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갈 거야?""가긴 뭘 가? 재밌는 연극이 막 시작되었는데, 보고 싶지 않아?"여민의 물음에 이현이 소파에 앉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당연히 봐야지!"여민이 감격에 겨워 이현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었다."전에 저 방안에 카메라를 달았어야 했는데, 생방송을 볼 수 있게."이에 이현이 웃으며 대답했다."현장에서 들어도 똑같잖아."그런데 이때, 이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누군가가 방 문을 세게 걷어찼다. 그리고 웅장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고, 뒤에는 명우와 명빈 등이 따르고 있었다.이현의 웃음이 순간 굳어지더니 바로 놀라서 일어섰다."임 대표님!"임구택이 가늘게 뜬 눈으로 방안을 훑어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소희는?"이현이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소희 씨는 여기에 없어요!"임구택이 작은 방의 문을 한눈에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이현이 막으려 했지만 명우가 먼저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가만히 계시죠."임구택이 힘껏 문을 당겼다. 그리고 방안의 장면을 본 그의 안색은 순간 얼음판마냥 차가워졌다.어두컴컴한 방 안에 이정남은 머리가 깨진 채 한쪽에 쓰러져 있었고 류 조감독은 소희의 옷깃을 잡은 채 침대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소희는 아직 조금 남아있는 이성과 힘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상의 단추는 뜯겨져 하얀 어깨와 속옷 어깨끈이 드러났다.그리고 소희의 손에 들린 작은 총은 류 조감독의 명치를 조준하고 있었다.그러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희와 류 조감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눈에 핏줄이 퍼진 소희는 순간 손에 힘을 풀었다. 손에 들린 총이 ‘펑’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1초만 더 늦었더라면 그녀는 이미 류 조감독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다.마음속에 억압된 두려움은 철저히 분노로 변했다. 임구택은 차가운 눈빛으로 다가가 류 조감독의 목을 잡고 그를 들어 올렸다. 얼굴에는 살육의 포악함이 묻어났다.방안에 남아 있는 연기를 조금 빨아들인 류 조감독의 얼굴은
이현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뭐 하는 거야! 임구택!""임구택, 돌아와!"하지만 임구택은 소희를 안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명우가 부하를 향해 손짓을 하자 부하가 바로 여민과 이현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인차 여민의 몸에서 투명한 작은 주머니를 찾아냈다. 주머니 속에는 흰색의 가루가 들어있었다.명빈이 술 세 잔을 따른 후 주머니 속의 가루를 술에 부었다. 그리고 술잔을 앞으로 밀었다.그는 임씨 가문의 모든 부두 장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왕래하는 손님들 중에는 점잖고 예의 바른 신사와 부유한 상인이 있는가 하면 교활한 건달 해비들도 있었다. 이상한 사람들을 다 만나보고 이상한 일들을 다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명빈은 이현과 여민의 모욕과 구걸에 얼굴색 한 번 번하지 않았다. 술잔을 앞으로 밀어주는 모습마저 음료수를 밀어주는 것 마냥 덤덤하고 차가웠다.그의 부하들이 술 한 잔씩 들고 이현, 여민 그리고 작은 방안의 류 조감독을 향해 걸어갔다.동시에 안에 있는 이정남을 데리고 나왔다.명빈이 술을 따른 순간부터 이현은 무언가를 깨닫고 필사적으로 후퇴했다. 공포심은 순간 극에 달했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안 돼, 난 싫어!""임구택은 너희들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을 거야!""안 돼!"이현과 여민 두 사람은 두려움에 발버둥 쳤지만 아무런 반항의 여지도 없이 술 한 잔을 강박적으로 들이켰다."콜록콜록!"이현은 소파에 쓰러진 채 격렬히 기침을 했다. 몸은 끊임없이 떨고 있었고 마음속의 공포는 갈수록 커졌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류 조감독에게 술을 먹이러 간 부하가 돌아와 명빈에게 총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땅에서 주운 겁니다. 소희 씨의 것인 것 같습니다."명빈이 총을 보고 잠깐 멍해 있더니 의미심장하게 명우에게 건네주었다.일반 것보다는 짧지만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진 총을 알아본 명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대표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명빈
