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제작팀에 도착한 소동은 스태프에게 자신이 새로 온 마민영의 개인 디자이너라고 소개했고, 스태프는 바로 소동을 안으로 안내했다.하지만 아직 마민영이 출근하기 전이라 소동은 홀로 분장실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그러다 다들 분분히 각자의 업무를 시작하자 조용하게 옆에 앉아 마민영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가 조수를 데리고 들어와서는 배우들에게 오늘의 의상을 안배하기 시작했다.분장을 하고 있던 배우들은 소희를 보자마자 잇달아 소희에게 인사를 했다. 다시 촬영을 시작한 이후로 다들 왠지 소희를 많이 존중하게 되었다.이미 2년 동안 소희를 보지 못한 소동은 순간 지난날의 원한이 밀려와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잠시 후 소희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해야 할지 생각했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소희는 소동 쪽을 보지도 않았고, 의상을 전부 안배한 후 바로 나갔다.이에 소동이 눈알을 한 번 돌리더니 바로 일어나 복도까지 따라 나가서는 소희를 불렀다."언니, 오랜만이야!"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소희가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소동을 알아보고는 의아해서 물었다."너 왜 여기에 있어?""아~ 나 마민영 씨가 특별히 초대한 개인 디자이너야. 앞으로 마민영 씨의 드라마 의상은 모두 내가 직접 코디할 거고."소동의 눈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언니가 해야 할 일인데 내가 빼앗아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민영 씨가 그러는데, 언니가 코디한 의상이 너무 별로래. 그래서 나더러 꼭 와서 도와달라고 어찌나 부탁을 하든지. 나도 거절하기 뭐해서 온 거야."소희가 담담하게 소동을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잘됐네."덤덤하게 한마디만 내뱉고 떠난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소동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곧 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소희가 지금 분명 화 나 미칠 지경인데 일부러 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극 중의 여
마민영이 다시 한번 소동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따라와."마민영에게는 개인 휴게실이 따로 있었다. 휴게실 분장대 맞은편 캐비닛에는 어제 소희가 보내온 여주의 의상들이 담겨 있었고, 물론 마민영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의상은 한 벌도 없었다.그래서 오늘 그녀는 특별히 자신이 평소에 자주 입던 옷들로 한 상자 더 가지고 왔다."민영 씨 정말 보는 눈이 있네요."소동이 그중의 치마 한 벌을 들고 말했다."저도 이 치마를 엄청 좋아하는데, 제가 입으면 핏이 안 살더라고요."200만 원에 달하는 치마를 들고 있는 소동을 마민영이 한 번 쳐다보고는 궁금해서 물었다."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지?""그냥 이런저런 장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회사 규모가 아무리 커도 저희 아버지 것이니까요, 전 아버지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 성공하고 싶어요."마민영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돈 많은 집 아가씨였네. 그래, 지훈처럼 세력 있는 가문의 도련님이 평범한 가정 출신인 여인을 좋아할 리가 없지.’"지훈이 오빠가 소동 씨를 좋아하지?"마민영의 물음에 소동은 얼굴이 빨개져 바삐 해석했다."저와 지훈 씨는 친구일 뿐입니다.""남녀 사이에 뭔 친구야? 연인이 아니면 곧 연인이 될 사이만 있는 거 아닌가?"마민영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더 이상 둘의 사이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나 지금 메이크업 받으러 가야 하니까, 옷이나 골라 놔.""네!"조수한테서 마민영이 찍을 씬을 확인한 소동은 바로 세련된 티셔츠와 같은 브랜드의 청치마를 준비했다.그리고 메이크업을 받고 소동이 준비한 옷까지 갈아입은 마민영은 순간 청춘의 느낌이 물씬한 소녀로 변했다.마민영이 아주 만족스러웠는지 웃으며 칭찬했다."괜찮네. 어제 소희가 고른 것보다 훨씬 예뻐. 안목 인정.""이런 브랜드에서 만들어낸 옷들만이 민영 씨의 완벽한 몸매를 돋보이게 할 수 있거든요."마민영이 듣더니 눈썹을 올린 채 냉소했다."소희는 딱 봐도 가난한 집 애 같았어, 품위가 뭔지 전혀 몰라.
