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청아는 얼른 옥수수를 작은 토막으로 잘라 냄비에 넣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장시원을 쳐다보니 그는 아직도 그 줄기상추를 씻고 있었다, 모든 줄기 틈새까지 빠짐없이 깨끗하게.이에 청아가 바삐 입을 열어 장시원을 제지했다.“됐습니다!”장시원은 그제야 줄기상추를 꺼내 좌우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청아에게 물었다.“껍질은 뭘로 벗기는데?”청아는 껍질 벗기는 칼로 한번 시범을 보였고, 장시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아가 배워준 대로 천천히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분명 잘 벗기고 있는데 청아는 왠지 불안 불안하여 장시원의 손만 주시하고 있었다, 자칫 했다간 손을 다치기라도 할까 봐.다행히도 장시원이 잡일을 해 본 적이 없는 도련님 치고는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동작이 점점 능숙해졌다.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청아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 장시원 쪽 상황을 살폈다.“껍질 벗기는 칼이 예뻐, 아니면 내 손이 예뻐?”청아의 걱정 어린 눈빛에 손등까지 따끔해진 장시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청아를 행해 물었다.“네?”너무 뜬금없는 물음이라 청아는 순간 멍해졌다. 그러다 안절부절하게 상사의 의도를 한참 분석하다 조심스레 대답했다.“당연히 대표님의 손이 더 예쁘죠?”“그걸 물은게 아니잖아. 왜 자꾸 돌아보냐고.”청아가 듣더니 묵묵히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관심해 줘도 이 태도야!’‘다시는 말 안 해!’얼굴에 억울함과 노여움이 너무 뚜렷하게 섞여 있어 장시원은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장시원도 청아한테 쌓인 게 많았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 표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오늘 일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무슨 일을요?”‘껍질 벗기는 칼과 비교했던 일?’장시원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그 의사와 맞선을 본 일.”“저희 선 안 봤어요!”“너희들 오늘 맞선을 봤는지 안봤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
“한번 시도해봐도 될 것 같은데?”장시원의 대답에 요요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눈알만 팽글팽글 돌리고 있었다.한 어른과 어린아이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조화롭기만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청아의 마음속은 착잡하기만 했다.‘장시원이 만약 요요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엄청 기뻐하겠지?’‘하지만 그 사실을 장시원에게 알려주게 되면 난 요요를 잃게 될 거야.’‘그러니 난 반드시 이 비밀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영원히 꺼내서는 안 돼.’……얼마 지나지 않아 반찬은 다 차려졌고, 세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한 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한 느낌도 없어 보이는 장시원과 요요와는 달리 청아는 아무리 해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다행히도 장시원은 밥 먹으면서 요요만 돌보느라 청아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고, 점심시간은 그런대로 조용하게 끝났다.그러다 오후 3시쯤이 되어 팩스를 받은 청아는 장시원에게 가져다주려고 다시 대표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느새 몸에 장시원의 양복 외투를 걸친 채 장시원의 품에 기대어 잠든 요요를 발견하고 청아가 놀라 급히 요요를 불렀다.“요요야.”“쉿! 자게 놔둬, 깨우지 말고.”장시원은 청아가 요요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손가락을 입술 쪽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청아는 여전히 미안해하며 말했다.“오래 안고 있으면 팔이 많이 힘들 겁니다, 제가 그냥 요요를 바깥에 있는 소파에 눕힐 게요.”“괜찮아, 깨우지 마. 팩스는 여기에 내려놓고, 가서 일 봐.”“네.”장시원의 말투가 너무 단호하여 청아는 결국 아무 말을 못하고 팩스만 탁자 위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러다 문어귀에 도착했을 때쯤 청아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장시원은 어느새 등을 소파에 기댄 채 왼팔로는 요요를 안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팩스를 들고 열심이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가끔씩 고개를 숙
장시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청아를 쳐다보며 덤덤하게 물었다.“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두, 두렵긴요! 저는 단지 아이를 데리고 회사로 가는 게 규칙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그런 것뿐입니다.”‘거짓말.’장시원은 차갑고 예리한 눈빛으로 청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요요랑 작별인사를 했다.“안녕, 요요야. 아저씨 생각하고.”“네! 아저씨도 요요와 엄마 생각 많이 하고요!”청아는 계속 차안에 앉아있었다간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얼른 요요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그러고는 장시원의 차가 시선속에서 사라진 후에야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장시원이 곁에 없으니까 청아는 확실히 긴장이 많이 풀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웃으며 요요를 향해 말했다.“요요야, 장 아저씨는 엄마의 상사야. 그러니까 아저씨 앞에서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돼. 