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은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훈이 화를 내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봐 너무 두려웠다.그녀의 작업실은 이미 오랫동안 수입이 없는 상태에 처했고, 진연이 또 언제 경제적인 지원을 끊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그녀는 반드시 스스로 방법을 찾아 작업실을 계속 꾸려나가야 했다.그래서 한참 생각한 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사실 지훈의 차에 다시 올라탄 그때부터 소동은 오늘 저녁 무조건 어느 정도 헌신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룸 안에서 지훈이 키스하려는 순간 소동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지훈을 거절했다.진석 같은 눈부신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으니 지훈 같은 평범한 남자가 눈에 들 리가 없었다.그렇게 받아주는 척하며 또 밀어내는 과정에서 지훈은 어느 정도 이득을 보게 되었고, 진심으로 소동을 사랑하고 있었던 지훈은 너무 강요하지 않았다.그러다 다 놀고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12시가 되었다.진연이 아직 자지 않고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소동은 놀라 급히 옷으로 목의 흔적을 가렸다.다행히도 진연이 너무 졸렸는지 자세히 보지도 않고 물었다."왜 이렇게 늦게 돌아온 거야?""제작진과 업무 이야기를 하느라 늦었어요."진연이 듣더니 즉시 정신을 차렸다."제작진, 어느 제작진?""지금 인기가 엄청 많은 이적 감독님의 새 드라마 있잖아요. 그분이 이번에 새로 뽑은 여주가 제작팀에서 안배해 준 디자이너의 안목이 별로라면서 개인 디자이너를 따로 뽑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저를 찾아왔고요.""바로 얼마 전에 자살한 배우 이현이 있었던 그 제작진?""네!""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 제작진의 디자이너가 소희였던 것 같은데?""그럴걸요?"소동이 확실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이에 진연이 다소 놀라워하며 다시 물었다."새로 뽑은 여주인공이 누군데? 정말 너를 개인 디자이너로 쓰겠대?""마민영이라는 배우요."진연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반짝이는 마음’에서 부잣집 아가씨 역할을 했었잖아. 엄청 예쁘
다음날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제작팀에 도착한 소동은 스태프에게 자신이 새로 온 마민영의 개인 디자이너라고 소개했고, 스태프는 바로 소동을 안으로 안내했다.하지만 아직 마민영이 출근하기 전이라 소동은 홀로 분장실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그러다 다들 분분히 각자의 업무를 시작하자 조용하게 옆에 앉아 마민영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가 조수를 데리고 들어와서는 배우들에게 오늘의 의상을 안배하기 시작했다.분장을 하고 있던 배우들은 소희를 보자마자 잇달아 소희에게 인사를 했다. 다시 촬영을 시작한 이후로 다들 왠지 소희를 많이 존중하게 되었다.이미 2년 동안 소희를 보지 못한 소동은 순간 지난날의 원한이 밀려와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잠시 후 소희와 만나게 되면 어떻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해야 할지 생각했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소희는 소동 쪽을 보지도 않았고, 의상을 전부 안배한 후 바로 나갔다.이에 소동이 눈알을 한 번 돌리더니 바로 일어나 복도까지 따라 나가서는 소희를 불렀다."언니, 오랜만이야!"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소희가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소동을 알아보고는 의아해서 물었다."너 왜 여기에 있어?""아~ 나 마민영 씨가 특별히 초대한 개인 디자이너야. 앞으로 마민영 씨의 드라마 의상은 모두 내가 직접 코디할 거고."소동의 눈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언니가 해야 할 일인데 내가 빼앗아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민영 씨가 그러는데, 언니가 코디한 의상이 너무 별로래. 그래서 나더러 꼭 와서 도와달라고 어찌나 부탁을 하든지. 나도 거절하기 뭐해서 온 거야."소희가 담담하게 소동을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잘됐네."덤덤하게 한마디만 내뱉고 떠난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소동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곧 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소희가 지금 분명 화 나 미칠 지경인데 일부러 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극 중의 여
