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이라 아침부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실내에 에어컨이 있었지만 야외 촬영이 있었기에 파라솔 밑에 숨어 태양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는 얼음을 선풍기 밑에 내려놓고 조금이라도 찬 바람이 나오길 바랬지만 마민영은 짜증을 내며 매니저에게 물었다.“소희한테 얼음 더 있어요? 아이스크림 많이 사서 보내주고 선풍기도 두 대 더 가져다줘요.”“지금 가져다드릴게요.”매니저는 바로 밖으로 나갔고 급하게 걷는 바람에 하마터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소동이와 부딪힐 뻔했다.“그리 급히 어디를 가시는 거에요?”소동은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민영 씨가 소희에게 아이스크림이랑 선풍기 몇 대 가져다줘라고 했거든요.”소동은 질투가 나 아니꼬운 어투로 말했다.“마민영이랑 소희가 많이 친해졌나 봅니다. 마민영 눈엔 소희밖에 없는걸 보니 마민영 한 사람을 케어해주는 것도 부족해 한 명 더 느셨네요.”“민영 씨가 그러라 하는데 저희도 어쩔 수가 없죠.”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제가 보기엔 소희도 고의적인 것 같은데, 마민영 믿고 당신들한테 이래라저래라 마음대로 부려먹고, 나였으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소동이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차가운 소리가 들려왔다.“소동 씨?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소동은 마음이 철렁했고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모르는 민영이가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깜짝 놀란 매니저는 줄행랑을 쳤다.“불만이 있으시면 뒷담화 말고 앞에서 얘기하세요. 금수저 출신의 아가씨께서 상스럽게 뒷담화를 하시는 게 역겹지 않습니까?”소동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그럼 당신은 저를 존중해 주신 적은 있으십니까? 저야말로 당신의 디자이너인데 소희에게 디자인을 맡기신 당신의 안중에는 제가 있긴 합니까?”“당신의 디자인은 쓰레기 같아요. 만약 내 사촌 오빠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고용하지 않았을 겁니다.”그녀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그리고 본인이 나의
“넌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마민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고 소동은 눈앞에 있는 추소용을 보더니 표정이 민영이보다 더 안 좋았다.“난 이 사람 동생인데 네가 뭔데 우리 누나를 욕해? 진짜 한대 치는 수가 있어?”소용은 민영을 매섭게 바라봤고 이에 질세라 민영은 오히려 세게 나갔다.“날 친다고? 그래 어디 한번 쳐보시던지!”민영을 치려던 소용의 손이 소동에 의해 제지당했고 소동은 민영에게 말했다.“이렇게 된 이상 우리의 협력은 없었던 걸로 하죠. 지훈 씨에게는 그만뒀다고 얘기할 거고 바로 제작진 팀에서 나가겠다고 할게요.”“나도 바라던 바에요!”민영은 차갑게 톡 쏘아붙였고 소용은 자신을 제지시키는 소동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누나 내가 누나 대신 한 대 쳐줄게!”“나를 친다고? 한번 쳐봐. 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면 당신은 물론이고 당신네 집안 가만히 놔두진 않을 거니까!”소동은 민영네 집안이 해성에서 끼치는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용을 끌고 자리를 떠났고 한참 지나자 소용이 물었다. “그 여자 누구야?”“여주인공, 마민영. 너 알아?”소용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지더니 아까까지만 해도 펄쩍 뛰며 난리를 치던 모습은 온데 간 데도 없이 차분해졌다.“그 사람 집안 배경 엄청 좋다고 들었는데.”“그래, 왜 때리러 가게? 가!”“아이, 됐어. 누나한테 피해 가면 안 되잖아!”소용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누나, 내가 사고를 사고 칠까 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소동은 피식 웃으며 소용의 질문을 피해갔다. 그녀는 소용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고 단지 일이 커져 소정인과 진연이 알게 될까 봐서였다.“근데 너 왜 온 거야?”“누나랑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어.”소용은 소동에게 잘 보이려는 어투로 얘기를 꺼냈다.“누나 친구랑 술집을 차리기로 했는데 누나가 준 돈으론 턱도 없어. 1억 정도 모자란데 좀 더 빌려줄 수 있어?”소용의 말에 소동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술집 차리는 거 맞
토요일 아침, 소희는 거실에서 소리가 나자 침실에서 나와서 슥 살펴봤더니 역시 이기택이었다. 셔츠 차림으로 부엌에서 따듯한 우유를 마시는 것 같았고 소희는 햇살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켜고는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잠시 후 씻고 환복을 한 소희가 다이닝룸으로 갔다.“오늘 왜 런닝하러 가자고 안 깨웠어?”구택은 그를 흘끗 보더니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토요일엔 쉬게 해주려고.”이게 소희는 방긋 웃으며 인사치레를 했다.“고마워.”자신의 체구보다 더 큰 셔츠를 입고 어깨까지 드리운 다듬지 않은 머리, 예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과 눈이 햇빛 아래에서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소희였다. 구택은 그런 그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소희는 우유 한 모금을 마시자 눈살을 찌푸렸다.“설탕 안 넣었어?”“넣었는데 왜 안 달아?”구택이 다가와 두 손으로 식탁을 받치고 그녀를 쳐다보았고 소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응, 안달아.”“그럼 내가 먹어볼게.”