순간 임구택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2년 동안 밤낮으로 그렸던 여인이 옷 반쯤 벗겨지고 눈동자에 야릇한 빛을 띤 채 그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는데,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임구택은 소희를 품에 꼭 안은 채 용솟음치는 정서를 애써 누르고 고개를 들어 분부했다."다음 길목에서 돌아 어정으로 가.""네!"임구택은 어쩔 수 없이 소희를 힘껏 품 속에 짓누르고 옷을 다시 잘 입혀 주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조급해하지 마, 자기야. 조금만 더 기다려."소희는 임구택의 가슴팍에 엎드린 채 그의 옷깃을 힘껏 잡고 목이 쉰 소리를 냈다."임구택, 나 너무 괴로워.""알아."임구택의 눈동자는 밤하늘처럼 어두웠다. 그는 넓은 손바닥으로 소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음 같았으면 소희를 대신해 그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아니, 당신은 몰라!"소희가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당신 분명 나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지자고 했잖아.""나 시력을 잃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난 전혀 어둠이 두렵지 않았어. 반대로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 거 같아서 너무 슬펐지.""그래서 당신한테 연락을 했는데, 당신은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가라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그러다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지.""당신 정말 미워!"목이 멘 채 중얼거리고 있는 소희의 소리에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는 임구택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나 소희의 얼굴을 들어 자신에게 붙였다."미안해.""소희야, 미안해!"그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키스했다. 미간에서부터 눈가로, 열정적이면서도 다정스럽게."한번 만 기회를 줘, 내가 다 보상할게."*차가 어정에서 멈추자 임구택이 양복으로 소녀를 감싸고 위층으로 걸어갔다.2년 동안 비어 있던 방이었지만 전혀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펫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소파에는 소희가 좋아하는 쿠션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에는
"아니, 없어.""착하네."방안은 줄곧 불이 꺼진 상태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불기 시작한 광풍은 맑은 달과 별을 뒤덮었고, 달빛을 가로막은 먹구름은 소녀의 아름다운 몸과 함께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바람이 한 시간 동안 불더니 새벽 3시부터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밤비는 여름의 무더위와 갑갑함을 씻어내 주고 불안을 달래주며 즐거운 꿈과 함께 사람들에게 상쾌함을 가져다주었다.소희는 빗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깥세상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한밤중의 비는 그칠 줄 모르다 날이 거의 밝아서야 바람이 점점 잦아졌다. 소희는 그제야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를 똑똑히 듣게 되었다.드디어 눈을 붙일 수 있었다.그녀는 엄청 많은 꿈을 꾸었다. 어렸을 때 양모에게 호통을 맞고 욕먹는 꿈, 실수로 동생의 장난감을 망가뜨렸다고 양모가 바늘을 들고 그녀의 손가락을 찌르는 꿈.하지만 그녀는 울 수 없었다. 울기만 하면 양아버지가 그녀를 걷어찼으니까.성인 남자의 발길은 오랫동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그 죽음에 직면하는 것 같은 아픔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정원의 문이 열리고 키가 엄청 큰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쫓아내고 그녀의 앞을 지켰다.고개를 들어 남자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눈물이 그녀의 눈을 흐려 아무리 해도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그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는 다시 사라졌다. 당황한 마음에 남자를 찾으려고 힘껏 눈을 크게 떴지만 남자의 희미한 그림자는 점점 멀어져 갔다.이때 화면이 갑자기 바뀌면서 그녀는 다시 그 버려진 공장으로 돌아갔고, 그녀와 전우들은 적에게 포위되어 한 작은 창고에 갇혔다.귓가에는 총소리와 폭발음이 난발했고 백양이 피투성이로 된 채 그녀의 앞을 지켰다.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들어 그를 구하려 했지만 임구택이 달려들어 그녀를 잡아당겼다."소희야!"그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뒤에 심명이 서있었다.
