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치고는 차에서 내리려는데 임구택이 갑자기 소희의 팔을 잡았다."나를 속이고, 이렇게 도망치면 끝이야?""그래서 뭐 어쩔 건데?""지금 나랑 밥 먹으러 가든지, 뽀뽀하든지. 뽀뽀해 주면 보내줄게."임구택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운 빛에 흐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소희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순간 어두컴컴한 빛 아래에서 부딪혔다.한참 후 소희가 입술을 오므린 채 대답했다."나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네가 생각하는 동안 난 절대 너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로는 줘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러면 난 네가 납득할 때까지 견지할 수 없을 거야."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임구택의 말투에는 약간의 집착이 섞여 있었다.소희는 오후에 케이크를 사기 위해 햇빛 아래에서 한참 줄을 섰던 임구텍의 뒷모습이 생각나 고개를 들어 임구택을 쳐다보았다."한 번만이야.""응."임구택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기울이자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그 모습에 임구택이 동작을 한 번 멈추더니 곧 다시 여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소희는 본능적으로 몸이 경직되었고 임구택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팔에 갑자기 힘을 주고 열정적으로 키스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소희가 분명 피하지 않았는데 임구택은 소희의 열정과 자신한테 기대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금방 사귀게 되었을 땐 아무리 가벼운 뽀뽀라고 해도 엄청 유쾌했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임구택은 소희가 다시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소희가 반응해 주기를 원했고, 그걸로 마음속의 불안감을 메우고 싶었다.한참 후, 주위의 광선이 더욱 어두워졌고, 임구택은 그제야 열적정인 키스를 끝냈다. 그러고는 마음속의 답답함을 짓누른 채 옅게 웃었다."그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건 아니지?"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한껏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소희를
"이건 백마야, 왕자님이 타고 다니는 백마."소희가 웃으며 설명했다.그러자 요요가 눈살을 찌푸린 채 큰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다시 물었다."요요는 타고 장 보러 갈 수 있는 당나귀를 원하는데. 백마 타고도 장 보러 갈 수 있어요?"어린아이의 진지한 고민에 소희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백마더러 요요 공주를 태우고 장 보러 가라고 하는 게 어때?"요요는 그제야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싱글벙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창밖을 한 번 내다보고는 귀엽게 말했다."오늘은 날이 너무 어두워 사장님들도 다 코낸하러 집에 갔을 거예요. 그러니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갈래요!""그래. 요요 가고 싶을 때 같이 가자.""참, 소희 이모. 아저씨는 왜 요요 보러 오지 않아요?"한창 재밌게 장난감을 놀고 있던 요요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소희에게 물었다.그러자 소희 입가에 걸린 웃음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다 한참 후 요요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아저씨 요즘 너무 바쁘셔서 며칠 있어야 요요 보러 올 수 있다는데?""알겠어요. 요요는 기다릴 수 있어요."요요가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철이 든 모습에 소희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결국 제일 불쌍한 건 요요였다. 분명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인데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없었으니."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와서 밥 먹어."이때 청아가 반찬을 들고 나오며 소리쳤다.이에 소희가 요요를 안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밥 다 먹고 난 후 소희는 요요랑 한참 더 놀아주다가 요요가 취침할 시간이 되어서야 위층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소희는 오후에 너무 많이 자서 그런지 전혀 졸리지 않아 샤워하고 서재에 앉아 디자인 원고를 그렸다.그러다 갑자기 옆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소희가 수신번호를 한 번 확인하고는 받았다."이 감독님?"[소희 씨!]이 감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친근하고 다정했다.[여주 캐스팅이 이미 다 끝나서 내일 오전에 정식으로 일을 시작할 건데,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 가지러 가니 직원이 바로 보온 상자에서 도시락 하나를 꺼내 소희에게 건네주었다."소희 씨, 이게 소희 씨 거예요."비록 도시락 통이 전부 일회용이라지만 소희 건 3층으로 쌓인 도시락 통으로 딱 봐도 일반 도시락보다 훨씬 고급졌다.옆에 있던 이정남이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이건 이 감독님이 주는 특별대우인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특별히 너를 챙겨주는 거야?"이에 소희도 어리둥절하여 직원에게 왜 그녀의 도시락만 다른 사람과 다르냐고 묻자 직원이 웃으며 위에서 시킨 대로 나눠준 것일 뿐,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소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도시락을 들고 밥 먹으러 갔다.그리고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이정남이 또 경탄했다.도시락의 제일 위층에는 연어, 쇠고기, 그리고 두 가지 야채가 담겨 있었고, 그다음 층에는 밥과 디저트, 맨 아래층에는 닭볶음탕이 담겨 있었다.이정남이 놀라서 말했다."우와! 케이스가 너무 남다른 거 아니야?"