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청아가 낸 기척에 놀라 문 쪽을 쳐다보았고, 청아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장시원을 바라보았다."왜 왔어요?"우강남이 듣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청아야, 오늘 엄마 퇴원하신다고 장 대표님께서 호의로 도우러 오신 건데, 너 그게 무슨 태도야?"이에 청아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되찾고는 우강남에게 물었다."오빠 오늘 출근 안 해요?""오늘 엄마 퇴원하시잖아, 그래서 휴가를 냈어."우강남이 웃으며 말했다."마저 못한 수속이 있으면 내가 갈게, 넌 장 대표님과 잠시 이야기 나누고 있어.""이미 다 끝냈어요!"죽어도 장시원과 단독으로 있고 싶지 않은 청아가 우강남의 말에 바로 거절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태도에 장시원의 눈동자에는 순간 어두운 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곧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가시죠."장시원을 유독 소외하고 차갑게 대하는 청아의 태도에 우강남이 마침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장시원이 먼저 화제를 돌려주는 덕분에 그도 재빨리 청아더러 물건을 잘 정리하라고 했다.그렇게 허홍연이 옷을 갈아입고 물건도 전부 정리한 후 몇 사람은 병실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때 병실의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하 의사가 들어왔다.그는 허홍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퇴원하신 걸 축하합니다.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하세요."청아는 하 의사를 보자마자 어색함이 밀려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옆에서 예리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보던 장시원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이건 또 뭔 표정이지?’‘부끄러워하는 건가?’‘허!’허홍연이 바삐 웃으며 대답했다."네, 그동안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고맙긴요."하 의사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청아를 바라보았다."재진 하는 날, 청아 씨가 같이 왔으면 좋겠네요."청아가 놀라 하 의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뭐라 말하기도 불편하고 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이에
다행히도 장시원은 줄곧 운전에 전념하느라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청아는 조용히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문질렀다. 반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이미 7~8번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우강남이 사는 주택단지에 도착했고, 아무리 기다려도 장시원이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청아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잠깐 올라가서 앉을래요?"이에 장시원이 백미러로 차갑게 청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됐어. 가족끼리 얘기하는데 내가 끼면 불편하니까, 난 차에서 기다릴게.""아니요!"청아가 듣더니 놀라서 연거푸 머리를 흔들었다."이만 돌아가셔도 돼요, 저는 잠시 후에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내가 시키는 대로 해."장시원이 청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또 한마디 덧붙였다."자꾸 반항하지 말고."순간 할 말을 잃게 된 청아는 거울에 비친 남자의 차가운 눈빛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그러고는 우강남과 허홍연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허홍연이 출근하지 않은 후로 줄곧 우강남의 새 집에서 지냈다.비록 예전의 집을 판 돈으로 바꾼 새 집이라고는 하지만 청아는 그곳이 낯설기만 할 뿐, 아무런 소속감도 느끼지 못했다.예전의 집을 팔고 난 후, 청아는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어졌다.우강남이 갑자기 입을 열어 해석했다."네 형수도 휴가 내고 나와 함께 엄마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 휴가를 내지 못했어."허홍연이 듣더니 즉시 말했다."괜찮아, 돈을 버는 게 중요하지."청아는 귀국해서부터 지금까지 정소연이라는 형수를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아주 다정해 보이는 여인이었다.하지만 정소연과 너무 친근한 것도 아니고, 정소연도 아직 우씨 집에 시집온 것도 아니니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해도 원망할 것 없었다.우강남이 열정적으로 청아를 향해 말했다."청아야, 엄마도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요요랑 함께 집으로 들어와. 마침 엄마가 너를 도와 요요를 돌볼 수도 있고."청아