등이 유리에 붙으면서 전해온 차가운 촉감은 순간 소희의 모든 세포를 자극하고 있었다.30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마치 심연과 같았다.하지만 모든 것이 또 그렇게 익숙할 수가 없었다.소희는 갑자기 아주 긴 꿈을 꾸다 깨어난 것 같은 황홀감이 들었다.한낮의 햇살은 남자의 옆모습을 더욱 눈부시게 비추었다..상체에만 헐렁헐렁하게 흰색 셔츠를 걸쳐 입은 그의 넓은 어깨에는 손톱에 긁힌 붉은색 자국이 나 있었고, 그 자국은 팽팽한 근육을 따라 아래로 쭉 이어졌다. 왠지 모르게 섹시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소희는 고개를 들어 유리에 기대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눈에 비치면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소희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소희는 다시 잠들었다. 다만 잠들기 전 임구택이 그녀를 달래며 약 두 알을 먹였다.어렴풋이 그중 한 가지 약의 냄새가 익숙한 것 같아 눈을 반쯤 뜨고 물었다."무슨 약이야?"임구택이 알약을 소희의 입술 옆으로 가져다 대고 그녀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피임약."이에 소희가 입술을 벌리고 알약을 삼켰다."착하네."임구택이 소희의 입꼬리에 입술을 한 번 맞추고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자."*소희는 지금 극도로 잠이 필요할 때라 오후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했다.그러다 누군가가 계속 건드려서 겨우 잠에서 깨게 되었다. 소희는 귀찮다는 듯 몸을 비틀고 애교가 섞인 어투로 소리쳤다."임구택, 하지 마!"그리고 그녀의 말투는 두 사람 다 멍하게 만들었다.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어정에서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소희는 어쩔 수 없이 깨어나 눈살을 찌푸린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흐리멍덩했던 눈동자는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한참 후, 임구택이 일어나 소희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자 소희가 곧 또 눈을 감았다.임구택이 불을 켜고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소희를 품에 안고 물었다."자기야, 뭐 좀 먹을래?""아니, 나 잘래."소희가 피곤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의 품에서 나온 소희는 일어나서 욕실로 갔다.익숙한 곳, 심지어 바디워시까지 기억 속의 그 냄새였다. 소희는 물을 틀어 몸 곳곳을 깨끗이 씻었다. 마음속은 어수선하고 초조했다.‘이미 헤어진 두 사람이 왜 또 같이 얽히게 된 거지?’소희의 눈빛은 얼음장마냥 차가웠다.샤워를 마친 후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역시 그녀의 옷들이 걸려 있었다.예전에 입었던 것도 있고 새로 구입한 것도 있었다.새로 장만한 옷들을 보면서 소희는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심플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골라 입은 소희는 안방을 지나 침대 위의 남자를 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그러자 뒤에서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인사도 없이 가?"그 소리에 소희는 발길 멈추고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쉬는 데 방해할까 봐."부드러운 가죽 침대 머리에 기대어 이불로 몸을 반쯤 가린 임구택의 얼굴은 눈부셨고 표정은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이 순간만큼 섹시하고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소희의 말에 임구택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체에만 헐렁한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의 가슴과 어깨 쪽에는 온통 옅은 흔적투성이었다.그는 뒤에서 소희를 껴안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1박 2일 동안 네 시중들었는데 보수도 안 줘? 적어도 2만 원은 줘야지."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사랑을 나눈 후 2만 원만 남기고 줄행랑을 쳤었다.그의 말에 소희도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음 차가웠다."임구택, 이현이 네 연극에 이토록 잘 맞춰준 걸로 봐서는 네가 엄청 많은 이익을 줬겠네?"임구택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무슨 뜻이야?""이현과 무슨 사이인 거야? 만약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왜 나를 속였어? 어젯밤의 일도 너희 둘이 함께 꾸민 거야?"임구택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아니야.""뭐가 아니야? 사귀는 사이가 아니야? 아니면 어제 일이 너희 둘이 같이 꾸민 게 아니야?"
