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처음부터 저 사람을 가만둘 생각이 없었어. 게다가 시원 오빠가 이미 저 사람을 때리기도 했고.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밖에 나가서 기다려."임구택의 얼굴색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나에게 누를 끼칠까 봐?"소희가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고 임구택을 노려보았다.이에 임구택이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결국 타협했다."알았어, 다시는 손대지 않을 게."일찍 임구택이 양소걸을 걷어차려는 순간에 바로 요요를 안고 몸을 돌린 장시원이 뒤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날뛰고 있는 여인의 목소리에 증오감이 묻은 눈빛으로 여인을 흘겨보았다.그러고는 요요가 놀랄까 봐 계속 요요를 달랬다.겨우 부축되어 의자에 앉은 양소걸은 한참이 지나서야 드디어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얼굴색은 여전히 파랗게 질려있었다.그의 아내는 여전히 경찰에게 즉시 임구택을 잡으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이에 경찰들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사실 그들은 오늘 처음으로 양씨 가족을 경찰서까지 데리고 온 게 아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양씨 가족은 이미 여러 번이나 이웃과 말다툼이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경찰에 신고해 그들도 양씨 가족을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다.이때 소대장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양 부인, 일단 진정하시고요. 영상을 확인해 본 결과 확실히 그쪽 아드님이 먼저 여자아이를 밀치는 바람에 아이가 하마터면 미끄럼틀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잖아요. 그런데 두 분이 사과하기는커녕 욕설까지 퍼부었으니 두 분의 잘못이 큰 건 사실입니다.""잘못이 크긴 뭐가 커? 아이들끼리 놀면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저 년은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아이한테 화를 냈잖아! 염치 있는 거야 없는 거야?"양 부인이 손가락으로 소희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임구택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무의식 중에 손을 움츠렸다.경찰이 듣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CCTV 영상으로 보아서는 소희 씨의 태도가 엄청 예의 발랐습니다. 오히려 양 부인이 시비도리를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소희 씨를
이때 갑자기 양소걸의 휴대폰이 울렸다. 수신 번호를 한 번 확인하고 전화를 받은 그의 얼굴에는 즉시 아부의 뜻이 묻은 웃음이 피어올랐다."방 대표님, 오셨습니까? 부소장님이랑 같이 오고 계신다고요? 네, 네, 네! 저 지금 경찰서 안에 있습니다. 네, 정말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그렇게 한참 아부를 떨다 전화를 끊은 후, 양소걸이 더욱 오만방자해져서는 소희 그들을 보며 말했다."너희들 오늘 다 죽었어!"그리고 그러는 양소걸의 모습에 소희가 낮은 소리로 장시원에게 물었다."화원 그룹이 엄청 대단한 건가요?"하지만 소희의 물음에 장시원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기만 했다."아마도?""직원이 저러니 전체 그룹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소희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내뱉은 소리에 줄곧 소희의 뒤에 서 있던 임구택이 갑자기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장시원을 바라보았다.이에 영문을 모르는 소희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임구택을 쳐다보며 물었다."왜 웃어?"임구택이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었다."미안, 안 웃을게."*경원주택단지장을 다 보고 주택단지에 들어선 이씨 아주머니는 한 곳에 모여 수군덕거리고 있는 인파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중 평소에 유독 가깝게 지내던 허씨 아주머니가 황급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왜 이제야 오는 거야? 자기 집 아이한테 큰일이 났어."이씨 아주머니가 듣더니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요 엄마와 양 부인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거든, 서로 때리기까지 했는걸. 그래서 모두 경찰서에 잡혀갔어."청아가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가 저녁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탓에 평소엔 늘 소희가 요요를 데리고 놀이터로 나와 놀곤 했다. 그래서 다들 당연히 소희가 요요의 엄마인 줄로 알고 있었다.허씨 아주머니의 말에 깜짝 놀란 이씨 아주머니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 청아에게 연락을 했다."요
