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원의 눈빛에 놀란 청아가 급히 말했다."시원 씨는 나한테 잘못한 거 없어요, 내가 잘못했어요.""억울한 척하지 마!"장시원이 청아의 어깨를 움켜쥐고 얼음장마냥 차가운 얼굴로 청아를 쳐다보았다."만약 정말 나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순순히 내 말에 따라.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너의 죄가 없어질 거라는 망상은 하지도 말고. 나를 건드린 사람은 나의 허락이 없이는 그 누구도 살릴 자격이 없어."장시원에게 잡힌 어깨가 너무 아팠지만 청아는 감히 뒤로 피하지도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장시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약간의 화간 묻은 어투로 말했다."알았어요, 피하지 않을 게요.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시원 씨도 기한은 줘야 할 거 아니에요!""기한?"장시원이 듣더니 냉소하며 대답했다."빚을 진 사람이 빚쟁이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건 처음 보네? 기한을 달라? 좋아, 평생 어때? 아니면 내가 장래에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고, 아주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게 되면 네가 나에게 가져다준 불쾌함을 잊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꺼져도 좋을 거야."청아는 순간 온몸이 떨렸다.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고 숭배했던 남자가 악마로 변한 것 같아 충격을 받은 것이다.장시원은 그제야 청아를 놓아주고 제자리로 돌아와 냉담하게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담긴 공포와 거리낌을 보고 통쾌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더욱 갑갑했다."무고한 척하지 마, 구역질 나니까."장시원의 차가운 악담에 청아의 눈동자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안색은 엄청 창백해졌지만 마음속으로는 평정심을 되찾고 창밖을 쳐다보았다.‘괜찮아!’‘아무리 어두운 세월이라도 난 다 이겨냈잖아.’‘진 빚을 다 갚아야지. 그래야만 홀가분해질 거야.’‘그러니 두려울 게 없어.’‘비록 인생에 사랑도 없고 혈육의 정도 없다지만 나에겐 요요와 소희가 있잖아. 그거면 돼.’장시원은 화가 다 풀렸는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경원주택단지로 질주했다.같은 시각, 이씨 아주
청아는 쓸쓸한 정서를 억누르고 다정하게 웃었다."그래."이때 이씨 아주머니가 옆에서 물었다."요요 외할머니는 퇴원하셨어?""네, 이미 집으로 돌아갔어요.""잘됐네."요요가 듣더니 기뻐하며 물었다."그럼 요요도 외할머니 보러 갈 수 있는 거예요?""당연하지. 나중에 같이 가자."청아가 대답하며 요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엄마한테로 와, 아저씨한테 달라붙지 말고. 아저씨는 일이 있어 금방 가봐야 해."요요는 그제야 고분고분 청아를 향해 달려갔다.품속이 빈 순간 장시원은 마음도 텅 빈 느낌이 들었다.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요요와 작별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 매일 제때에 밥 드셔야 해요!"요요는 장시원을 바라보며 청아가 자주 하던 말로 장시원에게 당부했다.이에 장시원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요요와 작별인사를 한 뒤 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청아의 곁을 지날 때 담담하게 귀띔했다."월요일에 출근하는 거 잊지 마."청아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조용히 대답했다. "네."그렇게 장시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 떠났고, 청아는 그제야 긴장감을 풀고 이씨 아주머니에게 말했다."먼저 올라가서 쉬세요. 제가 요요랑 좀 놀다가 올라갈게요."이에 이씨 아주머니가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다시 청아를 향해 물었다."요요 할머니가 퇴원했으니 나도 이제 올 필요 없는 거 아닌가?"청아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계획이 갑자기 변했으니.그래서 이씨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요요를 계속 돌보고 싶으세요?""당연히 돌보고 싶지. 요요는 말도 잘 듣고 철도 들어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걸." 이씨 아주머니가 애틋한 눈빛으로 요요를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럼 계속 저를 도와 요요를 돌봐 주세요. 제가 일자리를 새로 찾았거든요, 월요일부터 출근할 거고. 평일에는 그냥 예전처럼 제가 퇴근할 때까지만 요요를 돌봐 주시면 되고요, 주말에는 제가 요요랑 있을 테니까 아주머니는 집에서 쉬시면 돼요.""정말이야?"이씨 아주머