5분도 안 되어 소희가 촬영장에 나타났다."이 감독님, 저를 찾으셨어요?"소희를 본 순간 이 감독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민영 씨에게 코디한 옷이 씬이랑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안 들어?"소희가 모니터를 한 번 보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이건 제가 코디한 게 아니라 민영 씨가 따로 청한 개인 디자이너 분이 코디한 겁니다.""뭐? 그걸 왜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했어?"이 감독이 눈살을 찌푸린 채 조감독에게 분부했다."마민영 씨의 개인 디자이너도 호출해!"이 감독의 호출에 소동이 곧 나타나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감독님, 부르셨어요?"이 감독이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오늘 의상이 그쪽이 코디한 건가?""네!"소동의 순진한 태도에 이 감독의 얼굴색이 순간 굳어졌다."대본 제대로 보기나 했어? 마민영 씨가 맡은 역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는?"소동이 순간 멍해졌다. 대본을 보기는커녕 조수에게 대충 내용만 물었으니까."민영 씨가 맡은 역할은 별장 가정부의 딸이야. 평소에 엄청 절약하면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간고하게 사는 역할인데, 감히 브랜드를 입혀? 이 드라마가 이대로 방영되었다간 나의 감독길이 이대로 끝난다는 거 알아 몰라!"이 감독이 차가운 얼굴로 소동을 향해 소리쳤다.그리고 처음 이렇게 누군가에게 혼나 보는 소동은 얼굴이 붉어져 바삐 해석했다."저, 저 아직 대본을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대본도 안 읽어보고 뭔 제작팀 디자이너를 해!"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이 감독은 인정사정없이 계속 호통을 쳤다."너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아마추어가 감히 내 제작팀으로 기어들어 와?"이때 마민영이 다가와 바삐 물었다."왜 그래요?"소동이 마민영을 보더니 바로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감독님께서 제가 코디해 준 의상이 이번 씬이랑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전 아주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마민영의 대답에 이 감독이 화를 내며 말했다."민영 씨
소희의 조수 미나는 곧 소희가 새로 코디한 의상을 마민영에게 전달했고, 이번에 마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탈의실로 들어갔다.이에 소동이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러 뒤따라 탈의실로 들어갔다.하지만 들어가자마자 마민영이 화를 내며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너 목 위에 달린 건 장식품이야?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최소한의 소양도 없어? 이렇게 큰 로고가 붙어있는데 보지 못하고 감히 나한테 입혀 욕먹게 해? 지훈 오빠의 소개로 온 게 아니었으면 넌 바로 꺼져야 했어!"처음 이런 욕을 들어보는 소동은 속으로 더욱 분개했다. 분명히 마민영도 마음에 들어 했던 의상인데, 이 감독의 꾸중을 들었다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떠넘겼으니.그녀는 당장이라도 마민영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제작팀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정말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했다간 진연을 볼 면목이 없게 될 것이다.어젯밤 진연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보다 더욱 흥분했고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가정 셰프더러 보양식까지 만들라고 했었는데, 지금 이대로 떠나게 되면 진연은 엄청 실망할 게 분명했다.진연의 실망하여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떠오른 소동은 마민영의 질책을 참았다.마민영은 결국 소희가 고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이 감독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난 후 겨우 고분고분해져 착실한 태도로 촬영에 임했다.그리고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정남이 점심 먹을 때 호탕하게 웃으며 소희한테 본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는 소동과 소희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다만 마민영이 꾸중을 듣는 모습이 깨고소하게 느껴졌을 뿐."이 감독님도 다른 감독들처럼 자신을 오냐오냐 예뻐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이 감독님이 얼마나 참아줬는지 눈치도 못 채고. 오늘 이렇게 호되게 욕먹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날뛰지 못할 거야."이정남이 소희가 준 게다리 볶음을 먹으며 격동되어 말했다.오늘 그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된 미나도 유난히 기뻐하며 말했다."마민영이 어제 소희 씨를 얼마나 괴롭혔는데요! 소희 씨가 착하니까