마민영이 다시 한번 소동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따라와."마민영에게는 개인 휴게실이 따로 있었다. 휴게실 분장대 맞은편 캐비닛에는 어제 소희가 보내온 여주의 의상들이 담겨 있었고, 물론 마민영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의상은 한 벌도 없었다.그래서 오늘 그녀는 특별히 자신이 평소에 자주 입던 옷들로 한 상자 더 가지고 왔다."민영 씨 정말 보는 눈이 있네요."소동이 그중의 치마 한 벌을 들고 말했다."저도 이 치마를 엄청 좋아하는데, 제가 입으면 핏이 안 살더라고요."200만 원에 달하는 치마를 들고 있는 소동을 마민영이 한 번 쳐다보고는 궁금해서 물었다."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지?""그냥 이런저런 장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회사 규모가 아무리 커도 저희 아버지 것이니까요, 전 아버지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 성공하고 싶어요."마민영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돈 많은 집 아가씨였네. 그래, 지훈처럼 세력 있는 가문의 도련님이 평범한 가정 출신인 여인을 좋아할 리가 없지.’"지훈이 오빠가 소동 씨를 좋아하지?"마민영의 물음에 소동은 얼굴이 빨개져 바삐 해석했다."저와 지훈 씨는 친구일 뿐입니다.""남녀 사이에 뭔 친구야? 연인이 아니면 곧 연인이 될 사이만 있는 거 아닌가?"마민영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더 이상 둘의 사이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나 지금 메이크업 받으러 가야 하니까, 옷이나 골라 놔.""네!"조수한테서 마민영이 찍을 씬을 확인한 소동은 바로 세련된 티셔츠와 같은 브랜드의 청치마를 준비했다.그리고 메이크업을 받고 소동이 준비한 옷까지 갈아입은 마민영은 순간 청춘의 느낌이 물씬한 소녀로 변했다.마민영이 아주 만족스러웠는지 웃으며 칭찬했다."괜찮네. 어제 소희가 고른 것보다 훨씬 예뻐. 안목 인정.""이런 브랜드에서 만들어낸 옷들만이 민영 씨의 완벽한 몸매를 돋보이게 할 수 있거든요."마민영이 듣더니 눈썹을 올린 채 냉소했다."소희는 딱 봐도 가난한 집 애 같았어, 품위가 뭔지 전혀 몰라.
5분도 안 되어 소희가 촬영장에 나타났다."이 감독님, 저를 찾으셨어요?"소희를 본 순간 이 감독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민영 씨에게 코디한 옷이 씬이랑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안 들어?"소희가 모니터를 한 번 보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이건 제가 코디한 게 아니라 민영 씨가 따로 청한 개인 디자이너 분이 코디한 겁니다.""뭐? 그걸 왜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했어?"이 감독이 눈살을 찌푸린 채 조감독에게 분부했다."마민영 씨의 개인 디자이너도 호출해!"이 감독의 호출에 소동이 곧 나타나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감독님, 부르셨어요?"이 감독이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오늘 의상이 그쪽이 코디한 건가?""네!"소동의 순진한 태도에 이 감독의 얼굴색이 순간 굳어졌다."대본 제대로 보기나 했어? 마민영 씨가 맡은 역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는?"소동이 순간 멍해졌다. 대본을 보기는커녕 조수에게 대충 내용만 물었으니까."민영 씨가 맡은 역할은 별장 가정부의 딸이야. 평소에 엄청 절약하면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간고하게 사는 역할인데, 감히 브랜드를 입혀? 이 드라마가 이대로 방영되었다간 나의 감독길이 이대로 끝난다는 거 알아 몰라!"이 감독이 차가운 얼굴로 소동을 향해 소리쳤다.그리고 처음 이렇게 누군가에게 혼나 보는 소동은 얼굴이 붉어져 바삐 해석했다."저, 저 아직 대본을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대본도 안 읽어보고 뭔 제작팀 디자이너를 해!"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이 감독은 인정사정없이 계속 호통을 쳤다."너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아마추어가 감히 내 제작팀으로 기어들어 와?"이때 마민영이 다가와 바삐 물었다."왜 그래요?"소동이 마민영을 보더니 바로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감독님께서 제가 코디해 준 의상이 이번 씬이랑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전 아주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마민영의 대답에 이 감독이 화를 내며 말했다."민영 씨
소희의 조수 미나는 곧 소희가 새로 코디한 의상을 마민영에게 전달했고, 이번에 마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탈의실로 들어갔다.이에 소동이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러 뒤따라 탈의실로 들어갔다.하지만 들어가자마자 마민영이 화를 내며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너 목 위에 달린 건 장식품이야?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최소한의 소양도 없어? 이렇게 큰 로고가 붙어있는데 보지 못하고 감히 나한테 입혀 욕먹게 해? 지훈 오빠의 소개로 온 게 아니었으면 넌 바로 꺼져야 했어!"처음 이런 욕을 들어보는 소동은 속으로 더욱 분개했다. 분명히 마민영도 마음에 들어 했던 의상인데, 이 감독의 꾸중을 들었다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떠넘겼으니.그녀는 당장이라도 마민영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제작팀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정말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했다간 진연을 볼 면목이 없게 될 것이다.어젯밤 진연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보다 더욱 흥분했고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가정 셰프더러 보양식까지 만들라고 했었는데, 지금 이대로 떠나게 되면 진연은 엄청 실망할 게 분명했다.