청아는 눈빛이 냉담해져 고개를 저었다."모르겠는데요."전에 허연 사건은 허홍연이 혼자서 한 일로, 우강남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청아는 종래로 우강남을 탓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 남매는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아 엄마가 옛집을 팔아 우강남에게 새집을 사주고, 심지어 그녀를 팔아먹은 돈으로 우강남에게 사준 새집을 인테리어 했다고 해도 그녀는 한 번도 그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순간 실망감이 밀려왔다.이에 우강남이 급히 해석했다."청아야, 네가 생각하는 그 뜻이 아니야. 난 너를 장 대표님에게 밀어붙일 생각은 전혀 없었어, 정말이야. 넌 나의 친동생인데, 내가 어떻게 너를 밟고 위로 올라가겠어? 난 단지 네가 장 대표님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미지근하니까 불안해서 그랬을 뿐이야. 필경 장 대표님이 나를 엄청 챙겼었는데, 우리 아무리 그래도 감사의 마음은 품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청아의 얼굴색이 그제야 어느 정도 회복되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요.""나 너의 덕을 보고 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아니에요, 오빠가 오해했어요. 지난 2년 동안 닌 장시원과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어요. 게다가 오빠가 또 자회사의 직원이니 그 사람이 오빠를 알고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 오빠가 상사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오빠가 그만큼 훌륭했기 때문이에요. 오빠 자신을 믿어요,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고."우강남이 듣더니 헤벌쭉하게 웃었다."청아야, 고마워! 이제 졸업한 후 요요를 데리고 귀국해서 집으로 들어와. 우리 다 함께 행복하게 살 자."청아는 방금 허홍연의 태도가 생각나 소리 없이 웃었다."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그래. 어서 내려가 봐. 장 대표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그럼 갈게요."청아가 손을 한번 흔들고는 엘리베이터 타러 갔다.그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우강남이 다시 입을 열었다."시간이 나면 꼭 요요를 데리고 집에 놀러 와. 외삼촌으로서 나
청아가 다시 차에 올라타니 장시원이 의외로 얼굴색이 어두워져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와서 앉아, 할 말이 있으니까."이에 청아는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올라탔고, 장시원은 청아가 안전벨트를 하고 나서야 차에 시동을 걸었다.이렇게 나란히 앉으니 청아는 더욱 긴장하고 불안해졌다. 시선을 어디에 두든 장시원이 주는 긴박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한때 장시원에 대해 의존과 신뢰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그가 무섭게만 느껴져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를 한 번 훑어보던 장시원은 단번에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가슴이 더욱 갑갑해졌다.그러다 손을 뻗어 청아에게 지원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월요일에 이것과 증명서를 챙기고 회사로 출근해, 직원이 알아서 입사 처리해 줄 거야."청아가 듣더니 멍해져서 물었다."어디로요?"이에 장시원이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운전하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장씨 그룹.""내가 언제 출근한다고 했어요?""아니, 하지만 내가 대신 결정했어."장시원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청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나에게 보답하겠다며? 빚을 갚겠다며? 마침 네 학력도 괜찮으니 우리 회사로 와서 일하면서 보답해."청아는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하, 하지만 나 아직 졸업하지도 않았는데요?""졸업 논문을 다 쓰고 나면 나한테 보내. 내가 사람 찾아 졸업에 관한 일을 전부 처리해 줄 거니까 다시 치카고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청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소식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나보고 장씨 그룹으로 가서 출근하라고?’"왜? 싫어?"청아의 멍해진 표정에 장시원이 냉소하며 물었다."나한테 빚졌다고 한 게 설마 정말로 그냥 해본 말이었어?""아니요. 하지만 이거 빼고 다른 일로 죗값을 받을 게요."장시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차가워졌다."다른 일?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청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장시원의 눈빛에 놀란 청아가 급히 말했다."시원 씨는 나한테 잘못한 거 없어요, 내가 잘못했어요.""억울한 척하지 마!"장시원이 청아의 어깨를 움켜쥐고 얼음장마냥 차가운 얼굴로 청아를 쳐다보았다."만약 정말 나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순순히 내 말에 따라.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너의 죄가 없어질 거라는 망상은 하지도 말고. 나를 건드린 사람은 나의 허락이 없이는 그 누구도 살릴 자격이 없어."