"방 대표님?"방 대표의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에 양소걸이 어리둥절해져 입을 열었다.그러자 방 대표가 바로 양소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너 눈을 뒀다 어디에다 쓰는 거야? 그룹 대표님도 못 알아보고!""... 대표님이라니요?"양소걸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이때 마침 임구택을 알고 있었던 부소장이 웃으며 임구택을 향해 물었다."임 대표님은 무슨 일로 오셨죠?""제 애인이 억울하게 욕설을 들은 입장인데 경찰서에 잡혀왔다고 해서 와본 겁니다."임구택이 소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임구택의 동장에 소희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밀어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결국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부소장이 듣더니 바로 옆에 있는 경찰에게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야?"잠시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대반전에 소대장은 속으로 오히려 기뻐했다, 다행히도 방금 임구택 그들에게 엄한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바삐 사건의 경과를 두 사람에게 말해주었다.그리고 경과를 다 듣고 난 방 대표가 바로 양소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평소에 아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어린애가 마음이 어찌 그렇게 독할 수가 있어?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를 미끄럼틀에서 밀어버릴 생각까지 하다니! 소희 씨가 동작이 빨라 아이를 받아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여 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떻게 감당하려 그래!"양소걸은 고개를 숙인 채 식은땀만 뻘뻘 흘릴 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사실 그는 지금까지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시원이 내내 여자아이를 애지중지 안고 있어 당연히 장시원과 소희가 몰래 낳은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옆에 서 있는 임구택이 또 소희가 자신의 애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답을 알 수 없는 양소걸은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일이 어찌 되었건, 장시원과 임구택은 모두 그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그는 계열사의 일개 직원으로 그룹 본사
하지만 양소걸은 상처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즉시 장시원 앞으로 달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러고는 자책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장 대표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단지 제 아내가 아들이 얻어맞았다고,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강요해서 갔을 뿐입니다. 제가 만약 제 아들이 먼저 이 여자아이를 밀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저 분명 제 아들에게 야단쳤을 겁니다!""그래? 하지만 소희를 욕할 땐 아주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데?"장시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풍겨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양소걸로 하여금 무서워 벌벌 떨게 했다."제가 나쁜 놈입니다!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욕부터 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양소걸이 다시 한번 자신의 뺨을 때리며 사과했다. 그러나 장시원은 요요를 안고 몸을 돌린 채 전혀 양소걸의 사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양소걸은 어쩔 수 없이 또 방 대표에게로 가서 사정했다."방 대표님, 제발 뭐라도 말씀해 주세요! 저 회사의 핵심 직원이잖아요! 저를 한 번만 도와주세요!. "방 대표가 듣더니 눈살을 찌푸린 채 양소걸을 꾸짖었다."자네 핵심 직원인 건 맞지만 인품에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 자네 저 영상 속에서 날뛰는 꼴 좀 봐봐! 아주 하느님 머리 위에라도 올라 탈 기세잖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 정말 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저 그냥 제 아들이 맞았다고 해서 조급한 마음에 잘못을 저지른 거지 평소엔 절대 저런 모습이 아닙니다! 방 대표님, 장 대표님과 제 평소의 업적을 한 번 말해 봐요!"양소걸이 거듭 애원했다.하지만 방 대표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소희는 아까까지만 해도 발호하고 날뛰던 양소걸의 꼬리를 흔들며 애원하는 불쌍한 모습이 가소롭기만 했다.양소걸은 이번에 그녀와 장시원을 마주쳤기에 이렇게 순순이 잘못을 인정한 거지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었으면 무조건 물고 놓지 않은 채 죽도록 괴롭혔을 게 분명했다.이웃의 말에