구택은 갑자기 몸을 숙이고는 키스를 하였고 소희가 깜짝 놀라 멍하니 있는 이 기회를 틈타 구택은 키스를 계속 이어나갔다. 한 손으로 식탁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소희의 뒤통수를 감쌌는데 그들의 키스는 점점 절정으로 다다르고 있었다.소희는 눈을 감는 것으로 구택의 키스에 응했고 우유 향이 치아사이를 맴돌고 향긋한 향이 숨결을 통해 퍼져 소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구택의 눈에는 욕망이 이글거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아래턱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소희는 이내 뒤로 물러나 허스키한 목소리로 제지하였다.“안돼, 나 유민이 수업해 주러 가야 돼.”임유민, 눈치가 엄청 빨라 이미 그들이 결혼한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걔는 이미 알고 있어!”구택은 소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래도 선생님인데 단정한 이미지를 유지해야지!”소희는 머리를 살짝 들고 웃으면서 구택을 바라봤고 구택 또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그녀의 입술에 또 뽀뽀를 하였다.“넌 걔의 둘째 숙모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웃으며 얘기했다.“이 사람이 완벽하다면 내가 가당키나 하겠니?”소희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손에 힘을 주며 유민의 앞에서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암묵적으로 경고하자 유민은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그렇긴 하네요. 소희 쌤은 확실히 너무 완벽한 거 같으니까 하느님한테 말해서 빈틈 한 스푼 추가해달라고 해야죠.”그는 말하면서 강아지를 안았다.“밤아, 둘째 숙모한테 인사해야지!”“이름이 밤이야?”유민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맞아요, 제가 지은 건데 어때요? 잘 지었죠?”“그래 잘 지었네.”소희는 멋쩍어 하면서 유민의 말에 대답했고 유민은 가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소희를 하찮아하듯 말했다.“웃음에 영혼이 1도 없어요.”소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구택이 먼저 말을 꺼냈다.“어제 내가 상 준다고 하지 않았나? 내일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거 몇 개 사놓을게.”유민은 소희가 구택의 뒤에 서서 웃는 것을 보고 둘이 화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은 제3자일뿐 둘이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잘못했어요, 쌤, 아까 진심으로 웃는 걸 봤는데 진짜 아름다우십니다!”유민은 그새 아첨을 해야 할 정확한 타깃을 정한 것 같았고 이에 소희는 웃으며 회답했다.“알겠으니까 수업하러 가자!”구택은 그녀의 손을 이끌고 별장으로 가며 입을 열었다.“유민인 데이비드가 보고 싶었나 봐. 내가 데이비드랑 설희를 떼어놓을 수가 없어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서 유민이 보고 키워라고 했거든. 내가 집사님한테 말해서 주말에는 밤이를 우리에 가둬라고 할게.”고용일군 들이 다가오자 소희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려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웃었다.“괜찮아, 내가 무섭다 해도 조그마한 강아지를 뭐 어떻게 해놓을 정도는 아니야.”“널 무섭게 할 이유도 없어.”구택이 그윽하게 쳐다보자 소희는 마음 한켠이 살살 간지러운 느낌이 들더니 이에 입꼬리가 올라갔다.소씨네 본가.오늘 또한 본가에서 모임이 있는 날이라 진연은 아침 댓바람부터 소
이때, 소동은 더 이상 숨길 방법이 없었고 민영을 부르지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큰아버지, 죄송한데 저 일 그만둬서 더는 마민영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그녀의 말 한마디에 떠들썩했던 거실은 금세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진연은 믿기지 않다는 듯 물었다.“언제 관뒀는데? 왜 말하지 않은 거야?”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하순희가 해바라기씨를 먹으며 입을 열었다.“공교롭네. 큰오빠가 소동에게 부탁하려는데 소동이 일을 그만뒀다 하니.”이에 소정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혹시 큰 아버지를 돕고 싶지 않아 일부러 핑계 대는 건 아니냐?”“아니에요. 그만둔지 사나흘이나 됐어요.”“근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한 거야?”진연 또한 얼굴이 어두워져 물었고 소동은 얼굴이 창백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도대체 무슨 일이야?”소해덕의 질문에 소동은 울먹이며 사실대로 얘기했다.“저와 마민영의 관계는 좋았어요. 근데 소희가 제가 마민영의 개인 디자이너가 된 게 질투가 났는지 감독이랑 짜고 저를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마민영과 제 사이를 이간질시키더라고요. 소희의 말에 넘어간 민영이 저한테 불만이 하나둘씩 쌓여갔고 저는 정말 하는 수없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말이 끝나자 해덕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또 소희야?!”진연은 독이 잔뜩 올랐다.“걔는 소동을 망치고 싶어서 안달 났나!”연경과 설아는 눈이 마주치더니 싱겁다는 듯 말을 보탰다.“소희 걔는 도대체 왜 그런다니?”소시연이 벌떡 일어나서 소동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소희가 너를 질투한다고? 뻥을 칠 거면 상대를 봐가면서 정도껏 쳐. 도대체 네가 소희보다 뭐가 더 잘났다고 걔가 너를 질투해?”이에 소찬호도 동의한다는 듯 말을 했다.“매번 거짓말하는 것도 지겹지 않아? 소희 누나가 여기 없다고 그렇게 말을 한다고? 어디서 가당치도 않는 피해자 코스프레야!”두 사람의 폭로에 소동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순희는 그 둘을 노려보았다.
