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여자란 말에 사랑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그녀는 손톱으로 힘껏 손바닥을 꼬집으며 통증으로 정신을 차리려 했다.‘아마 태경에게 있어, 난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로 보이겠지.’사랑은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결코 변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최근에 좀 한가해서 마침 디자인 주문을 받았을 뿐이에요.”사랑은 태경과 어색한 관계로 되고 싶지 않아 먼저 한 걸음 물러섰다.태경은 그녀가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유정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봤어?”사랑은 침묵했다.태경은 그녀의 턱을 치켜들며 매서운 기세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알아본 적 없구나.”사랑은 너무 지쳤다. 지금 아무리 설명해도 태경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도 이해가 안 갔다.‘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다니, 정말 심태경 답지가 않아.’그래서 그녀는 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남자의 타고난 소유욕 때문인가? 자신의 아내가 밖에서 얼굴을 내밀고, 다른 남자와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사랑은 얼굴을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드러운 불빛이 여자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자, 촉촉한 입술은 마치 빨간 사과처럼 탐스러웠고,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태경은 저도 모르게 키스를 하고 싶었다.태경은 앞으로 다가가서 사랑의 얼굴을 들어올렸다.“그 사람 오늘 밤 어딜 건드렸지?”사랑은 이 질문에 좀 난처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 말을 하지 않았다.태경의 안색은 여전히 담담했고, 목소리도 매우 평온했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을 물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말해.”사랑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하얗고 가는 엄지손가락으로 장난치듯 사랑의 입술을 어루만졌다.태경의 목소리는 약간 잠겼다.“여기 만졌어?”사랑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남자의 엄숙한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태경은 길
태경은 사랑의 말을 무시하고, 집사에게 차 대시시키라고 했다.사랑은 그의 소매를 움켜쥐며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정말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요. 그냥 생리 온 것 같아요.”태경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요 며칠이 아닌 것 같은데.”계약 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부부로서 해야 할 일을 빼먹지 않았다.태경은 정상적인 남자였기에, 생리적 욕구가 있었다. 그를 만족하기엔 쉽지 않았는데, 어떨 때는 몇 번이나 사랑의 생리기간과 충돌되었다.사랑은 태경의 기억력이 이렇게 좋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돌리며 감히 태경의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요즘 날짜가 그리 정확하지 않거든요.”태경은 사랑의 이마를 만졌는데 체온은 정상이었다.사랑은 그에게 안긴 채로 침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고, 배의 통증이 점차 사라지자, 사랑도 많이 편안해졌다.태경은 약 상자에서 진통제를 꺼내 건넸다.“약 먹고 자.”사랑은 멍하니 진통제를 받았는데, 알약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사실 지금의 태경은 확실히 친절하고 다정했다. 평소의 그는 냉정하고, 자제하고 또 까칠했으니까.잠시 후, 남자는 다시 사랑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사랑은 물컵을 받으며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함부로 약을 먹지 못했다.‘아이를 가졌으니 조심해야 되는데...’태경은 셔츠의 단추를 풀며 물었다.“왜 안 먹어?”사랑은 아무 핑계를 댔다.“이제 좀 나아졌어요. 의사가 진통제를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약에 의존성이 생기니까요.”태경은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고 욕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그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사랑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으로 배를 어루만졌다.‘아직 두 달도 채 안 되어서,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모르겠네.’사랑은 주말에 예약한 수술을 생각하니, 가슴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아이를 지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
태경은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사랑은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냉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태경이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화할 때 그의 표정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차가웠던 미간이 점차 풀리면서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떠오르고, 모처럼 부드러운 기색이 비쳤다.말없이 시선을 돌린 사랑은 침대 시트를 힘껏 쥐었다. 심장은 마치 갈기갈기 찢어진 것만 같았다.몇 분 후, 태경이 전화를 끊고 돌아왔다. 사랑은 자신이 참을성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작은 얼굴을 들어 태경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강세영 씨 귀국했어요?”