진연의 실망하여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떠오른 소동은 마민영의 질책을 참았다.마민영은 결국 소희가 고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이 감독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난 후 겨우 고분고분해져 착실한 태도로 촬영에 임했다.그리고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정남이 점심 먹을 때 호탕하게 웃으며 소희한테 본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는 소동과 소희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다만 마민영이 꾸중을 듣는 모습이 깨고소하게 느껴졌을 뿐."이 감독님도 다른 감독들처럼 자신을 오냐오냐 예뻐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이 감독님이 얼마나 참아줬는지 눈치도 못 채고. 오늘 이렇게 호되게 욕먹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날뛰지 못할 거야."이정남이 소희가 준 게다리 볶음을 먹으며 격동되어 말했다.오늘 그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된 미나도 유난히 기뻐하며 말했다."마민영이 어제 소희 씨를 얼마나 괴롭혔는데요! 소희 씨가 착하니까
"그럼 계속 그렇게 괴롭힘만 당할 거야?"진연이 화가 치밀어 올라 말했다."소희는 정말 말썽이야! 네가 북극에 있을 때도 소희 때문에 해고된 거잖아! 그러다 이번에 겨우 제작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또 너를 해치려고 하고! 걔는 어떻게 그런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수 있어? 대체 어떤 사람이 키웠는지!""내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질투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난 떳떳하니까 두려워하지 않아요. 언니가 어떻게 나를 괴롭히든, 난 내 일에만 전념하고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 거예요."소동이 진연의 팔을 안고 다시 입을 열었다."엄마, 난 엄마의 사랑이 있으니 언니가 아무리 질투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진연이 듣더니 소동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불쌍한 내 새끼, 엄마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미안하긴요,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요!"소동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난 엄마의 사랑만 있으면 돼요.""엄마는 당연히 우리 소동이를 사랑하지, 네가 엄마의 가장 귀한 딸인데."소동을 달래고 있는 진연의 눈에는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난 평생 소희가 내 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거야!"진연의 품에 얼굴을 묻힌 소동의 눈빛은 얼음장마냥 차가웠다. 그러면서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나 반드시 언니보다 더 훌륭해져 엄마가 사람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드릴 거예요.""응, 엄마는 널 믿어!"소동은 여전히 마민영의 개인 디자이너 신분으로 제작팀에 남았다. 그리고 또 방심하여 욕먹기라도 할까 봐 열심히 대본을 읽어보고 인물성격을 분석하며 마민영의 의상을 코디했다.마민영도 이 감독에게 욕을 먹은 후 많이 착실해졌다. 적어도 매일 출근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졌고 의상 방면에 있어서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금요일,허홍연이 드디어 퇴원할 수 있게 되어 청아는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가서 퇴원 수속을 했다.그러다 하 의사가 사인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 청아는 그의 사무실에서 잠시
"그동안 매일 얼굴을 봐오면서 난 청아 씨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예전에 내가 단지 일과 책임감 때문에 출근한 거라면 청아 씨를 알게 된 후로부터는 매일 기대감을 안고 출근했어요."하 의사가 진지하게 청아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청아 씨의 상황은 내가 잘 알고 있지만, 나의 상황에 대해서는 청아 씨가 아직 잘 모를 겁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행정 기관에서 근무하시다 지금은 이미 퇴직하셨어요. 난 올해 서른 살로 여자 친구는 한 명만 만났었고, 2년 전에 깨끗하게 헤어졌어요. 그리고 내 명의로 된 집 한 채와 400만 원짜리 차 한 대가 있고요, 평소에 출근하는 것 외에 운동도 좋아하고, 약간의 결벽증도 있어요. 그 외엔 다른 안 좋은 나쁜 취미는 없......""하 선생님!"청아가 놀라서 하 의사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하 선생님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당연하죠. 서로에 대해 알아야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내가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노력할게요, 난 우리가 엄청 잘 맞다고 생각해요."