장시원에게 잡힌 어깨가 너무 아팠지만 청아는 감히 뒤로 피하지도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장시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약간의 화간 묻은 어투로 말했다."알았어요, 피하지 않을 게요.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시원 씨도 기한은 줘야 할 거 아니에요!""기한?"장시원이 듣더니 냉소하며 대답했다."빚을 진 사람이 빚쟁이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건 처음 보네? 기한을 달라? 좋아, 평생 어때? 아니면 내가 장래에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고, 아주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게 되면 네가 나에게 가져다준 불쾌함을 잊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꺼져도 좋을 거야."청아는 순간 온몸이 떨렸다.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고 숭배했던 남자가 악마로 변한 것 같아 충격을 받은 것이다.장시원은 그제야 청아를 놓아주고 제자리로 돌아와 냉담하게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담긴 공포와 거리낌을 보고 통쾌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더욱 갑갑했다."무고한 척하지 마, 구역질 나니까."장시원의 차가운 악담에 청아의 눈동자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안색은 엄청 창백해졌지만 마음속으로는 평정심을 되찾고 창밖을 쳐다보았다.‘괜찮아!’‘아무리 어두운 세월이라도 난 다 이겨냈잖아.’‘진 빚을 다 갚아야지. 그래야만 홀가분해질 거야.’‘그러니 두려울 게 없어.’‘비록 인생에 사랑도 없고 혈육의 정도 없다지만 나에겐 요요와 소희가 있잖아. 그거면 돼.’장시원은 화가 다 풀렸는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경원주택단지로 질주했다.같은 시각, 이씨 아주
청아는 쓸쓸한 정서를 억누르고 다정하게 웃었다."그래."이때 이씨 아주머니가 옆에서 물었다."요요 외할머니는 퇴원하셨어?""네, 이미 집으로 돌아갔어요.""잘됐네."요요가 듣더니 기뻐하며 물었다."그럼 요요도 외할머니 보러 갈 수 있는 거예요?""당연하지. 나중에 같이 가자."청아가 대답하며 요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엄마한테로 와, 아저씨한테 달라붙지 말고. 아저씨는 일이 있어 금방 가봐야 해."요요는 그제야 고분고분 청아를 향해 달려갔다.품속이 빈 순간 장시원은 마음도 텅 빈 느낌이 들었다.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요요와 작별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 매일 제때에 밥 드셔야 해요!"요요는 장시원을 바라보며 청아가 자주 하던 말로 장시원에게 당부했다.이에 장시원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요요와 작별인사를 한 뒤 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청아의 곁을 지날 때 담담하게 귀띔했다."월요일에 출근하는 거 잊지 마."청아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조용히 대답했다. "네."그렇게 장시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 떠났고, 청아는 그제야 긴장감을 풀고 이씨 아주머니에게 말했다."먼저 올라가서 쉬세요. 제가 요요랑 좀 놀다가 올라갈게요."이에 이씨 아주머니가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다시 청아를 향해 물었다."요요 할머니가 퇴원했으니 나도 이제 올 필요 없는 거 아닌가?"청아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계획이 갑자기 변했으니.그래서 이씨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요요를 계속 돌보고 싶으세요?""당연히 돌보고 싶지. 요요는 말도 잘 듣고 철도 들어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걸." 이씨 아주머니가 애틋한 눈빛으로 요요를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럼 계속 저를 도와 요요를 돌봐 주세요. 제가 일자리를 새로 찾았거든요, 월요일부터 출근할 거고. 평일에는 그냥 예전처럼 제가 퇴근할 때까지만 요요를 돌봐 주시면 되고요, 주말에는 제가 요요랑 있을 테니까 아주머니는 집에서 쉬시면 돼요.""정말이야?"이씨 아주머
소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아가 불쌍한 건 여전했다.억울하지 않다고?그때 당시 청아는 임신한 채 이국땅에서 혼자 살면서 허연의 돈을 갚기 위해 만삭이 될 때까지 식당에서 잡일을 했다. 때로는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 하기도 했었고. 한 번은 저녁 늦게까지 일한 바람에 과로로 집 앞에 쓰러진 걸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일찍 일어난 집주인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했었다.그 후 집주인은 그토록 고생하는 청아가 불쌍해 일부러 자신이 밥 지을 힘이 없다고 청아에게 하루 세끼를 맡겨 집세와 식비를 면제했다.그런 상황에서도 청아는 처음에 일자리를 찾지 못했을 때에만 소희가 준 카드를 사용했고 그 후에는 한 번도 카드 속의 돈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그러다 소희와 심명 그들이 치카고로 날아가 같이 살게 되어서야 청아의 생활이 많이 호전되었다. 나중에는 그녀가 디자인 한 작품이 우승을 따내게 되면서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았지만 결국 소희의 카드 값과 허연의 400만 원을 갚는 데에 써버렸다.