장연경은 급히 나와서 상황을 정리했다.“한 식구끼리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진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오늘 있었던 일, 제가 똑똑히 기억할 겁니다. 우리 소동이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왜 집에까지 와서 욕을 먹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확실하게 말해두는데 저한테 딸은 소동이 한 명이고 소희는 저랑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으니 그게 누가 됐든 불만을 품으시는 분이 계신다면 본인이 직접 집으로 데려가세요!”소동은 감동과 억울한 감정이 뒤섞여 울었고 진연의 몸에 기댔다.“엄마!”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시연이 말했다.“좋아요. 둘째어머니께서 소희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소희는 제 동생입니다.”소시연의 폭탄선언에 하순희는 당황하여 그에게 그만하라는 눈짓을 보내느라 바빴다. 소희를 대신해 몇 마디 했으면 됐지 굳이 일을 크게 벌일 필요까지는 없었다.진연은 차갑게 말했다.“그래 빨리 걔한테 전화해. 아마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테니까!”“그만!”소해덕이 입을 열었다.“매번 소희 때문에 이렇게 싸우니 원, 정인아, 지금 전화쳐서 바로 들어와라고 해. 온 다음에 진짜 소동의 걸림돌이 된 건지 확실하게 알자고. 만약 진짜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소씨 가문에 발을 붙이진 못하게 될 거야!”소정인은 해덕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버지, 소희를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저희도 이 얘기를 더이상 꺼내지 말고요.”“왜? 우리 소동이 보고 이런 일을 당하고도 잠자코 있어라는 거야? 빨리 걔한테 전화를 해서 바로 당장 오라고 그래! 그래야 소동이 결백하다는 걸 다들 알지!”날뛰는 진연에 정인은 어쩔 수 없이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실에 긴장이 기운이 맴돌았고 숨 막힐 듯이 고요한것이 일이 확실히 크게 번진 것 같았다.임씨 저택소희는 유민의 수업을 마치고 내려가던 중 정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소희야, 너 어디야?”“무슨 일 있어요?”정인의 말투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지금 본가에 한 번 와야 될 것 같다. 네 어
“아니! 나 혼자 갈게.”소희는 구택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그들에게 자신과 구택의 관계를 알리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감히 상상조차 안되었기 때문에 알리고 싶지 않았고 구태여 구택에게 일을 만들어 주고 싶지도 않았다.구택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내가 못 미더워?”“그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래.”소희는 구택을 향해 웃어 보였지만 그는 단호한 태도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그럼 같이 가! 내가 남편이라고 소개 안 시켜줘도 돼. 그냥 운전기사라고 해도 되니까 같이 가.”“되게 놀라 하실 거야.”구택의 참신한 발상에 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서프라이즈! 괜찮지 않아? 그러니까 가자!”구택은 무작정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려고 신발을 신을 때 유민이 계단을 내려와 놀리듯 물었다.“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요? 둘이 화해했다고 이제 나 무시하는 거야?”“그럼 너도 가. 가서 네 숙모 기 좀 살려주고.”소희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하고 있는 구택을 바라보며 주의를 주었다.“헛소리 그만해!”유민은 흥분해서 뛰어서 내려왔다.“누가 감히 우리 숙모님을 괴롭혀요!”“네가 안 가도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어.”소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유민이었다.“난 삼촌 말을 들어요. 감히 숙모를 괴롭히다니 우리 집안이 만만해 보이나 봐?”유민은 굉장히 흥분했고 그 모습을 보면 괴롭힌 게 화가 나서 흥분한 게 아닌 그냥 설레서 흥분한 걸로 보였다. 결국 본가로 돌아가는 차에는 세 사람이 타게 되였다. 소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본가에 가서 이 “불청객”들을 어찌 소개할 것인가를 궁리했고 구택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을 거니까.”유민도 한마디 거들었다.“둘째 숙모, 몸 싸움할 수 있으면 말싸움은 하지 마요. 우리가 옆에서 응원해 줄게요.”“넌 일이 커지건 말건 그냥 구경거리를 좋아하는구나.”
가정부 왕순희가 소희를 보더니 바로 괴상야릇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어머, 소희 아가씨 오셨군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난 또 아가씨가 어르신 댁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린 줄 알았네요.”말투에 섞인 조롱의 뜻이 너무 뚜렷하여 임구택이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똑같이 기분이 많이 언짢았던 임유민이 임구택 먼저 차가운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문을 지키는 하인 따위가 감히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짖어? 대체 눈이 먼 거야, 아니면 사람만 보면 짖는 병에 걸린 거야?”“그러는 너는 누군데 감히 우리 집까지 와서 마구 짖는 건데?”임유민의 욕설에 폭발한 왕순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임유민을 향해 소리쳤다.그러자 소희가 바로 임유민 앞에 가로막아서 왕순희를 향해 말했다.