소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아가 불쌍한 건 여전했다.억울하지 않다고?그때 당시 청아는 임신한 채 이국땅에서 혼자 살면서 허연의 돈을 갚기 위해 만삭이 될 때까지 식당에서 잡일을 했다. 때로는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 하기도 했었고. 한 번은 저녁 늦게까지 일한 바람에 과로로 집 앞에 쓰러진 걸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일찍 일어난 집주인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했었다.그 후 집주인은 그토록 고생하는 청아가 불쌍해 일부러 자신이 밥 지을 힘이 없다고 청아에게 하루 세끼를 맡겨 집세와 식비를 면제했다.그런 상황에서도 청아는 처음에 일자리를 찾지 못했을 때에만 소희가 준 카드를 사용했고 그 후에는 한 번도 카드 속의 돈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그러다 소희와 심명 그들이 치카고로 날아가 같이 살게 되어서야 청아의 생활이 많이 호전되었다. 나중에는 그녀가 디자인 한 작품이 우승을 따내게 되면서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았지만 결국 소희의 카드 값과 허연의 400만 원을 갚는 데에 써버렸다.그리고 금전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지난 2년 동안 청아가 홀로 요요를 키우면서 받은 고통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요요가 아직 젖을 떼지 않았을 때, 청아는 매일 밤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낮에는 또 수업하러 가고 수업시간이 끝나면 아르바이트하러 갔다.어느 날은 요요가 차 한 대 없는 늦은 밤중에 갑자기 열이 나는 바람에 청아는 홀로 울면서 10킬로를 뛰어 병원으로 갔다. 그런 무력함과 초조함은 청아 본인 외에는 누구도 모를 것이다.외국에 있는 그 2년여 동안 다행히도 착한 집주인, 소희 그리고 성연희가 있었기에 청아가 겨우겨우 버텨왔던 것이다.비록 요요의 존재를 장시원은 모르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 두 사람의 아이였고, 청아가 또 그렇게 고생스럽게 요요를 키웠는데, 정말 아직도 빚진 게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저녁에 소희와 청아는 요요가 조용히 청아의 품에서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청아는 고개를 숙여 곤히 잠든 요요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온화한
다음날 토요일,오늘도 임씨 가문의 운전기사가 소희 데리러 왔다.가는 길에 소희는 차 안에서 교과서와 복습 자료를 뒤적거리며 강의할 내용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임유민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임유민의 과외를 맡기 시작해서부터 여러 번이나 개인 사정 때문에 오지 못했으니. 나중에 우정숙이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임씨 가문에 도착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소희는 잔디밭 쪽에서 전해오는 함성을 듣게 되었다.소리를 따라 찾아가 보니 임구택과 임유민이 공을 차고 있었다잔디밭에는 골포스트가 놓여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운동복 차림을 한 채 뛰어다니고 있었다.종래로 임구택이 축구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 소희는 갑자기 조백림이 조직한 축구 경기를 볼 때 임구택이 했던 말이 생각나 순간 할 말을 잃었다.‘2년이나 지났는데 왜 갈수록 유치해지는 거야.’소희는 잔디밭 가장자리까지 천천히 걸어가 두 사람이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구경했다.두 사람은 축구공 하나를 둘러싸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뛰어다녔다. 임구택은 줄곧 임유민을 양보하면서 기교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그러다 몇 분 후 임구택은 드디어 공을 넣었고 임유민은 멀리 굴러간 공을 주으러 갔다.그 틈을 타 임구택이 소희를 돌아보며 웃었다. "거기 서서 뭐 해, 물이나 가져다줘."이에 소희는 하얀 벤치에 놓인 생수 두 병을 들고 임구택 쪽으로 걸어갔다.멀지 않은 거리를 임구택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쳐다보았다.소희가 다가가서 물을 건네주었다."나 손이 엄청 더러워. 열어줘."임구택의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흰 이마에 흩어져 붙어 있었고, 소희를 쳐다보고 있는 두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어둡고 깊어졌다.소희는 임구택을 한 번 흘겨보고는 물병 뚜껑을 열어 건네주었다.물병을 건네받은 임구택은 고개를 들어 물을 꿀꺽꿀꺽 크게 들이마셨다. 옆으로 흘러나온 물방울은 그의 각진 턱선을 따라 기복이 심한 목덜미를 지나 흰색 티셔츠 속으로 스며들었고, 티
