말했다. “소동아,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도 나에게 조금은 표현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소동은 긴장해서 몸이 굳었고, 지훈에게 이렇게 큰 부탁을 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으며 지훈의 볼에 뽀뽀했다. “지훈 씨, 나도 당신한테 호감 있어요.”지훈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소동아, 이 말을 들으려고 오래 기다렸어. 우리 조용한 곳에서 좀 더 이야기하자.”소동은 갑자기 당황했다. 소동은 지훈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빨리 제안할 줄은 몰라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지훈 씨, 먼저 내가 부탁한 일부터 해줘요. 우리 사이는 천
진연이 집에 없는 소동을 발견하고 전화를 걸었을 때, 소동은 지훈의 침대 위에 있었다. 지훈은 핸드폰을 들어 한 번 보고는 바로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땅에 버리자 바닥에서 굴러 흩어진 두 사람의 옷 위로 떨어졌다.……일요일 오후, 소희는 M 국에서 돌아온 강솔을 만났다. 강솔은 도경수의 오랜 친구의 딸로, 그림을 사랑해 어릴 적부터 거의 도경수 곁에서 자랐다.처음 소희와 진석이 북극 디자인 작업실을 창립할 때, 강솔은 경성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북극 디자인 작업실은 이미 알려지기 시작했고, 소희는 창작만 하고 스튜디오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석은 강솔을 끌어들여 디자인 총괄로 만들었다.하지만 그녀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고,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M 국으로 떠나 공부하러 갔다가 오늘 막 돌아왔다.몇 명이 모여 군우빌딩에서 만났을 때, 소희와 진석은 먼저 도착해 방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강솔이 꽃나비처럼 방 안으로 들어와 소희를 껴안으며 말했다. “소희야, 너무 보고 싶었어!”진석은 한 걸음 물러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네요.”단발머리, 예쁜 얼굴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석을 바라보는 강솔이었다.“이 분은 누구세요?”진석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강솔씨 상사입니다.”“아, 제 상사셨군요, 죄송해요.”강솔은 머쓱해하며 말을 이었다.“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진석은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하영이 뒤에서 들어오며 웃으며 말했다. “자, 다들 앉아요!”강솔은 소희를 안 놓아줬다.“소희야,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이번에 너 때문에 귀국했어!”처음 소희가 도경수에게 그림을 배울 때, 강솔은 도경수의 집에 살고 있었다. 강솔은 소희보다 세 살이 많아 소희를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매일 ‘소희야, 소희야’하며 불렀다. 당시 소희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고, 강솔이 아무리 치대도 반응하지 않았지만,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