사랑은 이미 남에게서 세영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영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떠받드는 공주로 살았는데,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세영이 공항에 도착하자, 동창들은 이미 SNS에 사진을 올리며 그녀를 환영했다.태경은 가슴을 드러내는 짙은 색의 가운을 입고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빛에 은근히 숨이 막혔다.“응.”사랑은 침묵했다.‘나도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태경은 화가 났든 안 났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영원히 냉담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방의 불을 끄고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을 남겨두었다.사랑은 자신을 이불 속으로 숨기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삼키려 애썼다.침대에 누운 태경은 사랑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뜨겁고 단단한 그의 몸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둘의 몸은 서로 닿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했다.남자는 코끝으로 사랑의 어깨를 가볍게 문질렀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태경의 손은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고, 그 뜨거운 온도는 끊임없이 전해져 왔다.그는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좀 괜찮아졌어?”사랑은 태경이 자신을 부드럽게
사랑은 조용히 자신에게 말했다. ‘커피 한 잔 타는 것뿐이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사랑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준비해 대표님 사무실로 가져갔다.태경은 냉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셔츠의 소매는 위로 말아 올려져 있었고, 드러난 하얀 손목조차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심심한 듯 손가락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사랑의 시선은 소파에 앉아 있는 세영으로 향했다. 세영은 오늘도 눈에 띄는 빨간 벨벳 탱크톱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곱슬머리 덕분에 매력이 한층 더 강조된 모습이었다.세영의 미모는 화려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정교했고, 눈매에는 요염한 빛이 서려 있었다.지금 세영은 나른하게 태경의 사무실 소파에 엎드려 있었고, 다리를 꼬고 앉아 그의 책과 서류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심했던 것인지, 힐끗 한 번 쳐다보곤 바로 옆으로 던져버렸다.“태경아, 네 사무실은 왜 이렇게 검은색 아니면 하얀색뿐인 거야? 너무 밋밋하지 않아?” 사랑은 세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영이 당당하게 태경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사랑은 뜻밖에도 조금 부러움을 느꼈다.태경은 결벽증과 강박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무실 안의 서류는 덕훈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세영은 오히려 마음대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세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썹을 들어올리며 붉은 입술을 의미심장하게 구부리며 미소를 지었다.사랑을 훑어보는 세영의 눈빛은 무척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불만을 감추며 일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태경에게 물었다.“이 사람이 네 비서야?”대답을 듣기도 전에, 세영은 천천히 일어서서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태경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왜 이렇게 예쁜 비서를 쓰는 건데?”세영의 비아냥에 익숙해진 태경은 사랑을 보더니 먼저 나가라고 했다.태경은 자신의 사생활이 들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설령 그 사람
사랑은 세영과 화장실에서 다툴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바로 돌아섰다. 그러나 세영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두 팔을 끼고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태경이 널 사랑하기라도 하니?”사랑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태경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침대 위에서도 그에게는 그저 욕구를 발산하는 도구일 뿐이었다.태경은 아마 예진 같은 여자들에게는 약간의 감정이라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거나, 성격이 마음에 들었거나.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태경은 그 여자들을 어느 정도는 아낀 적이 있었다.하지만 사랑을 대할 때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그저 계약을 이행하는 동료에 불과했고, 부부로 가장해야 할 배우일 뿐이었다. 태경은 사랑에게만큼은 유독 감정이 없었다.학교 다닐 때부터 태경은 세영과 사귀기 전에도 여자친구가 많았다. 모두가 눈에 띄게 아름답거나 몸매가 뛰어난 미녀들이었다. 태경은 얌전하고 줏대 없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붉은 장미처럼 열정적이고 화려한 사람들에게 끌렸다.사랑은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날 사랑하든 말든, 전혀 중요하지 않아. 난 상관이 없으니까.”세영은 웃기 시작했다.“그래?”말하면서 세영은 앞으로 걸어갔고, 하이힐을 신고 있어 사랑보다 키가 더 컸다. 그녀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웃으며 사랑에게 귓속말을 했다.“고등학교 때, 칠판에 붙인 그 연애편지, 네가 쓴 거지?”사랑은 주먹을 꽉 쥐고서야 진정을 할 수 있었다.이 일은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녀는 거의 잊어버렸다.졸업하기 전, 사랑은 용기를 내 고백의 편지를 썼고,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태경의 책상에 집어넣었다.그들은 귀족 학교를 다녔기에 교실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나중에 태경은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데다, 그의 책상에 연애편지를 넣는 여자도 셀 수 없이 많았다.그러나 누가 사랑이 쓴 편지를 주웠는지, 그녀의 이름을 찢은 다음