소희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설마 정말 이 감독님이 준 특별대우인 건가?’‘내가 분명 감독님의 부탁을 거절했는데 이렇게 잘해준다고?’"일단 먹죠."계속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올 것 같아 소희는 아예 음식을 꺼내 중간에 놓았다.이정남도 사양하지 않고 쇠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순간 눈빛이 밝아져 말했다."이건 맹성의 쇠고기잖아! 틀림없어.""음식 방면에 있어 정남 씨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죠."소희가 웃으며 말했다.그러자 이정남이 바로 도도한 태도를 드러냈다."그럼!"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기 시작했고, 소희는 속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대체 누가 날 이 정도로 챙겨준 거지?’물론 소희는 그 모든 게 허진의 전화 한 통 때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오전에 이 감독과 통화하면서 다시 촬영을 재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허진은 임구택이 줄곧 이 감독의 작품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임구택에게 전화 걸어 보고
마민영은 매니저,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세 명의 조수를 데리고 왔다.매니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웃으며 오래전에 이미 출연하기로 정해놓은 스케줄이 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출연 거부 하기가 뭐해서 부득이하게 이제야 오게 되었다고 설명했고, 이 감독은 속으로 많이 화가 났지만 결국 괜찮다고 말했다.소희는 마민영이 있는 분장실로 찾아가 오후 첫 신을 찍을 때 입을 옷을 골라주었다. 마민영은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하품을 하면서 소희가 말해주고 있는 스토리의 줄거리를 들었다.그러다 갑자기 짜증이 섞인 말투로 소희의 말허리를 잘랐다."졸려 죽겠네 진짜. 어제 게임하느라 밤을 새웠는데 왜 점심도 안 되어 깨웠어요! 이렇게 졸린데 뭔 촬영을 하라고!"매니저가 듣더니 얼른 마민영에게 입을 다물라고 눈짓을 했다.이에 소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보지 못한 척 고른 옷을 조수 미나에게 건네주며 마민영에게 갈아입혀라고 했다.하지만 마민영이 옷을 한 번 쳐다보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뭐야, 옷이 왜 이렇게 구려? 난 안 입어. 당신 패션 디자이너 맞아? 보는 눈이 왜 이래?"미나가 듣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다.이에 소희는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민영 씨 쪽에서 직접 준비해 온 복장이 있나요? 민영 씨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따로 있으시다면 그 스타일에 맞춰 다시 상의해도 돼요."마민영의 조수가 마민영의 눈짓에 바로 이동 옷걸이를 밀어와 그들이 준비한 옷을 소희에게 보여주었다.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전부 이름 있는 브랜드의 것들로 예복도 있었고, 심지어 거의 다 단번에 브랜드를 알아차릴 수 있는 클래식한 디자인들이었다.그래서 소희는 부득불 다시 마민영에게 설명했다."민영 씨, 이번 작품에서 민영 씨가 맡게 될 역할은 별장 가정부의 딸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주인집에서 생활하면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다 나중에 노력과 견지로 모든 사람의 존중을 받아내고 창업하여 성공하게 되죠. 이야기의 뒷부분에 이르러서야
나가면서 소희는 마침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마른 몸매에 큰 키를 가진 남자는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동시에 남자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며 소희의 얼굴을 아래우로 훑어보고는 하찮다는 눈빛으로 차갑게 한 번 웃고는 고개를 돌려 휴게실로 들어갔다.그러다 마민영을 보자마자 지훈은 미소를 지었다."우리 동생, 축하해. 제일 잘 나가는 감독과 합작하게 되었으니 이번에 반드시 대박 날 거야.""하지만 오자마자 나에게 이런 낡아빠진 옷을 입으라고 주는 거 있지? 너무 짜증나!"마민영의 투정에 지훈이 의자에 앉아 옷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네. 하지만 우리 동생의 기질이 뛰어났으니 아무리 평범한 옷이라도 몸에 걸치기만 하면 바로 고급스러워 보일 거야."마민영은 그제야 얼굴에 웃음을 띠고 지훈에게 물었다."또 이모의 부탁으로 왔어?""네가 강성에서 적응하지 못할까 봐 엄마가 직접 해성에만 있는 떡을 만들었어."지훈이 말하면서 자신의 비서에게 떡을 담은 통을 마민영에게 건네주라고 했다."역시 이모밖에 없다니까."마민영이 웃으며 떡통을 건네받자 지훈이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움직이지 마, 사진 찍어 엄마에게 보내주게. 안 그러면 또 나를 의심할 거야."이에 마민영이 포즈까지 취하고는 당부했다."예쁘게 찍어줘.""우리 동생이 이렇게 타고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데 안 예쁠 리가 있겠어?"지훈이 무심코 아첨하는 말을 한마디 내던진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떡도 전달해 주고, 네 얼굴도 봤으니 난 이만 가볼게."마민영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잘 가. 나 대신 이모한테도 안부를 전해주고.""알았어."촬영 현장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지훈은 바로 마민영의 사진을 한마디의 글과 함께 개인 계정에 올렸다.[사촌 여동생이 새 제작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새 드라마 대박나셈!]지훈도 강성에서 꽤나 이름 있는 재벌 2세라 매번 개인 계정에 사진을 올리면 엄청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그리고