아저씨를 너무 귀찮게 해서도 안 되고, 아저씨가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하지만 아저씨는 요요의 친구인걸요?”“요요야,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함부로 말 해서는 안 돼.”“네…….”갑자기 기운 없이 청아의 어깨에 엎드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요요의 모습에 청아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저녁에 뭘 먹고 싶어? 엄마가 해줄게.”분명 맛있는 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두 눈이 반짝반짝거렸던 요요인데 오늘따라 흥미가 없어 보였다.“엄마, 요요는 아저씨가 보고 싶어요. 아저씨를 우리 집으로 불러와 같이 저녁 먹으면 안 돼요?”“아저씨는 바빠!”“네…….”그렇게 청아가 요요를 안고 집에 들어서는데 마침 허홍연의 전화가 걸려왔다.허홍연의 말투에는 기쁨이 배어 있었다.[청아야, 하 선생과는 어떻게 되었어?]“저 하 선생님과 똑똑히 말했어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을 거라고.”[청아야! 너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니? 하 선생의 조건이 얼마나 좋은데, 그것도 주동적으로 너를 쫓는 건데, 대체 왜 거절하는 거야? 너 그러다 앞으로 하
줄곧 소리 없이 옆에 앉아 청아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던 요요가 갑자기 청아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 청아의 목을 껴안고 다소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엄마, 외할머니도 엄마한테 화냈어요?”청아가 요요를 꼭 껴안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엄마는 두렵지 않아.”“엄마, 우리 앞으로 다시는 외할머니 집에 가지 마요.”요요는 청아의 슬픔을 느꼈는지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더 진지했고, 그러는 요요의 말투에 순간 목이 메어 오른 청아는 눈물을 꾹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뭐야, 왜 그래?”그런데 이때 마침 장 주머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선 소희는 단번에 소파에 앉아 부둥켜안고 있는 두 모녀를 발견하고 급히 물었다.“소희! 외할머니가 엄마를 괴롭혔어요!”요요가 소희의 물음에 바로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이에 소희가 의아해하며 청아를 바라보았고, 청아가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소희가 바로 청아의 곁으로 다가갔다.“너 오늘 그 집에 갔어?”“응.”청아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오늘에 일어난 일을 대충 말해 주었다.그리고 소희는 조용히 옆에 앉아 청아의 말에 귀를 귀울이다 청아의 말이 끝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넌? 그 하온이라는 의사를 좋아해?”“아니. 너도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잖아, 난 남자친구를 찾아 결혼할 수 없어.”“네 아버지의 일을 떠나서 그 사람이 만약 요요를 받아들이겠다면? 그래도 고민해보지 않을 거야?”“응.”청아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녀는 요요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꼭 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결혼하게 되면 난 또 그 사람과 아이를 낳아야 할 거잖아, 그럼 그때 가서 요요는 어떻게 해?”“그래, 이미 결정이 났으면 더는 고민하지 마. 아줌마가 비록 어른이시긴 하지만, 너도 그렇게 매사에 타협할 필요 없어, 넌 그들을 위해 충분히 많은 걸 했으니까.”“응! 나도 알아. 그래서 난 절대 타협하지 않을 거야!”“그럼 기분 풀고! 내가 방금 가재랑 요요가 제일 좋아
“곧 도착할 거야.”소희가 웃으며 대답하고는 또 고개를 돌려 요요한테 물었다.“요요야, 곧 있으면 연희 이모가 네 선물을 들고 온다는데, 기뻐?”요요가 듣더니 즉시 흥분해하며 입구로 달려갔다.“연희 이모!”“아직 안 왔어, 요요야.”청아가 보더니 어처구니없어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정확히 30분 후, 한 무더기의 물건을 들고 청아네 집에 들어선 성연희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요요부터 찾았다.“요요는? 내 새끼 요요는?”요요가 자신의 이름을 듣더니 바로 부엌에서 달아나왔다.“연희 이모!”“어이구! 우리 요요! 보고 싶어 죽을 뻔했네!”성연희는 물건을 내려놓고 바로 요요를 안고 두 바퀴 돌았다.이에 요요가 기뻐하며 깔깔 웃었다.마침 접시를 들고 주방에서 나온 소희가 보더니 덩달아 한번 웃고는 성연희를 향해 말했다.“먼저 손부터 씻어, 밥 먹어야지.”“알았어. 일단 요요 선물부터 꺼내고.”성연희가 손을 씻고 돌아와서는 요요의 선물부터 찾아 꺼냈다바비 인형, 오르골, 여러가지 예쁜 스커트…….“게임 테이블도 있는데, 그건 너무 커서 택배로 보냈어. 요 며칠 사이에 도착할 거야.”성연희가 웃으며 오르골을 열어 요요에게 건네주었다.“요요야, 마음에 들어?”은은한 음악소리가 순간 오르골에서 울려 퍼졌고, 아름다운 서커스단 마차 안에는 작은 공주가 유니콘의 등에 올라앉아 음악에 따라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그리고 그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요요의 깨끗한 두 눈에는 흥분된 빛이 가득했다.“네! 마음에 들어요!”“너무 많이 샀어, 연희야. 이렇게 많은 스커트를 요요가 언제 다 입는다고 그래.”끊임없이 주머니 속에서 요요의 선물을 꺼내고 있는 성연희의 모습에 청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고, 이에 성연희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예쁘고 깜찍한 게 있으면 요요에게 사주고 싶은 걸 어떻게 해? 나도 나 자신을 공제할 수가 없어.”그러면서 성연희는 또 상자 하나를 꺼내 청아에게 건네주었다.“자, 이건 네 선물.”“뭔데?”청아가 의아