눈물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눈물이 태경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사랑은 자신이 이미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 그녀의 마음은 많이 아팠다.심하게 아픈 게 아니라, 마치 바늘이 천천히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 바람에 사랑은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사랑은 깊이 숨을 쉬더니,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했다. 그녀는 조용히 사무실 문을 닫고, 비서실로 돌아왔다.그녀는 사인할 서류를 책상 위에 놓은 다음 새로 입사한 인턴을 불렀다.“대표님에게 서류 좀 보내줘. 내일 쓰실 거야.”인턴은 태경을 유난히 두려워했다. 평소에 회의를 할 때도, 뒤에 숨어있다가 가끔 태경을 훔쳐보곤 했다.동료들의 말을 빌리자면, 태경은 카리스마가 넘쳐서, 화를 내지 않고 웃어도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강 비서님, 저 정말 너무 무서워요.”인턴은 평소에 잡일을 하면서, 입사한 이래 대표님 사무실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이 가장 대단하다고 느꼈다. 못 하는 것이 없고, 또 무엇이든 잘할 수 있었다. 회사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경의 사생활까지 해결할 수 있다니.사랑은 어쩔 수 없었다. “진 비서는?”인턴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얼른 대답했다.“진 비서님은 이 비서님과 같이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그럼 진 비서 기다리자.”“네.”...점심, 태경과 세영은 밥을 먹으러 나갔는데, 오후 두세 시가 되어도 태경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침내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었고, 일을 끝낸 후, 핸드폰을 놀며 수다를 떨었다.사랑은 오후에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사무실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컴퓨터로 임신 중 주의해야 할 사항을 검색했다.밑에 수많은 건의가 튀어나왔다.사랑은 열심히 핸드폰으로 빽빽이 적었는데, 한순간 또 힘이 빠졌다.‘이 아이를 남겨둘 생각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을까?’사랑의 머릿속
사랑은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몰래 태경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태경의 부모님 앞에서 이름을 부를 때를 제외하면, 사랑에게는 그를 다정하게 ‘남편’이라 부를 기회가 없었다.심지어 밤에 그런 일을 할 때조차도, 그저 감정이 북받친 순간에만 작은 목소리로 태경의 이름을 부르며 살살 해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사랑은 침대 위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고생을 겪어야 했다. 태경은 힘이 너무 셌고, 소유욕도 지나치게 강했다. 심지어 그녀의 감정마저 통제하고 싶어 했다.사랑도 점차 깨달았다. 태경이 자신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불쌍하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좋아한다는 것을...‘섬뜩한 괴벽이 있는 사람이야.’사랑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알았어요.”전화를 끊고 사랑은 일찍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옷장에는 비싼 치마가 많이 걸려 있었는데, 분기마다 신상품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회사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은 하나도 없어서, 사랑은 거의 입지 않았다.그녀는 빨간색 치마 두 벌을 골랐지만, 색깔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아 다시 내려놓았다.결국 사랑은 벨벳 핑크색의 긴 치마를 선택했다. 진주 끈으로 허리를 감싸니 무척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치마는 몸에 잘 맞았지만, 등이 다소 노출되어 있었다. 사랑은 이렇게 노출이 심한 옷을 거의 입지 않았는데, 태경 역시 그녀가 이런 옷을 입고 정식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골라준 치마는 언제나 보수적이고 차분한 스타일이었다. 눈에 띄지도 않고, 예의에 어긋나지도 않는...사랑은 주의사항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임산부는 화장도 하지 말아야 하고, 하이힐도 신으면 안 된다는 것.그녀는 거울 속 화장기 없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래도 아름답다고 느꼈다.저녁 7시 30분, 사랑은 플랫슈즈로 갈아신고, 집안 기사에게 클럽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사랑은 코트로 자신을 꼭 감싸며, 차가운 손을 꺼내 태경에
사랑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룸 안의 빛이 어두워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사랑은 저도 모르게 몸을 가볍게 떨었다.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엄지손가락은 지푸라기라도 쥐듯이 태경의 손을 힘껏 쥐었다.‘태경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거야?’사랑은 갑자기 춥다고 느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그녀는 이까지 떨렸다.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가 태경의 마음을 맞힐 수 있겠는가? 그의 말은 진심 같기도 또 농담 같기도 했다.태경은 어둡고 그윽한 눈빛을 하며 은근히 웃고 있었다. 그는 사랑이 자신의 손을 꼭 잡도록 내버려두며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계속 내 곁에 있을 거야? 좋아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사랑이 억지로 소리를 냈다.