소희가 전화를 끊고 빠른 걸음으로 청아에게 다가갔다."너 왜 왔어?""아주머니의 연락을 받고 왔지, 너와 요요가 경찰서로 끌려왔다 해서. 너 괜찮아? 요요는?"청아의 물음에 소희가 착잡한 눈빛으로 뒤에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장시원을 쳐다보았다."요요 저쪽에 있어."그리고 소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청아는 장시원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놀라 뒤로 물러섰다.장시원이 청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청아!"그러다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숙여 품속의 요요를 쳐다보았다. 순간 장시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요요가 너의 아이였어?"이때 마침 청아를 알아본 요요가 기뻐하며 소리쳤다."엄마!"하마터면 요요를 놓칠 뻔한 장시원의 얼굴색이 다시 한번 변했다.‘내가 왜 여태껏 그걸 생각 못한 거지?’‘요요의 이목구비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는데.’‘소희가 여러 번 나에게 요요가 친구의 아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소희의 성격으로는 친구가 몇 명 없잖아.’‘왜 그게 청아일 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아마도 청아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그런데 떠난 지 3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미 아이까지 낳았다니.’크게 놀란 건 청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요요를 안을 생각도 못하고 당황하여 소희를 쳐다보았다.이에 소희가 조용하게 고개를 흔들며 청아에게 눈짓을 했다, 장시원이 요요의 신분을 모른다고.청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평정심을 되찾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오래간만이네요, 장시원 씨."장시원의 눈동자에는 침통의 빛이 가득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청아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밀물마냥 밀려와 펼쳐졌다.장난 같았던 두 사람의 첫 만남, 그를 한바탕 때려 상처를 입힌 후 어정에서 함께 보냈던 하루하루들, 앨범과 성 모형이 담긴 상자를 안고 불쌍하게 울며 자신에겐 더는 집이 없다고 하소연하던 그날......모든 추억이 눈에 선해 그는 한순간도
‘아니면 속은 건가?’‘그래, 확실히 멍청한 부분이 있긴 했지.’‘하지만 결국 나에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는 거네? 안 그랬으면 그 당시 돈을 위해 나를 직접 허연의 침대에까지 보내지 않았을 거니까.’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장시원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그리고 그러는 장시원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임구택이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야유하는 표정을 지었다.그가 소희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을 때 제일 기뻐했던 장시원이 드디어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되었으니.역시 곧 있으면 자신과 똑같게 될 거라는 임구택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뒤좌석에 앉은 청아는 불안하여 내내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소희가 그녀에게 사건의 경과를 대충 말해주었다.요요도 깜찍하게 흉내를 내며 말했다."소희 이모 엄청 멋있었어요! 아저씨도 엄청 대단했고요! 이렇게 나쁜 사람을 걷어찼어요."짤막한 다리를 휘두르며 청아에게 장시원의 대단함을 과시하는 요요의 귀여운 모습에 소희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하지만 차 안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소희는 결국 웃지도 못하고 요요를 품에 안았다."무서웠어?""아니요!"요요의 깜찍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도 섞여있었다."아까 그 사람들 나쁜 사람이에요! 요요는 두렵지 않아요!""그래? 요요 참 용감하네."장시원은 요요의 앳되고 귀여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이 착잡했다. 그는 줄곧 요요를 자신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아이로 여기고 예뻐했는데, 우청아와 다른 남자가 낳은 아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쓸쓸하면서도 아팠다.경찰서가 동네와 멀지 않아 임구택의 차는 곧 경원주택단지에 도착했다.청아가 먼저 요요를 안고 차에서 내렸고 뒤따라 내린 장시원이 소희에게 말했다."얼른 올라가. 난 볼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아."장시원의 차가운 소리에 청아의 눈빛이 세게 한 번 떨렸다. 그러다 한참 후 장시원을 향해 말했다."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천만에."하지만 장시원은 소외감이 가득한 말투로 한마디를 내뱉고