반시간 후,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도착하게 되었고, 소동은 꽃을 한쪽에 내려놓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사실 저 지훈 씨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지훈이 소동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웃었다."우리 사이에 뭔 부탁이야.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저 작업실을 차린 건 지훈 씨도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요즘 많이 힘들어 우리도 겨우 유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지훈 씨 사촌여동생분한테 부탁해서 저를 디자이너로 그 제작팀에 꽂아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그랬구나."지훈은 사실 진작 소동이 부탁하고 싶어 하는 일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놀란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감한 표정을 드러냈다."그렇지만 그들 제작진에 이미 패션 디자이너가 있는 것 같던데?""민영 씨처럼 잘 나가는 배우한테 단독으로 디자이너를 붙여 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민영이 오늘 처음 그 제작팀에 합류한 거라 바로 개인 디자이너를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되겠지만......"지훈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소동의 손을 잡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네가 나한테 부탁하는 일이니까, 내가 반드시 도울게."소동은 손을 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더욱 달달하게 웃었다."정말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고맙긴."지훈의 그윽한 눈빛에 순간 소름이 돋은 소동은 당장이라도 지훈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지훈이 또 나중에 다른 일로 자신을 협박할까 봐 급히 웃으며 말했다."그럼 지금 바로 민영 씨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주실 수 있을까요?""그래. 민영이 내 말을 엄청 잘 따라."지훈이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손을 거두고 휴대폰을 꺼내 마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소동은 그제야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놓은 손을 다리 위에 올렸다.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고, 지훈이 바로 입을 열었다."민영아, 너희 제작팀의 패션 디자이너 어때?"[말도 마, 너무 구려! 의상도 싸구려 구식만 찾아와서는 인물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그
소동은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훈이 화를 내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봐 너무 두려웠다.그녀의 작업실은 이미 오랫동안 수입이 없는 상태에 처했고, 진연이 또 언제 경제적인 지원을 끊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그녀는 반드시 스스로 방법을 찾아 작업실을 계속 꾸려나가야 했다.그래서 한참 생각한 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사실 지훈의 차에 다시 올라탄 그때부터 소동은 오늘 저녁 무조건 어느 정도 헌신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룸 안에서 지훈이 키스하려는 순간 소동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지훈을 거절했다.진석 같은 눈부신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으니 지훈 같은 평범한 남자가 눈에 들 리가 없었다.그렇게 받아주는 척하며 또 밀어내는 과정에서 지훈은 어느 정도 이득을 보게 되었고, 진심으로 소동을 사랑하고 있었던 지훈은 너무 강요하지 않았다.그러다 다 놀고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12시가 되었다.진연이 아직 자지 않고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소동은 놀라 급히 옷으로 목의 흔적을 가렸다.다행히도 진연이 너무 졸렸는지 자세히 보지도 않고 물었다."왜 이렇게 늦게 돌아온 거야?""제작진과 업무 이야기를 하느라 늦었어요."진연이 듣더니 즉시 정신을 차렸다."제작진, 어느 제작진?""지금 인기가 엄청 많은 이적 감독님의 새 드라마 있잖아요. 그분이 이번에 새로 뽑은 여주가 제작팀에서 안배해 준 디자이너의 안목이 별로라면서 개인 디자이너를 따로 뽑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저를 찾아왔고요.""바로 얼마 전에 자살한 배우 이현이 있었던 그 제작진?""네!""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 제작진의 디자이너가 소희였던 것 같은데?""그럴걸요?"소동이 확실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이에 진연이 다소 놀라워하며 다시 물었다."새로 뽑은 여주인공이 누군데? 정말 너를 개인 디자이너로 쓰겠대?""마민영이라는 배우요."진연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반짝이는 마음’에서 부잣집 아가씨 역할을 했었잖아. 엄청 예쁘
다음날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제작팀에 도착한 소동은 스태프에게 자신이 새로 온 마민영의 개인 디자이너라고 소개했고, 스태프는 바로 소동을 안으로 안내했다.하지만 아직 마민영이 출근하기 전이라 소동은 홀로 분장실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그러다 다들 분분히 각자의 업무를 시작하자 조용하게 옆에 앉아 마민영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가 조수를 데리고 들어와서는 배우들에게 오늘의 의상을 안배하기 시작했다.분장을 하고 있던 배우들은 소희를 보자마자 잇달아 소희에게 인사를 했다. 다시 촬영을 시작한 이후로 다들 왠지 소희를 많이 존중하게 되었다.이미 2년 동안 소희를 보지 못한 소동은 순간 지난날의 원한이 밀려와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잠시 후 소희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해야 할지 생각했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소희는 소동 쪽을 보지도 않았고, 의상을 전부 안배한 후 바로 나갔다.이에 소동이 눈알을 한 번 돌리더니 바로 일어나 복도까지 따라 나가서는 소희를 불렀다."언니, 오랜만이야!"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소희가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소동을 알아보고는 의아해서 물었다."너 왜 여기에 있어?""아~ 나 마민영 씨가 특별히 초대한 개인 디자이너야. 앞으로 마민영 씨의 드라마 의상은 모두 내가 직접 코디할 거고."소동의 눈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언니가 해야 할 일인데 내가 빼앗아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민영 씨가 그러는데, 언니가 코디한 의상이 너무 별로래. 그래서 나더러 꼭 와서 도와달라고 어찌나 부탁을 하든지. 나도 거절하기 뭐해서 온 거야."소희가 담담하게 소동을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잘됐네."덤덤하게 한마디만 내뱉고 떠난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소동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곧 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소희가 지금 분명 화 나 미칠 지경인데 일부러 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극 중의 여
