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는 피하지도 않고 흩어진 종이를 사이에 두고 남자의 차가운 눈을 마주쳤다.그녀는 약간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드러냈다.시원은 전에 청아의 멍청하면서도 귀여운 이런 모습을 가장 좋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장 싫증이 나는 모습으로 변해버렸다.그리하여 두 눈에서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뭘 봐요? 그런 억울하다는 표정 짓지 마세요! 역겨워요.”청아는 눈동자가 떨리자,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 눈을 떨구고 땅에 흩어진 종이를 바라보며 쪼그리고 앉았다.그리고 천천히 서류를 한 페이지씩 정리하면서 살펴보았다.곧 최결이 이전에 정리한 자료 중의 일부 빠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맨날 회사에 앉아서 무슨 생각하는 겁니까? 연애나 하고 데이트나 할 궁리만 하는 겁니까?”시원은 얼굴을 굳히고 차갑게 웃으며 비꼬았다.“연애할 때는 무척이나 적극적이죠? 남자한테 버림받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 아니면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만 있으면 덮치고 싶은 겁니까?”“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연애하는 겁니까?”청아는 반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손에 든 자료 묶음을 꼭 쥐었다.그리고 눈물이 눈시울을 향해 솟구쳤지만 억지로 참아냈다.청아는 계속 흩어진 종이를 주웠는데, 수척해진 몸은 더욱 여려진 듯했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시원은 원래 계속 욕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가슴이 미어져 결국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다만 가슴의 울기가 가라앉지 않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몸을 돌려 보지 않으려고 했다.이때, 사무실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배강이 들어왔다.서류를 줍고 있는 청아를 한 번 보고 노한 얼굴의 시원도 한 번 보고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청아 씨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왜 이렇게 화내는 건데?”배강은 말하면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청아를 도와 땅에 흩어진 자료를 주우려고 했다.“혼자 줍게 놔둬! 상관하지 마!”시원은 무거운 소리로 외쳤다.배강은 고개를 들어 의아해했다.그는 시원과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여태껏 시원이가 이렇
고개를 돌린 장시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배강을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야?”“부사장이 너한테 엄청 혼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 화내는 거 구경하려고 왔지.”배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역시, 무섭긴 하네.’ 그 상황에서 울지 않은 우청아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시원은 담배를 피우고 나서는 차분하게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다 봤으면 이만 가지?”“그래, 간다 가.”배강은 웃으며 일어났고 이내 시원에게 당부했다.“청아 씨 좀 그만 괴롭혀. 저렇게 귀엽고 예쁜 사람 욕할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어?”“어.”하마터면 본인 친엄마에 의해 하온에게 팔릴 뻔했다. 더군다나 다른 남자랑 데이트까지 했는데 본인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청아를 보며 시원은 화를 안낼래야 안 낼 수가 없었다.‘하온이랑 사귀면 진짜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건가? 아니, 집안 배경은 알고나 있는 거야?’청아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정말 하온과 사귄다면 우씨 집안은 그녀를 호적에서 파고도 남았다.……청아는 자신의 의자 털썩 앉고는 멍해 있었다. 시원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데이트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 그의 분노는 자연스레 청아에게로 옮겨졌고 그녀를 많이 원망했을 것이었다.자신이 여자가 생기지 않는 한 청아도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청아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건 바로 그의 지병을 치료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그녀는 시원으로 하여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도록 권고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필경 그는 미혼이었고 후사도 없는 게 문제이긴 했다. 그가 좋아진다면 아마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화가 단단히 나있어서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꼼짝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청아를 보더니 최결은 서랍에서 반창고를 꺼내고는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미안해요, 아까 프린트할 때 제가 빠뜨린 거였더라