“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온 손님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나를 찾으신다고 해서 온 거니까, 가서 내가 왔다고 알리세요.”왕순희는 그제야 임유민을 한번 노려보고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그러다 왕순희가 세 사람의 시선속에서 사라진 후에야 소희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이따가 이 집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두 사람 절대 화를 내지 말고, 나 대신 나서지도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하지만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왜 소희한테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던 임유민이 소희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쌤 소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이 쌤한테 이런 태도인 거야?”“내가 소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으니까.”“그럼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집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이 집의 아가씨인 건 사실이고, 또 잃어버렸다가 겨우 다시 찾게 된 거잖아.”“모든 사람이 다 혈육의 정을 중시하는 건 아니야.”소희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덤덤하게 대답하자 임구택이 바로 한기가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소씨 가문에서 당신을 입양한 게 운성 강씨 가문이라는 걸 몰라?”“몰라.”“어쩐지.”“소씨 가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한테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
강아심은 그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살짝 빛났다. 아심은 가능한 시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벽 구석에 깨진 도자기 조각이 보여. 우리가 어떻게든 가서 그걸 손에 넣어야 해.”깨진 도자기 조각은 절반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고, 아마도 산에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서 밥을 먹다 그릇을 깨뜨리고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여자의 숨결이 부드럽게 시언의 귀를 간질이며 퍼졌다. 아심의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닫히며 그의 귀밑 민감한 피부를 살짝 스쳤다. 시언은 몸이 순간 굳어졌다가 늦게서야 대답했다.“소용없어.”“뭐?” 아심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이 줄엔 합금 섬유가 섞여 있어. 칼로도 자를 수 없으니 도자기 조각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해.”시언이 낮게 말하자, 아심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정말 당신을 특별대우해 주긴 하네요!”이번엔 시언이 이해하지 못했다.“응?”“아니, 그런 거지! 일부러 합금 줄까지 써서 묶어놨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이런 대접 못 받을걸요!” 아심이 말하자, 시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느새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들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교대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마지막 교대 때는 가면을 쓴 남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모두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텅 비었던 방은 순식간에 꽉 찼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방 안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시언과 아심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섰다. 시언은 벽에 몸을 대고 서서 손으로 아심의 등을 감싸며 가면 남자를 주시했다.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는 방 한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용병들은 방 안에 나무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방금 비가 내린 터라 산속은 밤이 되면서 습기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강아심은 용병에게 조하루네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용병은 냉랭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기억해두었고, 하루가 망설이자 바로 그를 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걸어갔다. 이에 하루는 몸부림치며 울먹이며 외쳤다.“삼촌, 누나!”점점 그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아심은 목이 메었지만, 하루를 떠나보내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다.오두막 바깥에서는 시언에게 맞아 쓰러진 자들이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부상이 심한 자들은 땅에 누워 쉬고, 가벼운 부상자들은 안으로 들어와 명령을 기다렸다.가면을 쓴 남자는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돌아와 자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저들을 잘 지켜보고 있어. 윗선의 지시를 기다려.”