그리고 금전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지난 2년 동안 청아가 홀로 요요를 키우면서 받은 고통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요요가 아직 젖을 떼지 않았을 때, 청아는 매일 밤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낮에는 또 수업하러 가고 수업시간이 끝나면 아르바이트하러 갔다.어느 날은 요요가 차 한 대 없는 늦은 밤중에 갑자기 열이 나는 바람에 청아는 홀로 울면서 10킬로를 뛰어 병원으로 갔다. 그런 무력함과 초조함은 청아 본인 외에는 누구도 모를 것이다.외국에 있는 그 2년여 동안 다행히도 착한 집주인, 소희 그리고 성연희가 있었기에 청아가 겨우겨우 버텨왔던 것이다.비록 요요의 존재를 장시원은 모르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 두 사람의 아이였고, 청아가 또 그렇게 고생스럽게 요요를 키웠는데, 정말 아직도 빚진 게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저녁에 소희와 청아는 요요가 조용히 청아의 품에서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청아는 고개를 숙여 곤히 잠든 요요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온화한
다음날 토요일,오늘도 임씨 가문의 운전기사가 소희 데리러 왔다.가는 길에 소희는 차 안에서 교과서와 복습 자료를 뒤적거리며 강의할 내용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임유민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임유민의 과외를 맡기 시작해서부터 여러 번이나 개인 사정 때문에 오지 못했으니. 나중에 우정숙이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임씨 가문에 도착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소희는 잔디밭 쪽에서 전해오는 함성을 듣게 되었다.소리를 따라 찾아가 보니 임구택과 임유민이 공을 차고 있었다잔디밭에는 골포스트가 놓여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운동복 차림을 한 채 뛰어다니고 있었다.종래로 임구택이 축구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 소희는 갑자기 조백림이 조직한 축구 경기를 볼 때 임구택이 했던 말이 생각나 순간 할 말을 잃었다.‘2년이나 지났는데 왜 갈수록 유치해지는 거야.’소희는 잔디밭 가장자리까지 천천히 걸어가 두 사람이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구경했다.두 사람은 축구공 하나를 둘러싸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뛰어다녔다. 임구택은 줄곧 임유민을 양보하면서 기교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그러다 몇 분 후 임구택은 드디어 공을 넣었고 임유민은 멀리 굴러간 공을 주으러 갔다.그 틈을 타 임구택이 소희를 돌아보며 웃었다. "거기 서서 뭐 해, 물이나 가져다줘."이에 소희는 하얀 벤치에 놓인 생수 두 병을 들고 임구택 쪽으로 걸어갔다.멀지 않은 거리를 임구택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쳐다보았다.소희가 다가가서 물을 건네주었다."나 손이 엄청 더러워. 열어줘."임구택의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흰 이마에 흩어져 붙어 있었고, 소희를 쳐다보고 있는 두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어둡고 깊어졌다.소희는 임구택을 한 번 흘겨보고는 물병 뚜껑을 열어 건네주었다.물병을 건네받은 임구택은 고개를 들어 물을 꿀꺽꿀꺽 크게 들이마셨다. 옆으로 흘러나온 물방울은 그의 각진 턱선을 따라 기복이 심한 목덜미를 지나 흰색 티셔츠 속으로 스며들었고, 티
지엠 본사 아래 주차장에 도착한 소희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몇 대 떨어진 곳에 파란색 페라리가 멈춰 서더니, 연한 파란색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가 소희 쪽을 바라보며 걸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남자는 몸을 돌릴 겨를도 없이 목덜미에 통증을 느끼며 눈앞이 깜깜해졌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곧이어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다가와 검은색 롤스로이스로 끌고 가 태웠고, 차는 신속히 사라졌다.소희는 차 뒤쪽을 돌아가며 누가 자신을 미행했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페라리가 주차된 자리까지 가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의 주인 역시 사라진 상태였다.소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자신이 오해했나 싶었다. 그저 우연히 그곳에 주차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떠나버린 걸까?더 이상 찾을 수 없자, 소희는 신경을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화영을 만나러 갔다.화영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화영은 회의 중이었다. 소희는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며 기다렸다.약 30분 후, 화영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소희는 소파에 기대어 쿠션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소희는 소리에 금세 눈을 떴다. 