청아는 한참 침묵하고 나서야 하 의사의 말을 소화하고 다소 황당함을 느껴 말했다."아니요, 하 선생님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나의 가정도, 나의 과거도 전부 다.""무슨 과거가 있는데요?""저에겐 도박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있어요. 비록 이미 사라진 지 3년이 되었지만,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시한폭탄 같은 존재라고요. 그리고 저에겐 딸이 있어요."하 의사가 듣더니 순간 멍해져 한참 후에야 놀라서 입을 열었다."결, 결혼했어요?""아니요."결혼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있다는 건, 하 의사도 당연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그는 깨끗한 기질을 풍기고 있는 여인이 의외로 혼전임신을 하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크게 충격을 받은 하 의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이의 아빠는요?""이미 헤어졌어요.""멍청하네요. 헤어졌는
병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청아가 낸 기척에 놀라 문 쪽을 쳐다보았고, 청아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장시원을 바라보았다."왜 왔어요?"우강남이 듣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청아야, 오늘 엄마 퇴원하신다고 장 대표님께서 호의로 도우러 오신 건데, 너 그게 무슨 태도야?"이에 청아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되찾고는 우강남에게 물었다."오빠 오늘 출근 안 해요?""오늘 엄마 퇴원하시잖아, 그래서 휴가를 냈어."우강남이 웃으며 말했다."마저 못한 수속이 있으면 내가 갈게, 넌 장 대표님과 잠시 이야기 나누고 있어.""이미 다 끝냈어요!"죽어도 장시원과 단독으로 있고 싶지 않은 청아가 우강남의 말에 바로 거절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태도에 장시원의 눈동자에는 순간 어두운 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곧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가시죠."장시원을 유독 소외하고 차갑게 대하는 청아의 태도에 우강남이 마침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장시원이 먼저 화제를 돌려주는 덕분에 그도 재빨리 청아더러 물건을 잘 정리하라고 했다.그렇게 허홍연이 옷을 갈아입고 물건도 전부 정리한 후 몇 사람은 병실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때 병실의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하 의사가 들어왔다.그는 허홍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퇴원하신 걸 축하합니다.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하세요."청아는 하 의사를 보자마자 어색함이 밀려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옆에서 예리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보던 장시원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이건 또 뭔 표정이지?’‘부끄러워하는 건가?’‘허!’허홍연이 바삐 웃으며 대답했다."네, 그동안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고맙긴요."하 의사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청아를 바라보았다."재진 하는 날, 청아 씨가 같이 왔으면 좋겠네요."청아가 놀라 하 의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뭐라 말하기도 불편하고 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이에
소희가 메시지를 보낸 지 3초 만에 임구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차 안에서 소희는 깜빡거리는 전화 화면을 잠시 응시했다. 남궁민이 불편해할까 싶어 임구택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되어 잠깐 망설이다 전화를 끊고,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문자로 해.][왜 전화 끊었어? 그 사람은 왜 왔어?]소희는 첫 질문은 넘기고 대답했다.[아마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온 것 같아.][그런데 왜 굳이 그 사람한테 밥까지 사?][손님이니까 예의를 지켜야지.]그러자 구택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그럼 어디로 가는지 주소 보내.]소희는 예정된 식당 주소를 보냈다. 그 사이 앞좌석에서는 심명과 남궁민이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고, 소희는 눈을 감아버렸다.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소희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구택을 발견했다. 그는 날렵하고 우아한 맞춤 정장을 입고, 시계를 확인하다가 휴대폰을 꺼내 소희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심명도 구택을 발견하곤 얼굴을 찌푸리며 소희에게 물었다.“왜 임구택까지 불렀어?”소희가 대답했다.“구택도 남궁민을 알아.”심명은 불편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며 가려고 했다. 그때 남궁민이 비웃으며 말했다.“뭐죠? 