장시원은 자동차 페달을 끝까지 밟은 채 시내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임구택의 차가 바짝 따르고 있었다.하지만 신호등에 걸리는 바람에 임구택은 결국 장시원의 차를 놓치게 되었고, 케이슬에 도착했을 땐 장시원은 이미 술을 두 병 가져다 놓고 마시고 있었다.침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장시원이 고개를 들어 임구택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왜 따라왔어? 초라해진 내 모습 구경하려고?"임구택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에게 술 한 잔을 따르며 담담하게 물었다."청아 씨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청아 씨가 결혼하든 아이를 낳든 너와 상관이 없는 일인데 네가 왜 초라해져?"임구택의 물음에 장시원이 잠깐 멍해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들이마셨다.‘내가 우청아를 좋아한다고?’‘아니, 난 우청아를 미워해야 하는 게 맞아.’임구택이 장시원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날 탓하는 거 아니지?""널 왜 탓해?""사실 나 요요가 청아 씨의 아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소희가 말하지 못하게 해서 여직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장시원이 듣더니 냉소했다."그래서 네 뜻은, 네 마음속에서 소희가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당연하지.""예전에 네가 소희 때문에 힘들어했을 때 내가 네 곁에 같이 있어줬다는 걸 잊지 마."장시원의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 임구택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내가 왔잖아."장시원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임구택을 대꾸하지도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만약 정말 청아 씨를 좋아하는 거라면 가서 고백해. 이렇게 혼자 울적하게 술을 마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니야.""그 말은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고 싶네."장시원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네가 틀렸어. 내가 왜 이혼도 하고 아이도 낳은 여자한테 고백해?""그래, 그럼 고백하지 마. 어차피 며칠만 더 지나면 청아 씨 어머니께서 퇴원할 거고, 그때가 되면 청
또래의 친구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사랑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권리를 요요에게서 박탈한 것 같아 죄책감뿐인 청아는 소리 없이 요요의 작은 머리통을 어루만지기만 했다.그렇게 한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수신번호를 확인한 청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긴장해져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져버렸다.번호를 저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닳도록 외워둔 번호라 받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휴대폰은 청아가 받을 때까지 계속 진동할 거라는 기세로 조용해질 줄 몰랐다.이에 청아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휴대폰 맞은편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조용하게 들려왔다."여보세요?"청아가 다시 소리를 내어 묻자 맞은편의 장시원이 그제야 한번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열었다.[언제 결혼한 거야?]장시원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정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리고 청아가 한참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장시원의 말투가 더욱 차가워졌다.[M국에 가자마자 남자친구를 사귄 거야?]청아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대답했다."네."[출국하자마자 진정한 사랑을 만났어?]장시원의 말투에 묻은 조롱의 뜻은 너무 뻔했다. 청아는 M국에 도착한 후 함께 집을 맡아 살았던 룸메와 룸메 남자친구의 일이 생각나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 한 명 없는 타향의 땅에서 서로 의지한 거죠, 뭐."장시원이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다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왜 헤어진 건데?]장시원의 물음에 청아는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이에 장시원의 숨소리가 갑자기 한 번 거칠어지더니 말투가 얼음장마냥 차가워졌다.[그 자식이 너를 버렸어? 두 사람이 낳은 아이조차도 싫다던? 우청아, 넌 어떻게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목 위에 달린 건 장식품이야?]청아는 여전히 입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는 청아의 태도에 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장시원은 계속 인정사정없이
