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유정과 사귀고 있었을 때 그가 유정의 곁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그녀는 긴장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마치 맹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는 당연히 유정이가 부끄러움을 타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키스하고 있었으니.성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머지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그대로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한테 쓰러졌다.관중석에 앉아있던 이선도 벌떡 일어나 놀란 표정으로 유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줄곧 자신이 성준을 빼앗은 것 때문에 유정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유정이와 키스하고 있는 남자는 누구인 거지?방금 경기를 하고 있을 때부터 이선은 조백림을 발견했다. 키 크고 덩치 좋고 선수들 중에서 제일 생긴 그가 팀원을 이끌어가며 경기를 컨트롤했었고, 체력과 능력이 그야말로 완전히 성준을 깔아뭉갰다.‘그런데 그렇게 잘 난 남자가 유정의 남자친구라고?’‘유정이 성준 씨를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왜 벌써 이렇게 훌륭한 남자친구로 갈아탄 거지?’한참이 지나서야 조백림이 유정을 놓아주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 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흐리멍덩하던 두 눈이 점차 붉어져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자기를 위해 복수도 해줬는데, 이 정도의 장려는 받아가도 괜찮잖아?"아직도 머릿속이 어지러운 유정은 남자의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바라보며 사고하는 방식을 잊은 사람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조백림이 옆에 있는 임구택, 장시원 등과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유정이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무의식적으로 왼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선이 두 눈에 독을 품은 채 유정을 노려보고 있었다.하지만 유정은 이선을 신경 쓸 기분이 나지 않아 멍하니 제자리에 앉았다.소희가 그러는 유정이에게 물을 건네주며 덤덤하게 웃었다."당황하지 마요."유정은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다 갑자기 방금 그녀에게 키스할 때 장난기가 묻
경기가 끝난 후 조백림은 회식할 겸 장시원, 오진수 등 친한 친구들과 방금 경기에서 같은 팀을 했던 팀원들을 전부 응접실로 초대했다.조백림과 같은 팀을 했던 팀원들 중에는 여행객 중에서 임시로 뽑은 이들도 있는가 하면 전부터 조백림과 알고 지냈던 친구들도 있어 다들 친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그렇게 다 같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임구택은 통화하러 나갔고 장시원이 바로 소희의 곁에 앉아 담담하게 물었다."요요는 괜찮아? 그날 많이 놀랐지?"이에 소희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요요 담이 엄청 커요.""맞아, 요요는 용감한 아이지."‘그의 엄마처럼.’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얼굴에 장시원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물었다."언제 떠난대?""계획대로라면 청아 오빠의 결혼식이 끝난 후에 떠나는 건데, 아줌마께서 퇴원하시면 바로 떠나야 할 것 같다네요."소희의 대답에 장시원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나 때문에?"이에 소희가 잠깐 멍해지더니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아니요. 아줌마께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일정이 너무 오래 지체됐거든요, 그래서 학교 쪽에서도 청아를 재촉하고 있고."분명 그럴듯한 대답이었는데 장시원의 눈빛에 묻은 냉기는 더욱 짙어졌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게 그를 더욱 화나게 했던 것이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다시 물었다."올해에 졸업하는 거야?""네.""그럼 그 후엔 무슨 계획이래? 졸업하면 바로 귀국한대, 아니면 치카고에 남는대?""당분간은 치카고에 머물 거예요."소희의 대답에 장시원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한참 아무 말을 안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요요 아빠, 누구야? 왜 그들 모녀를 버렸어?"소희가 듣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난감한 표정을 드러내며 대답했다."그건 상황이 많이 복잡해서, 저도 잘 모르겠네요."장시원이 듣더니 갑자기 차가운 미소를 드러냈다."쓰레기 인간한테 속아 그런 꼴이 나다니, 정말 대단하기
"쉿!"장명원의 말에 소희가 바로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다 좌우를 한 번 살펴보고 나서 자신의 손목을 뒤로 빼며 말했다."뭔 의뢰를 받아요? 미연 씨랑 약혼 안 할 거예요?"이에 장명원이 잠깐 멍해 있더니 다시 소희의 손을 잡았다."기간이 짧은 의뢰를 맡으면 되잖아요. 아무튼 난 의뢰받고 싶어요.""약혼식이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장말이에요?""네.""그래도 되고! 그럼 그때 가서 꼭 나한테 줘야 해요!""크흠!"장명원이 격동되어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 사람 뒤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뒤쪽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임구택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소희의 팔을 잡고 있는 장명원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장명원은 순간 팔이 따끔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사코 손을 놓지 않았다."구택 형, 나와 보스의 감정까지 질투하는 건 아니겠죠?"임구택이 다가와서는 장명원을 밀어냈다."난 여자조차도 질투하는데, 넌 뭐가 다르지?"임구택의 놀라운 힘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한 장명원이 임구택의 논리에 어이없어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음식이 다 차려지고 다들 하나둘씩 식탁 쪽으로 가서 착석했다. 도중에 소희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고 우민율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어제 종일 장시원 옆에 달라붙어 있었던 우민율이 오늘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장시원과 무슨 일이 있은 게 분명해.’소희의 입맛을 알고 있던 친구들은 소희가 좋아할 것 같은 음식을 전부 소희의 앞으로 밀어주었다.임구택 덕분에 소희는 그들 무리 중에서 제일 이쁨 받는 한 명으로 된 셈이었다.이에 황정아 등은 너무 질투 났지만 감히 표현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리고 유정은 워낙 소희를 좋아해서 그런 점에 있어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그러다 중도에 화장실을 가려고 룸에서 나온 유정은 마침 복도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조백림을 발견하게 된다. 오전 경기장에서 공공연