“네.”사랑은 고개를 숙였고, 긴 머리카락은 그녀의 표정을 가렸다.정헌은 조용히 사랑을 바라보았는데, 그녀가 확실히 예쁘게 생겼단 것을 발견했다. 미간에서는 은근히 아름다운 정취가 스며들었다. 봄기운이 물씬 풍겨, 사람을 매료시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정헌은 사랑의 이런 모습이 좀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무정한 남자였다. 심지어 고의로 그녀를 놀리고 싶었다.“다시 생각해 보지 그래?”사랑은 온몸에 추위가 몰려왔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기에 이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정헌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대신 나설 수 있는데.”그는 줄곧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사람이었다. 태경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정헌도 나름 잘 알고 있었다.태경 마음속에 없는 사람이라면, 태경의 앞에서 죽어도 그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건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사랑은 정신을 차리고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정헌은 점잖게 보이고, 말도 잘하며, 부드럽고 매너 있어 보이지만, 사랑은 그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편견은 어떻게도 숨길 수 없으니까. 사실 정헌
사랑은 몸이 뻣뻣해졌다. 지호가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사람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가 있었다. 사랑도 그때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팔지도 않았을 것이다.태경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그도 사랑이 왜 에스타나이트에 가서 아르바이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청연의 병원비는 결코 한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태경은 사랑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군.’지호는 태경이 무관심한 것을 보고 재미없다고 느꼈다.‘하긴, 신경 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강사랑에게 무슨 감정을 가지겠어.’지호의 머리는 또 아프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참았다. 매번 사랑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지호는 머리가 따끔거렸고, 마치 바늘이 관자놀이를 호되게 꿰뚫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또 그렇게 빨리 사랑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려 하지 않았다.지호는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다. 도대체 자신의 병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이 그렇게 얄미운 것인지. 그의 피부는 눈처럼 창백했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럼 너희들 방해하지 않을게.”‘더 이상 있을 순 없어.’몸을 돌려 떠나자, 애써 참았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호는 발걸음을 비틀거렸고, 옆의 난간을 짚어서야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숨을 깊게 쉬었다.이 순간, 전기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통증은 그제야 서서히 사라졌다.지호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눈빛의 살의는 전례 없이 짙어졌다. 그는 마치 악마처럼 이를 갈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강사랑을 죽일 거야. 그 사람이 죽기만 하면, 난 더 이상 그 여자를 볼 리가 없고, 이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을 거야.지호는 일찍 연회장을 나섰다. 그는 차에 앉아 미간을 비비다가, 갑자기 입을 열고 앞에 앉은 기사에게 물었다.“내가 예전에 병원에 있을 때, 어떤 치료를 받은
지호의 말은 모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랑을 향한 경멸이 넘쳤다.태경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내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거지?”지호는 평소에 남의 일을 알아보지 않았고, 그럴 흥미도 없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가족사업을 인수하면서, 그 깨끗하지 못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이런 일들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지호의 안색은 차가웠고, 짙은 동공은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궁금해서.”태경은 코웃음을 쳤다.“이제 세영을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야? 네가?”지호가 세영을 좋아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이미 누군가 알아차린 일이었고, 그때 태경도 오만하고 도도한 소년이었으니, 이 일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다만 그는 승부욕이 강했기에 지호에게 한 번 고백해 보라고 했다. 누가 세영의 마음을 얻느냐에 따라 진정한 승자가 결정된다고 말하며.태경은 지호가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는 세영과 죽마고우였으며, 같은 골목에서 자란 이웃이었다고 했다.오랜 치료로 지호는 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그때의 감정만큼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지호는 태경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동창이었으니 당연히 궁금하지.”태경은 사랑과 지호가 동창이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 무척 의아해했다. 물론 태경도 사랑과 동창이었다.그러나 태경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없어, 잠시 침묵했다.“중학교? 고등학교? 아니면 대학?”지호는 무슨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는지, 입가에 미소가 천천히 나타났다. 그는 수려하고 정교하게 생겼으며, 뚜렷한 윤곽은 마치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웃으면 미간의 포악한 기운도 사라져 무척 매혹적이었다.그는 쯧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가 강사랑에게 물어봐.”걸레라 말하고 싶었지만, 지호는 또 억지로 삼켰다.지호는 동정심