얼굴 보기도 전에 도망가려는 건가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자를 남에게 뺏긴 거죠.”소희는 남궁민을 향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무슨 말이야?”심명은 얼굴이 굳어지며 남궁민에게 한 대 더 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다가 소희의 물음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 임구택이 왔으면 잘됐네. 나도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겠군.”구택은 이미 소희를 보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소희의 손을 먼저 잡은 뒤 남궁민과 심명을 번갈아 보았다. 이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은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남궁민이 입을 열기 전, 소희가 먼저 소개했다.“내 남자친구, 임구택.”남궁민은 이미 이디야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손을 내밀며 태연하게 말했다.“사장님, 반가
“남궁민은 어디 있어?” 소희가 물었다. 심명이 옆으로 비켜서자, 소희는 소파에 다리와 팔이 묶인 채 앉아 있는 남궁민을 보게 되었다.둘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소희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남궁민은 반가움에 찬 얼굴로 말했다.“소희, 드디어 다시 만났네!”소희는 다가가 직접 그의 묶인 끈을 풀어주며 물었다.“여긴 어쩐 일로 왔어?”남궁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는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당신을 보러 왔지!심명은 이 광경에 속이 뒤틀리는 것처럼 불편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말하려면 제대로 해. 그 지독한 표정은 뭐야? 나도 아직 여기 있거든.”남궁민은 심명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오직 소희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사실 예전부터 찾아오고 싶었어. 그런데 한동안 강시언의 일을 돕느라 조금 늦었거든.”소희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설마 새해에 그 메시지 보낸 게 당신이었어?”남궁민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나야!”소희는 살짝 웃으며 물었다.“지금 어디서 묵고 있는데?”“호텔에 있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그럼 점심은 내가 대접할게.”“좋지!” 남궁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사는 곳이니, 네가 주인이지.”그때 심명이 갑자기 끼어들며 소희에게 애교 섞인 불만을 표했다.“나도 같이 갈래! 그런데 왜 나한텐 밥 사준다고 안 해?”남궁민이 비웃으며 말했다.“여긴 네 구역이라며. 자기 땅에서 뭘 또 사달라고 하는 거야?”“우리 둘 사이에 당신이 끼어들 일 아니거든요!” 심명은 이를 악물자, 소희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둘 다 그만 좀 해. 점심은 내가 두 사람 다 대접할 테니까.”두 사람은 동시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서로를 한 번 흘겨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점심시간이 다가와 세 사람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소희는 차를 가져왔고, 남궁민은 아까까지 묶여 있었기에 당연히 소희의 차에 탔다. 그는 앞좌석 문을 열
소희는 놀란 듯 말했다.[남궁민? 어디 있어?]“지금 내 곁에 있어. 네가 오랫동안 미행을 당하는 걸 보고 그를 데려왔어.”“그자가 혹시라도 너를 괴롭히는 거라면, 내가 당장 그를 돌려보내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심명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소희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주소 좀 보내줘. 내가 곧 갈 테니까 그 사람한테 손대지 마.]“알았어!” 심명은 기쁘게 대답한 뒤, 덧붙였다.“운전 조심하고 서두르지 마.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소희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심명은 소희와 곧 만나게 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즉시 주소를 보냈다. 그러자 남궁민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심명을 쳐다보았다.“이제 내가 소희의 친구라는 걸 알았으니, 얼른 나 좀 풀어줄래요?”심명은 남궁민이 자신을 소희의 전 남자친구라 소개한 이후로 불편함이 가득했기에, 냉소하며 말했다.“소희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뭘 그렇게 서두르나요? 얌전히 기다려요.”남궁민은 손이 뒤로 묶여 있었지만, 다리는 자유로워 스스로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는 심명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소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심명은 남궁민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소희랑 어떻게 알게 된 사이에요?”남궁민은 손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얼굴로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무시하듯 말했다.“내가 왜 대답해야 하죠?”심명은 냉소하며 말했다.“그럼 내가 소희가 오기 전에 널 영영 소희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릴 권리도 있다는 거 잊지 마요.”남궁민은 심명이 실제로 그렇게 할 사람이라는 걸 알고,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우린 꽤 오래된 친구예요.”“꽤 오래됐다고요? 그럼 내가 소희를 만난 시기보다 더 이른 시절이라는 건가요?”“당연히 그렇죠!” 남궁민은 소희와의 만남을 자랑스럽게 회상하며 말했다.“그때 소희가 나한테 총을 건네줬거든요.”심명은 비웃으며 말했다.“자기 보호도 못 하는 주제에 전장에 나간 걸 자랑이라고 해요?”“난 그래서 그 생사를 함께한 친