화영인 걸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잠을 깨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영은 소희에게 커피 한 잔을 준비해 건네주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자 화영은 소희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웃으며 말했다.“며칠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구택 사장님이 자제를 좀 하셔야겠어.”소희는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눈가에 핀 연한 홍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물었다.“설탕 넣었지?”“넣었어. 세상에, King이 달콤한 걸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화영이 웃저, 소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먼저 마시고, 다 마시면 드레스 피팅하러 가자.” 화영이 말에, 소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투덜댔
결혼식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원래라면 소희는 지금쯤 운성으로 돌아가야 했고, 결혼 전까지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소희는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직접 할아버지께 말씀드려.”구택은 낮게 웃으며 끝없이 소희의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좋아, 내가 말할게. 할아버지도 분명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실 거야.”소희는 침대에 눕자 이불을 뒤집어쓰며 몸을 말아 올렸다. 손을 뻗어 불을 끄고는 말했다.“너무 졸려, 이제 자자!”구택은 욕실 가운을 벗어 이불을 젖히고 들어가 소희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입맞춤을 남겼다.“분명 아까까지는 아주 생기 넘치더니.”“조금 자제해주면 안 돼?” 소희는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 구택은 그녀의 목선을 따라 올라가 귀밑을 가볍게 입 맞추며 말했다.“곧 운성으로 돌아가잖아. 우리 사흘 동안 못 보겠는걸.”“나흘이야!” 소희는 구택을 바로잡았다.“나흘도 길지. 내가 혼자 이 침대를 지키며 네가 없는 네 밤을 보내야 한다니.” 구택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고 매혹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소희의 귀 뒤에 자극적인 입맞춤을 남겼다.소희는 귀 뒤의 예민한 피부가 붉게 물들며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과 마음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그 결과, 다음 날 아침 소희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구택은 원래 그녀와 함께 출근하고 싶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어제 얻었으니, 오늘은 양보해야지. 나 혼자 출근할 수밖에.”소희는 그의 애처로운 투정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구택을 보았다.“얼른 출근해. 저녁에 내가 데리러 갈게.”“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아침 꼭 챙겨 먹고, 나갈 때는 연락해.” 구택이 당부했다.“알겠어!”구택은 소희의 뺨에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소희는 열 시까지 푹 자고 아침을 먹은 후 구택
그날 밤, 어정.임구택이 샤워하는 동안 소희는 발코니의 소파에 기대어 성연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소희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가 묻어 있었고, 눈매는 지쳐 보였다. 연희는 결혼식 날 구택이 신부를 맞이하러 올 때 어떻게 혼내줄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신나게 설명하고 있었다.[아, 맞다. 소희야, 지씨 가문의 일 들었어?] 연희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고, 졸음이 밀려오던 소희는 흐릿하게 대답했다.“지씨 가문? 무슨 일이야?”[지씨 가문의 어르신이 돌아가시자마자 엄청난 권력 다툼이 일어났대. 결국 지승현이 이겼다고 하더라.][다들 상상도 못 했지. 지씨 가문에서 내쫓겼던 할머니가 이런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을 줄은 말이야!] 연희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사실 나도 아심이 때문에 지씨 가문에 관심을 두게 됐어. 그동안 유언장 때문에 아심이가 지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거든.][나도 그녀를 도울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 집 할머니가 몰래 주식을 매입한 사실이 알려지자 지씨 가문 사람들도 아심이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어.]아심 이야기가 나오자 소희는 금세 정신이 들었고, 성연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눈빛에는 생각에 잠긴 기색이 더해졌다.연희가 덧붙였다.[지승현은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정말 냉정한 사람인 것 같아.][이틀 만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측 사람들을 많이 내쫓았다는 소문이 돌더라고. 