사랑은 태경의 뜻을 알 수 있었다.“사랑 따위 없어.”이것은 태경이 준 충고였다.두 사람 사이에 호흡이 생겼는지,사랑은 자신이 지금 정서를 잘 숨길 수 있는 배우로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심장 전체가 유리 조각으로 뒤덮여 따끔거려도,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 행세할 수 있었다.그녀는 억지로 태경에게 웃었고, 조금도 자신의 슬픈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농담이에요.”말하면서 사랑은 손을 놓았다.“대표님께서 듣고 싶지 않으시다면, 앞으로 저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게요.”태경은 오늘 밤 사랑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또 어디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기다, 그는 사랑의 너무 요염한 미소를 보며 입을 열었다.“강 비서 오늘 밤 기분이 좋은가 봐?”‘이렇게 환하게 웃다니. 하지만 너무 가식적이야.’태경은 사랑이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미소는 항상 뻣뻣하고 불편해 보였다.“괜찮은 편이에요.”“하지만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아. 제가 디자인과 관련된 것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태경은 사랑이 전에 디자인과 관련된 주문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하나는 홈 디자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얼리 디자인이었다. 어떻게 봐도 관계가 없었다.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한 대학생이었다. 사랑은 매일 힘들게 뛰어다니며 여러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갔다. 약간 초췌했지만 또 의욕이 넘쳤다.마치 바위 틈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잡초와 같았다.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니, 한없이 연약해 보이고 바로 끊어질 것 같지만, 또 생각보다 완고하고 강인했다.“주얼리 디자인과 홈 디자인이 같은 거야?”태경이 웃으며 물었다.“확실히 다르지만, 홈 디자이너는 주얼리를 좋아하면 안 되나요? 대부분 여자들은 주얼리를 좋아하잖아요.”태경은 사랑이 평소 주얼리에 관심을 가진 적을 보지 못했다. 박나은은 사랑을 엄청 좋아했는데, 때로는 친아들인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약혼하자마자, 박나은은 사랑에게
태경은 똑똑한 사랑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가끔 애교를 부리는 그녀가 좋았다.그는 눈앞의 정교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드러진 웃음은 진심이 아닌 짜낸 웃음이었지만, 이곳의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아름다웠다.“앞으로 그 사람들 건드리지 마.”태경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이 한마디만 했다.사랑은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 따끔함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점차 웃음을 거두며,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입을 열었다.“제가 어찌 감히 엄 여사님을 건드리겠어요? 그런데 기어코 저를 귀찮게 하려 하시잖아요.”태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강 비서는 피할 줄도 모르는 거야?”사랑이 말했다.“제가 눈에 거슬리니까, 저를 해치려는 거잖아요. 그럼 어떡해도 피할 수 없죠.”사랑은 다정하게 태경의 팔을 안으며 다시 웃었다.“차라리 대표님이 가셔서 엄 여사님에게 직접 말씀드려요. 저와 대표님은 그저 계약 부부일 뿐이란 것을. 그럼 엄 여사님도 저를 봐줄지도 몰라요.”말을 끝내자, 태경은 줄곧 침묵에 잠겼다.엄수인이 그렇게 유치하고 지루한 사람이 아니라서, 사랑을 괴롭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단지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랑은 오늘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기 때문에, 태경의 앞에서 말할 때, 더 이상 주의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에게 불쾌감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만약 엄 여사님이 오늘 절 봐주지 않는다면, 대표님께선 절 도와줄 건가요?”태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엄 여사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지?”“강세영 씨가 슬퍼할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요.”태경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랑의 턱을 들어 올렸다.“넌 항상 세영과 비교하길 좋아하더라.”그가 이렇게 말하자, 사랑은 그제야 자신이 늘 세영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남편이 바람난 조강지처도 아니고, 이러면 안 돼, 강사랑. 난 이런 사람으로 되고 싶지 않아.’사랑은 더 이상 웃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태경은 무척