남궁민은 코웃음을 치며 느긋하게 말했다.“나랑 소희의 관계? 나는 소희의 전 남친이자, 생사를 함께한 친구...”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명은 벌떡 일어나 그의 얼굴을 위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당신의 소희의 뭐라고요? 방금 잘 못 들었으니까 다시 말해봐요.”남궁민이 태연하게 말했다.“나는 소희의 전...”퍽! 심명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꽂혔다. 심명의 매력적인 눈매는 분노로 붉게 물들었고, 섬뜩하고 냉혹한 기운이 감돌았다.“내가 아는 한, 소희에게 전 남자친구가 있다면 그건 나뿐이에요. 감히 나의 소희를 핑계 삼으려고 하다니, 죽여서 내쫓아버릴 줄 알아요!”남궁민은 입가에 상처가 생겨 피가 맺혔다. 이를 악물고 심명을 노려보며 말했다.“여기도 법과 인권이 있는 나라니 조심해요. 내가 당신을 고소할 거니까. 아니, 지금 내 인신 자유를 불법으로 제한하고 있으니 꼭 법적 조치를 취할 거예요!”심명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이곳은 내 구역인데, 당신이 뭘 하든 내가 겁낼 줄 알아요?”그리고 옆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데려가서 실컷 두들겨 패. 사실대로 말할 때까지 계속.”남궁민은 심명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난 진짜로 서희를 알아요. 그래서 C 국까지 찾아온 거라고요!”심명은 남궁민이 서희라는 이름을 말하는 걸 듣고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며 경계심이 더해졌다.“찾으러 온 이유가 뭐죠?”남궁민은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말했잖아요. 우리는 친구이자, 생사를 함께한 사이라고.”“생사를 함께 했다고요?” 심명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당신이 우리 소희를 구한 적이라도 있다는 건가요?”“서희가 날 구했죠.” 남궁민은 자부심이 서린 표정으로 답했다.“또한 우린 함께 싸운 적도 있다고.”심명은 소희의 과거에 대해 일부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약간의 신빙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남자가 여자에게 구원받았다니, 정말 큰 은혜를 입었네.”남궁민은 심명의 비꼬는
지엠 본사 아래 주차장에 도착한 소희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몇 대 떨어진 곳에 파란색 페라리가 멈춰 서더니, 연한 파란색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가 소희 쪽을 바라보며 걸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남자는 몸을 돌릴 겨를도 없이 목덜미에 통증을 느끼며 눈앞이 깜깜해졌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곧이어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다가와 검은색 롤스로이스로 끌고 가 태웠고, 차는 신속히 사라졌다.소희는 차 뒤쪽을 돌아가며 누가 자신을 미행했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페라리가 주차된 자리까지 가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의 주인 역시 사라진 상태였다.소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자신이 오해했나 싶었다. 그저 우연히 그곳에 주차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떠나버린 걸까?더 이상 찾을 수 없자, 소희는 신경을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화영을 만나러 갔다.화영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화영은 회의 중이었다. 소희는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며 기다렸다.약 30분 후, 화영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소희는 소파에 기대어 쿠션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소희는 소리에 금세 눈을 떴다. 화영인 걸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잠을 깨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영은 소희에게 커피 한 잔을 준비해 건네주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자 화영은 소희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웃으며 말했다.“며칠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구택 사장님이 자제를 좀 하셔야겠어.”소희는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눈가에 핀 연한 홍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물었다.“설탕 넣었지?”“넣었어. 세상에, King이 달콤한 걸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화영이 웃저, 소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먼저 마시고, 다 마시면 드레스 피팅하러 가자.” 화영이 말에, 소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투덜댔