이런 성격을 가진 지승현이니, 지씨 가문의 사람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지.][그래서 아심이가 손해를 보지 않을까 좀 걱정돼.]소희는 마음이 복잡해져 연희와 몇 마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구택이 다가와 소희의 옆에 앉으며 방금 말리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아까는 졸린다며?”소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뭔데?” 구택은 욕실 가운을 반쯤 열어젖히고 다가왔고, 그로 인해 은은한 차가운 향과 함께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승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할머니의 마음이야. 그리고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기도 해.”아심이 대답했다.“할머니의 마음은 손자며느리에게, 지씨 가문의 일원에게 주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받을 수 없어. 네가 가지고 있다가, 미래의 아내에게 전해줘.”“아심아...” 승현은 여전히 아심을 설득하고 싶어 하자, 아심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넌 날 잘 안다고 했잖아. 그러니 더는 설득하지 마.”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아심아, 굳이 모든 관계를 이렇게 명확히 나눌 필요는 없잖아.”“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때로는 친구 사이에도 서로 조금씩 빚지며 관계가 깊어지기도 하는 거야.”아심은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볼게.”승현은 아심의 진지한 표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져 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더 큰 아쉬움도 느껴졌다.“아심아, 앞으로 우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물론이지.” 아심은 미소 지었다.“설마 나에게 원망이 남아서, 선을 긋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당연히 그럴 리 없지!” 승현은 즉시 대답했다.“난 네게 오직 고마운 마음뿐이야.”그리고 아쉬움도 함께.“그럼 됐네.”이때 직원이 음식을 가져와 두 사람은 대화를 잠시 멈췄다. 아심은 숟가락을 들어 웃으며 말했다.“일단 식사하자. 며칠 동안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 오래야.”승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그렇게 고생해? 돈이야 끝없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닌데.”“고생하는 이유가 꼭 돈 때문만은 아니야.” 아심은 해산물 수프를 한 모금 마시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한 번 바빠지면 그냥 멈추기 싫어지거든.”승현은 걱정스럽게 말했다.“그래도 건강은 챙겨야 해. 의사도 그렇게 당부했잖아.”“알겠어.”두 사람은 가볍게 일상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승현
아심은 표정 변함없이 물을 따라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눈치챘어?”승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말했다.“응. 원래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피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했어.”그는 아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 내 개인 계좌에 정아현 씨가 보낸 돈이 들어왔더라. 그래서 아현 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어.”“아현 씨가 그러더라고. 네가 부탁한 거라고, 네가 소개해 준 고객에 대한 커미션이라고 말이야.”“그 순간 모든 게 이해됐어.”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너는 정말로 남에게 빚지지 않으려는 사람이구나. 내게 여자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한 것도, 내가 병원에서 서명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지?”“그리고, 그때 이미 할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내 곁에 있어 주며 힘든 시기를 함께해준 거고.”“또한 예전에 네가 아플 때 내가 곁을 지켜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고.”“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너는 일부러 강성을 떠났지.”“혹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을까 봐,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더라도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아심은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나도 아쉬워.”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넌 매일 할머니와 통화했잖아. 할머니는 정말 기뻐하셨고, 가시는 길도 평온하셨어.”“그렇다면 다행이네.”아심은 승현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별할 때 얽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승현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심아, 정말로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아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사실 중간에 너와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해 볼까 생각도 했어. 하지만 미안해, 그건 내겐 무리였어.”승현이 물었다.“그 사람 때문이야?”아심은 솔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래.”승현의