성연희는 이번에 출장 가서 엄청 중요한 거래처와 성공적으로 거래를 성사하게 되었다고 유난히 기뻐했다. 이에 소희와 청아도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주고 술을 마시며 별의별 이야기를 나눴다.그러다가도 옆에서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요요가 뜬금없이 세 사람의 대화에 한마디씩 끼어들면 세 사람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밤은 점점 무르익어 갔고, 세 사람의 전쟁터는 어느새 주방에서 거실로 옮겨졌다. 연희는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고, 소희는 아이스크림, 청아는 감자칩을 먹고 있었다.하지만 먹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대화는 끊길 줄 몰랐다, 요요가 버티지 못하고 청아의 품속에서 잠들었는데도 세 사람은 자는 시간이 아까웠는지 늦은 밤이 되도록 계속 이야기를 나눌 만큼.그러다 술에 많이 취한 성연희는 결국 상에 엎드려 잠들었고, 소희는 잠든 성연희를 청아네 작은 침실까지 업고 가서 눕히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으로 돌아온 후, 소희는 베란다의 소파에 앉아 새벽의 강성을 바라보았다.소파 옆에는 플로어 스탠드만 켜고 있었고,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줄곧 맑기만 했던 소희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황홀함이 묻어 있었다.그렇게 한참 새벽의 바람을 쐬어도 잠이 오지 않자 소희는 휴대폰을 꺼내 통신기록을 뒤졌다.임구택이 소희에게 건 마지막 한통의 전화는 8일전으로 멈춰 있었다.청원에서 돌아와, 소희가 디자인 원고를 마저 그려야 한다며 임구택의 저녁 데이트를 거절했던 날.그리고 그날 소희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임구택이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한마디만 했다.[소희야, 다음에 헤어질 때 한 번만 나 좀 돌아봐 줄래?]꽤 오래 전의 기억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소희는 여전히 그때 당시 임구택의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그때 소희는 잠깐 멍해 있다가 알겠다고 아주 간결한 대답을 내뱉었지만, 임구택은 그것 마저도 엄청 만족스러웠는지 웃으며 전화를 끊었었다.하지만 심명이 갑자기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폭탄을 터뜨려 놓고 가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장시원이 듣더니 궁금해하며 물었다.하지만 임구택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술만 따라 마실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날 소희와 심명이 안고 있던 장면을 생각하기만 하면 임구택은 당장이라도 가서 심명을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소희한테 전화 안 해?”임구택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도 일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던 장시원은 더는 캐묻지 않고 휴대폰을 그의 앞으로 밀어주며 물었다.그러나 임구택은 움직이지 않았다.“이 한밤중에 급한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맞는 말이긴 했다.임구택은 바로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전원이 꺼져 있다고?’임구택이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불길한 예감에 순간 안색이 어두워진 임구택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복 외투를 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이에 장시원이 황급히 떠나는 임구택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무 조급해하지는 마, 소희가 네 번호를 차단했을 수도 있으니까.”“…….”소희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임구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또 소희에게 전화를 두 번이나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임구택은 페달을 끝까지 밟아 제일 빠른 속도로 경원주택단지에 도착했다. 그러다 다시 소희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문득 소희 침실의 불이 켜져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뭐야, 집에 있었어?’‘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배터리가 다 떨어진 거야, 아니면 정말로 나를 차단한 거야?’‘하지만 집에 있는데 휴대폰 배터리가 다 떨어질 리는 없는 거잖아? 그럼 정말로 나를 차단했다는 거네?’임구택의 얼굴색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그러다 몇 분 후, 소희 침실의 불은 꺼졌고, 임구택은 그걸로 소희가 집에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하지만 임구택은 날이 거의 밝
소희는 먼저 성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창 운전 중이던 성연희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바로 물었다.[언제부터 잘 때 휴대폰 전원을 꺼두는 습관이 생겼어?]“배터리가 다 돼서 전원이 꺼진 거야. 무슨 일인데?”소희한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인한 성연희는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별일은 아니고, 나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어, 명성 씨가 프란스로 출장 가는데 같이 가재.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하고 갈 겨를이 없어서 전화했던 거고.]“그래, 즐겁게 놀다가 와.”[응! 이제 내가 돌아오면 우리 또 술 마시자.]“알았어.”성연희와의 통화가 끝난 후 소희는 또 청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아도 성연희의 일 때문에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그러면서 또 요요랑 놀이공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아침 밥은 주방에 있다고 알려주었다.그렇게 두 통의 통화가 끝나는 동안 소희는 이미 1층에 도착했고, 임씨네 운전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올라탄 소희는 계속해서 통화기록을 위로 올렸고, 손가락이 ‘임구택’의 이름을 지나치는 순간 바로 멈추었다.그러다 한참 임구택에게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심명의 전화가 걸려왔다.[자기야, 일어났어?]“시간이 몇 시인데? 설마 너 아직도 안 일어났어?”오주는 국내보다 3시간이 빨랐다.[나 지금 점심 먹고 있지.]심명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물었다.[내 생각 했어?]“나 지금 임유민한테 과외 해주러 가야 해. 중요한 일이 없으면 끊어.”[또 임씨네 집에 가는 거야? 설마 벌써 임구택과 화해했어?]“지금은 유민이에게 과외 해주러 가는 거고, 그거랑은 별개의 일이야.”[그 말의 뜻은 아직 화해하지 않았다는 거네? 그럼 됐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 녀석을 이렇게 놔둬서는 안 되지.]방금 전 까지만 해도 목소리에 불만이 섞여 있던 심명은 금세 또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소희는 차창 밖만 바라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