배강은 뒤를 힐끗 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남자들이 저러는 날이 며칠 있긴 한데 장 사장은 그 가운데서도 심각하죠.”청아는 잠시 멍해있다가 이내 피식 웃었고 팔짱을 낀 채 서있던 배강도 따라 웃었다.“웃으면 됐습니다. 시원이도 곧 괜찮아질 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네, 감사합니다.”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마침 청아 씨 같이 유능한 직원이 부족했는데 장 사장한테 잘 말해서 내 밑에서 일하게 할까 생각도 했어요. 아마 장담하건대, 지금보다 훨씬 편할 겁니다.”배강의 얘기에 청아는 놀랐다는 듯 눈이 커졌다.“진심으로 하시는 얘기세요?”“물론이죠, 청아 씨만 오케이 하신다면 당장 장 사장한테 말할 겁니다.”배강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청아를 바라보았지만 청아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저를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장 사장님이 성격이 날카로우시지만 저는 그분 덕분에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었거든요. 사장님께서 화를 내신 건 확실히 제가 잘못을 했고 이는 사장님을 탓할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 감사하지만 부대표님의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좀 더 생각하실 시간 필요하지 않나요?”“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다시 한번 붙잡는 배강 이였지만 청아는 고개를 저어 보였고 배강은 매우 아쉬워했다.“제 매력이 장 사장보단 못한가 봅니다.”“그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이곳이 익숙해진 것뿐입니다. 부대표님의 능력이야 대단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바입니다.”긴장해하는 청아에 배강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농담이거든요!”“장 사장님께서 저를 스카우트하셨고 사장님이 저보고 나가라고 하시긴 전까진 그 어디도 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부대표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고 하면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그 말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가서 일 보세요.”“네!”배강은 청아를 보며 웃더니 돌
그는 배강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어투로 얘기했다.“진짜 그렇게 말했다고?”“어 그래서 나도 되게 아쉬웠어.”시원의 어두웠던 얼굴은 금세 환해졌고 입꼬리도 살살 올라갔다.“비서가 필요한거면 내가 찾아줄게. 이왕이면 예쁜 사람으로.”“내가 넌 줄 아냐? 내가 마음에 든 건 청아 씨의 능력이야.”“뭐가 마음에 들었든 간에 그 사람은 절대 너랑 일할 순 없을 거야. 그리고 너 청아한테서 떨어져!”시원의 경고에 배강은 이렇게까지 그녀를 감싸고도는 게 이상하다고 느껴졌다.“설마 청아 씨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니지?”“아니야. 나랑 그 사람 사이에 얽힌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니까 넌 좀 빠져있어!”“그래 어쨌든 간에 청아 씨한테 잘해주고 자꾸 혼만 내지도 말고.”“내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걔는 알고 있을 거야.”시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일이나 해, 끊어!”“아 맞다, 청아 씨 이마 깨졌다.”“알았어!”전화를 끊고 나니 화가 많이 가라앉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확실히 지나치게 행동한 거 같아 그녀를 불러들여 많이 다쳤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날 밤 청아가 울면서 싫어하던 모습과 어제 하온과 데이트를 할 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대조가 되더니 분노가 또다시 차오르고 있었다.‘내가 정말 너한테 잘해주고 있다는 걸 넌 알기나 할까?’정말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오자 머리가 지끈 해졌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더 생각했다간 그녀를 달래주는 게 아닌 다시 한번 화를 낼 것 같아서였다.결국 그는 최결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우청아 씨 아까 보니 다쳤던데 소독약이랑 연고 사서 갖다주세요.”“네 알겠습니다.”이틀 뒤에 기원과의 협력이 성사되었고 최결은 계약서를 가지고 시원에게 가자 시원은 흘끗 보았다.“잘 됐네요.”“기원이 저희와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했고 저희는 저희가 할 일만 했을 뿐 초기에 청아 씨의 공이 컸습니다.”시원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옆 책상에 올려져있 던