승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심을 따라가며 계속 불렀다.“아심아!”아심은 걸음을 멈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더 이상 묘지까지는 가지 않을 거야. 너 대신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려줘.”승현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우리 엄마 성격이 원래 그렇고, 내 동생도 엄마가 너무 편애해서 버릇이 없거든. 그들이 한 말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승현은 아심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며칠 동안 나와 함께 해주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집에 가서 푹 쉬어. 며칠 지나고 나면 다시 보자.”아심은 답했다.“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집에 도착하면 알려줘.”“들어가 봐.”아심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가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그날 밤, 아심은 승현과 통화를 하며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다음 날, 아심은 출근했고, 한 주 동안 밀려 있던 업무가 그녀를 압도했다. 비서인 정아현이 서류 한 묶음을 들고 와서 서명을 부탁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사장님, 요 며칠은 지승현 사장님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시나 봐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앞으로 며칠 동안 지씨 집안에 관한 동향, 특히 주식 쪽에 신경 좀 써줘요.”아현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사장님이 여전히 신경 쓰시는 줄 알았어요. 사실 전에도 사장님이...”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제가 꼼꼼히 살펴볼게요!”“그래, 가서 일 봐요.” 아심은 미소 지었다.그 후 이틀 동안 아심은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승현도 여러 가지 일에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은 중간에 점심을 함께 먹은 것 외에는 별다른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셋째 날 오후, 아심은 마침내 모든 업무를 끝냈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아현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얼굴에 흥분이 가득했다.“사장님, 뉴스 보셨어요? 지씨 집안의 주식이 크게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지승현의 눈 아래는 푸른 기운이 돌았고,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어머니 권수영을 깊이 응시했다. 권수영은 승현의 눈빛에 약간 겁먹은 듯 물었다.“그게 무슨 눈빛이니?”승현은 냉소하며 말했다.“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요.”“지수철이 태어난 순간부터 하루하루 그 애만 편애하더니, 지금은 핑계를 대며 모든 재산을 작은아들에게 물려주려는 거잖아요!”권수영은 그의 말을 듣고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렸지만 변명했다.“너와 수철은 모두 내 아들인데 내가 어찌 편애하겠니? 네가 굳이 그딴 업계 종사하는 여자를 여자친구로 사귀니, 내가 실망할 수밖에 없지 않니!”승현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렇다면 엄마 말대로 모든 재산을 수철에게 넘기세요!”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서 걸어 나갔다. 권수영은 분노로 씩씩거렸고,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정말 내가 못 할 줄 아나? 그 천한 여자랑 결혼이라도 하면, 너도 당장 집에서 내쫓아버릴 거야!”“과연 이 집안 도련님의 자리를 잃으면 그 여자가 여전히 널 곁에 둘지 보자고!”승현은 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권수영뿐만 아니라, 다른 지씨 가문의 사람들도 모두 아심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아심이 김후연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된 후로 지씨 가문의 첫째와 둘째 집안 식구들, 심지어 승현의 할아버지까지도 아심의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모두가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김후연의 유산이 아심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지아윤은 기회를 보아 수철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 아심 쪽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저 여자 보여?”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봤어. 근데 왜?”아윤은 말했다.“저 여자가 네 집 재산에 눈독 들이고 네 형에게 달라붙어서 돈을 빼앗아 가려고 해. 네 엄마가 지금 무척 화가 났거든.”“가서 몇 마디 쏘아붙이고, 장례식장에서 쫓아내 버려!”수