“예!” 몇몇 용병들이 대답했다.가면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다른 용병들도 따라 나갔다. 오두막 안에는 두 명의 용병만이 남아 시언과 아심을 감시하고 있었다.잠시 후, 시언은 갑자기 아심을 들어 올려 돌며 옆에 있던 대나무 침대에 넘어졌다. 손발이 묶여 있어 힘 조절이 어려웠고, 그가 아심 위에 넘어지며 아심은 깜짝 놀랐다. 시언은 바로 몸을 뒤집어 아심이 자신의 위에 있도록 했다.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시 중이던 용병들은 깜짝 놀라 총을 겨누었지만, 두 사람이 단순히 침대에 누워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천천히 총을 내렸다.아심은 약간 고개를 들어 아래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언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 줄에 묶여서 뻣뻣하게 서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그나마 나아.”아심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그러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도 겪어봤어. 걱정하지 마, 난 쉽게 죽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아심은 그들을 감시하는 용병들을 한 번 흘깃 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를 바로 죽여 노도를
시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노도를 위해 복수하러 온 건가?”가면을 쓴 남자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변성기를 사용한 탓에 그 웃음소리는 거칠고 듣기 거북했다. 마치 산속에서 이빨을 드러낸 야수가 내는 소리 같았다.“진언이 설마 노도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남자가 손짓하자, 바로 누군가가 하루를 그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하루의 목을 쓰다듬으며 냉소를 지었다.“이게 진언의 아들인가?”“아니!” 시언이 차갑게 응수했다.“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진언은 무고한 아이가 본인 앞에서 죽는 걸 원하지 않겠지?”가면을 쓴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하루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이 떨렸다. 하루는 고개를 돌려 시언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만, 도움을 청하거나 가면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다.이때 아심이 차갑게 말했다.“그 아이는 마을에 사는 평범한 농가의 아이야. 내가 인질이 될 테니 그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가면을 쓴 남자가 시언을 보며 물었다.“진언의 생각은 어때?”시언은 들고 있던 총을 내던졌다.“우리 조직에는 조직만의 규칙이 있어. 여성이나 아이를 인질로 잡는 건 가장 비열한 용병들만 하는 짓이야.”“너희들이 원하는 건 나니까 나를 마음대로 처리해. 하지만 여자와 아이는 산 아래로 보내.”아심이 시언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젓자, 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고 깊은 눈빛을 보냈다.“내 말을 들어.”아심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때, 가면을 쓴 남자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아이는 풀어줄 수 있어. 하지만 이 여자는 안 돼. 이름은 넘버세븐. 진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 내가 틀리지 않았군!”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면 남자를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럼 아이부터 풀어줘!”“서두르지 마. 그 아이가 내 손 안에 없으면, 이 사람들로는 진언을 막아낼 수 없어. 내가 그 정도는 알고
강아심이 몸을 드러내는 순간,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두 개의 창문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던 아심은 결국 한 사람과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아심은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고 강력하게 상대의 약점을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창문을 통해 밀려들었고, 하루가 숨던 곳에서 고개를 내밀자 한 고용병이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들어가!” 아심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발로 근처에 있던 나무 의자를 걷어차 상대의 어깨를 가격해 총을 떨어뜨렸다.“탕!” 총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고, 총알이 벽을 뚫고 나갔다.아심은 두 명을 밀어내며 하루가 숨은 대나무 침상으로 다가가 그를 보호했다. 그 순간 또 다른 고용병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하루가 숨은 침상 밑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아심은 몸을 날려 고용병의 총을 걷어차며 떨어뜨렸고, 다시 그 총을 잡으려는 찰나 또 다른 고용병 두 명이 그녀를 공격해 왔다.아심은 한 남자의 팔을 비틀어 탈골 시키고, 몸을 회전시켜 다른 남자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아심의 힘은 이 고용병들보다 약했지만 몸놀림이 민첩하고 공격이 매끄러워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러나 그 순간, 대나무 침상 위로 한 남자가 뛰어올라 침상을 들어 올리며 하루를 붙잡아 칼을 그의 여린 목에 들이댔다.“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이 아이를 죽일 거야!”이와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언이 지나온 길에는 이미 쓰러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언의 등장에 방 안의 고용병들은 더욱 경계하며 총을 모두 그에게 겨누었다.가장 가까이 있던 고용병이 아심의 머리에 총을 겨누자 시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총으로 겨누지 마.”고용병은 시언의 서늘한 시선을 받자 손이 떨렸지만,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시언은 천천히 아심 쪽으로 걸어갔다. 고용병의 눈빛은 두려움이 엿보였고, 본