한 여름이라 아침부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실내에 에어컨이 있었지만 야외 촬영이 있었기에 파라솔 밑에 숨어 태양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는 얼음을 선풍기 밑에 내려놓고 조금이라도 찬 바람이 나오길 바랬지만 마민영은 짜증을 내며 매니저에게 물었다.“소희한테 얼음 더 있어요? 아이스크림 많이 사서 보내주고 선풍기도 두 대 더 가져다줘요.”“지금 가져다드릴게요.”매니저는 바로 밖으로 나갔고 급하게 걷는 바람에 하마터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소동이와 부딪힐 뻔했다.“그리 급히 어디를 가시는 거에요?”소동은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민영 씨가 소희에게 아이스크림이랑 선풍기 몇 대 가져다줘라고 했거든요.”소동은 질투가 나 아니꼬운 어투로 말했다.“마민영이랑 소희가 많이 친해졌나 봅니다. 마민영 눈엔 소희밖에 없는걸 보니 마민영 한 사람을 케어해주는 것도 부족해 한 명 더 느셨네요.”“민영 씨가 그러라 하는데 저희도 어쩔 수가 없죠.”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제가 보기엔 소희도 고의적인 것 같은데, 마민영 믿고 당신들한테 이래라저래라 마음대로 부려먹고, 나였으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소동이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차가운 소리가 들려왔다.“소동 씨?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소동은 마음이 철렁했고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모르는 민영이가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깜짝 놀란 매니저는 줄행랑을 쳤다.“불만이 있으시면 뒷담화 말고 앞에서 얘기하세요. 금수저 출신의 아가씨께서 상스럽게 뒷담화를 하시는 게 역겹지 않습니까?”소동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그럼 당신은 저를 존중해 주신 적은 있으십니까? 저야말로 당신의 디자이너인데 소희에게 디자인을 맡기신 당신의 안중에는 제가 있긴 합니까?”“당신의 디자인은 쓰레기 같아요. 만약 내 사촌 오빠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고용하지 않았을 겁니다.”그녀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그리고 본인이 나의
“넌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마민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고 소동은 눈앞에 있는 추소용을 보더니 표정이 민영이보다 더 안 좋았다.“난 이 사람 동생인데 네가 뭔데 우리 누나를 욕해? 진짜 한대 치는 수가 있어?”소용은 민영을 매섭게 바라봤고 이에 질세라 민영은 오히려 세게 나갔다.“날 친다고? 그래 어디 한번 쳐보시던지!”민영을 치려던 소용의 손이 소동에 의해 제지당했고 소동은 민영에게 말했다.“이렇게 된 이상 우리의 협력은 없었던 걸로 하죠. 지훈 씨에게는 그만뒀다고 얘기할 거고 바로 제작진 팀에서 나가겠다고 할게요.”“나도 바라던 바에요!”민영은 차갑게 톡 쏘아붙였고 소용은 자신을 제지시키는 소동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누나 내가 누나 대신 한 대 쳐줄게!”“나를 친다고? 한번 쳐봐. 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면 당신은 물론이고 당신네 집안 가만히 놔두진 않을 거니까!”소동은 민영네 집안이 해성에서 끼치는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용을 끌고 자리를 떠났고 한참 지나자 소용이 물었다. “그 여자 누구야?”“여주인공, 마민영. 너 알아?”소용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지더니 아까까지만 해도 펄쩍 뛰며 난리를 치던 모습은 온데 간 데도 없이 차분해졌다.“그 사람 집안 배경 엄청 좋다고 들었는데.”“그래, 왜 때리러 가게? 가!”“아이, 됐어. 누나한테 피해 가면 안 되잖아!”소용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누나, 내가 사고를 사고 칠까 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소동은 피식 웃으며 소용의 질문을 피해갔다. 그녀는 소용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고 단지 일이 커져 소정인과 진연이 알게 될까 봐서였다.“근데 너 왜 온 거야?”“누나랑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어.”소용은 소동에게 잘 보이려는 어투로 얘기를 꺼냈다.“누나 친구랑 술집을 차리기로 했는데 누나가 준 돈으론 턱도 없어. 1억 정도 모자란데 좀 더 빌려줄 수 있어?”소용의 말에 소동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술집 차리는 거 맞