아심은 표정 변함없이 물을 따라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눈치챘어?”승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말했다.“응. 원래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피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했어.”그는 아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 내 개인 계좌에 정아현 씨가 보낸 돈이 들어왔더라. 그래서 아현 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어.”“아현 씨가 그러더라고. 네가 부탁한 거라고, 네가 소개해 준 고객에 대한 커미션이라고 말이야.”“그 순간 모든 게 이해됐어.”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너는 정말로 남에게 빚지지 않으려는 사람이구나. 내게 여자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한 것도, 내가 병원에서 서명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지?”“그리고, 그때 이미 할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내 곁에 있어 주며 힘든 시기를 함께해준 거고.”“또한 예전에 네가 아플 때 내가 곁을 지켜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고.”“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너는 일부러 강성을 떠났지.”“혹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을까 봐,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더라도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아심은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나도 아쉬워.”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넌 매일 할머니와 통화했잖아. 할머니는 정말 기뻐하셨고, 가시는 길도 평온하셨어.”“그렇다면 다행이네.”아심은 승현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별할 때 얽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승현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심아, 정말로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아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사실 중간에 너와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해 볼까 생각도 했어. 하지만 미안해, 그건 내겐 무리였어.”승현이 물었다.“그 사람 때문이야?”아심은 솔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래.”승현의
승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심을 따라가며 계속 불렀다.“아심아!”아심은 걸음을 멈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더 이상 묘지까지는 가지 않을 거야. 너 대신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려줘.”승현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우리 엄마 성격이 원래 그렇고, 내 동생도 엄마가 너무 편애해서 버릇이 없거든. 그들이 한 말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승현은 아심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며칠 동안 나와 함께 해주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집에 가서 푹 쉬어. 며칠 지나고 나면 다시 보자.”아심은 답했다.“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집에 도착하면 알려줘.”“들어가 봐.”아심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가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그날 밤, 아심은 승현과 통화를 하며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다음 날, 아심은 출근했고, 한 주 동안 밀려 있던 업무가 그녀를 압도했다. 비서인 정아현이 서류 한 묶음을 들고 와서 서명을 부탁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사장님, 요 며칠은 지승현 사장님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시나 봐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앞으로 며칠 동안 지씨 집안에 관한 동향, 특히 주식 쪽에 신경 좀 써줘요.”아현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사장님이 여전히 신경 쓰시는 줄 알았어요. 사실 전에도 사장님이...”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제가 꼼꼼히 살펴볼게요!”“그래, 가서 일 봐요.” 아심은 미소 지었다.그 후 이틀 동안 아심은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승현도 여러 가지 일에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은 중간에 점심을 함께 먹은 것 외에는 별다른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셋째 날 오후, 아심은 마침내 모든 업무를 끝냈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아현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얼굴에 흥분이 가득했다.