지승현은 서둘러 말했다.“아주머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앞으로 우린 가족이나 다름없잖아요.”사실 양세민은 김후연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김후연이 없으니, 굳이 자기를 계속 고용할 이유도 없고, 집마저도 팔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승현의 말에 그녀는 비로소 안심되었다.“도련님, 저에게 이 집까지 주실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 머물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 급여도 필요 없어요.”“나중에 도련님이 오실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해드릴게요.” 양세민이 감격해 말하자 승현이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양세민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강아심은 오후 내내 승현과 함께 김후연의 유품을 정리해 주었다.김후연은 승현이 어렸을 때 입었던 옷들과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받았던 상장, 심지어 유치원에서 놀이를 하며 받은 작은 플라스틱 메달까지도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승현은 그 물건들을 바라보다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심은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 후 이틀 동안 아심은 승현의 곁에 머물며 김후연의 장례 준비를 도왔다. 아심은 나서지 않고 조용히 승현의 옆에서 함께 있어 주기만 했다.셋째 날, 김후연의 장례식이 열렸다. 아심은 조문객으로 참석해 마지막으로 꽃 한 다발을 헌화했다.이날 많은 사람이 김후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아심은 그곳에서 승현의 할아버지가 유가족 자리에서 오랜 시간 할머니의 영정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아심은 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아내와 함께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승현은 곧바로 그의 어머니 권수영에게 불려 나갔다. 권수영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일부러 물었다.“아까 네 옆에 있던 그 여자는 누구니?”승현이 대답했다.“제 여자친구예
한 시간 후.강아심은 고개를 숙여 오래된 마을을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강성으로 향해 차를 몰았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아심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김후연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차를 밖에 주차하고, 조용한 골목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부터 김후연 할머니 집 마당에 피어난 등나무꽃이 보였다. 활짝 핀 꽃들에서 달콤한 향기가 골목 가득 퍼져 있었다.꽃들은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꽃도 때맞춰 피어 있었지만 이제 그 꽃을 돌보던 주인은 더 이상 없었다.아심은 나무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가며 문턱을 넘을 때, 지난번에 김후연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해졌다.마당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해당화 꽃잎이 바닥을 가득 메웠고, 옆의 빨랫줄에는 예전에 아심이 김후연에게 사준 숄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지승현은 마당에 앉아 있었다. 김후연 할머니가 늘 앉던 등나무 의자에 앉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구부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그는 초췌한 얼굴에 눈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아!”아심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반쯤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왔어.”“힘내.”승현의 눈이 더욱 붉어지며 목이 메어 조용히 말했다.“할머니가 가셨어. 날 가장 아껴 주신 분이 영원히 떠나셨어.”아심은 그의 슬픔을 함께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할머니는 네 곁을 떠난 게 아니야. 다른 모습으로 곁에 남아 계시는 거야.”“널 곁을 스치는 바람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 그 모든 게 할머니가 돌아와 널 지켜보고 계신 걸지도 몰라.”승현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거의 간절하게 이마에 가져다 댔다.“아심아, 이제 나에겐 너밖에 없어.”아심은 낮게 대답했다.“내가 곁에 있을게.”잠시 후, 양세민 아주머니가 나와 아심에게 말했다.“할머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도련님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