토요일 아침, 소희는 거실에서 소리가 나자 침실에서 나와서 슥 살펴봤더니 역시 이기택이었다. 셔츠 차림으로 부엌에서 따듯한 우유를 마시는 것 같았고 소희는 햇살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켜고는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잠시 후 씻고 환복을 한 소희가 다이닝룸으로 갔다.“오늘 왜 런닝하러 가자고 안 깨웠어?”구택은 그를 흘끗 보더니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토요일엔 쉬게 해주려고.”이게 소희는 방긋 웃으며 인사치레를 했다.“고마워.”자신의 체구보다 더 큰 셔츠를 입고 어깨까지 드리운 다듬지 않은 머리, 예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과 눈이 햇빛 아래에서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소희였다. 구택은 그런 그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소희는 우유 한 모금을 마시자 눈살을 찌푸렸다.“설탕 안 넣었어?”“넣었는데 왜 안 달아?”구택이 다가와 두 손으로 식탁을 받치고 그녀를 쳐다보았고 소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응, 안달아.”“그럼 내가 먹어볼게.”구택은 갑자기 몸을 숙이고는 키스를 하였고 소희가 깜짝 놀라 멍하니 있는 이 기회를 틈타 구택은 키스를 계속 이어나갔다. 한 손으로 식탁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소희의 뒤통수를 감쌌는데 그들의 키스는 점점 절정으로 다다르고 있었다.소희는 눈을 감는 것으로 구택의 키스에 응했고 우유 향이 치아사이를 맴돌고 향긋한 향이 숨결을 통해 퍼져 소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구택의 눈에는 욕망이 이글거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아래턱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소희는 이내 뒤로 물러나 허스키한 목소리로 제지하였다.“안돼, 나 유민이 수업해 주러 가야 돼.”임유민, 눈치가 엄청 빨라 이미 그들이 결혼한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걔는 이미 알고 있어!”구택은 소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래도 선생님인데 단정한 이미지를 유지해야지!”소희는 머리를 살짝 들고 웃으면서 구택을 바라봤고 구택 또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그녀의 입술에 또 뽀뽀를 하였다.“넌 걔의 둘째 숙모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웃으며 얘기했다.“이 사람이 완벽하다면 내가 가당키나 하겠니?”소희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손에 힘을 주며 유민의 앞에서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암묵적으로 경고하자 유민은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그렇긴 하네요. 소희 쌤은 확실히 너무 완벽한 거 같으니까 하느님한테 말해서 빈틈 한 스푼 추가해달라고 해야죠.”그는 말하면서 강아지를 안았다.“밤아, 둘째 숙모한테 인사해야지!”“이름이 밤이야?”유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맞아요, 제가 지은 건데 어때요? 잘 지었죠?”“그래 잘 지었네.”소희는 멋쩍어 하면서 유민의 말에 대답했고 유민은 가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소희를 하찮아하듯 말했다.“웃음에 영혼이 1도 없어요.”소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구택이 먼저 말을 꺼냈다.“어제 내가 상 준다고 하지 않았나? 내일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거 몇 개 사놓을게.”유민은 소희가 구택의 뒤에 서서 웃는 것을 보고 둘이 화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은 제3자일뿐 둘이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잘못했어요, 쌤, 아까 진심으로 웃는 걸 봤는데 진짜 아름다우십니다!”유민은 그새 아첨을 해야 할 정확한 타깃을 정한 것 같았고 이에 소희는 웃으며 회답했다.“알겠으니까 수업하러 가자!”구택은 그녀의 손을 이끌고 별장으로 가며 입을 열었다.“유민인 데이비드가 보고 싶었나 봐. 내가 데이비드랑 설희를 떼어놓을 수가 없어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서 유민이 보고 키워라고 했거든. 내가 집사님한테 말해서 주말에는 밤이를 우리에 가둬라고 할게.”고용일군 들이 다가오자 소희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려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웃었다.“괜찮아, 내가 무섭다 해도 조그마한 강아지를 뭐 어떻게 해놓을 정도는 아니야.”“널 무섭게 할 이유도 없어.”구택이 그윽하게 쳐다보자 소희는 마음 한켠이 살살 간지러운 느낌이 들더니 이에 입꼬리가 올라갔다.소씨네 본가.오늘 또한 본가에서 모임이 있는 날이라 진연은 아침 댓바람부터 소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