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은 황급히 도망쳤다. 소혁을 멀리 피하고 싶었다. 소혁이 자신에게 매달릴까 봐 두려웠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소연에게 소씨 집안이 아닌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고 일깨워줄 가봐 두려웠다.소연은 돌아가서 일도 하지 못하고 마민영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있어 휴가를 내야 한다고 하면서 바삐 차를 몰고 도망쳤다.소혁은 줄곧 그녀의 차를 쫓아 멀리 달렸고 진귀한 포르쉐를 보면서 놀라움과 탐욕의 빛을 드러냈다. 소혁의 눈에는 소연은 확실히 부자였다.소연은 소혁을 따돌린 후 화가 난 상태로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소희, 너무 독하게 구는 거 아니야?”“독하다고?” 소희는 냉소했다.“소혁은 아무런 이유 없이 나온 사람이 아니야. 20년 동안 소씨 집안에서 좋은 나날들을 보낸다고 정말 자신의 출신을 잊었어?”“나에게 이런 말을 하지 마. 나는 어릴 때부터 소씨 집안에서 자랐고, 추씨 집안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소희가 말했다.“네가 관계가 없다고 해도 소용없어. 왜냐하면 너는 영원히 바꿀 수 없기 때문이야. 너와 소혁은 같은 핏줄이야. 추씨 집안의 빚, 이제 갚을 때가 되었어!”소연은 이를 갈았다.“소희, 소혁이 네가 일부러 데리고 온 사람이지? 나를 소씨 집안에서 쫒아내려고. 소씨 집안의 재산과 회사를 원해? 어림도 없지. 진원은 이미 약속했어. 소씨 집안의 돈과 부동산은 모두 내 것이라고. 한 푼도 너에게 주지 않을 것이야!”“원래 나도 원하지 않았어!”“싫은데 왜 날 그렇게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야?”소희는 말투가 냉담하다.“소연아, 탓하려면 너 자신을 탓해! 너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잖아. 내가 먼저 건드린 게 아니야. 오히려 네가 자꾸만 분란을 일으키지. 그러니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연은 화가 났다.“왜냐하면 너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서 위협이야. 내가 어디에 가든지 네가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편안하게 지낼 수 없어!”“그건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해서 그런 거야!”“소희, 너 가만 안
소연은 이틀 동안 집에 있었다. 마민영의 조수에게 몇 번 재촉을 받고서야 다시 제작진 팀으로 향했다.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마민영의 분장실로 갔다.8시, 마민영은 이미 도착했다.그날 소희가 말한 이후로 마민영은 하루도 지각한 적이 없다. 이 감독이 가장 기뻐하며 특별히 소희에게 감사를 표했다.마민영은 소연의 차림새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뭐 자신이 스타인 줄 알아? 안심해. 네가 제작진 팀에서 일하며 기자가 쪼그리고 지켜보아도 기자들은 너를 찍지 않을 거야.”소연은 마민영에게 조롱을 받고 마음속에 불이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스크를 벗고 일을 시작했다.마민영이가 화장할 때 소연은 조수에게 물었다.“요 며칠 나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까?”조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없어요!”소연은 눈빛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그 제작진 중에 소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녀는 소희가 어디에서 소혁을 찾아왔는지 모른다. 소혁이 지금 제작진 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모르겠어요, 들어본 적 없어요!” 조수가 웃으며 말했다.“제작진 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겠어요?”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하루빨리 소혁을 벗어나야 했다. 진원과 소정인이 그의 존재를 알아서는 절대 안 된다.그러나, 하늘은 분명히 소연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촬영장에 갔을 때, 소혁이 갑자기 달려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를 불렀다.“누나, 누나!”소연은 옆에 있던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두 그녀의 몸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소연은 비록 개인 디자이너일 뿐이지만, 제작진 팀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녀가 부잣집의 큰 아가씨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세운 이미지도 부잣집 아가씨가 가족에게 의지하지 않고 열심히 분투하며 자신의 사업을 만드는 이미지이다.그러나 소혁이 이렇게 대중 앞에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자 다른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부잣집 아가씨한테 어떻게 막노동하는 동