강시언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최근에 내가 너의 양부모와 관련된 단서를 따라갔고, 너를 납치했던 사람을 찾아냈어.”“대략 1년 전에 체포되어 지금 감옥에 있어. 내가 사람을 보내 잘 돌봐주게 했지.”아심은 눈빛이 살짝 차가워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시언은 말을 이었다.“그리고 널 샀던 양부모도 지금 형편이 좋지 않아. 아들은 방탕한 삶을 살고,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여자 친구랑 함께 부모를 착취하고 있지.”“돈을 요구하며 부모를 때리고 욕하는 게 다반사야. 그래서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따로 손을 쓸 필요도 없었어.”아심은 담담히 말했다.“나는 그들에게 이미 마음을 비웠어요. 어차피 친부모도 아니었으니까요. 나를 사들였다가 다시 팔아버릴 수도 있는 사람들이죠.”“감정도 없으니 당연히 원망도 없어요.”“원망은 내가 해!”시언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거웠다.“그 사람들이 너를 때리고 욕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 받는 벌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아심의 마음은 순간 간질거렸다. 마치 개미가 기어오르는 듯한, 따뜻하면서도 저릿한 감각이 가슴 끝까지 퍼졌다. 그녀는 눈가가 살짝 물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들이 나를 팔았기에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로 그들을 원망하지 않아요.”시언은 팔을 들어 아심의 어깨를 감싸며 눈을 마주쳤다. 시언의 깊고 투명한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갑고도 또렷해졌다.“그날 도경수 할아버지가 네 몸에 있는 태어나는 반점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하지 않았잖아. 네 생각엔 뭐라고 답해야 할까?”시언은 끝음을 살짝 끌며, 자기 목소리에 특유의 저음과 자극적인 울림을 더했다. 빗소리에 묻힌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강렬히 두드렸다.이에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있는 그대로 대답하세요. 근데, 그럴 용기 있어요?”“내가 무서워서 못 한다고 생각해?”시언은 낮고 짧게 대꾸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아심의 정교한 턱을 잡아들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오븐 속 닭 날개는 이미 다 구워졌고, 끓던 국도 식어버렸다. 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는지, 부슬부슬한 빗소리가 고요한 분위기를 더욱 차분하게 만들고 있었다.강시언은 몸을 약간 일으켜 그녀의 옷을 입혀주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뒷정리할 테니, 너는 가서 샤워해. 씻고 나오면 바로 식사할 수 있을 거야.”강아심은 나른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움직이지 않고 대꾸했다.“내가 샤워 끝낼 때쯤 당신이 음식을 다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해요?”“딱 두 가지 요리랑 국 하나야. 충분하겠어?”시언이 묻자, 아심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점심에 외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음식이 많이 남아서, 그거 데워서 먹으면 돼요. 음식은 낭비하면 안 되니까.”“그래.”시언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아심을 조리대에서 내려주었지만, 아심은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싸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붉게 물든 눈가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못 걸을 것 같아요.”이에 시언은 낮게 웃으며 아심을 다시 들어 올려 주방에서 주방의 욕실로 데려갔다....두 사람이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되었다. 시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아심은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얇은 잠옷 차림의 그녀는 헝클어진 긴 머리를 어깨에 흘러내린 채 앉아 있었다. 밖에서 스며드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아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날렸고, 하얗고 가녀린 어깨가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났다.아심은 비를 바라보며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어두운 조명이 그녀의 부드럽고 가냘픈 라인을 더 강조했고, 그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을 주었다.시언은 그녀에게 다가가 같은 자세로 바닥에 앉았다.“야근은 좋은 핑계겠지만, 도도희 아주머니랑 도경수 할아버지가 모를 리 없지. 너, 집에 가기 싫은 거잖아.”아심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언의 깊고 투명한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에 아심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 말이 맞아요.