“사장님, 뉴스 보셨어요? 지씨 집안의 주식이 크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지승현의 눈 아래는 푸른 기운이 돌았고,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어머니 권수영을 깊이 응시했다. 권수영은 승현의 눈빛에 약간 겁먹은 듯 물었다.“그게 무슨 눈빛이니?”승현은 냉소하며 말했다.“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요.”“지수철이 태어난 순간부터 하루하루 그 애만 편애하더니, 지금은 핑계를 대며 모든 재산을 작은아들에게 물려주려는 거잖아요!”권수영은 그의 말을 듣고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렸지만 변명했다.“너와 수철은 모두 내 아들인데 내가 어찌 편애하겠니? 네가 굳이 그딴 업계 종사하는 여자를 여자친구로 사귀니, 내가 실망할 수밖에 없지 않니!”승현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면 엄마 말대로 모든 재산을 수철에게 넘기세요!”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서 걸어 나갔다. 권수영은 분노로 씩씩거렸고,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정말 내가 못 할 줄 아나? 그 천한 여자랑 결혼이라도 하면, 너도 당장 집에서 내쫓아버릴 거야!”“과연 이 집안 도련님의 자리를 잃으면 그 여자가 여전히 널 곁에 둘지 보자고!”승현은 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권수영뿐만 아니라, 다른 지씨 가문의 사람들도 모두 아심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아심이 김후연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된 후로 지씨 가문의 첫째와 둘째 집안 식구들, 심지어 승현의 할아버지까지도 아심의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모두가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김후연의 유산이 아심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지아윤은 기회를 보아 수철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 아심 쪽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저 여자 보여?”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봤어. 근데 왜?”아윤은 말했다.“저 여자가 네 집 재산에 눈독 들이고 네 형에게 달라붙어서 돈을 빼앗아 가려고 해. 네 엄마가 지금 무척 화가 났거든.”“가서 몇 마디 쏘아붙이고, 장례식장에서 쫓아내 버려!”수
지승현은 서둘러 말했다.“아주머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앞으로 우린 가족이나 다름없잖아요.”사실 양세민은 김후연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김후연이 없으니, 굳이 자기를 계속 고용할 이유도 없고, 집마저도 팔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승현의 말에 그녀는 비로소 안심되었다.“도련님, 저에게 이 집까지 주실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 머물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 급여도 필요 없어요.”“나중에 도련님이 오실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해드릴게요.” 양세민이 감격해 말하자 승현이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양세민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강아심은 오후 내내 승현과 함께 김후연의 유품을 정리해 주었다.김후연은 승현이 어렸을 때 입었던 옷들과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받았던 상장, 심지어 유치원에서 놀이를 하며 받은 작은 플라스틱 메달까지도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승현은 그 물건들을 바라보다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심은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 후 이틀 동안 아심은 승현의 곁에 머물며 김후연의 장례 준비를 도왔다. 아심은 나서지 않고 조용히 승현의 옆에서 함께 있어 주기만 했다.셋째 날, 김후연의 장례식이 열렸다. 아심은 조문객으로 참석해 마지막으로 꽃 한 다발을 헌화했다.이날 많은 사람이 김후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아심은 그곳에서 승현의 할아버지가 유가족 자리에서 오랜 시간 할머니의 영정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아심은 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아내와 함께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승현은 곧바로 그의 어머니 권수영에게 불려 나갔다. 권수영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일부러 물었다.“아까 네 옆에 있던 그 여자는 누구니?”승현이 대답했다.“제 여자친구예
한 시간 후.강아심은 고개를 숙여 오래된 마을을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강성으로 향해 차를 몰았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아심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김후연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차를 밖에 주차하고, 조용한 골목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부터 김후연 할머니 집 마당에 피어난 등나무꽃이 보였다. 활짝 핀 꽃들에서 달콤한 향기가 골목 가득 퍼져 있었다.꽃들은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꽃도 때맞춰 피어 있었지만 이제 그 꽃을 돌보던 주인은 더 이상 없었다.아심은 나무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가며 문턱을 넘을 때, 지난번에 김후연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해졌다.