우정숙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의 대답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제가 임유진에게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에요. 그러니 유진이를 탓하지 마세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을 뿐, 전부 제 문제예요.”우정숙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래서 우리 유진이가 혼자만 짝사랑하고 있었던 거군요?”서인은 굳게 다문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고, 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꽤 부담됐겠어요. 대신 사과할게요.”서인의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아니에요.” 우정숙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앞으로 유진이가 여기에 오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 시간이 지나면 유진이도 점점 식어갈 테고,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죠.”서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방법을 생각해 보죠.”“좋아요. 믿을게요.”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서인은 2층 베란다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구은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에도 말했던 맞선 이야기요. 언제 진행할 건가요?”구은태는 뜻밖이라는 듯 놀라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드디어 마음을 정한 거야?]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집에는 당분간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상대방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만나볼 수 있어요.”구은태는 한순간 고민하더니 물었다.[그러면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거야?]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구은태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서인이 결혼을 전제로 여자를 만날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기 때문이다.전화를 끊자마자, 구은태는 곧바로 서선영을 찾아가 맞선 일정을 조율했다.다음 날, 서선영이 서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만났던 진수아 어때? 사실 걔가 너를 마음에 무척 들어서 했어.]그리고 덧붙였다.[수아
서인은 새로 도착한 테이블을 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이거 내가 산 거 아닌데. 다시 가져가세요.”배송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손님, 임유진 씨가 이미 결제하셔서 반품이 어려워요.”서인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말했다.“그러면 테이블은 놔두고, 돈은 돌려주세요. 대신 내가 결제할게요.”그러나 직원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죄송해요, 이미 결제된 금액은 환불이 불가능해요.”서인의 얼굴에 짙은 불만이 떠올랐다. 하지만 배송 직원들에게 화를 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후원에 놔두세요.”직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오현빈이 직원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갔다. 서인이 따라갔을 때, 테이블은 이미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최고급 황화리 원목으로 제작된 수제 테이블. 정교한 수공예로 깎아낸 꽃무늬 장식은 유명 장인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 테이블 하나만으로도 뒷마당의 분위기가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변했다.서인은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 유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던 말.“이 뒷마당엔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어요. 뭔가 값비싼 거라도 하나 놔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유진은 일부러 이 테이블을 주문한 걸까?한편, 한쪽에는 부서진 낡은 탁자가 여전히 버려진 채 남아 있었다. 현빈이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이건 이제 버려야겠네요!”그러나 서인은 한 번 흘깃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놔둬.”그 말에 현빈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현빈이 다른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서인은 부서진 탁자를 완전히 분해하고 있었다.그는 그 나무판자를 가져다가 애옹이와 야옹이의 집 사이에 덧대고 있었다. 애옹이는 아직 어려서 나무 지붕에서 야옹이 쪽으로 뛰어내릴 때마다 자주 미끄러졌다.하지만 이제는 그사이에 작은 다리가 생겼으니, 더 이상 떨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현빈은 벽에 나무판자를 못질하는 서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우리 형님