이 말을 들은 소혁이 말했다.“우리 부모님은 소희를 4년 동안 키웠어. 하지만 2년 전에 나에게 720만원을 주며 연을 끊자고 하더라.”소연은 차갑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소희도 나한테 720만원을 줄 수 있는데, 우리 둘은 같은 배에서 나왔잖아. 넌 내게 얼마나 줘야 한다고 생각해?”소혁은 계산적이었다.이 말을 들은 소연은 이를 악물었다.“만약 내가 너에게 돈을 준다면 내 눈앞에서 사라질 거야?”“문제없어, 돈만 주면 널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소혁이 즉시 대답했다. “얼마를 원해?”소연이 차갑게 물었다. 소혁은 눈동자를 굴리며 타진하듯 말했다.“그럼 2천만원 어때?”“좋아, 지금 바로 송금할게, 돈을 받고 나면 즉시 드라마 제작진을 떠나,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소연이 무겁게 말했다.소혁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장기 식권 같은 소연을 쉽게 놓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소혁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승낙할 수밖에.“좋아, 돈을 준다면 난 갈 거야!”소연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송금할게!”소혁의 눈이 빛났다. 그는 시험 삼아 2천만원을 언급했는데 소연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동의했다. 이건 그녀가 진짜 돈이 많다는 걸 의미했다!그러면 더더욱 그녀를 놓칠 수 없었다!소혁은 마음이 들떠서 인생의 정점을 찍을 것만 같았다!소연은 소혁에게 2천만원을 송금하고 독설을 퍼부으며 말했다. “바로 사직해.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소혁은 핸드폰에서 송금된 돈을 확인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히죽 웃었다. “바로 갈게요!”그는 고개를 돌려 극단의 팀장에게 사직서를 내러 갔다. 그러고는 두 걸음 걷다가 다시 뒤돌아 말했다. “누나, 시간 나면 다시 뵈러 올게요!”소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꺼져!”소혁는 얼굴이 차가워졌고, 눈에는 음울한 기운이 서렸다.소연은 소혁의 뒷모습이 점점 사라지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 빚,
“오늘 입찰 회의는 어땠어?”최결이 담담하게 물었다.청아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오전에 장 사장님이 최결님을 찾으셨는데, 중요한 고객이 있다고 하셔서 저를 데리고 가신 거예요.”“괜찮아!”최결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우리 둘 다 입찰 안에 참여했고 청아 씨도 입찰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누가 가든 똑같지!”“네, 그럼 이따가 입찰안 진행 과정을 보내 드리겠습니다.”청아가 말했다.“조급해 하지 마. 아 그리고 어젯밤에 김우와 협력하는 방안으로 너무 늦게 자서 그런데 커피 한 잔만 타 줘!”최결은 한참 타자를 하며 청아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리고 청아는 그녀에게 커피를 따라주었다.커피를 타다 준 청아에게 최결은 또 한 묶음의 자료를 건네주며 말했다.“이것 좀 복사해 줘. 복사해야 할 건수는 내가 모두 써 놨으니 부탁해.”“알겠습니다!” 청아가 대답했다.“청아, 이것 좀 업무부서에 보내 줘!”“청아, 기술부에서 요구하는 데이터인데 장 사장님이 이미 서명했으니 빨리 보내 줘!”청아는 줄곧 최결을 도와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했다.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그러니 장시원이 입찰하려는 몇 회사의 재무제표를 요청할 때까지 청아는 그의 요구를 만족할 수 없었다.최결은 이 사실을 알고 눈살을 찌푸리며 청아를 바라보았다.“할 수 없으면 말을 해. 이렇게 사단 내지 말고? 너 때문에 장 사장님의 일이 지체되잖아! 장 사장님이 업무 효율에 대한 요구가 얼마나 높은 지 아냐? 내가 보기에 넌 아직 부족해, 더 노력해야 한다!”청아는 변명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네!”최결은 장시원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보고서는 나에게 맡겨. 한 시간 안에 너한테 보내 줄게!”장시원은 청아를 힐끗 쳐다보며 손목을 들어 시간을 한 번 보았다.“지금 나가서 한 시간 후에 돌아올 겁니다.”“알겠습니다!” 최결은 즉시 말했다.“안심하세요. 한 시간 안에 무조건 완성하겠습니다!”장시원은 또 한 번 청아를 보고 나서야 성큼성