"어서 수업하러 가야지."소희가 난감한 표정으로 임구택을 한 번 노려보고는 임유민을 향해 정색해서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가방을 메고 별장으로 들어갔다.임유민이 임구택을 향해 눈썹을 한 번 올리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둘째 삼촌, 소희 쌤이 여전히 삼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 더욱 분발해요."이에 임구택이 임유민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도 분발해.""제가 뭘 분발해요?""둘째 삼촌과 둘째 숙모가 잘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줘야지."임유민이 듣더니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말고 저에게 맡겨요. 어차피 소희 쌤은 지금 삼촌보다 저를 더 좋아하니까."".....".‘그래, 둘째 삼촌 화병이 나 죽을 때까지 시비 걸어. 삼촌이 죽으면 너에겐 둘째 숙모도 없을 거니까.’......소희는 임유민의 방에 앉아 임유민이 샤워하는 동안 이번 주의 숙제를 전부 검사했다.그리고 임유민도 소희가 기다린다는 걸 알고 신속히 샤워하고 수업하러 나왔다."머리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소희가 임유민의 젖은 머리를 한 번 보고는 물었다."괜찮아, 금방이면 말라.""그럼 수업 시작하자."소희는 1교시에서 지난주의 내용을 복습하고 2교시에서는 다음 주에 배울 내용을 예습할 계획이었다.임유민이 자신의 주말 숙제를 소희에게 건네주며 물었다."어때?"방금 이미 한 번 훑어본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전보다는 많이 진보했어."적어도 시를 함부로 왜곡하지 않았으니."그럼 가서 둘째 삼촌에게 보여 줘."임유민이 웃으며 말했다."둘째 삼촌보고 우리 아빠에게 사진 찍어 보내라고 해. 안 그러면 아빠는 또 내가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았다고 의심하실 거야."한눈에 임유민의 꿍꿍이를 간파한 소희가 덤덤하게 웃었다."방금 네가 샤워할 때 내가 이미 너의 엄마에게 찍어 보냈어. 두 분 지금 함께 계시겠지?"순간 할 말을 잃은 임유민이 한참 지나서야 불만이 묻은 어투로 말했다."다음부터는 둘째 삼촌에게 시켜, 안 그러면 엄
임유민이 보더니 바로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왜 날 그렇게 쳐다봐? 난 너에게 점심 먹고 가라고 권했잖아. 둘째 삼촌은 네가 거절할 줄 몰랐어."중도에 분명 임유민이 휴대폰을 만진 걸 본 소희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이때 임구택이 더욱 무고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에 임구택과 임유민이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소희의 뒤를 따랐다.차에 오른 후 임구택이 말했다."점심시간이 다 되었는데 일단 밥 먹으러 가자.""점심에 청아 집으로 가서 밥 먹기로 했어.""미뤄."소희가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는 다시 말했다."이미 하고 있을 거야."임구택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다시 일깨워 주었다."전에 청아 씨가 치카고로 돌아가게 되면 어정으로 오겠다고 약속했던 거 잊지 마."소희가 듣더니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자신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지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다 눈동자를 한 번 돌리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소희의 흔쾌한 대답에 임구택이 기뻐서 바로 물었다."청아 씨의 어머니 이미 퇴원하셨다고 들었는데, 청아 씨는 언제 돌아간대?""시원 씨가 알려주지 않았어?"소희의 의아함이 묻어있는 눈빛에 임구택이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물었다."뭘?""청아를 치카고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시원 씨가 장씨 그룹에서 청아한테 알맞은 일자리를 찾아줬어.""......"임구택이 고개를 돌려 소희를 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나를 가지고 놀았어?""아니."소희의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모습에 임구택이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마음속의 울분은 갈수록 벅차올라 얼굴색마저 어두워졌다.이에 순간 기분이 좋아진 소희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올라간 입꼬리는 여전히 임구택에게 포착되었다.