조하루가 즉시 과일 주스를 시언에게 내밀며 말했다.“삼촌, 이거 드세요. 저를 그렇게 오랫동안 업어 주셨잖아요. 고마워요!”시언은 얇게 입가를 올리며 주스를 다시 돌려주었다.“난 누나와 장난친 거야.”“아...”시언은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효과는 없었다. 조하루는 멍하게 대답하며 다시는 시언을 쳐다보지 못했다.아심은 입술을 꽉 다물며 웃음을 참았고, 차마 대놓고 웃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빵을 베어 물었다.숲속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창가에 앉아 방 안을 들여다보며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쭈쭈 하고 소리를 내면서. 아직 인간에게 위협을 느껴본 적 없는 새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아심은 빵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 창가에 놓았다. 새는 신나게 부리로 쪼아먹었지만 다 먹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시언은 창 아래에 서 있는 아심을 보며 반쪽 남은 빵을 들어 올렸다.“천천히 먹어, 난 밖에 좀 보고 올게.”아심은 시언이 문을 나가는 걸 보고 하루에게 속삭였다.“볼일 보러 가야 해? 삼촌이랑 같이 가면 돼!”하루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갔다. 아심은 천천히 빵을 다 먹고 물병을 집어 들고 막 마시려던 순간, 밖에서 탕! 하고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아심의 얼굴이 굳어졌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시언이 떨고 있는 하루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곧바로 따라오던 한 남자를 발로 차서 밖으로 날려 보냈다.그는 고개를 돌려 매우 빠르게 말했다.“지켜, 절대 나오지 마. 창문도 다 잠가!”문이 열리는 그 순간, 아심은 이미 상황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미 포위당한 상태였다. 나무집 주위는 전부 위장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용병들로 가득했고, 적어도 스무 명이 넘었다.문이 닫히고 난 뒤, 바깥에서는 치열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아심은 조하루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두 개의 창문을 빠르게 닫은 뒤, 창을 야생 동물로부터
강시언이 앞서 걸었고, 중간에는 조하루, 뒤에는 강아심이 따라갔다.비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을 걸으며, 아심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조하루에게 지팡이 삼아 주었다. 세 사람은 고요하고 습한 산림 속을 조용히 지나갔다.겨우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인데, 하루는 이미 지쳐 헉헉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아이라 무리가 있는 듯했다.아심은 걸음을 멈추고 하루의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자, 내가 업어줄게!”시언이 돌아서더니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아심에게 넘기며 말했다.“내가 업을게!”하루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겁먹은 듯 시언을 올려다보았다.“저, 저 아직 괜찮아요.”“아직 한참 남았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어? 올라와!” 이번에는 시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냉정하고 단호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하루는 아심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격려하는 눈빛을 본 후에야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며시 시언의 등에 올라탔다.시언이 일어서자 조하루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시언의 넓고 든든한 등에 안겨, 하루는 안전감을 느꼈다. 시언은 고개를 돌려 아심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아심도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열몇 개의 계단을 더 오르던 중, 하루는 손에 쥐고 있던 비타민 젤리를 시언의 입가에 내밀었다.“아저씨, 이거 드세요!”시언은 원래 거절하려 했으나, 아심이 늘 이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한 손을 뻗어 젤리를 받아 입에 넣었다.하루의 검게 빛나는 눈이 환하게 반짝였고, 시언이 자기가 준 젤리를 먹자 무척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시언이 젤리를 씹으며 물었다.“더 있어?”하루는 허둥지둥 젤리 통을 꺼내 다시 시언에게 주려 했지만, 그가 말했다.“뒤에 있는 누나한테 두 알 줘.”하루는 그제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에 다섯 여섯 개의 젤리를 쥐고 아심에게 내밀었다.“누나!”아심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하나를 집었다.“고마워!”하루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아