최결이 말했다. “공교롭네요. 장 사장님은 방금 나가셨어요. 오기 전에 장 사장님께 전화를 안들이셨나요?”우민율은 눈썹을 까닥하며 말했다.“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어서 전화 안 했지!”최결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렇다면 먼저 장 사장님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세요. 장 사장님은 곧 돌아오실 거예요!”“좋아!” 우민율은 특별히 청아를 한 번 더 보고 나서야 사무실로 갔다.최결은 뒤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들어갔다.사무실 문이 닫히자 최결은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을 데리고 커피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설탕 세 스푼, 우유는 넣지 않았어요!”우민율은 웃으며 말했다.“내 입맛을 기억하네. 고마워!”그녀는 무심한 듯 최결에게 물었다.“새로 온 조수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떻게 39층으로 왔어?”최결이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낙하산처럼 39층에 왔죠. 게다가 전에 여기서 일한 것도 아닙니다!”우민율은 순간 표정이 굳어지며 물었다.“장시원이 데리고 온 건가?”최결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 사장님의 태도는 미지근해요. 아는 사이 같지는 않아요.”우민율은 안심하고 커피를 들고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그럼 나 혼자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서 일해!”“그럼 부탁할 일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시키세요!”최결이 웃었다.“좋아!”최결은 사무실에서 나와 곧장 청아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청아, 맞은편 커피숍에 가서 민율 아가씨에게 드실 간식과 차를 사 와. 홍차, 무스는 녹차 맛으로, 그리고 헤이즐넛 초콜릿도. 꼭 기억해. 모두 민율 아가씨가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이야. 그리고 꼭 맞은편 커피숍에 가서 사와.”청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죄송하지만 장 사장님이 저에게 맡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시간이 안 돼서요.”그 말을 들은 최결의 얼굴이 굳어졌다.“우청아, 민율 아가씨가 누군지는 알아?”청아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고객입니까?”“고객보다 더 중
장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원의 표정은 온화하고 냉담했다.“민율 아가씨, 무슨 일 있습니까?”우민율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생태원을 분리한 후,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제 생각은 안 했어요?”장시원은 양복 외투를 벗고 가죽 의자에 몸을 맡겼다. 그러고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그의 눈 속의 냉랭함을 희석했다.“우민율, 우리 모두 성인이니 밀고 당기는 애매한 썸 관계는 됐고 사실대로 말할게요. 전 그 쪽한테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우민율은 씁쓸함을 감추며 가볍게 웃었다.“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장시원은 담배를 물고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없습니다!”“그럼 저한테 아직 기회가 있네요!”우민율은 부드럽게 웃으며 반드시 가질 거라는 의지를 보였다.장시원은 가볍게 웃었다.“저를 잘 모르시네요. 제가 좋아하는 여자라면 얼마든지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2년 동안 제가 대답하지 않은 걸 보면 모르겠어요? 그러니 단념하세요!”우민율은 움찔했다. 그러고는 말했다.“그런데 2년 동안 당신 곁에 다른 여자도 없었잖아요!”장시원은 약간 짜증이 났다.“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여기서 계속 치근덕거리시면 본인 몸값만 떨어진다는 것을 모르나요, 그리고 이런 수법은 남자에게 안 통해요. 짜증만 날 뿐이죠!”“뭐 짜증 난다 해도 괜찮아요. 당신한테 외면당할까 봐 두려울 뿐이지!”우민율은 거대한 녹나무 책상에 앉아 몸을 한껏 기울이며 남자를 주시하고 있다.장시원이 웃었다.“당신은 자신의 몸매가 어떻다고 생각하세요?”우민율이 자신있게 말했다.“완벽해요!”“맞아, 완벽하죠. 남자한테 꽤 유혹적이죠. 그런데 전 관심 없습니다. 설마 그걸 못 알아 채시건 아니겠죠?”우민율의 안색이 급변했다.그녀가 막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장시원은 말했다.“들어오세요!