결혼식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원래라면 소희는 지금쯤 운성으로 돌아가야 했고, 결혼 전까지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소희는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직접 할아버지께 말씀드려.”구택은 낮게 웃으며 끝없이 소희의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좋아, 내가 말할게. 할아버지도 분명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실 거야.”소희는 침대에 눕자 이불을 뒤집어쓰며 몸을 말아 올렸다. 손을 뻗어 불을 끄고는 말했다.“너무 졸려, 이제 자자!”구택은 욕실 가운을 벗어 이불을 젖히고 들어가 소희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입맞춤을 남겼다.“분명 아까까지는 아주 생기 넘치더니.”“조금 자제해주면 안 돼?” 소희는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 구택은 그녀의 목선을 따라 올라가 귀밑을 가볍게 입 맞추며 말했다.“곧 운성으로 돌아가잖아. 우리 사흘 동안 못 보겠는걸.”“나흘이야!” 소희는 구택을 바로잡았다.“나흘도 길지. 내가 혼자 이 침대를 지키며 네가 없는 네 밤을 보내야 한다니.” 구택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고 매혹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소희의 귀 뒤에 자극적인 입맞춤을 남겼다.소희는 귀 뒤의 예민한 피부가 붉게 물들며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과 마음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그 결과, 다음 날 아침 소희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구택은 원래 그녀와 함께 출근하고 싶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어제 얻었으니, 오늘은 양보해야지. 나 혼자 출근할 수밖에.”소희는 그의 애처로운 투정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구택을 보았다.“얼른 출근해. 저녁에 내가 데리러 갈게.”“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아침 꼭 챙겨 먹고, 나갈 때는 연락해.” 구택이 당부했다.“알겠어!”구택은 소희의 뺨에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소희는 열 시까지 푹 자고 아침을 먹은 후 구택
그날 밤, 어정.임구택이 샤워하는 동안 소희는 발코니의 소파에 기대어 성연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소희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가 묻어 있었고, 눈매는 지쳐 보였다. 연희는 결혼식 날 구택이 신부를 맞이하러 올 때 어떻게 혼내줄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신나게 설명하고 있었다.[아, 맞다. 소희야, 지씨 가문의 일 들었어?] 연희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고, 졸음이 밀려오던 소희는 흐릿하게 대답했다.“지씨 가문? 무슨 일이야?”[지씨 가문의 어르신이 돌아가시자마자 엄청난 권력 다툼이 일어났대. 결국 지승현이 이겼다고 하더라.][다들 상상도 못 했지. 지씨 가문에서 내쫓겼던 할머니가 이런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을 줄은 말이야!] 연희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사실 나도 아심이 때문에 지씨 가문에 관심을 두게 됐어. 그동안 유언장 때문에 아심이가 지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거든.][나도 그녀를 도울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 집 할머니가 몰래 주식을 매입한 사실이 알려지자 지씨 가문 사람들도 아심이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어.]아심 이야기가 나오자 소희는 금세 정신이 들었고, 성연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눈빛에는 생각에 잠긴 기색이 더해졌다.연희가 덧붙였다.[지승현은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정말 냉정한 사람인 것 같아.][이틀 만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측 사람들을 많이 내쫓았다는 소문이 돌더라고. 이런 성격을 가진 지승현이니, 지씨 가문의 사람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지.][그래서 아심이가 손해를 보지 않을까 좀 걱정돼.]소희는 마음이 복잡해져 연희와 몇 마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구택이 다가와 소희의 옆에 앉으며 방금 말리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아까는 졸린다며?”소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뭔데?” 