"그럼 계속 그렇게 괴롭힘만 당할 거야?"진연이 화가 치밀어 올라 말했다."소희는 정말 말썽이야! 네가 북극에 있을 때도 소희 때문에 해고된 거잖아! 그러다 이번에 겨우 제작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또 너를 해치려고 하고! 걔는 어떻게 그런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수 있어? 대체 어떤 사람이 키웠는지!""내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질투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난 떳떳하니까 두려워하지 않아요. 언니가 어떻게 나를 괴롭히든, 난 내 일에만 전념하고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 거예요."소동이 진연의 팔을 안고 다시 입을 열었다."엄마, 난 엄마의 사랑이 있으니 언니가 아무리 질투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진연이 듣더니 소동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불쌍한 내 새끼, 엄마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미안하긴요,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요!"소동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난 엄마의 사랑만 있으면 돼요.""엄마는 당연히 우리 소동이를 사랑하지, 네가 엄마의 가장 귀한 딸인데."소동을 달래고 있는 진연의 눈에는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난 평생 소희가 내 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거야!"진연의 품에 얼굴을 묻힌 소동의 눈빛은 얼음장마냥 차가웠다. 그러면서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나 반드시 언니보다 더 훌륭해져 엄마가 사람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드릴 거예요.""응, 엄마는 널 믿어!"소동은 여전히 마민영의 개인 디자이너 신분으로 제작팀에 남았다. 그리고 또 방심하여 욕먹기라도 할까 봐 열심히 대본을 읽어보고 인물성격을 분석하며 마민영의 의상을 코디했다.마민영도 이 감독에게 욕을 먹은 후 많이 착실해졌다. 적어도 매일 출근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졌고 의상 방면에 있어서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금요일,허홍연이 드디어 퇴원할 수 있게 되어 청아는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가서 퇴원 수속을 했다.그러다 하 의사가 사인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 청아는 그의 사무실에서 잠시
"그동안 매일 얼굴을 봐오면서 난 청아 씨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예전에 내가 단지 일과 책임감 때문에 출근한 거라면 청아 씨를 알게 된 후로부터는 매일 기대감을 안고 출근했어요."하 의사가 진지하게 청아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청아 씨의 상황은 내가 잘 알고 있지만, 나의 상황에 대해서는 청아 씨가 아직 잘 모를 겁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행정 기관에서 근무하시다 지금은 이미 퇴직하셨어요. 난 올해 서른 살로 여자 친구는 한 명만 만났었고, 2년 전에 깨끗하게 헤어졌어요. 그리고 내 명의로 된 집 한 채와 400만 원짜리 차 한 대가 있고요, 평소에 출근하는 것 외에 운동도 좋아하고, 약간의 결벽증도 있어요. 그 외엔 다른 안 좋은 나쁜 취미는 없......""하 선생님!"청아가 놀라서 하 의사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하 선생님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당연하죠. 서로에 대해 알아야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내가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노력할게요, 난 우리가 엄청 잘 맞다고 생각해요."청아는 한참 침묵하고 나서야 하 의사의 말을 소화하고 다소 황당함을 느껴 말했다."아니요, 하 선생님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나의 가정도, 나의 과거도 전부 다.""무슨 과거가 있는데요?""저에겐 도박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있어요. 비록 이미 사라진 지 3년이 되었지만,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고요. 그리고 저에겐 딸이 있어요."하 의사가 듣더니 순간 멍해져 한참 후에야 놀라서 입을 열었다."결, 결혼했어요?""아니요."결혼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있다는 건, 하 의사도 당연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그는 깨끗한 기질을 풍기고 있는 여인이 의외로 혼전임신을 하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크게 충격을 받은 하 의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이의 아빠는요?""이미 헤어졌어요.""멍청하네요. 헤어졌는