우민율은 괴로웠다. 마음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소문에는 장시원이 여성들한테 젠틀하다고 하는데 그건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말하는 헛소리이다. 장시원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여성에게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남자였다.2년을 쫓아다녔다. 그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하지만 시원은 그런 그녀를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우민율은 얼굴에 비통함을 띠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당신 말이 맞습니다. 다 제 탓이죠.”말이 끝나자 가방을 들고 분연히 떠났다.우민율은 자리를 떠났지만, 최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장 사장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회사를 위해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일한 것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봐주세요!”“한 번뿐입니다. 당신이 우청아씨의 공을 채가는 것을 한 번이라도 다시 보게 된다면 짤 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장시원은 고개를 숙이고 보고서를 보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한기를 느끼게 하였다.최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벌벌 떨며 말했다.“예, 장 사장님 감사합니다!”“나가세요, 그리고 우청아씨 보고 오라 하세요!”장시원이 말했다.최결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사장실 문을 나서서야 자기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원망을 품고 우청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장 사장님이 불러.”그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청아는 우민율이 슬픈 표정을 눈치챘다. ‘최결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사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본데?’청아는 장시원이 화를 냈다고 짐작했다. 그녀는 이미 그의 변덕스러움을 경험해 보았다.청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 안에서 어떤 감정의 변화도 없는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청아가 장 사장 앞으로 다가갔다.“장 사장님, 찾으셨어요?”장시원은 보고서를 뒤적이며 미지근한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사무실에서 일할 때 곤욕을 참으면서 일할 필요는 없습
장시원이 소리 없이 심호흡 한번 하여 마음을 가다듬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이것뿐만 아니라 고정자산의 변화도 한번 봐 봐, 비정상적이잖아.”장시원이 제표 중의 잘못된 부분들을 짚어내며 청아에게 김화의 의도를 분석하는 걸 가르쳐주었다.조금 전 까지만 해도 오리무중이었던 청아는 장시원의 설명을 들으며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장시원한테서 무언가를 배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청아가 회사에 온 이후로, 장시원은 기회가 되면 청아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설령 점심에 밥을 먹다가도 청아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묻게 되면, 장시원은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해석해 주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고, 곁눈질로 그걸 눈치챈 청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어느새 빨갛게 물든 청아의 귓불을 쳐다보며 장시원의 눈빛이 더욱 그윽해졌다.“내가 한 말들, 다 기억했어?”“네! 다 기억했어요.”“집중해서 들어, 같은 말 두 번 다시 반복하는 건 딱 질색이니까.”얼핏 들으면 상사가 직원에게 해주는 정상적인 귀띔이었다. 하지만 청아는 왠지 모르게 꿍꿍이가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순간 얼굴까지 빨개졌다.“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아무일 없는 척하며 덤덤하게 대답하고 있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그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앞에 있는 다른 제표를 가리켰다.“그럼 정풍의 제표를 한번 체크해봐, 진짜로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보게.”청아는 더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장시원이 가르쳐준 대로 제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제표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고, 최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야 청아는 이미 퇴근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또각또각 사무실로 걸어 들어온 최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청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장시원에게 퇴근해도 되냐고 물었다.장시원도 그제야 시간을 한 번 보고는 청아를 향해 말했다.“너도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