“네!” 하루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였다. “정말 맛있어요, 우리 다들 엄청나게 좋아해요.”“하루에 두 알만 먹어야 해,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아심은 자연스럽게 하루와 대화를 이어갔다.“알아요, 선생님이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어요.” 하루의 미소는 순수하고 귀여웠다.시언은 그들이 뒤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룸미러로 아심을 흘깃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아심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이 작은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어둡고 흐린 날씨에,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차창이 물안개로 덮여 바깥 풍경이 희미하게 변해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아심과 하루의 대화와 빗소리, 그리고 쉼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차가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시언은 뒷좌석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심은 이마를 차창에 대고 잠이 들어 있었다.하루는 창문에 성에 낀 자국을 손가락으로 그리다가, 시언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얼른 손을 내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시언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자기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건넸다.“이거 좀 도와줘. 누나에게 덮어줘.”아심은 얇은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그녀가 운성에 왔을 때 날씨가 더워서 두꺼운 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하루는 외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아심의 몸에 덮어주었다.시언은 아심을 한 번 더 보자,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에 시언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차는 산길을 따라 다시 30분가량을 달렸고, 드디어 앞쪽에 무너진 도로가 보였다. 더는 차로 갈 수 없었다.“네 물건 잘 챙기고, 여기서 내려야 해.” 시언이 하루에게 말했다. “산을 돌아서 넘어가야 하거든.”“네!” 하루는 대답하며 자신의 가방을 메고, 안에 들어 있는 옷과 책을 잘 챙겼다.“삼촌, 누나를 깨울까요?” 하루가 묻자, 시언은 표정을 굳히며 뒤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시언은 이미 아침을 먹었을 거라 생각한 아심은 따로 묻지 않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심은 평소처럼 전화를 걸어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오늘은 아이들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라 아심은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갔다.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 그녀는 도도희와 시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하고 있었고, 그 대화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산길이 비에 무너져서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어. 차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산길을 올라가야 해서 너무 위험해.”도도희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시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비가 많이 오진 않으니까 시도해 볼 만해요.” 이때, 아심은 다가가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나요?”시언은 아심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분명히 옷 따뜻하게 입으라고 한 것 같은데.”오늘 아심은 얇은 검은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시언의 지적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도도희 앞이라 반박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곧 가서 갈아입을게요.”도도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아심에게 설명했다.“한 학생의 할아버지가 병이 너무 위중해서 의식이 흐려졌대.”“그런데 할아버지가 계속 손자를 찾고 계셔서 가족들이 전화로 아이를 데려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도도희는 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언은 아이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산길이 위험할까 봐 걱정돼.”“위험할 게 뭐 있어요?” 시언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요. 아이한테 준비하라고 전해주고, 곧 출발할게요.”시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고, 아심도 뒤따라가며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시언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안 돼.”“왜 안 돼요?” 아심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언을 따라붙었다.“그 애들이 얼마나 당신을 무서워하는지 모르죠? 혼자 데려가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