임유민은 더욱 흥미로워하며 물었다.“구은정 아저씨는 어떻게 반응했어?”“그, 그게...”임유진은 문득 마지막 순간, 유진이 반사적으로 서인의 옷깃을 붙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두운 밤, 희미한 빛 속에서 본 그의 표정 다시금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진은 황급히 그 순간의 기억을 밀어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서인의 반응을 떠올려 보려 했다.하지만 그때 상황이 너무나 급작스러웠다. 서로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에 유진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도망쳐 나왔고,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서인의 얼굴이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하지만 확실한 건 서인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아주 잠깐 저항했던 것 같기도 하다.그러나 유진이 술김에 더욱 과감하게 나서자, 결국 서인도 서서히 받아들이며 주도권을 잡았던 듯했다.둘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탐하며 키스했다. 그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유진은 또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다행히 어두운 테라스에서는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유민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는 신이 난 듯 말했다.“오! 잘했네! 이렇게 빨리 진전이 있을 줄이야!”유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게 말하지 마.”유민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원했다.“힘내! 몇 번 더 키스하면 확실해질 거야.”“야!”유진은 유민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감정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하지만 과연 그런 기회가 다시 올까?’그날 밤, 서인은 뒷마당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문과 오현빈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다. 누군가 서인을 불렀지만, 그는 대충 응답만 하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자마자, 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옹이가 언제 들어왔는지, 자신의 침대 한가운데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서인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언제나 무심하고 냉정하게 대했지만, 이상하게도 애옹이는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심지어 매번 서인의
공기마저 멈춰버린 듯한 순간이었다....임유진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얼굴이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이리저리 뒤척이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자, 결국 유진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기로 했다.테라스로 나가 보니, 밤하늘은 흐린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달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별 하나 없이 검게 가라앉은 하늘.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복잡하게 뒤엉켰다.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고,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익명으로 SNS 고민 상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남자가 여자에게 반응하는 건, 그 여자를 좋아해서일까요?]잠시 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그렇죠.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만 반응한다고 하더라고요.][제가 남자인데,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여자가 충분히 매력적이면 다 반응해요.][윗댓 의견 반대요. 그럼 동물과 다를 게 뭐예요?][애초에 인간도 동물이잖아요.]...유진은 계속해서 새로 고치며 댓글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읽었다. 어떤 댓글을 보면 마음이 설레다가도, 또 어떤 댓글을 보면 불안해졌다. 혼란스러움과 기대감이 엇갈려 마음이 쉴 새 없이 출렁였다.그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해?”임유민이었다. 유진은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급히 껐다. 그러고는 서둘러 휴대폰을 뒤로 감추며 더듬거렸다.“아, 아냐! 아무것도 안 했어!”유민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뭐야,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유진은 얼굴이 뜨거워지며 발끈했다.“꼬맹이는 신경 꺼!”그러자 유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부모님 출장 가시면서 누나 나한테 맡기고 가셨거든? 그러니까 누나 문제는 내 문제지. 뭔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조언해 줄 수도 있으니까.”유진은 반박하려다가,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동생을 바라보며 체념