마당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해당화 꽃잎이 바닥을 가득 메웠고, 옆의 빨랫줄에는 예전에 아심이 김후연에게 사준 숄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지승현은 마당에 앉아 있었다. 김후연 할머니가 늘 앉던 등나무 의자에 앉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구부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그는 초췌한 얼굴에 눈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아!”아심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반쯤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왔어.”“힘내.”승현의 눈이 더욱 붉어지며 목이 메어 조용히 말했다.“할머니가 가셨어. 날 가장 아껴 주신 분이 영원히 떠나셨어.”아심은 그의 슬픔을 함께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할머니는 네 곁을 떠난 게 아니야. 다른 모습으로 곁에 남아 계시는 거야.”“널 곁을 스치는 바람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 그 모든 게 할머니가 돌아와 널 지켜보고 계신 걸지도 몰라.”승현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거의 간절하게 이마에 가져다 댔다.“아심아, 이제 나에겐 너밖에 없어.”아심은 낮게 대답했다.“내가 곁에 있을게.”잠시 후, 양세민 아주머니가 나와 아심에게 말했다.“할머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도련님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계세요.
도도희는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에게 다시 인연이 있기를 바랄게.”도도희의 말뜻을 짐작한 아심은 미소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난 가볼게. 수업 들어가요!”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그녀가 짐을 든 걸 보고 창가에 머리를 내밀며 작별 인사를 했다.“언니!”“아심 언니, 다시 돌아올 거예요?”“누나, 우리 모두 누나를 그리워할 거예요!”아심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강성에 있는 대학에 와야 해!”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아심은 작별 인사를 길게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에 더 머물지 않고 도도희에게 인사를 남긴 뒤,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짐을 차에 싣고, 그녀는 자신의 차를 몰아 저택을 떠났다....강시언은 2층으로 올라가 그 오래된 창고 방에 들어갔다. 그의 키 큰 몸은 벽에 기대어 앉아 밖의 흐릿하고 어두운 날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 후, 그는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시언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강아심, 너 나한테 복수하는 거냐?”이 시간 동안 그녀의 애매한 태도와 고통스러운 모습이 모두 자신에게 일부러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시언은 처음으로 차갑게 아심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불렀고,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다. 그간의 온기와 친밀함이 마치 빗속의 안개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텅 빈 회색만이 남아 있었다.아심은 운전 중이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눈을 살짝 깜빡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시언의 목소리는 어두웠다.“넌 모든 걸 계산했겠지만, 네 마음은 계산해 봤냐?”아심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본인이 분명히 말씀해 주셨잖아요. 특수 요원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시언이 말했다.“그럼 네가 내게 했던 말 중 진심이 뭐야?”아심은 천천히 대답했다.[당신에 대한 존경과 애정, 그리고 당신에
다음 날.강아심은 전화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날이 밝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방 안은 회색빛으로 어두웠다. 그녀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귀에 대고 받았다. “여보세요?”[아심아!] 전화기 너머에서 지승현의 슬픔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그 말에 아심은 눈을 번쩍 뜨며 순식간에 잠이 깼다. 몸은 깨었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 온화하던 김후연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심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고 아심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그 후, 별장의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급한 일이 생겨 강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배웅은 사양하니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보자고 했다.채팅방에서 모두가 놀라며 아쉬워했고,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며 나중에 강성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몇 개의 메시지를 답장하고 난 후 그녀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집을 떠나기 전 며칠 동안 머물렀던 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보고, 문을 닫고 나섰다. 계단을 내려올 때 마침 강시언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단체 채팅방의 메시지를 보고 아심을 찾으려 올라가던 중이었다.아심의 손에 들린 여행 가방을 본 그는 마음이 답답해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아심이 대답했다. “강성에 일이 좀 생겨서요.”