사랑은 태경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봐도, 그녀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사랑은 담담하게 엄수인을 바라보았다. 마흔에 가까운 여자는 마치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예쁘지는 않았지만, 기질은 무척 부드러웠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엄수인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랑은 병원에 있었고, 병실 안에는 생사를 알 수 없는 남청연이 누워 있었다.엄수인은 문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며 가식적인 태도를 보였다.“어머 불쌍해라.”남씨 가문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고, 사랑의 삼촌도 경제 범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강남복은 그런 사랑을 C시로 데리고 갔다.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진심으로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남들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억지로 자신을 키웠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엄수인은 강남복 앞에서 사랑을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뒤에서 은근히 강남복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사랑이 오늘 또 울었어. 아마도 가족이 그리운 것 같아.’사랑은 줄곧 남씨 가문의 사람들과 아주 친했다.강남복은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해서, 그 사람들을 가장 싫어했고,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았다.엄수인이 아무렇게 한 말 때문에, 사랑은 강남복에게 뺨을 두 대나 맞았다.“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미 죽었고, 네 삼촌도 이미 감옥에 들어갔어. 정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싶으면, 너도 그냥 죽어. 내 앞에 와서 재수 없게 굴지 말고.”사랑도 그때 겨우 열 몇 살이었고,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녀는 강남복 앞에서 울지도 않고, 아픔을 참으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울고 보채고, 또 강남복과 말다툼하면 엄수인의 함정에 걸려들 뿐이었다.그때 사랑은 강남복이 매달 주는 생활비를 받아서 남청연의 병원비를 내야 했다.그녀는 전에 엄수인에게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기에, 지금은 더욱 그럴 리가 없었다. 사랑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엄 여사님, 나이가 드셔서 치매라도 걸리셨나 봐요? 절
사랑은 추위를 좀 타서 숄을 걸친 다음, 사람이 적은 구석에 가서 앉으며, 종업원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경매장에는 화려한 등불이 켜져 있었고, 무척 눈이 부셨다.사랑은 C시에서 아주 잘나가는 거물들을 많이 보았다.‘강세영도 대단하네, 이런 분들을 초대했다니.’사실 사랑은 처음에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을 따라 각 대회에 참가했다. 세영은 그녀와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을 선택했고, 그저 학급과 교수님이 달랐다.매년의 디자인 대회는 신인들이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었다. 그해 사랑은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기 전에, 교수님이 보낸 최고의 디자인 대상을 보았다. 그 그림은 그녀의 컴퓨터에 있는 내용과 거의 똑같았다.그것을 본 순간, 사랑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교수님은 세영이 디자인상을 받은 작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녀를 천재라고 했다.사랑은 그 그림을 보고 머릿속이 좀 혼란스러웠다.“이게 강세영의 작품이라고요?”교수님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래, 너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특히 생기가 있어.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대단한 신인이 나타난 적이 없는데.”사랑은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작품이 왜 세영의 것으로 됐겠는가?그녀는 한 달 넘은 시간을 들여서야 이 작품을 설계했는데, 그동안 무수히 많은 원고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을 때, 세영은 재빨리 사랑을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훔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사랑에게 출세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사랑은 자신의 컴퓨터가 영문도 모른 채 해킹당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컴퓨터를 들고 수리하러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디자인 원고를 되찾았다.‘아마 그때부터 강세영은 이 일을 계획하고 있었을지 몰라.’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에, 사랑도 나설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유력한 증거조차 내놓을
병원의 간병인은 사랑의 엄격한 말투에 깜짝 놀랐다.평소의 사랑은 줄곧 얌전하고 부드러워, 여태껏 이렇게 큰 소리로 자신과 말을 한 적이 없었다.간병인은 전전긍긍했다.[꽃을 들고 오셨기에 나쁜 사람 같지 않았어요. 게다가 또 어머님의 옛 친구라고 말씀하셔서, 들어오시라고 했어요.]사랑은 이 말에 화가 나서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차가운 얼굴을 하며 엄숙하게 경고했다.“앞으로 그 여자 또 온다면, 그냥 떠나라고 해요.”간병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어요.]사랑은 전화를 끊어도 화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냉정함을 유지하며, 엄수인이 오늘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엄수인은 이유 없이 우리 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않았을 거야. 그 여자는 무슨 일을 하든 다 목적이 있었어. 그때 그렇게 오랫동안 참은 것을 보면, 엄청 교활하고 똑똑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어.’강남복이 이렇게 쉽게 남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차지한 것도 다 엄수인이 뒤에서 도와줬기 때문이다.태경은 사랑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병원에 무슨 일 생겼어?”사랑은 화를 참으면서 태경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아니에요.”태경은 여전히 사랑을 챙겨주고 싶었다. 동정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사랑이 홀로 C시에 와서 학업을 마치고, 일자리를 찾는 게 확실히 쉽지 않다고 느꼈다.‘강 비서는 원래 N시의 사람인 것 같은데. 강 비서 어머니도 N시의 사람이었지.’C시에 배경도, 가족도 없었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무척 힘들게 나아갔다.태경은 사랑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솔직히 말해.”사랑도 사양하지 않았다.“알았어요.”사랑은 눈을 들어 태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엄수인과 맞설 때, 내가 이긴 적이 없는 건 아니야. 엄수인은 심태경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어 할 텐데.’심씨 가문은 강씨 가문과는 달리 명실상부한 명문가였다. 태경의 아버지는 정치인이었고, 작은아버지도 권세가 높은