후원에는 벽에 걸린 벽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온 마당은 은은한 황금빛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장미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애옹이는 작은 집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야옹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로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 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서인은 오늘 많은 술을 마셨다. 기분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유진 대신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유진은 조용히 다가가, 서인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가 정말 잠든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넋을 잃고 말았다.서인의 짙고 선명한 눈썹은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책에서 묘사하는 ‘긴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그 눈썹만 봐도, 서인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눈은 길고 날렵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콧날은 오뚝하고 반듯해, 본래부터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턱선에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덮여 있어, 평소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었다.서인이 어떤 모습이든, 유진은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의 수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유진은 거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서인의 턱에 닿기 직전 갑자기 서인이 눈을 번쩍 떴다.서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와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산길에서 적들의 포위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았다.유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뒤에 있던 탁자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낡은 탁자는 이미 몇 번이나 수리를 거쳤던 터라, 유진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쾅! 순식간에 탁자가 부서졌다. 몸을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그 순간 굵은 손이 유진의 팔을 붙잡
이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고, 갑자기 가게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뛰어나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생일 축하해요!”이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웃었다.“내 생일이었어?”“자기 생일도 모르다니!”임유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케이크를 그 앞에 내밀었다.“자, 촛불 끄고 소원 빌어요!”이문은 굳은 얼굴로 기계적으로 촛불을 불어 끄자 유진이 곧장 말했다.“소원도 안 빌고 그냥 끄면 어떡해요!”이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긴장해서 깜빡했어!”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긴장할 게 뭐 있어요?”그때, 오현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묻힌 생크림을 이문의 얼굴에 문질렀다. 이문은 한순간 얼어붙더니, 이내 손을 뻗어 현빈을 쫓기 시작했다.조용하고 따뜻했던 생일 파티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유진은 한가운데에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서인은 카운터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장난을 바라보았다.평소의 냉랭한 표정과는 달리, 이날만큼은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한 직원이 장난을 치려다 유진에게 다가갔다.그러나 유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긴 팔이 앞으로 뻗어져 나가, 상대의 손을 막아섰다.서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너한테 묻히면, 그대로 돌려줘. 괜히 억울해하지 말고.”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서인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사람들의 난장판을 피해 도망쳤다.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의 서인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유진은 새로운 케이크를 꺼내며 작게 으쓱했다.“다행히도, 저는 항상 대비책을 준비하죠!”유진은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자르고 원래는 서인에게 주려 했지만,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손가락으로 크림을 살짝 묻혀 서인의 얼굴에 바르려 했다. 그러나 서인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피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서인이 보였다. 임유진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사장님!”“응.”그러나 서인은 무심한 듯 가볍게 대답했을 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유진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가게 안 손님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우선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거들기로 했다.주방에서 음식을 나르던 중, 이문이 유진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너랑 사장님이 산에서 가져온 산나물로 끓인 버섯 갈비탕이야. 갓 끓였으니까 맛 좀 봐.”유진은 국물에 떠 있는 버섯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깊고 진한 풍미에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와, 너무 맛있어요!”“나도 좀 먹어볼까?”오현빈이 다가와서는 직접 손으로 갈비 하나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현빈은 음미하듯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향이 진하네. 이게 진짜 자연산 버섯이지!”그는 유진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런데 오늘은 왜 저녁까지 여기 있어?”유진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오빠들이 보고 싶어서요. 