영상 속의 셰프는 유창하게 자국어를 구사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신은 미스터 강의 여자 친구인가요? 참고로 지금 종료해도 보수는 환불되지 않아요.]아심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알고 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좋아요. 그러면 이만!]셰프의 말을 끝으로 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상을 종료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강시언에게 물었다.“닭 날개를 굽고 싶으신 거예요?”“너 할 줄 알아?”“이미 양념까지 다 해두셨으니, 오븐에 넣고 온도와 시간을 맞추면 끝이예요.”시언은 접시에 담아둔 닭 날개를 그녀에게 건네자, 아심은 돌아서서 접시를 오븐에 넣으며 물었다.“어떻게 갑자기 요리를 배우고 싶으셨던 거예요?”시언은 다른 재료를 고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별거 아니야. 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밥상을 느껴보라고.”그 말에 아심은 순간 멈칫하며 오븐을 멍하니 바라봤다. 몇 초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타이머를 설정했다. 아심은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제가 뭐 도와줄까요?”시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가 내가 부른 셰프를 쫓아냈잖아. 네가 안 도우면 생닭을 먹겠다는 뜻인가?”아심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으며 도마 위에 놓인 토마토를 보며 물었다.“이건 뭐 만들려고요?”“약간의 토마토를 곁들인 소고기볶음.”아심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아직 걷는 법도 배우지 않았는데 벌써 달리려는 거예요?”시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지?”아심은 대답 대신 말했다.“그 요리는 오래 걸려요. 배가 고프니까 그냥 토마토는 생으로 먹어요.”시언은 물었다.“생으로? 그냥 먹으라고?”“상쾌하고 맛있어요.”아심은 토마토를 반으로 자른 뒤 한 조각을 손으로 집어 시언의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한번 먹어보고 생토마토 맛이 어떤지 확인해 보세요.”아심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눈가가 붉어진 채 가늘게 올라간 눈꼬리와 흐르는 듯한 시선으로 무의식적인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시언은
아심은 연희가 쏟아내는 말들을 들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기절하지 마, 그러다 네 남편이 걱정하실라.”[아심아, 내가 도경수 할아버지를 몇 년 동안 알아 왔는지 너 알아?]연희는 감탄하며 말했다.[우리가 친구였는데, 이제 넌 도경수 할아버지의 친손녀가 됐잖아!]아심은 연희의 목소리에서 그녀의 놀라움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나도 정말 많이 놀랐어.”[그렇지만 정말 축하할 일이야!]연희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정말 깜짝 놀랄 만 하면서도 기쁜 소식이야!]연희는 평소 양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재아가 도경수의 손녀가 아니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뻤다. 그런데, 아심이 도경수의 손녀라는 사실을 들었을 땐 말 그대로 두 배의 기쁨이었다.어젯밤, 연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노명성을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명성은 그녀가 임신이라도 한 줄 알고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고마워.”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연희야, 나도 네가 내 친구라는 게 너무 행복해.”[이제는 친구뿐만 아니라 가족이기도 하잖아!]연희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번 주말에 도경수 할아버지를 찾아뵈러 갈게. 축하도 드릴 겸.]“언제든지 환영해.”두 사람은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오후에 정아현이 다시 업무 보고를 하러 왔을 때는 이전과 달리 눈에 띄게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내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결국 입을 열었다.“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저,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사장님이 걱정돼서 그랬던 건데, 앞으로는 다시는 미스터 강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요!”아심은 담담히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남자 친구 생겼다면서요? 데이트하러 가요.”이에 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감사드려요, 사장님.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게요!”...아심이 퇴근할 때쯤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회사를 나설 땐 직원들마저 모두 퇴근해 그녀 혼자 남아 있었다.점심으로 받은 음