그는 손을 뻗어 소희의 가는 허리를 안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맞추려는데 소희가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눈빛에는 이미 소외감과 냉정함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속엔 어느 정도의 경각심도 섞여 있었다."아니, 난 필요 없어!"말을 마친 후 소희는 개보다 더 무서운 것에 쫓기고 있는 사람마냥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임구택은 다소 좌절한 표정으로 문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소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뒤로 문틀에 기대어 이마를 짚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희에 대해 어쩔 수가 없으면서도 마음이 아팠다.어젯밤 소희가 흐리멍덩한 상황에서 한 그 말들은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아마도 남은 생은 속죄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때 그가 탁자 위에 놓은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두 날 동안 그의 핸드폰은 줄곧 무음 상태였다. 그렇게 아무 전화도 받지 않으면서 전심전력으로 소희를 시중들었는데.‘양심도 없는 녀석!’임구택이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이야?"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명우였다.[대표님, 어제 점심 류개와 이현 등 세 사람이 선후로 블루드를 떠났습니다. 이현이 마지막으로 떠났는데 정신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임구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계속 주시하고 있어."[예!]명우가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참, 소희 아가씨의 물건이 제 손에 있는데, 대표님에게 드릴까요, 아니면 소희 아가씨에게 드릴까요?]"무슨 물건인데?"[총입니다.]총이 맞긴 했지만 진짜 총은 아니었다.임구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나한테로 가지고 와."[네!]……소희는 단숨에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방금 큰비가 내린 것 때문에 공기가 맑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습하고 무더웠다.그리고 그 습하고 더운 공기는 아침부터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금요일 밤의 일은 그녀도 임구택이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도와주러 간 것이었다.
류 조감독은 신인 배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고, 술도 한 잔 따라줬다.하지만 그는 차를 몰고 간 거라 술을 마시지 않고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소파에 쓰러진 채 이현이 그의 손을 잡고 그의 휴대폰 잠금을 해제해서 소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을 보기만 했다, 초조해 미칠 것 같았지만 몸은 나른해진 채 힘을 쓸 수가 없어서.그가 너무 어리석어서 소희를 해친 것이었다.소희가 듣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런 말 하지 마요. 제대로 따지고 보면 정남 씨가 나 때문에 연루되었는걸요. 일단 푹 쉬어요, 그리고 내일 만나서 다시 이야기해요."[응.]이정남이 대답하고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다시 물었다.[소희야,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그럼요."전화를 끊은 후의 소희의 얼굴색은 엄청 어두웠다.‘임구택! 분명 날 병원에 보내 위 세척하게 할 수 있었으면서 하필!’‘그러고도 나보고 감사를 표하라고? 꿈도 야무져!’소희가 어정에서 나오자 벤틀리 한 대가 이미 주택단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소희 아가씨, 임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라는 명입니다.""괜찮습니다."소희가 냉정하게 거절하고는 택시 한 대를 잡아 올라 떠났다.이에 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임구택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제 차를 타지 않으시고 따로 택시를 잡았습니다."임구택이 짧게 탄식 한 번 하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내버려 둬.]‘이번엔 정말 화가 났나 보네.’*택시에 올라탄 후 소희가 또 청아에게 연락을 했다. 청아도 깜짝 놀랐다.[소희야, 너 어디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꺼져 있고. 나 방금 경찰에 신고했어!]소희가 웃으며 말했다."나 괜찮으니 빨리 경찰에게 해석해. 경찰 아저씨한테 폐를 끼치지 말고."[그래서 너 지금 어디야?]"경원으로 돌아가는 길, 곧 집에 도착할 거야."[나 진짜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