구택은 욕실 가운을 반쯤 열어젖히고 다가왔고, 그로 인해 은은한 차가운 향과 함께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승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할머니의 마음이야. 그리고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기도 해.”아심이 대답했다.“할머니의 마음은 손자며느리에게, 지씨 가문의 일원에게 주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받을 수 없어. 네가 가지고 있다가, 미래의 아내에게 전해줘.”“아심아...” 승현은 여전히 아심을 설득하고 싶어 하자, 아심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넌 날 잘 안다고 했잖아. 그러니 더는 설득하지 마.”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아심아, 굳이 모든 관계를 이렇게 명확히 나눌 필요는 없잖아.”“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때로는 친구 사이에도 서로 조금씩 빚지며 관계가 깊어지기도 하는 거야.”아심은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볼게.”승현은 아심의 진지한 표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져 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더 큰 아쉬움도 느껴졌다.“아심아, 앞으로 우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물론이지.” 아심은 미소 지었다.“설마 나에게 원망이 남아서, 선을 긋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당연히 그럴 리 없지!” 승현은 즉시 대답했다.“난 네게 오직 고마운 마음뿐이야.”그리고 아쉬움도 함께.“그럼 됐네.”이때 직원이 음식을 가져와 두 사람은 대화를 잠시 멈췄다. 아심은 숟가락을 들어 웃으며 말했다.“일단 식사하자. 며칠 동안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 오래야.”승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그렇게 고생해? 돈이야 끝없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닌데.”“고생하는 이유가 꼭 돈 때문만은 아니야.” 아심은 해산물 수프를 한 모금 마시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한 번 바빠지면 그냥 멈추기 싫어지거든.”승현은 걱정스럽게 말했다.“그래도 건강은 챙겨야 해. 의사도 그렇게 당부했잖아.”“알겠어.”두 사람은 가볍게 일상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승현
아심은 표정 변함없이 물을 따라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눈치챘어?”승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말했다.“응. 원래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피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했어.”그는 아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 내 개인 계좌에 정아현 씨가 보낸 돈이 들어왔더라. 그래서 아현 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어.”“아현 씨가 그러더라고. 네가 부탁한 거라고, 네가 소개해 준 고객에 대한 커미션이라고 말이야.”“그 순간 모든 게 이해됐어.”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너는 정말로 남에게 빚지지 않으려는 사람이구나. 내게 여자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한 것도, 내가 병원에서 서명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지?”“그리고, 그때 이미 할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내 곁에 있어 주며 힘든 시기를 함께해준 거고.”“또한 예전에 네가 아플 때 내가 곁을 지켜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고.”“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너는 일부러 강성을 떠났지.”“혹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을까 봐,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더라도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아심은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 나도 아쉬워.”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넌 매일 할머니와 통화했잖아. 할머니는 정말 기뻐하셨고, 가시는 길도 평온하셨어.”“그렇다면 다행이네.”아심은 승현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별할 때 얽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승현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심아, 정말로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아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사실 중간에 너와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해 볼까 생각도 했어. 하지만 미안해, 그건 내겐 무리였어.”승현이 물었다.“그 사람 때문이야?”아심은 솔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래.”승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