식사 중에 강시언이 물었다.“저녁에 또 약속 있어?”아심은 반쯤 내려간 눈길로 잠시 깜빡이며, 약간 죄책감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요즘 정말 바빠요.”“응.” 시언은 짧게 대답한 뒤 더는 묻지 않았다.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지만 각자 차를 타고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아심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녀는 정말 바빴다.정아현이 업무 보고를 하러 들어왔을 때, 아현은 무심코 아심에게 말했다.“내일 토요일인데, 권수영 여사님께서 댁에서 생일 파티를 연대요. 성대한 파티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꽤 많은 사람을 초대한 것 같아요.”“지승현 사장님도 아마 어머니 생일을 위해 집에 남아 있을 거고요. 어쩌면 권 여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며느리를 정하려고 할지도 몰라요.”아현은 슬쩍 아심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내일 생일 파티에 누가 참석하는지 제가 알아볼까요?”아심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약간 피곤한 듯 말했다.“아현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와 지승현은 이미 끝났어요. 앞으로도 절대 다시 이어질 일은 없으니까, 지씨 집안 일은 신경 쓰지 마요.”“그리고 지승현 앞에서 내 얘기를 일부러 꺼내지도 마세요.”아현은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장님, 그런데 미스터 강이 돌아와서 사장님을 찾으신 건 맞죠?”아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아현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그날 저녁, 그분이 회사로 오시는 걸 봤거든요.”아심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사장님, 그분과 다시 만나신 건가요?”아현의 질문에 아심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보고서를 읽으며 담담히 말했다.“아니야.”이에 아현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안 만나는 게 맞아요. 사장님,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마세요. 그 사람이 갑자기 돌아와선 찾아오고, 또 떠나서는 연락도 없는 게 말이 돼요?”“사장님을 뭐로 보고 그러는 건지, 정말 어이가 없네요.”아심의 얼굴은 갑자기
“잠이 안 온다면, 다른 걸 해도 괜찮아.”강시언이 말하자, 강아심은 잠시 침묵하더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여기 남아 있는 거예요? 대단한 진언님께서 굳이 소파에서 자는 걸 선택하시다니, 대체 왜요?”시언은 차가운 눈을 반쯤 내리며 담담히 대답했다.“비가 와서 못 가.”아심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시언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넌 뭐라고 생각했는데?”“저는...”아심은 손을 들어 시언의 셔츠 앞자락을 잡으며, 긴 속눈썹을 떨었다. 그의 어깨를 스치며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남으신 이유가, 내일 아침 제가 만든 샌드위치를 드시고 싶어서인 줄 알았어요.”“그 샌드위치, 꽤 맛있더라고.”“그러면 내일도 만들어 드릴게요.”“좋아.”아심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저 이제 피곤해요. 잘게요. 방해하지 마세요.”“자.”시언은 아심을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마치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했고, 천둥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두 사람이 꼭 껴안고 평온한 잠에 들었다.아심은 곧 잠들었지만, 시언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잠들기 전부터 그녀에게 자극받은 상태였고, 지금 아심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품 안에 있으니 더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얇은 실크 슬립 드레스 하나만 입은 아심은 곡선이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피부는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그랬기에 시언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약간의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막 잠들려는 순간, 아심이 시언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리고 아심의 손이 시언의 풀어진 셔츠 단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언은 즉시 정신이 번쩍 들며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강아심!”하지만 아심은 깊이 잠든 상태라 대답이 없었다.시언은 깊은숨을 내쉬며 아심의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아심은 무의식적으로 몸부
몇 번째인지 모를 천둥소리가 울리고 난 후, 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시언의 눈동자는 어둠보다 더 깊고 짙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아심의 옆얼굴에 뜨거운 입맞춤을 남겼다.아심은 허리띠를 푸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한 번 깜빡였고, 그러더니 시언의 품에서 일어나 뒤돌아보며 나른하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심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며 문을 닫고 잠갔다.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린 후, 아심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문에 기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은 뒤에야 셔츠를 정리하며 욕실로 향했다.거실.시언은 굳게 닫힌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항상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냉소와 무력감이 떠올랐다.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 손을 씻었다. 그가 다시 거실로 돌아오자,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메시지가 도착했다.시언은 화면을 확인한 뒤, 희미한 조명 속에서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아심이 또다시 시언에게 계좌이체를 한 것이었다.그러자 시언은 화가 나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메시지를 보내며 물었다.