시언은 그녀를 주시하며 물었다. “어젯밤 일 때문이야? 아직도 화난 거야?”“아니요!” 아심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아심은 짐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려 하자, 시언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아심!”아심은 걸음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가 말을 이어 나가길 기다렸다.“안 가면 안 될까?” 시언은 깊은 눈빛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힘겹게 끌어낸 말처럼, 간절하게 이어졌다. “안 가면, 안 돼?”아심은 가방 손잡이를 꽉 쥐고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강시언이 말했다. “별일 아니에요.”도도희가 강아심의 손을 놓으며 웃으며 말했다. “됐어,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어.”이에 아심이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쉬세요.”“그래!”세 사람은 함께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길목에서 헤어졌다. 시언과 아심은 각자 사는 별장으로 돌아갔다. 별장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도우미는 이미 퇴근해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시언이 말했다. “저녁을 못 먹었으니, 뭐라도 좀 준비해 줄게.”“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심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피곤해서 입맛도 없어요. 그냥 올라가서 자고 싶어요.”“그럼 그렇게 해. 만약 밤에 배고프면 언제든 전화해.”시언의 말투는 다정했고, 아심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걸어갔다. 시언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달라 보이는 듯해 말문을 열었다.“이번 일, 나도 미리 알지 못했어.”아심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알아.”“하지만.” 시언의 목소리는 밤처럼 깊고 잔잔했다. “시야가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치챘어. 몸을 감추려고 일부러 옷을 더 입고, 변성기를 썼지만, 그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차렸지.”“걔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라서 모른 척했어.”아심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조금 진정이 되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함께 묶였을 때 시언이 빠져나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던 점이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또한, 그 용병들이 두 사람에게 밧줄을 묶을 때 시언의 상처 부위를 피해서 묶었다는 것도 이상했다.다만 그 당시 아심은 마음이 급하고 혼란스러워서, 시언이 자신을 신경 써서 움직이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난 원망하지 않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진짜 노도의 부하들이 사람을 사서 복수하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심은 얕게 웃으며 다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는 멈춰
아심은 말을 마치고 바로 물었다.“조하루는 어떻게 됐나요?”시야는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무사히 집에 데려다줬어요. 집이 꽤 가난해서 할아버지가 아프신데도 병원에 갈 돈이 없다고 해서 저희가 그 집에 돈을 좀 두고 왔어요.”“놀라게 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하루 군에게도 여러분이 무사하다는 걸 전했습니다. 그저 장난이었다고 말했어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천만에요! 예전엔 우리가 잘 몰랐지만, 이제 앞으로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시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농담 그만하고, 빨리 떠나!” 시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야는 아심에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기 사람들을 불러 함께 산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아심을 향해 말했다.“이 일은 진언 님과는 아무 상관 없어요. 전부 제 생각이라서, 절대 진언 님을 탓하지 마세요!”아심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탓 안 해요. 장난이었다면서요?”시야는 아심에게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시언의 차가운 눈빛이 번쩍이자 급히 사라졌다.잠시 후, 아까까지 살기와 긴장으로 가득 찼던 오두막은 다시 조용해졌다. 원래의 고요하고 텅 빈 분위기로 돌아갔다. 방 한가운데의 불만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고, 나뭇가지가 탁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시언은 아심 앞에 앉아 물병을 건네며 물었다.“놀랐어?”아심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모두 무사하니 더 좋은 거 아니에요? 그렇죠?”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시야 대신 사과할게.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아심은 방금 전의 격렬한 감정이 갑자기 멈추자 머릿속이 멍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아니요, 물어볼 건 없어요. 다 알겠으니 우리 내려가요. 벌써 늦었어요. 도도희 이모가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방금도 전화했었어요.”시언은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지금 내려가자.”두 사람은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