웃고 있는 소희의 옆모습을 보노라니 임구택은 마음속의 울분과 불만이 단번에 많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소희는 차 밖에 진짜 사람이 있는 거 같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착하네."임구택이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 했다.이에 소희가 임구택 먼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내일 오후 유민이를 데리고 승마장으로 가자."소희의 뜬금없는 제의에 임구택이 잠깐 멍해 있더니 다소 불쾌해하는 어투로 물었다."우리 둘의 데이트인데, 유민이는 왜 불러?""성적이 오르면 사격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거든.""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서 왜 나와 했던 약속은 마음에 두지 않는 거야?""내가 뭘 약속했는데?""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약속했잖아.""그건 당신이 먼저 질린다고 한 거잖아."소희의 대답에 임구택은 순간 가슴이 바늘에 찔린 것마냥 아팠다.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이때 갑자기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청아가 휴대폰 맞은편에서 밥이 거의 다 되어 간다고, 언제 돌아오냐고 묻고 있었다.이에 소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나 지금 집 아래에 있어, 곧 올라갈 거야."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임구택과 작별을 고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내 그윽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임구택의 눈빛에 소희는 결국 말을 삼켰다.임구택이 손을 들어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웃었다."어서 올라가, 밥 많이 먹고.""응, 운전 조심해."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임구택이 자신을 계속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건물로 들어갔다.그리고 차에 앉아 있는 임구택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한 번도 돌아보지 않네. 모질긴.’소희가 청아의 집으로 들어서니 청아가 마침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그러다 소희를 보고 고개를 들어 웃으며 물었다."왜 오늘 이렇게 늦게 돌아온 거야?""임유민이 일이 있다고 해서 수업을 늦게 시작했어."거실에서 놀고 있던 요요가 소희의 목소리를 듣고 소희한테로 다가갔다."소희 이모!""오전에 뭐 했어?""엄마랑 같이
가뜩이나 매일 온몸으로 출근을 거부했던 마민영이 듣자마자 이 감독을 찾아갔고, 마민영의 그런 모습에 대본을 보고 있던 이 감독이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민영 씨가 여긴 무슨 일이지?”“감독님, 왜 소희 씨만 주말을 쉴 수 있는 거죠? 저도 쉬겠습니다!”“누가 민영 씨한테 그런 소리를 했어?”“소동 씨요!”이 감독의 물음에 마민영이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소동을 가리켰다.그리고 마침 마민영에게 눈짓을 하려던 소동이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마민영의 행동에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저 여인 바보 아니야?’‘저런 지력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연예계에서 살아남은 거야?’이 감독이 순간 안색이 어두워져서는 소동을 바라보았다.“소동 씨, 우리 제작팀의 촬영 진도가 이미 엄청 지체됐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말아 줄래?”“저, 저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에요.”소동의 어눌한 대답에 이 감독이 한숨을 내쉬고는 마민영을 바라보았다.“민영 씨, 소희 씨는 우리 제작진의 직원이 아니라 북극에서 보내온 디자이너야. 그러니 북극의 직원이 북극의 규칙에 따라 주말을 쉬는 게 마땅한 거 아닌가? 그리고 매주 금요일이면 소희 씨는 토요일에 찍을 씬들의 의상을 아무런 누락도 없이 전부 다 정리해 놓고 쉬는 거야. 하지만 민영 씨가 당시 체결 한 계약서에는 명백히 적혀있었어, 제작진의 모든 합리적인 안배에 협조해야 한다고. 민영 씨 같은 배우들은 제작팀에 합류하게 되면 거의 휴식이 없다는 거 민영 씨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소동 씨 같은 경우는 민영 씨가 사적으로 청한 디자이너이니까 소동 씨의 휴무에 대해서는 민영 씨가 알아서 결정해.”“배우도 사람이에요, 정상적으로 쉴 권리를 누린다고요!”“그럼 민영 씨의 출연료도 일반 직장인들과 한 번 비교해 봐.”마민영의 계속되는 불만에 이 감독이 쌀쌀하게 웃으며 조롱했고, 팩트에 제대로 맞은 마민영은 순간 할 말을 잃게 되었다.이에 소동이 기회를 틈타 마민영을 타일렀다.“그래요, 민영 씨. 이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