[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웠어?]잠시 후, 아심이 답장을 보냈다.[부디 돈을 받아줘요. 거래가 끝났으니, 다음번에도 잘 협력할 수 있겠죠?]아심은 막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밖에서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가를 살짝 올렸다. 그러나 시언은 더 이상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아심은 그가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직접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 아심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기획서를 읽고, 도도희와 통화를 한 뒤, 피곤함에 이끌려 잠이 들었다.천둥소리는 계속 이어졌지만, 아심은 매우 깊이 잠들었다.한밤중.어느덧 새벽 두 시가 되었다.천둥소리에 잠이 깬 아심은 시간을 확인한 뒤 잠시 고민하다가, 이불을 챙겨 침대에서 내
[그럼 내가 방해하지 않을게. 일이 끝나면 꼭 집에 오렴.]도경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하자 아심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뒤, 아심은 도경수의 번호를 저장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일에 몰두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도경수가 했던 한 글자가 맴돌았다.집, 아심에게도 이제 집이 생겼다.잠시 후, 도씨 집안에서 보낸 점심이 도착했다. 5단으로 된 보온 도시락에는 네 가지 반찬과 한 가지 국이 담겨 있었다.모두 어제 아심이 식사 중에 유독 많이 먹었던 요리들이었다. 도경수는 아심의 입맛을 기억한 것이다. 아심은 마음속 깊이 따뜻함이 밀려들었고, 가족이라는 존재가 점점 더 가깝게 느껴졌다.오후에는 도도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저녁에 비가 올 테니 우산을 준비하고, 약속이 끝나면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전화를 끊고 난 뒤, 아심은 휴대전화를 쥐고 갑자기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저녁 8시쯤, 아심은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었고, 강시언이 소파에 앉아 책을 들고 느긋하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이에 아심은 그에게 다가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남의 집에 들어오실 때는 원래 이렇게 허락도 안 구하시나요?”“남의 집?”시언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차갑게 내리는 비가 어우러진 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맑은 옥처럼 울렸다. 아심은 시언의 맞은편 테이블 위에 앉았다.따뜻한 조명 아래, 아심의 아름다운 이목구비에는 약간의 나른함과 여유가 섞여 있었다.“저는 이제 당신의 넘버 세븐이 아니예요.”시언은 손을 들어 아심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살짝 당기며 자기 무릎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내 넘버 세븐이 아니더라도, 넌 내 재희야.”이에 아심은 매혹적인 눈빛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 재희가 당신의 것이죠?”시언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도도희가 말했다.“집으로 가져올 짐이 있으면 내가 같이 가서 챙길게.”강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제가 혼자 해도 돼요. 짐이 많지 않거든요.”도경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일이 끝나면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너랑 상의할 일이 있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그러자 양재아가 말을 받으며 웃었다.“아심이 집에 오면 내 옆방에서 지내면 어때? 우리 같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도도희는 잔잔히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내가 이미 내 옆방을 정리해 두었어요. 재희와 좀 더 가까이 있고 싶거든요.”그 말에 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것도 괜찮네요.”아침 식사가 끝난 뒤, 강시언은 아심을 회사까지 데려다주었고, 도경수는 끝까지 마당 문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재아는 도씨 집안의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도경수가 시언의 차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차가운 기운이 들었다.‘역시 친자식은 다르구나.’ 재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내가 몇 달 동안 도씨 집안에서 도경수를 모셨는데도, 강아심이 하루 있는 것만 못하네.’“가요, 늦겠어요.”재아는 시선을 거두며 운전사에게 말했다....시언은 앞을 응시한 채 운전하며 물었다.“저녁에 정말 약속이 있는 거야?”아심은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떨어져 따뜻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이예요.”그러자 시언은 그녀를 힐끔 보며 말없이 운전했고, 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녁에 제가 운전해서 갈 테니 굳이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그래.” 시언은 담담히 대답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심은 가벼운 질문을 하였다.“강재석 할아버지랑 언제 강성으로 돌아가세요?”시언이 물었다.“왜 그러는데?”“그냥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아심은 잠시 멈추었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강재석 할아버지가 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