‘그래, 틀림없이 조백림 꼬시러 온 걸 거야!’‘경기장에 있을 때부터 조백림을 노렸던 거지. 그래서 일부러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하고 와서 저렇게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고. 남자들이 저런 스타일을 제일 좋아하니까.’‘예전에 성준 씨도 저렇게 유혹해 낸 거겠지?’‘불쌍한 성준 씨,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되어 병상에 누워있을 때 네 마음속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예쁜 소녀는 지금 다른 남자를 꼬시고 있다고.’유정은 오만가지 생각에 웃음만 나왔다.식견이 넓고 만나본 사람도 많은 조백림은 이선의 꿍꿍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성준 씨라는 분이 그쪽을 꼬드겼으니, 꼬드긴 사람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이에 이선이 잠깐 멍해 있더니 즉시 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기개를 드러냈다."저 비록 성준 씨와 사귀고 있지만 그이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몇백만 원도 제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거고요.""그래요?"조백림이 눈썹을 한 번 올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남자친구의 돈을 쓰지 않는 모습은 기개 넘쳐 보이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찾아와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죠? 내가 그쪽에게 빚을 졌나요? 내가 생태원의 사장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닙니다."이선에게 속기는커녕 오히려 인정사정없이 디스 해버린 조백림의 태도에 유정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심지어 오늘 경기장에서 그가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이선은 갑자기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더 아련해진 얼굴을 들어 조백림을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저에게 돈을 좀 빌려줄 수 있을까요? 20만이면 돼요. 제가 매달 4만 원씩 반년 안에 반드시 다 갚을 게요."‘헐......’유정은 순간 이선이가 남달라 보였다. 20만 원을 반년으로 나눠서 갚겠다니.‘그럼 매달 조백림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후 그 기회를 타서 조백림을
이선이 멀리 떠나가서야 유정의 표정이 다시 덤덤해졌다. 그러고는 화장실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조백림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점잖고 잘 생긴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너 정말 저 여인한테 돈 빌려줄 생각이었어?""그럴 리가요?"유정이 냉소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뺨을 몇 대 날려줘도 모자랄 판에 돈은 왜 빌려줘요?"유정의 대답에 조백림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분명 이렇게 대단한데 어떻게 저 여인한테 진 거야?"유정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어두워져서는 자조하 듯 대답했다."예전에 난 사랑은 진심을 다 해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태생으로 바보처럼 성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단지 비겁한 수단을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저 여인만이 남보다 더 똑똑해서 세상 사람을 손아귀에 넣고 놀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일리가 있네. 그럼 우리 둘이 결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랑 있으면 넌 영원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고, 가끔 너의 그 지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유정은 당연히 조백림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진심을 다 해 대할 필요도 없고, 더욱 자아와 이성을 잃지 않아도 될 게 분명했다.사실 전에 유정은 이미 조씨 가문과 파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조백림을 이용하여 이선을 화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외의 수확일 것 같아서.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조백림이 엄청 똑똑하다는 거다."나 이미 이선한테 제대로 찍혔어요. 그리고 한 여인을 망쳐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걸 빼앗는 것이죠. 이선은 반드시 다시 백림 씨를 찾아올 거예요. 정말 이선의 미인계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솔직히 그 여인의 외모와 수단으로 나를 꼬시기엔 한참 멀었어."조백림의 대답에 유정이 기뻐하며 손바닥을 쳐들었다."좋아요! 거래가 성사!"이에 조백림이 웃으며 덩달아 손을 들어 유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이번엔 백림 씨가 나를