마침 오늘 일찍 끝나기도 했고요.”현빈은 히죽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우리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어떤 사람 보고 싶었던 거야?”이에 유진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다 알면서 왜 물어요?”현빈은 유진에게 더욱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어제 형님 집에 갔더니, 밤늦도록 방에 불이 켜져 있더라. 아무래도 너 생각하느라 잠 못 잔 거 같은데?”유진의 볼이 붉어지며 눈을 굴렸다.“어떻게 그렇게 단정해요? 혹시 그냥 잠이 안 온 걸 수도 있잖아요.”“딱히 다른 이유가 있겠어?”현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유진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고마워요, 오빠!”“고맙긴, 우린 그저 축하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유진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결혼식 날은 사흘 동안 파티 열어드릴게요!”현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바로 그때, 서인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차가운 목
“그 토끼도 내 거잖아요? 내 물건으로 내 토끼 먹인 건데, 돈을 받을 수 없죠!”박민란은 단호하게 임유진의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그리고...”박민란은 다른 바구니에서 화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분 속에는 난초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이 난초는 꽤 좋은 품종이에요. 기념 삼아 드릴 테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산에 놀러 오세요.”임유진은 난초를 받으며 말했다.“감사해요!”박민란은 손사래를 쳤다.“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죠.”서인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유진과 함께 강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했다.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달렸다. 유진은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하게 웃었다.“정말 잔뜩 챙겨서 돌아가네요!”서인은 어젯밤 자신이 한숨도 못 자고 뒤척였던 걸 떠올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정작 그녀는 마냥 즐거운 얼굴이라니. 하지만, 어쨌든 이 여행도 끝났다.강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차가 샤부샤부 가게 앞에 멈추자, 오현빈을 비롯한 직원들이 뛰어나왔다.서인이 차에서 내리고, 유진과 함께 가게로 들어가려던 순간, 서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어느새 서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현빈은 서인과 유진의 맞잡은 손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인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조금 어색한 듯 유진의 손을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어서 일하러 가자.”유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놀았더니 다시 일하러 가기가 싫어지네요.”서인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며칠은 단지 예외일 뿐이야.”서인의 차분한 눈빛을 마주하자, 유진의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고 있던 난초를 바라보았다.“난 애옹이 보러 갈게요. 난초도 마당에 놓고 와야 하고요.”그렇게 말한 후, 유진은 뒷마당으로 향했다.한편, 현빈과 직원들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현빈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서인에게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서인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몸속을 타고 도는 술기운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듯했고, 유진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술기운을 더욱 자극했다.잠시 후,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밤바람을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그 사이, 유진은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베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꽤 얌전해 보였다. 그러나 서인이 자리에 눕자마자, 유진이 몸을 뒤척이며 다시 그의 품으로 굴러들어 왔다.‘오늘 밤, 잠은 포기해야겠군.’다음 날 아침, 유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는데, 침대에는 유진 혼자뿐이었고, 서인은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내다보니, 서인과 안토니가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서인은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아침 햇살이 서인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평소의 거친 분위기를 감싸 안았다.서인에게서 풍기는 느슨한 여유가 사라지고, 더없이 당당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창틀에 두 팔을 올려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맑고 영롱한 유진의 눈동자에는 오직 서인만 담겨 있었고,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진이 소리쳤다.“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서인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향할 때, 그 안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유진 또한 서인을 향해 눈길을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얇은 아침 안개 너머에서 조용히 마주쳤다.산속의 안개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