병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청아가 낸 기척에 놀라 문 쪽을 쳐다보았고, 청아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장시원을 바라보았다."왜 왔어요?"우강남이 듣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청아야, 오늘 엄마 퇴원하신다고 장 대표님께서 호의로 도우러 오신 건데, 너 그게 무슨 태도야?"이에 청아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되찾고는 우강남에게 물었다."오빠 오늘 출근 안 해요?""오늘 엄마 퇴원하시잖아, 그래서 휴가를 냈어."우강남이 웃으며 말했다."마저 못한 수속이 있으면 내가 갈게, 넌 장 대표님과 잠시 이야기 나누고 있어.""이미 다 끝냈어요!"죽어도 장시원과 단독으로 있고 싶지 않은 청아가 우강남의 말에 바로 거절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태도에 장시원의 눈동자에는 순간 어두운 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곧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가시죠."장시원을 유독 소외하고 차갑게 대하는 청아의 태도에 우강남이 마침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장시원이 먼저 화제를 돌려주는 덕분에 그도 재빨리 청아더러 물건을 잘 정리하라고 했다.그렇게 허홍연이 옷을 갈아입고 물건도 전부 정리한 후 몇 사람은 병실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때 병실의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하 의사가 들어왔다.그는 허홍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퇴원하신 걸 축하합니다.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하세요."청아는 하 의사를 보자마자 어색함이 밀려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옆에서 예리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보던 장시원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이건 또 뭔 표정이지?’‘부끄러워하는 건가?’‘허!’허홍연이 바삐 웃으며 대답했다."네, 그동안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고맙긴요."하 의사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청아를 바라보았다."재진 하는 날, 청아 씨가 같이 왔으면 좋겠네요."청아가 놀라 하 의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뭐라 말하기도 불편하고 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이에
다행히도 장시원은 줄곧 운전에 전념하느라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청아는 조용히 손바닥의 땀을 바지에 문질렀다. 반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이미 7~8번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우강남이 사는 주택단지에 도착했고, 아무리 기다려도 장시원이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청아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잠깐 올라가서 앉을래요?"이에 장시원이 백미러로 차갑게 청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됐어. 가족끼리 얘기하는데 내가 끼면 불편하니까, 난 차에서 기다릴게.""아니요!"청아가 듣더니 놀라서 연거푸 머리를 흔들었다."이만 돌아가셔도 돼요, 저는 잠시 후에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내가 시키는 대로 해."장시원이 청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또 한마디 덧붙였다."자꾸 반항하지 말고."순간 할 말을 잃게 된 청아는 거울에 비친 남자의 차가운 눈빛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그러고는 우강남과 허홍연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허홍연이 출근하지 않은 후로 줄곧 우강남의 새 집에서 지냈다.비록 예전의 집을 판 돈으로 바꾼 새 집이라고는 하지만 청아는 그곳이 낯설기만 할 뿐, 아무런 소속감도 느끼지 못했다.예전의 집을 팔고 난 후, 청아는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어졌다.우강남이 갑자기 입을 열어 해석했다."네 형수도 휴가 내고 나와 함께 엄마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 휴가를 내지 못했어."허홍연이 듣더니 즉시 말했다."괜찮아, 돈을 버는 게 중요하지."청아는 귀국해서부터 지금까지 정소연이라는 형수를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아주 다정해 보이는 여인이었다.하지만 정소연과 너무 친근한 것도 아니고, 정소연도 아직 우씨 집에 시집온 것도 아니니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해도 원망할 것 없었다.우강남이 열정적으로 청아를 향해 말했다."청아야, 엄마도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요요랑 함께 집으로 들어와. 마침 엄마가 너를 도와 요요를 돌볼 수도 있고."청아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