워낙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던 소희가 모처럼 잘 맞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 임구택도 속으로 많이 기뻐했다. 그래서 조백림에게 앞으로 모임에 꼭 유정도 같이 데리고 참석하라고 했다.이에 조백림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하죠. 앞으로 자주 만나요!"그렇게 다들 서로 작별 인사하고 각자 차에 올라타 생태원을 떠났다.그러다 넓은 도로에 들어서니 오후의 햇빛이 차창을 뚫고 따스하게 스며들어왔다.따스한 햇볕을 쬐며 은은한 노래를 한참 듣고 있던 소희는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졸음이 몰려와 곧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이에 임구택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뒤에서 자신의 외투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그 순간, 임구택은 고요함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자다 다시 깨어났을 땐 차는 이미 낯선 곳에 멈추어 있었다. 임구택은 차 안에 없었고 주위의 경치를 봐서는 아직 강성 시내에 들어서지도 않은 것 같았다.소희는 즉시 미끄러져 내려간 양복 외투를 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임구택 찾으러 가려는데 마침 길가의 디저트 가게 밖에서 줄을 서고 있는 임구택을 발견하게 되었다.디저트 가게 밖에는 4~5명이 줄 서 있었고 그중 고급진 셔츠와 양복바지를 차려입고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임구택이 유독 눈에 띄었다.그리고 남다른 기질을 풍기고 있는 임구택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구경하고 있던 소희는 갑자기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의 앞으로 다가가 휴대폰 번호를 묻는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임구택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하고 차가웠다. 소녀를 거절했는지 소녀는 결국 난감한 얼굴로 사과하고는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구택의 순서가 되었고, 임구택은 음식을 주문하고 돈까지 지불한 후 한쪽으로 가서 음식을 기다렸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차 쪽을 쳐다보았다.이에 소희는 곧바로 뒤로 등받이에 기댄 채 계속 자고 있는 척했다.오분 정도 지난 후, 임구택이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그러
임구택이 마카롱의 맛을 음미하며 웃음을 드러냈다."처음엔 너무 달고 느끼했는데 먹을수록 감칠맛이 도네? 어쩐지 당신이 디저트를 엄청 좋아한다했어.""처음에 단 걸 좋아하게 된 건 단 음식을 먹으면 빨리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소희의 덤덤한 대답에 임구택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연히 소희가 어릴 때 양부모에게 가혹한 학대를 받으며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해서 성인이 된 후 한을 풀려고 단 음식에 그토록 집착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니.’그러다 임구택은 갑자기 소희가 6살 때 시언 따라 훈련소로 가서 훈련을 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나이가 가장 어리고 체력도 다른 사람보다 못했으니 무엇을 하나 체력 소모가 빨랐을 거고, 체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서 초콜릿 같은 단 음식을 선택한 게 분명했다.그렇게 천천히 단 음식에 의존하게 되었을 거고.임구택은 순간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어 웃으며 말했다."이후부터 네가 단 음식 먹는 걸 더는 공제하지 않을게."마카롱을 다 먹고 초콜릿 케익을 먹기 시작한 소희가 임구택의 말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것 마냥 눈썹을 올렸다. 왜 음식 방면에서 임구택의 공제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이때 임구택이 다시 입꼬리를 올리더니 낮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매번 당신에게 규칙을 정하고 결국엔 내가 못 지키고 있네. 오늘도 당신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당신이 기뻐하는 걸 보고 싶어 사고."창밖을 보고 있던 소희가 임구택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들어 차창 유리에 비친 임구택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턱선이 날렵한 잘 생긴 얼굴은 무심코 스쳐지난 눈빛마저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었다.소희는 입안의 케이크를 삼킨 후 덤덤하게 대답했다."어차피 지키지 못할 거, 그냥 없는 걸로 하지 그래?""그건 절대 안 되지."임구택의 단호한 대답에 소희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계속 케이크를 먹었다
말을 마치고는 차에서 내리려는데 임구택이 갑자기 소희의 팔을 잡았다."나를 속이고, 이렇게 도망치면 끝이야?""그래서 뭐 어쩔 건데?""지금 나랑 밥 먹으러 가든지, 뽀뽀하든지. 뽀뽀해 주면 보내줄게."임구택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운 빛에 흐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소희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순간 어두컴컴한 빛 아래에서 부딪혔다.한참 후 소희가 입술을 오므린 채 대답했다."나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네가 생각하는 동안 난 절대 너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로는 줘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러면 난 네가 납득할 때까지 견지할 수 없을 거야."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임구택의 말투에는 약간의 집착이 섞여 있었다.소희는 오후에 케이크를 사기 위해 햇빛 아래에서 한참 줄을 섰던 임구텍의 뒷모습이 생각나 고개를 들어 임구택을 쳐다보았다."한 번만이야.""응."임구택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기울이자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그 모습에 임구택이 동작을 한 번 멈추더니 곧 다시 여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소희는 본능적으로 몸이 경직되었고 임구택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팔에 갑자기 힘을 주고 열정적으로 키스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소희가 분명 피하지 않았는데 임구택은 소희의 열정과 자신한테 기대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금방 사귀게 되었을 땐 아무리 가벼운 뽀뽀라고 해도 엄청 유쾌했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임구택은 소희가 다시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소희가 반응해 주기를 원했고, 그걸로 마음속의 불안감을 메우고 싶었다.한참 후, 주위의 광선이 더욱 어두워졌고, 임구택은 그제야 열적정인 키스를 끝냈다. 그러고는 마음속의 답답함을 짓누른 채 옅게 웃었다."그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건 아니지?"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한껏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소희를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