태경은 들으면서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을 많이 하면, 내가 엄청 신경 쓰이는 것 같잖아.’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차가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때 가도 정말 이렇게 소탈하게 생각할 수 있길 바라.”태경은 남자를 잘못 만나 고생한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다.그에게는 멍청한 사촌 여동생이 있었다. 재벌가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가난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몇 년 동안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겨우 그 남자를 손에 넣었고, 각 방면으로 잘 챙겨주었지만, 결국 그 남자는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돈을 충분히 모은 후에 그녀를 차버렸다.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태경을 찾아와 애원했다. 이를 갈며 그 남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태경은 그녀의 부탁에 짜증이 났지만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어떻게 하기도 전에, 사촌 여동생은 마음이 약해져 얼른 멈추라고 했다.당시 태경은 무척 냉담하게 물었다.“대체 어쩌자는 거야?”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이렇게 맞는 것을 보니까,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에요.”태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마음이 왜 아파?”만약 자신의 아내가 이렇게 그를 대한다면, 태경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날 놀리고, 내 감정을 짓밟는다면, 죽어도 싸지.’태경의 사촌 여동생도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하면 반드시 갚아줘야 했고, 속도 좁아서 의심이 많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남에게 거의 당한 적이 없던 재벌 집 아가씨가 남자에게 버림받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니.정신을 차리자, 태경은 사랑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럴게요.”태경은 사랑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나름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자존심이 있었고, 강경하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항상 약속을 잘 지켰다.그러나 태경은 여전히 사랑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그때 가서 돈도 낭비하고, 시간도 낭비했지만 괜히 마음
이혼을 하든 말든 사랑은 상관없었다. 지금 이혼하나, 2년 후에 이혼하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렇게 되면 사랑은 다른 방법을 찾아 남청연의 병원비를 벌어야 했다. 다른 모든 것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터였다.사랑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태경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만약 이혼을 원하신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녀는 언제든 계약을 앞당겨 종료하는 것에 협조할 수 있었다. 태경이 계약서의 규정에 따라 상응하는 위약금을 배상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사랑은 자신이 말을 마치고 난 후, 태경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은 무척 차가웠다.태경의 변덕스러운 기분을 줄곧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사랑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완곡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물론, 앞당겨 종료한다면, 나에도 배상금이 있는 거 맞죠?”사랑은 행여나 태경이 화가 나서 약속을 번복할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제야 태경이 왜 감정이 없는 거래를 하기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확실히 간단하고 편리했다. 앞으로도 번거로움이 없을 것이고, 그저 충분한 돈만 있으면 된다.태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랑을 쳐다보더니 냉소를 지었다.“강 비서, 나한테서 배상금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거야?”이 말이 나온 순간, 사랑은 가슴이 아팠다. 정말 각박하고 매정한 남자였다.태경은 인정사정 없이 말했고, 사랑은 시간이 좀 걸려서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좀 초라해 보였는데, 생각해 보면 태경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난 이미 심태경에게서 적지 않은 배상금을 받은 것 같아. 아이를 지우면서, 천만 원 넘은 돈을 받았잖아.’사랑은 마음이 이미 마비되어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욕심이 많은 법이죠. 돈이 많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태경은 손으로 사랑의 턱을 잡으며, 좁고 긴 눈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담담